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 9월 조치원읍 신안리의 한 골짜기, 속칭 서당골에 자리를 잡았다. 풍수지리를 아는 분들은 ‘좌청룡 우백호’로 둘러싸인 명당이라고 기뻐한다. 연로하신 어머니와 우리 부부, 아이들 셋, 강아지 세 마리, 닭 두 마리…이렇게 우리는 대가족이다.
집 뒤는 온통 산이다. 저 멀리 비단결 같던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이 조용히 흐른다. 좌우 산자락에는 복숭아 과수원이 아래쪽으로 뻗었으며, 중간 골짜기를 절묘한 곡선의 논들이 계단을 만들었다. 우리 집터는 원래 고추와 들깨농사를 짓던 밭이었다. 그러나 ‘푸성귀라도 자급해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텃밭을 일굴 때면 간간이 기와 쪼가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 전 서당이나 절이 있던 곳이 아닌가 한다.
우리집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은 500m 이상 떨어진 아랫마을에 살고 있다. 마을에서 우리집까지는 경사진 좁은 흙길이 이어져 있다. 지난 겨울 눈이 올 때마다 음지 쪽으로 빙판이 생기더니 하루는 손자손녀를 거느리고 며느리와 시장구경을 나섰던 어머니가 미끄러지면서 손목골절로 6주 정도 고생을 하는 일도 생겼다.
그러더니 드디어 아침신문을 배달하는 분이 손을 들었다. “도저히 집까지는 배달이 어렵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뒤로 집에서 약 400m 아래쪽 바위 틈에 신문을 두고 간다. 미안했던지 신청하지도 않은 다른 신문을 한 장씩 더 놓고 간다.
아침마다 신문 가지러 가는 길은, 내게 신선한 공기를 쐬며 산책하는 길이요 산새들과 즐거운 아침 인사를 나누는 길이다. 녹지 않은 눈과 빙판을 조심스레 밟다가, 붉은 무늬 옷을 입은 흰 딱따구리가 벌레를 파먹는 타악기 소리를 듣고 모처럼 막내둥이 꼬마처럼 신기한 눈으로 물끄러미 쳐다보기도 한다.
추운 날에도 여전히 풋풋한 소나무들, 가시덤불 사이에 삼삼오오 놀다가 사람소리를 듣고 쪼르르 놀라는 참새들, 파란 하늘을 여유로이 비행하는 매와 산비둘기, 산까치들…. 별로 재미없는 기삿거리와 돈 냄새 물씬 풍기는 광고물로 얼룩진 대개의 일간 신문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진지한 생명의 숨소리들이 나의 아침을 풍요롭게 해 준다. 신문 한 장 읽기 위해 번거로운 것도 사실이지만 ‘간단하고 편리한 것은 대개 생태적인 건강성에 배치된다’는 것을 이곳에 살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일 포스티노’와 우리집 우편함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섬마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일 포스티노’는 칠레에서 망명한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젊은 집배원 사이의 우정을 그렸다. 요란한 말보다는 조용한 눈빛, 많은 말보다는 필요한 말, 화려한 관광지보다는 평화로운 바다 풍경 속에 깊이 교감하는 두 사람의 관계는 사족이 전혀 없는 깔끔한 시 한 편과도 같았다.
솔직히 나는 우리집을 찾아오는 집배원과 바로 그런 관계를 맺고 싶었다. 그래서 서툰 솜씨로 큼직한 우편함을 만들며 ‘일 포스티노’를 상상했다. 자전거를 타고 즐거운 마음으로 나를 찾아오는 친구,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차 한 잔의 여유를 나누는 친구, 때로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가는 친구….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었다. 가을 햇살 속에 서너 차례 땀 흘리며 우리집까지 올라온 젊은 집배원은 “공기가 참 좋네요” 하더니 끝내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이 너무 힘드니 혹시 아랫집에 우편물을…” 하는 것이었다. IMF체제에 진행된 공공부문 구조조정의 파도가 내가 사는 귀틀집 흙벽에 와락 부딪쳐 갈가리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사람은 줄고 일거리는 늘어나 힘들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한 집 때문에 500m 골짜기 언덕길(그것도 비포장)을 왕복한다는 것은 노동강도가 세지는 것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노동강도의 강화에 대해 일상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해온 나로서는 집배원의 고충을 풀어주는 것이 마땅했다.
나는 아랫집과 우리집을 이어주는 흙길 중간쯤에 말뚝을 세우고 엉성하게나마 내손으로 만든 우편함을 걸었다. 멀리서도 우편물이 왔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뚜껑에 작은 장난감을 올리고 가느다란 줄로 묶어 이 줄 일부를 끼워 놓았다. 집배원이 뚜껑을 열고 우편물을 넣는 순간 이 장난감이 무게 때문에 아래로 떨어지게 해 놓은 것이다. 식구 중 누군가 우편물을 꺼내면서 다시 원래 위치로 해 놓으면 우편함이 비었다는 표시다.
한쪽 벽면이 통유리창으로 된 두레방(거실)에서 우편함까지는 대략 250m. 우편함 위의 작은 장난감이 보일락 말락한다. 그래서 산새들을 관찰하려고 마련한 망원경을 아예 유리창 가까이 걸어놓고 ‘우편함 뚜껑이 위에 있는지 아래로 떨어졌는지’ 조심스레 살피기도 한다. 처음에는 세 녀석이 서로 망원경을 보겠다고 난리를 치더니 요즘은 조금 잠잠해졌다.
