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로스앤젤레스 남서쪽 해안에 자리잡은 관광명소 레돈도 비치에서 바라본 바다 건너편 땅은 찬사를 자아낼 정도로 경관이 수려하다. 그 곳이 바로 ‘국민의 정부의 얼굴없는 실세’ 조풍언씨(趙豊彦·60)가 살고 있다는 팔로스버디스 지역이다.
하지만 오후 6시경 땅거미가 내리자 레돈도 비치에서는 더 이상 팔로스버디스 지역을 바라볼 수 없었다. 팔로스버디스는 미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가로등이 없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경치가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드는 관광객들 때문에 주민들의 결의로 가로등을 철거했다는 것. 그 어둠 속에서 조씨는 지금 외부와 연락을 끊은 채 은둔생활에 들어가 있다.
그의 침묵에서 어떤 무게가 느껴졌기 때문일까? 본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갖가지 루머 덕분에 조씨의 ‘몸값’은 계속 치솟았다. 최근 한 달 사이에 국내 유수의 신문·방송 기자들로부터 연일 쏟아지는 수백통의 ‘러브콜’을 완고하게 거부한 탓인지 그에 대한 억측도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최근에는 급기야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어려웠던 야당 시절, 대통령을 물심양면으로 극진하게 모신 3인방 중 한 명”이라는 소문까지 돌면서 ‘대통령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재미교포’라는 관측까지 나왔다.
조풍언씨가 사람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모은 것은 2월8일 한나라당 이신범(李信範) 의원이 김대중 대통령의 막내아들 홍걸씨(弘傑·미국 USC대 박사과정)의 LA 호화주택 거주 의혹을 제기하면서부터였다.
홍걸씨는 LA의 부촌(富村)인 팔로스버디스 지역에 조씨 소유로 돼 있는 220만달러(26억4000여만원)짜리 집에 살고 있으며, 조씨는 무기중개상을 하면서 현 정권과 깊은 ‘커넥션’을 맺고 있다는 것이 이의원이 제기한 의혹이었다. 그러나 실상 김홍걸씨는 팔로스버디스에서 약 20분 떨어진 토랜스시에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요즘은 샌디에이고에 한 달간 머무르며 ‘태평양시대 한·미·일 3국 간의 무역관계’라는 주제로 논문을 집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끝없이 제기되는 의혹들
조풍언씨가 언론에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9년 5월 그가 김대통령의 일산 자택을 6억5000여만원에 구입했다는 사실이 두 달후 알려지면서 그의 이름이 거론됐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재미동포 재력가가 여생을 한국에서 보낼 요량으로 집을 구입한 것 정도로 생각했고, 조씨 개인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한나라당은 지난 2월 말 홍사덕(洪思德) 선거대책위원장이 발표한 성명에서 “조풍언씨가 시가 1500억원에 이르는 대우그룹의 경기도 포천 소재 아도니스 골프장을 114억원이라는 헐값에 매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그의 일산 자택 구입, 홍걸씨의 호화주택 거주의혹 등을 함께 묶어 ‘권력형 부정비리’로 몰아 붙이기 시작했다.
지난 1월과 2월 두 차례 미국을 다녀온 ‘DJ 저격수’ 이신범 의원은 좀 더 구체적으로 조풍언씨와 현 정부 사이의 ‘커넥션’을 주장했다. “조씨는 현 정부와 맺은 인연을 이용해 구조조정에 들어간 대우그룹이 벌인 사업 중 전망이 좋아 보이는 사업을 유리한 조건에 인수하려고 했다는 흔적이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는 것.
