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깊이 있고 환한 얼굴의 최인호와 갑갑하고 견고해 보이는 얼굴의 이문열. 현재 50대인 그들은 40대 한국남성들이 걸어가는 두 갈래 길의 표본을 보여주었고, 그 차이가 오늘의 두 사람 얼굴에서 나타난다.》
몇 해 전 그는 중년의 가슴 아픈 사랑을 맑고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 소설 한 권을 출간했다. ‘사랑의 기쁨’이란 제목을 단 이 작품은 그가 젊은 시절에 휘갈기듯 써낸 ‘별들의 고향’ 같은 도회지 풍의 감각적인 소설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의 정신적 변화를 알려주는 의미심장한 작품일 수도 있다.
또 얼마 전에 그는 ‘나는 아직도 스님이 되고 싶다’라는 제목의 수상집을 출간했다. 어느 기자가 그에게 독실한 가톨릭 신자면서 굳이 스님이 되고 싶다고 한 이유가 뭔지 물었더니 “당신은 아빠와 엄마 중 누가 더 좋으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자신을 ‘불교적 가톨릭 신자’라고 자처, 두 종교 사이를 편하게 오가는 종교적 이중 국적자임을 밝힌 자유인이다.
‘갑갑하다, 견고하다, 웃는 얼굴이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 문학의 영웅, 이문열의 사진을 볼 때마다 느끼는 필자의 소감이다. 그는 연간 수억원의 인세 수입을 올리는 대단한 소설가다.
그러나 2000년 2월, ‘이문열 서원’인 ‘부악문원’의 문학지망생 모집에 지원자가 10여 명으로 급감했다고 한다. 98년 1기 모집 때는 5명 정원에 지원자가 150여명이 몰리더니 2기 때는 90명으로 줄었고 올해는 10여명으로 줄었다는 것이다. 줄어도 너무 줄었다. 자기 돈을 내고 배우는 문학교실에도 사람들이 몰리는 판인데, 어째서 대소설가인 이문열의 강의가 제공되고 3년간 많은 장서와 숙식이 무료로 제공되는 부악문원에 문학지망생의 발길이 줄어드는 것일까.
부악문원의 지망생 급감 사건은 98년에 출간한 그의 회심작 ‘변경’의 부진에 이은 것이어서 그에게 더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문열의 문학론에 젊은 세대가 염증을 느끼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내기도 했고, 또 한편에서는 그의 문장이 더 이상 문학청년들을 끌지 못한다는 다소 냉소적인 평을 하기도 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작가 최인호(1945년생)와 이문열(1948년생). 현재 50대인 그들은 젊은 날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인생을 보냈다. 그러나 그들이 보낸 40대는 전혀 달랐고, 그 차이가 바로 오늘날 최인호와 이문열의 얼굴을 다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영화의 롱테이크 기법처럼 우리의 삶을 조망해보면, 남자의 40대는 대단히 의미있는 ‘인생의 위기’라 할 만하다. 그 고비를 제대로 넘기지 못해 심리적 나락으로 떨어져버리는 사람도 있고 행복한 인생을 위한 기회로 만드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온전히 각자의 몫일 것이다.
마흔둘의 고백
그런 점에서 ‘제2의 사춘기’라고도 불리는 40대에 정신적 격동을 각각 다른 방법으로 겪어낸 최인호와 이문열은 한국의 40대 남성이 겪는 변화의 실체를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는 유효한 모델일 수도 있다는 게 필자 생각이다. 한국의 40대 남성을 고찰하는 글의 첫머리에 최인호와 이문열을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만 이 글에서 언급되는 최인호와 이문열은 정신과 의사 눈에 비친 그들의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모습일 따름이다. 인용되는 각종 자료나 에피소드들은 그들의 문학적 성과나 사회적 성취도와는 무관하다. 정신과 의사의 관점에서 40대 남자의 내면적 진화를 살펴보는 데 유용한 자료들만 임의적으로 취사선택했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 자신의 개인적 취향이나 가치관 따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음도 미리 밝혀둔다.
