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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중편소설)

추풍령

  • 서대수

추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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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아버지가 잠을 깨웠을 때 나는 어리둥절했다. 아직도 푸르스름한 여명이 휘장처럼 창을 가리고 있는 시간에 아버지가 잠을 깨운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나는 서울로 도망치려는 나의 계획을 아버지가 알아챈 것이 아닌가 싶어 더럭 겁이 났다. 그러나 나뿐만 아니라 동생들도 깨우는 것을 보고는 그것이 아님을 알았다.

아버지의 굳은 표정은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졌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흔히 그랬던 것처럼 지난 밤에도 아버지는 모두가 잠든 후에 들어왔다. 하지만 다른 때와는 달리 일을 나갔다가 늦은 것이 아니라 트럭기사들과 무슨 회의를 하다가 늦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타지에 나갔다가 저녁 무렵에 부산에 도착했지만 회의가 있어 늦게 들어온다고 전화를 했었다.

아마도 그 회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여전히 잠이 들러붙어 있는 눈을 꿈벅거리며 아버지를 쳐다보는 연희의 모습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동호는 일어나 앉기는 했지만 잠에 취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동호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게 했다.

“빨리 옷 입고 차 타러 가자.”

아버지의 메마른 음성이 나직하게 방 안을 채웠다. 그 풀기 없는 음성에서 나는 나의 계획이 허물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하필이면 왜 오늘인가. 짜증이 났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새벽 골목에서 어둠이 서성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바다내음이 났다. 바다는 아파트촌 저 멀리, 어둠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을숙도 뒤편에 있다. 을숙도는 낙동강이 긴 여행을 끝내고 바다가 되는 곳이다. 을숙도는 연희의 친구, 새들이 잠자는 곳이기도 했다. 연희는 을숙도에만 가면 새가 된다고 했다. 아직 새들은 새벽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벌써 골목을 거의 다 빠져나갔다. 골목을 벗어나면 제과점이 나온다. 제과점에서는 언제나 빵 굽는 구수한 냄새가 흘러나온다. 초등학교 2학년인 동호는 그 냄새를 똥냄새 같다고 했다. 나는 동호가 말하는 냄새가 내가 느끼는 구수한 냄새보다 더 깊이 그의 마음에 밀착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동호에게 그 냄새는 어릴 적 기저귀에서 나던 똥냄새와 다르지 않다. 동호는 그 냄새를 미칠 듯이 좋아했다. 동호는 언제나 제과점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제과점의 유리창에 코를 바싹 붙이면 동호의 코는 돼지코가 된다. 돼지코가 되어도 그 냄새와 유리면에 닿을 때 느껴지는 매끈한 감촉이 좋아서 자꾸만 그렇게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제과점 아줌마가 날카로운 눈으로 동호와 나를 흘겨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걸음걸이는 언제나 발끝이 밖으로 벌어진다. 사람들은 그런 걸음걸이를 팔자걸음이라고 했다. 엉거주춤 주저앉을 듯이 걷는 아버지의 걸음걸이가 오늘따라 유난히 동작이 커보였다.

다시 바다내음이 났다. 밤새 어둠에 묻어 밀려와 잠자던 바다내음을 아버지가 휘저어 깨워놓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바다내음은 제과점의 빵냄새와 새벽버스의 매연냄새에 깨어나 바다로 되돌아갈 것이다.

하늘이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구름으로 덮여 있는 하늘이 나에게는 툭툭한 솜이불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어젯밤 뉴스에 오늘 오후쯤 서울 지역에 눈이 올 거라고 했다. 함께 뉴스를 보고 있던 연희는 부산에도 내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부산에 눈이 올 확률은 극히 희박했다. 다른 지역에는 눈이 와도 부산에는 거의 언제나 비가 내렸다.

“아빠, 지금 우리 어디 가는데요?”

골목 끝에 다다랐을 때 동호가 물었다. 그것은 나도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표정이 너무나 굳어 있어서 감히 입을 떼지 못하고 눈치만 보아왔다.

“싸우러.”

아버지는 짧게 대답했다. 의외였다. 아버지가 어머니 외에는 누구와 싸우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나는 그 무겁게 가라앉은 대답 속에 숨어 있는 또다른 아버지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어머니와 싸울 때처럼, 자조 섞인 한탄과 냉소를 흘리며, 가끔씩 콧방귀도 뀌어가며, 더러는 술에 취해 혀꼬부라진 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싸우는 것일까? 아니면 권투선수나 레슬링선수들처럼 주먹이나 머리로 치고 받고 하면서 싸우는 것일까?

“누구하고 싸우러요?”

동호가 다시 물었다. 그 목소리에 긴장감이 돌았다. 아버지는 뭔가 우물거리다 대답을 하지 못하고 주머니를 뒤졌다. 아마도 담배를 찾는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에 부닥칠 때면 담배를 피운다. 아버지의 침묵에 동호가 멍한 얼굴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 역시 동호의 얼굴을 멀뚱하게 쳐다보다가 연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연희 또한 코알라 같은 유순하고 조용한 얼굴로 물끄러미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어디로 싸우러 가는데요?”

동호의 끈질긴 질문이 이어졌다.

“서울.”

아버지의 그 짧은 한 마디가 내 귀를 때렸다. 그곳은 바로 오늘 내가 도망가려던 곳이 아닌가. 불끈 희망이 솟았다. 그것은 차비를 들이지 않고도 서울에 갈 수 있다는 얘기였다.

“서울요? 그럼 큰고모네가 살고 있는 데잖아요?”

동호가 다시 물었다.

“그래, 니도 전에 한 번 가본 적 있잖아.”

“그럼 굉장히 먼 덴데…, 잠깐만요.”

무엇을 잊어먹은 듯 동호가 부리나케 집 쪽으로 되돌아 뛰어갔다. 아버지의 팔자걸음을 그대로 빼닮은 동호는 골목을 좌우로 휘저으며 뛰었다.

아버지가 담배를 빼어물었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피어오른 라이터 불의 섬광에 아버지의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 밝게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남자친구가 가끔씩 사주던 모카빵의 딱딱한 껍질처럼 굳어 보이는 아버지의 표정은 2년 전 우리집에 그 사건이 터졌던 날을 떠올려주었다. 그날처럼 아버지의 얼굴은 절망에 빠져, 죽기를 작정하고 절벽 끝에 서있는 사람의 얼굴과도 같은 거무죽죽한 빛이었다. 문득 나는 우리 공주님들 일어났나, 어허, 우리 왕자님도 일어났구마, 하며 학랑과 장난기 어린 얼굴로 대하던, 2년 전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의 아버지 표정이 그리워졌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들어오던 그날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한 날이었음을 언니에게서 듣고 알았지만, 그날 이후 아버지에게서는 농담과 웃음이 말끔히 사라졌다. 골목에 동호의 모습이 나타나자 아버지는 대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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