그 대표적인 예로 이의원은 포천 아도니스 골프장과 대우통신의 TDX사업 부문을 적시했다. 이의원은 “무기거래상인 조씨는 쓰러져가는 대우로부터 통신장비 군납과 관련, 일종의 전화교환기 시스템인 TDX 사업을 인수해 사업을 확장하려 했으며, 아도니스 골프장의 경우에도 금융감독위원회가 대우와 정희자씨(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부인) 측에 조씨와 계약을 체결하도록 권한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 조풍언씨와 대우통신 간의 TDX사업 매각에 대한 계약은 조씨가 계약금 230억원을 치른 상태에서 해지됐으며, 조씨는 자신이 대표로 있는 ‘라베스’라는 회사 명의로 지난해 말 계약금 반환소송을 낸 상태다.
오호근(吳浩根) 기업구조조정위원회 위원장 겸 대우 구조조정추진협의회 의장 역시 이의원의 주장을 “근거없는 억측”이라고 일축했다. 오 위원장은 “김우중씨가 대우통신에서 TDX 부분을 매각하기로 한 것은 경영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자구책이었으며, 대우통신에 대한 워크아웃이 시작되면서 계약이 해지된 것”이라고 말했다.
오위원장은 TDX 사업부문에 대해서는 현재 채권단이 주체가 돼 실사작업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따라 매각이 이루어지면 조씨가 낸 계약금 반환소송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위원장은 “현재 협상 테이블에서 거론되는 가격은 조씨가 제시한 계약금보다는 다소 높은 가격대에서 이뤄지고 있다”면서 “조씨가 낸 계약금이 특혜를 운운할 만한 금액은 아니다”라고 했다.
또한 조씨와 김우중 회장 사이에 사업 매각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경기고 선후배 사이라는 개인적인 인연에 의한 것이지 권력을 이용해 강압적으로 이뤄진 것은 결코 아니라고 강조했다.
오위원장은 또, 아도니스 골프장 계약과 관련해 “조씨가 대우측에 잔금까지 모두 지불해 계약이 성립됐었다”며 “막판에 정희자씨가 서명을 거부하면서 시간을 끌더니 없던 일으로 하자고 고집을 부려 조씨측이 계약금과 잔금을 모두 돌려 받은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이신범 의원은 조풍언씨가 세운 무기중개업체 기흥물산이 미국의 대표적인 레이더 통신장비 업체 ITT(International Telephone · Telelgraph)의 장비를 국내에 들여오는 에이전트 노릇을 하면서 거액의 소개료를 챙겼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 시절부터 20여년간 연간 1조원이 넘는 무기중개 시장에서 그가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며 재력가로 성장한 배경에는 기흥물산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
“그 사람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기흥물산의 유풍상(劉豊相) 사장은 “1973년 창립 당시 조풍언씨가 공동대표를 맡았지만, 그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1984년 이후 공동대표 자리에서 물러났다”며 조씨와 가깝다는 소문을 일축했다. 유사장은 “조씨에게 가끔 전화를 걸지만 최근에는 바쁘다며 전화도 잘 안 받아준다”고 말했다.
유사장은 또 “군장비의 경우 최근 국방부가 직접 계약을 하기 때문에 무기중개업체인 우리 같은 회사가 큰돈을 벌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신범 의원이 제기한 조풍언씨와 대통령 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의 막내동생 이성호(李聖鎬)씨의 유착설에 대해 이성호씨는 “1992년 친지의 소개로 LA에서 조풍언씨를 만나 서로 아는 사이인 것은 사실이지만 지난 5년 동안 단 두 차례, 그것도 우연히 만났으며 친밀한 사이는 결코 아니다”라고 밝혔다.
조풍언씨는 3월1일 한 언론사와 전화 인터뷰에서 “아도니스 골프장 매입을 추진했던 것은 1999년 6~7월경 경영난에 빠진 김우중 회장과 대우 구조조정본부장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으며, 계약금을 치른 것은 사실이지만 대주주인 정희자씨의 반대로 계약이 무산됐다”고 해명했다.