“나는 나이 마흔둘에 내가 이 세상의 진리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 사기꾼임을 깨달았고, 극심한 영혼의 영양 실조에 걸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최인호가 쉰이 훨씬 넘은 어느날 뱉어낸 육성 고백이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8세에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문학 천재였다. 그의 소설은 나올 때마다 베스트셀러로 기록됐을 뿐만 아니라 그가 직접 쓴 시나리오로 각색해 영화로 상영될 때도 연속 히트를 치는 등 흥분된 젊은 날을 보낸 성공한 작가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들 도단이 앞에 무릎을 꿇고서 “무능한 아버지를 용서해달라”면서 빌었다고 하니, 그 괴로움이 꽤 심각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마흔둘의 어느날, ‘하늘과 땅이 날카로운 키스를 하는 듯한’ 느낌을 받고 가톨릭에 귀의한다.
최인호의 40대는 외부로부터 받는 갈채가 갑자기 아무 의미없이 느껴지고 타인들의 칭송이 진정한 자기를 만나는 데 방해만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한 잔인한 시기였다. 치열한 심리적 내전을 치른 시기였던 것이다.
최인호의 초반 작품 ‘바보들의 행진’ ‘고래사냥’ ‘적도의 꽃’ 등이 도회지풍의 감각적인 작품이라면, 마흔둘의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낸 이후에 나온 ‘왕도의 비밀’ ‘길없는 길’과 같은 작품은 역사적 철학적 안목이 확고해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소설이다.
나이 40의 진통이 그를 변화시킨 것이다. 예술가 수백 명의 생애를 분석한 연구를 보면, 그들 대부분은 중년에 심각한 심리적 위기를 맞았는데 그것을 잘 극복한 예술가들은 그들의 사생활과 작품 방향이 달라졌다고 한다. 작품이 내용면에서 더욱 깊어지고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예술가란 삶의 본질을 다루는 감성적인 사람일 가능성이 많으므로, 그들은 이런 문제에 있어선 늘 보통사람보다 일선에 서기 때문이다.
40대의 회심작 ‘변경’의 실패
이번에는 이문열을 보기로 하자.
98년 12월, 서른아홉 살에 시작해서 쉰살에 탈고한 ‘변경’이 출간되었다. 작가로서 가장 완숙한 40대에 대부분을 썼기에 변명할 여지도, 동정을 구할 여지도 없어 어깨가 무겁다고 말한 작품이다. 그리하여 그는 ‘변경’을 출간할 당시 “이 소설이 실패한다면 그것은 곧 나의 문학적 실패와 연결될 수도 있다”며 비장하게 말했다. 이것은 ‘변경’이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 실패할 수 없다는 자신감의 또 다른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들의 반응이 예상외로 잠잠하자, 그는 소설쓰기 30년 만에 처음으로 자존심을 접고 전국의 주요도시를 순회하면서 독자 사인회까지 가졌다. ‘변경’의 성적표는 이문열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주었고, 그는 이후 한동안 글 한 줄 못 쓰는 열병을 앓았다.
소설 ‘변경’은 강한 반공 이데올로기가 남아 있는 사회에서 월북한 아버지를 가진 가족들이 겪는 아픔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이문열의 실제 삶과 동일한 설정이다. 그 역시 ‘변경’은 생으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자신의 가족사를 모티프로 쓴, 자신의 자화상이 반 이상 들어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변경’의 주인공 인철은 자신의 모습이 철저히 투영된 분신이라고까지 했다. 그래서 ‘변경’을 보면 이문열이 자세히 보인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자신을 월북자의 아들 즉 빨갱이로 보는 사회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 월북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들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들어차 있을 것이다.
“어떤 종류의 주장이고 무엇을 위한 운동이든 내가 끼어드는 날로 그것은 용공조작의 무서운 칼날 아래 놓이게 됐을 것”이라는 작중인물의 한탄은, 보이지 않는 연좌제가 서슬퍼렇게 작동하던 시대를 살아낸 이문열 자신의 삶을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무의식은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말을 피하기 위한 긴장과 불안으로 점철된 것이리라.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남한의 반공 이데올로기에 무조건 찬성하고 그에 발맞추어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감정을 내비치지 말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관념적인 삶의 자세로 일관했다. 그의 분신이라는 주인공 인철이 끝까지 ‘관찰하고 정리하고 해석하는 사람’으로 남은 것도 이문열식 삶이다. ‘문학이 내면으로 들어가는 현상을 경계한다’고 한 그의 말은 인간의 내면세계에 천착해야 할 문학가의 발언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발상이지만 그의 삶을 보면 이해가 된다.
결국 최인호가 자신의 젊은 날을 송두리째 부정하며 새로운 삶에 눈뜰 때도 그는 여전히 심리적 방어와 관념적인 수사로 자신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최인호의 글은 신선하고 파격적인 데 반해 이문열의 글은 관념적이고 딱딱하다. 최인호에게서는 예술가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느껴지는데 이문열에게서는 권위적인 느낌만 감지된다.
40이 넘도록 자신의 콤플렉스를 해결하지 못한 채 안고 가는 사람의 삶이 어떻게 굴절되는지를 이문열은 잘 보여주고 있다.
40대는 유혹의 시기
인생 40은 불혹(不惑)이라는 말이 있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이 말은 오랜 세월 40대의 대명사로 인지돼 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신의학적으로 보면 공자의 이 말은 전혀 틀린 것이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40∼45세 남자들의 80%가 이 시기에 심리적 위기를 경험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40대는 불혹(不惑)이 아닌 유혹(有惑)의 시기라고 해야 한다.
칼 융(C.G. Jung)이라는 정신분석가는 38세에 자신의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열정도 없다고 느끼기 시작했고, 자신이 서서히 미쳐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그 당시 융은 큰 병원을 소유하고 있었고 학문적으로도 대단히 인정받고 있었으며 안정된 가정도 있었다. 그는 남들이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필요는 발견을 낳는 법이던가. 융은 자신의 이런 경험들을 성찰하는 과정에 중년의 심리에 대한 뚜렷한 업적을 남긴다. 융은 40세 전후가 인간의 행동과 의식이 탈바꿈(reversal)하는 결정적인 전환기임을 밝혀냈다.
융은 이때 비로소 인생에 대한 진정한 ‘눈뜸’이 일어난다고 했다. 중년은 ‘인생의 절정’이자 인생의 태양이 머리 한가운데에 떠 있는 ‘인생의 정오(the noon of life)’라는 것이다. 사실 중년(中年)의 한자 표기에도 ‘가운데 중’자가 들어가는 걸 보면 40대가 ‘인생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시기라는 점에서는 동·서양의 관점이 별로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40대가 인생의 절정이 되기 위해선 반드시 치러야 할 것이 있다. 바로 ‘흔들림’이다. 학자들은 “중년기는 외면적으로는 별 문제없이 균형잡힌 듯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분노, 속은 듯한 느낌, 탐욕 같은 유치한 감정을 지니는 시기다. 바람직한 생활과 미소 뒤에 숨은 미성숙한 탐욕과 유치한 야망과 같은 양면성으로 40대 남자들은 갈등에 빠진다”고 말한다.
지난해에 필자가 운영하는 정신건강센터에서 40대 남자들을 대상으로 정신과 의사에 대한 인식조사를 한 적이 있다. 그중에 ‘정신과 진료실에 누가 제일 많이 올 것 같으냐?’라는 질문이 있었는데, 그 응답 결과가 재미있다. 40대 남자들은 자기 또래의 남성들이 정신과 상담실을 제일 많이 찾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40대 남자들 자신의 고단하고 괴로운 심정을 투사한 결과일 것이다.
실제로 40대의 많은 남자들은 흔들리는 자기 자신을 보며 ‘40은 불혹이라는데 나는 왜 이렇게 철없이 흔들리는 걸까’ 하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자책한다. 어떻게 보면 공자는 수천년 동안 이 시기의 남자들에게 공연한 자책감을 불러일으키는 큰 실수를 저지른 셈이다.
그런 관점에서 필자는 40대 남자들을 ‘유피놀세대’라는 이름으로 규정하려 한다. ‘유피놀(UFINOL)’이란 ‘Unfinished noon of life(미완의 절정)’의 줄임말이다. 흔들림의 과정이 남았으므로 절정이되 미완의 절정인 것이다.