조씨는 또 매매가격인 114억원도 “결코 헐값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같은 해명에도 불구하고 조씨에 대한 궁금증은 가시지 않는다. 조씨가 이후 언론 인터뷰를 모두 거부하고 있는데다 공개석상에 나서는 것도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갖가지 소문을 몰고 다니는 조풍언씨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기자는 이런 의문을 품고 3월10일 LA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팔로스버디스 롤링힐즈에 있는 조풍언씨의 집에서도 조씨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고, 그가 경영하는 한인타운의 가든스위트 호텔에서도 그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었다.
호텔 직원들은 하나같이 “회장님은 멀리 출장을 가셨고 호텔에는 자주 들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조씨로부터 팔로스버디스의 카발레스로드 저택을 구입한 조모씨가 경영하는 레돈도비치의 한국 횟집에도 찾아가 보았지만 조씨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는 없었다. 조씨 부부가 다닌다는 교회에서도 조씨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아! 자넨가?
미국 동포사회에서 조씨는 그다지 널리 알려진 존재는 아니었다. 다만 이번 ‘사건’ 이후 고향이 목포로 김대통령과 같으며, 김대통령 미국 망명 시절 경제적, 심리적으로 많은 도움을 줬고, 김대통령 일가와는 거의 친척 같은 관계를 유지해왔다는 소문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한인사회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교포들의 경우도 대부분 조씨를 한두번 보았다고 대답하는 정도거나 이름을 들어봤다는 정도의 반응이었다. 교민사회의 각종 모임에 나와 적극적으로 활동한 적도 없으며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은 것도 아니라는 것. 이를 입증하듯 그가 20여년간 정착해서 살아온 LA에서 그의 증명사진 한 장도 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1967년 미국 유학 생활을 거쳐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LA 카운티의 주요 정책결정에 영향을 끼치는 커미셔너로 활동하고 있으며 김대통령 당선 직후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막후에서 도왔다는 이천용(李千龍)씨는 “한두 번 스친 적은 있는 것 같은데,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1972년 미국으로 이민간 뒤 건축업으로 성공, 미국 국무부 극동담당 자문위원을 지냈을 정도로 LA에 깊이 뿌리내린 박시언(朴時彦) 전 신동아그룹 부회장도 조씨에 대해 “10여년전쯤 비벌리힐스에서 벤덤이라는 주류소매업(Liquor Store)을 해 돈을 번 뒤 호텔업으로 성공한 사람 정도로 알고 있는데, 면식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대통령이 신군부의 탄압에 못이겨 미국으로 망명했던 시절, 음으로 양으로 김대통령을 ‘모셨던’ 인사들은 대부분 조풍언씨의 행적에 대해 비교적 소상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1966년 미국에 건너가 LA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다 현재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이선주(李善主)씨는 “김대통령과 동향인 조씨의 아버지는 광복 직후 목포에서 청년단 단장을 했는데, 김대통령이 조씨 아버지 밑에서 부단장을 지내면서 인연을 맺었다”며 “이후 조씨는 한국에 무기류를 납품하는 무기수출 대행업을 하면서 큰돈을 벌었다”고 했다.
이씨는 조풍언씨와 김대통령이 처음 대면한 자리도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1993년 10월15일 LA에서 열린 한국인권위원회 창설 10주년 기념식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났다는 것.
망명 시절이던 1983년 7월, 비민주적인 군사통치를 종식시키고 민주정부를 회복하겠다는 취지로 김대통령이 설립한 이 단체의 1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김대통령은 공식행사가 끝나고 리셉션을 가졌는데, 그 장소가 바로 조씨가 운영하는 가든스위트 호텔이었다. 자연스레 인사할 기회를 맞은 조씨는 김대통령에게 자신이 아무개의 아들이라고 소개했고, 대통령은 조씨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때 조씨는 후원비로 1만달러를 선뜻 내놔 1992년 대통령 선거로 패배로 침울해 있던 김대통령을 흡족하게 했다.
이선주씨는 “조씨는 재미동포들이 조국의 열악한 인권상황에 맞서 어려운 투쟁하고 있을 때도 기부금을 내거나 한 적은 없었다”며 “교민사회에 적극적으로 어울리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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