이렇게 흔들리는 40대에 접어든 한국 남성들을 관찰해보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가 ‘현실순응적 태도’다. 98년에 출간된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 자료를 보면 각 연령대의 특징을 나타내는 몇 가지 키워드가 수록돼 있다. 벗어나려는 10대(탈출 욕구), 즐기려는 20대(재미 욕구), 더불어 살아가려는 30대(공동체의식), 외로운 50대(외로움)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40대의 키워드는 무엇일까. 바로 ‘피곤한 40대’다. 40대는 20대처럼 즐거운 시간을 갖고자 몸부림치지도 않으며 30대처럼 사회불만을 토로할 힘도 없다. 일회용 위장약 복용률이 어느 연령대보다 높고, 노후보장보험에 80%가 가입해 있을 만큼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지니고 있다.
가족에 대한 강박적인 의무감은 말할 것도 없고 건강이나 자신감 상실도 40대 남성들에게 심리적 피곤함을 가중하고 있다. 그러한 심리적 피곤함에서부터 40대 남자의 현실순응적 태도가 비롯된다.
둘째는 ‘편견과 아집의 고착화’다. 얼마 전 한 식당에서 재미난 장면을 목격했다. 직장 동료간 회식자리인 듯했다. 상사로 보이는 40대 남자를 중심으로 10여 명이 방에 둘러앉아 고기를 굽고 있었다. 가운데 앉은 상사는 자신의 인생관, 정치철학 등에 관해서 신나게 말하느라 고기먹는 것도 잊고 있었다. 상사 바로 앞과 옆에 앉은 두세 명만 얼굴에 기계적인 웃음을 띤 채 그의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뿐, 그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일수록 얼굴에 생기가 있어 보였다.
확실히 남자들은 나이가 들면서 말이 많아지고 남의 말을 귀기울여 듣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사오정식 동문서답을 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뿐 아니다. 스스로 터득한 몇 개의 삶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칙들을 일반화하여 타인에게 강요하는 무리수조차 서슴지 않는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비유를 들어 A,B,C 세 자동차 중 하나를 사려고 망설이는 남자가 있다고 치자. A자동차는 엔진성능이 뛰어나고, B자동차는 외장이 좋으며, C자동차는 승차감이 뛰어나다. 이렇게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경우 남자는 어느 한 자동차를 선택하고 나서도 ‘불안심리’가 뒤따른다. ‘내가 선택한 것이 과연 최선이었는가’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장점을 강조하고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나쁜 것이라고 폄하기 시작한다. 마음을 편케 하려는 심리적 방어기제의 일종인 것이다.
중년은 이렇게 자기 정당화, 자기 합리화가 두드러지는 시기다. 어떻게든 자신이 경험했거나 받아들였던 상황들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부정하게 되면 그 시간 속에 들어 있던 자신의 존재 근거 자체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40대 남자들이 편견이나 아집 등에 집착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바로 이런 것이다.
40대의 감성화 경향
셋째는 40대 남자들에게서 가장 흔히 나타나는 것으로 ‘감성화 경향’이다. 상담실에서 만난 한 40대 건축가의 말을 들어보자.
“얼마 전 집 앞 문방구를 지나다 우연히 하모니카를 보았습니다. 갑자기 어린 시절 하모니카를 서툴게 불어보던 생각이 나더라구요. 이제부터 한가할 때 하모니카나 불어볼까 해서 하나 샀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가슴이 다 설레더군요.”
중앙부처의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과장(43)도 그런 경우다. 서점에 가도 늘 경제 재테크 서적이나 직장인의 성공처세술을 다룬 책에만 관심을 기울이던 그가 시에 끌리기 시작한 것은 아주 우연한 일 때문이다.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여직원이 보던 책을 뒤적이다가 한 구절에 끌려서 시를 읽기 시작한 것이다. 시는 이젠 그에게 빼놓을 수 없는 낙이 되었다. ‘방금 운명이 제 앞을 지나갔습니다’라는 시구처럼 시가 운명처럼 그의 앞을 지나갔다. ‘내가 왜 그동안 이렇게 아름다운 언어를 몰랐을까’ 하고 뼈에 사무치게 후회가 될 정도였다.
그는 시를 보기 위해서 월간 문학지를 정기 구독하기 시작했고 PC통신의 문학동호회에도 가입했다. 동호회 사람과 만나서 시와 인생에 대한 얘기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이제까지 쌓아온 생활의 온갖 찌든 때와 쓰레기들이 다 발 밑으로 사라져 가는 느낌이었다. 시와 시를 통한 세상만이 그에게 의미를 갖게 해주는 듯했다.
그는 지금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지리산에서 실족사한 어느 시인의 시를 지갑에 넣고 다닌다. 그의 아내는 “문학청년 하나 났네” 하며 약간은 비아냥거린다. 아내의 그런 태도는 김과장을 말할 수 없이 쓸쓸하고 우울하게 했다.
늘 바깥일에만 신경을 집중한 채 전투적인 삶을 살아가던 남자가, 어느날 드라마를 보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또 남자들은 이때 의존성이 늘어나고 따뜻하고 섬세한 감정이 되살아난다. 갑자기 아이들에게 깊은 애정이 생기며 아이의 생활에도 관심이 생긴다.
40대 후반의 한 육군 대령이 아들 문제로 진료실을 찾았다. 그의 아들은 머리를 온통 노랗게 물들이고 가출을 일삼는 세칭 ‘날라리’였다. 그는 남부끄러워서 아들을 때려도 보고 회유도 해보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부대에서는 그의 말 한마디에 수천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데, 집에서는 아들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는 생각에 더 수치스러웠다. 그런 그가 어느날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며 당황한 기색으로 병원으로 뛰어온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이렇다. 전날 저녁 아들이 밤 11시까지 들어온다는 약속을 해놓고서 새벽 2시가 넘어서야 들어왔다. 아들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다는 느낌이 들어 괴로웠다. 아들이 들어오자 흥분해서 혼을 내다가 아들 앞에서 자신이 옛날에 얼마나 고생하며 살았는지를 얘기하게 됐고, 그러다가 그만 아들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그가 말했다.
“아들에게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였으니 얘가 이제부터 아버지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큰일났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만나본 아들의 말은 전혀 달랐다. 아들은 “저는 어제 저녁에 난생 처음으로 우리 아버지도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전까지 아버지에 대한 반항과 적개심으로 똘똘 뭉쳐 있던 아들은 아버지의 인간적인 면모에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다. 남자의 감성이 가지고 있는 파괴력이 성공적으로 나타난 사례다.
남자의 감성으로 성공한 나훈아와 실패한 남진
실제로 남자의 감성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바로 가수 나훈아와 남진이다. 70년대 처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두 라이벌 가수는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더 이상 라이벌이 아니다. 한 사람은 남자의 감성으로 호소해 지금도 성공적인 인생을 보내고 있지만, 또 한 사람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먼저 나훈아를 보자. ‘대한민국 나훈아’라는 그의 비디오 타이틀에 걸맞게 30년 이상 가수로서 정상을 유지해온 스타다. 철저한 프로의식을 가지고 모든 것이 자신의 컨트롤하에 움직일 수 있을 때만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 그래서 자신이 기획하는 라이브 무대에만 서는 사람 정도로 알려져 있다. 탄탄한 노래 실력과 엄격한 자기관리가, 30년이 넘은 지금껏 가수 나훈아를 인기 정상에 있게 만든 비결이란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그의 콘서트를 직접 본 필자는 다른 각도에서 나훈아를 생각하게 됐다. 프로로서 완벽에 가까운 그의 능력에다 결정적으로 날개를 달아주는 어떤 요소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감성적 섹스 어필’이었다.
과장된 경상도 사투리, 검은 얼굴에 유난히 대비되는 흰 치아를 드러내는 과장된 웃음은 팬들에게 친밀감을 주면서 심리적 방어를 무장 해제시킨다. 그리고 그의 무대에서 느껴지는 일관된 흐름은 한마디로 ‘교태’였고, 그것이 중년 여성들에게 강한 감성적 섹스 어필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개발한 창법이라는 ‘꺾기’나 ‘뒤집기’도 결국은 탄탄한 그의 목청에 교태를 섞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의 섹스어필은 요즘 젊은 가수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겉무늬만 섹스 어필이 아닌, 청중들에 대한 ‘극진한 공감과 배려’가 동반된 섹스 어필이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그것은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최고의 여자로 대우받는 여자가 가질 법한 극치감 같은 것이다. 불가사의할 만큼 매력적인 나훈아식 감정전달이다. 많은 중년 여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빠져 드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리라.
그는 또 나이든 남자의 성도 상품이 될 만큼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가수이기도 하다. 그 나이가 되도록 노래를 잘하는 가수는 많다. 그러나 50이 넘도록 감성적인 섹시함을 보여줄 수 있는 남자는 흔치 않다.
반면에 한때 라이벌이었던 가수 남진을 보자. 얼마 전 연예인협회 이사장에 취임한 후 토크쇼에 나온 그를 보게 되었다. 한때 대한민국 처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그의 모습은 흔적도 없었고 50대라는 나이에 ‘걸맞아 보이는’ 고지식하고 권위적인 한 사내가 거기 있었다. 예술가적인 풍부한 감성이나 상상력은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집안일은 잘 도와주느냐는 MC의 질문에 “우리 집안 남자들은 절대 부엌 같은 데는 안 들어갑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그것을 너무나 자랑스러워하는 듯 보였다. 그의 아내가 밝히는 남편에 대한 바람은 듣는 사람의 마음까지 우울하게 만들었다.
“조금 덜 권위적이셨으면 좋겠어요.”
필자는 남진을 폄하하거나 희화(戱化)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융통성 없이 딱딱해 보이는 그는 마치 기름기 하나 없는 팍팍한 고기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잘생기고 재능 있던 사람도 나이가 들어 감성이 결여되면 전혀 매력적이지 못하다는 무서운 증거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직업적인 능력만 대단하다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여자를 데려다가 좋은 옷, 좋은 집을 사줄 수 있는 남자라고 가정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능력 있고 섹스 어필한 남자, 이것이 남자들에겐 지상에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일 것이다. 그래서 21세기에는 감성적인 남자만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한편 40대 남성의 흔들림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성공을 거머쥔 40대 남자가 어느날 갑자기 “그래, 난 성공했어. 그런데 그것이 대체 내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거야?” 하며 의미타령을 하기도 한다. 자신이 이룬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을 동시에 받기 때문이다. 살아왔던 시간들을 ‘의미가 없었다, 잘못 살았다’고 회의하기도 한다.
여하간 이런 40대 남성 현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공한 사람이든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인간사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심리적 동요다. 그런데 왜 40대 남자들은 이런 변화를 겪게 되는 것일까. 남자들은 30대 초반까지는 교육을 받고 직업을 선택하여 실생활의 기반을 다지고 결혼하는 등 삶의 외형적인 틀을 갖추는 준비에 모든 에너지를 투입한다.
그 결과 삶의 외형이 어느 정도 잡힌 사람들은 앞으로 자신의 에너지를 어디에 쏟을지 몰라 방향을 잃고 정신적인 공황 에 빠지게 된다. 이때 남자들은 일 중심의 가치관을 넘어서 자유로운 내면적 자아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이런 변화는 30대 중반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이러한 중년의 변화는 심리적·생물학적으로도 입증된다. 원래 남성의 몸 속에는 다량의 남성호르몬과 아주 소량의 여성호르몬이 있고, 여성은 그 반대다. 그런데 묘하게도 30대 중반이 지나면서부터 남자에게는 남성 호르몬이 감소하고 여성호르몬이 증가하게 된다. 반대로 여자들은 여성호르몬이 감소하고 남성호르몬이 증가한다.
그 결과 여자는 점점 독립적이고 주도적이게 되며 남자는 예민하고 감성적이게 된다. 그런데 여자들이 독립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누구나 긍정적인 발전으로 간주하지만, 남자들이 감성적으로 변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우선 스스로가 자신의 그런 변화를 ‘약해진’ 증거로 보고 감추려고만 한다. 또 아내는 안정된 가정을 이룬 남편이 지금에 와서 흔들리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자 인생에서 40대를 정점으로 이루어지는 감성적인 변화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외형적이고 객관적인 삶에 치우친 그들의 삶에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요소가 늘어나면서 한 인간의 삶이 균형을 잡아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남자들의 외도가 많아지는 것도 따지고 보면 40대 남자들의 감성화와 관련이 깊다. 한 예를 들어보자. 일상생활에서는 좀처럼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가장 솔직하고 발가벗은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좋은 방법으로 정신의학에서는 ‘자유연상’이나 ‘심리극’을 이용하는데, 40대 남자 8명이 마음과 마음을 연결시켜주는 심리극에 참가해 눈을 감고 의자에 앉았다. 실내에는 음악이 낮게 흐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안락한 곳으로 여행을 갑니다. 비행기나 기차, 배를 타고 갈 수도 있고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할 수도 있습니다.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데리고 가도 좋습니다.…다 왔습니다. 이곳에서 마음껏 지내십시오. 세 시간 후에는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음악 속에 푹 파묻힌 듯한 반최면의 상태에서 그들은 마음속 깊이 숨겨놓은 욕구들을 펼쳐보였다. 놀랍게도 8명의 남자중 6명이 이완된 상태의 자유연상에서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떠올렸다. 다른 연령층의 경우 부모나 형제에 대한 억눌렸던 감정들, 혹은 그들과 연관된 어린 시절의 한 때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상상속의 여행을 마치고 난 한 40대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파란 하늘 아래 잔디가 끝없이 펼쳐진 곳으로 갔습니다. 원두막 같은 곳이 있어서 큰 대자로 누워 나긋한 실바람을 즐기며 낮잠도 잤습니다. 누굴 데려갈 수 있다고 해서 처음엔 아내가 떠올랐지만 로맨틱한 분위기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아서 그만뒀습니다. 나를 편하게 해줄 수 있는 여자가 있다면 세 시간만이라도 행복하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40대 중반에 들어선 한 부장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상상에 흠뻑 도취된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떤 여자와 같이 백사장을 걷고 있었습니다. 아주 매력적이고 조용한 여자인 것 같았습니다. 내가 알던 사람은 아니구요. 그런 느낌의 여자와 같이 이야기를 실컷 하고 왔습니다.”
40대 남자의 바람
연애 때나 결혼 초의 남자들, 또 바람 피우는 아버지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 있는 남자들은 결혼 후에 외도하는 남자들을 심하다 싶을 정도로 몰아붙인다. 자기는 절대로 그러지 않으리라는 맹세와 함께. 그러나 그것도 40이 되기 전까지의 얘기다.
“우리 나이가 되면 아내 외에 딴 여자를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왜 그런가요?”
그날 8명의 남자들이 공통적으로 제기한 의문이었다. 그런데 아내들은 남편들이 자신 외에 딴 여자를 생각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어느 회사에 다니는 서차장(42)은 저녁식사 후 오랜만에 아이들 없이 아내와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TV를 보고 있는데 드라마에서 남녀가 불륜의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가 농담처럼 아내에게 물었다.
“나한테 애인이 생기면 어떡할래?”
남편의 말을 듣고 어이없다는 듯이 0.5초 만에 용수철처럼 튀어나오는 아내의 대답.
“배 나오고 나이 들고 돈도 없는 당신같은 남자를 누가 좋아하기나 한대?”
그는 아내에게 살의를 느낄 만큼 심한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누군가와 밤새워 얘기를 나누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고백하는 40대 남성이 의외로 많다. 자신에게 철이 없다거나 어린애 같다고 비난하지 않으면서 자신에게 공감하며 얘기를 들어줄 상대를 갈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욕구를 가지고 집으로 들어간 남자들은 거세고 공격적이며 현실적으로 변한 아내를 만날 가능성이 많다. 그럴 때 그들의 마음은 밖으로 치닫게 된다. 물론 이것은 습관적으로 외도를 일삼는 남자들의 바람기를 합리화하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든 40대 남자가 외도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들끓는 성욕을 못 이겨 젊은 여자나 찾는 중년의 찝찝함 정도로 매도하지만 그들이 털어놓는 속마음은 바로 그런 것이다. 어쩌면 40대 남자가 겪는 변화의 90% 이상은 ‘감성화’라는 코드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감정 표현이 열등한 남자들
그런데 정작 40대들은 그 시기를 전후해 ‘갑자기’ 찾아온 정서적이고 부드러운 감성의 세계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지 말아야 할 장소에서 느닷없이 성기가 발기될 때처럼 당혹감에 휩싸인다. 그때까지 대부분의 남자들은 감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표현하는 것인지 등을 제대로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감정기능 발달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남자들은 선천적인 면에서나 후천적인 면에서 여자에 비해 열등하다. 먼저 선천적 측면에서 신경해부학적으로 들여다보면 남자 뇌와 여자 뇌는 조금 다르다.
남자 뇌는 객관적·논리적 추론을 담당하는 피질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데 비해, 여자 뇌는 식욕·성욕·감정의 중추인 변연계가 발달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작동한다. 생리적으로 남자는 여자에 비해서 감정을 잘 느낄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후천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정신분석가 스톨러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남자의 성이 오히려 제2의 성이라는 이론을 제시한다. 남자의 성은 여자의 성에 비해서 훨씬 불안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어떤 문화권에서든 아이를 돌보는 일은 여자 몫이다. 엄마든, 유모든, 집단탁아소의 보모든 대부분이 여자다. 그래서 아이들은 생의 초기에 자기를 돌봐주는 여성의 특징(부드럽고 감성적이고 포용적인 면)을 내면화하면서 심리적으로 성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여자아이들은 그런 여성성의 특징들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성장할 수 있지만 남자아이들은 서너 살부터 생각하지도 못한 도전에 직면한다. 지금까지 체득해왔던 여성의 특징들을 다 부정해야만 남자로 대우하겠다는 거대한 사회적 압력에 맞닥뜨린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자들의 마음속에 내재하는 ‘남성다움에 대한 강박관념’, 즉 ‘맨 콤플렉스’의 작동이 그것이다. 이때부터 ‘제대로 된’ 남자가 되기 위해서 사내아이들은 적극적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절제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남성은 사회적으로는 대우받는 성일 수는 있지만 심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본질적인 측면(여성성의 특징)을 다 뒤엎은 이후에 생긴 2차적인 성이어서 매우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남자들의 감정기능이 퇴화할 수밖에 없는 후천적 이유다.
그러니 선천적·후천적으로 감정기능이 열등한 남자들은 역으로 40대에 찾아오는 감성을 성장의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
40대 남자의 흔들림은 내적인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이며, 자신도 알지 못했던 깜짝 놀랄 만한 재(再)성장의 시작이다. 충분히 흔들리면서 감성의 흐름에 몸과 마음을 맡기며 내면의 길을 스스로 찾아낸 남자는 점점 유연하고도 매력적으로 변한다. 말 그대로 ‘절정의 시기’를 맞이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불안정해 보이지만 더할 나위없이 감성적이고 풍요로운 시기. 그게 남자의 40대이며 남자의 삶에 행복을 느낄수 있게 해주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이런 천사의 선물을 악마로 인식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되고 만다.
그것은 처음 자전거 배우기에 비유할 수 있다. 초보가 자전거를 배울 때 넘어지려고 하면 반사적으로 핸들을 반대쪽으로 꺾게 된다. 그럴 때마다 귀가 따갑게 듣는 것이 넘어지려는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만 넘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모순된 말 같지만 실제로 그렇게 해야 넘어지지 않는다.
40대에 감정의 흔들림을 겪는 남자들에게도 이러한 교훈은 요긴하다. 감정 쪽으로 기우는 마음을 억지로 이성 쪽으로 돌리려다 보면 넘어져서 상처만 생기기 때문이다. 결국 40대는 ‘마음의 자전거 타기’를 익혀야 하는 시기다. 중년에 새로운 변화와 흔들림을 느끼는 것은 죄도 수치도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인생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의 나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