우편함이 집에서 멀어진 대신 집배원 일은 예전보다 쉬워졌으리라. 그러나 슬프게도 우편함이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집배원과 인간적 교류가 불가능하다. 더욱 슬픈 것은 그가 일에 쫓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을 때다. 지난 연말 집배원에게 주려고 우편함 속에 카드와 작은 선물을 넣어 두었다. 그런데 하루 이틀이 가고 1주일, 2주일이 가도 집배원은 이 선물을 가져가지 않았다. 겉에다가 ‘집배원 아저씨께’라고 크게 써놓았는데도 그리고 ‘포장’이 꽤 커서 잘 보였을 텐데도….
우편함이 약간 깊어서 선물을 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선물 자체가 싫어서 거부한 것인지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분실 위험을 무릅쓰고 아예 뚜껑을 열어 선물이 밖으로 드러나도록 해놓았다. 과연 효과가 있었다. 집배원은 그동안 거의 무감각하게 뚜껑을 열고 우편물만 ‘툭’ 집어던지고 가버렸기에 선물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생태적 건강성, 사회적 건강성은 약간의 불편함과 귀찮음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임을 또다시 깨달았다.
이곳에 살면서 우리 나라엔 크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는 서울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시골사람이다. 서울 내지 수도권 이외는 모두 시골로 인식되고, 심하게 말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런 분류는 좀 나은 편이다. 사실상 대한민국의 축소판인 서울을 떠나 지방에 산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대한민국’을 떠나 사는 것이나 다름없다.
가만히 보면 이것은 그 자체가 문제기도 하지만, 사실은 여러 심층적 사회문제들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정치경제적으로 서울은 중앙집권주의, 권력중심주의를 상징하며, 교육과 문화조차 서울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특히 직장생활과 아이들 교육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서울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보편화한 정서다. 현관문만 걸어 잠그면 자기 가족만의 개인적 공간이 확실히 보장되는 아파트의 편리한 생활은 그러한 의식을 더욱 강화한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이 시골 조치원의 서당골이라는 촌구석에서 즐겁게 살고 있는가.
아무래도 1997년 3월, 조치원에 있는 고려대학교 서창캠퍼스 경영학과 조교수로 발령받은 것이 직접적인 계기다. 독일 유학을 가기 전 2년, 유학을 갔다 온 후 3년 가까이 나는 과천에 살았다. 과천은 서울과 가깝고 지하철도 잘 연결되고 관악산과 청계산으로 둘러싸여 쉽게 등산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도시 전체가 하나의 공원처럼 느껴져 대한민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힌다.
그럼에도 항상 마음속에 가졌던 불만은, 과천이라는 전원도시가 조금만 다르게 보면 하나의 거대한 콘크리트 복합물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분당이나 일산과 같은 무시무시한 아파트 숲은 아닐지라도 콘크리트 건물이 도시 전체를 얌전하게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콘크리트가 주는 답답함을 가리기 위해 돈으로 인공적인 자연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갈수록 높은 건물이 들어서서 그 좋던 관악산도 시야에서 사라졌고, 교통량이 늘면서 공기도 급속하게 나빠졌다.
더 심층적인 불만은, 그렇듯 생활 조건이 나빠지는 데도 무감각하게 아무 일 없는 듯 살아가는 나의 모습, 아니면 그래도 이만한 곳이 어디 있느냐고 자위하며 사는 나의 모습이었다. 그러던 차에 조치원에 새 일자리가 났으니 ‘서울을 건강하게 빠져나가기’ 계획이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서울생활에 미련을 두는 이유는 대개 직장(장사), 교육, 그리고 문화생활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첫번째 이유인 직장이 해결되자마자 얼싸 좋다 하고 미련 없이 서울을 버렸다. 나머지 문제는 시골에 살아보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흙, 벌레, 풀, 나무, 꽃, 나물, 가축 등과의 풍부한 체험과 다양한 놀이, 그리고 인간미를 지닌 이웃과의 교류, 아이들에게는 이런 것이 진짜 교육이었다. 물론 이것을 몰라서 서울을 고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대개 “아이들이 크면 생각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그리고 내 아내도 아니다. 최소한, 아이가 원하지 않는다면 결코 서울을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문화생활도 아쉽지 않다. 꼭 보고 싶은 연극이나 영화가 있다면 서울이 천리 아니 만리라도 갈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웬만한 것은 서울이 아닌 이곳에서도 즐길 수 있다. 더 중요한 깨달음은 문화생활이 밖에 있는 것을 돈으로 사서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자율성을 키워가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허전함이나 허탈감 없이 갈수록 더욱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집 가구 마당 텃밭 따위를 자신의 아이디어에 따라 만들고 고치고 가꿔보는 것, 식당에서 편하게 음식을 주문해 먹기보다는 여러 가지 요리를 직접 시도해 보는 것, 비싼 양주를 사서 마시기보다는 과일이나 솔잎, 쑥뿌리 등으로 술을 직접 담가보는 것 등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라도 직접 해보는 동안 저절로 건강한 문화생활이 이뤄질 수 있다.
사람들은 “나중엔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 당장은 매일매일을 ‘지옥 같이’ 산다. 언젠가 나는 “젊어서 죽도록 일하고 늙어서 인생을 즐기기는 꿈에 불과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말은 현재의 삶과 현재의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서 나중에 자기 시간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잃어버린 ‘시간 주권’을 되찾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채워 나가자는 말이다. 이러한 삶의 자율성을 잃은 채 현재의 행복을 자꾸만 뒤로 유보하는 사람들은 그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일 중독이나 쇼핑 중독, 게임 중독 따위에 빠지기 쉽다.
결론은 ‘결단의 문제’다. 이렇게 살다가는 작은 행복도 결코 찾을 수 없다는 위기감,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살고 싶은 대로 살아야겠다는 단호함, 이런 것이 마침내 바른 결단을 내리게 하는 것 아닐까?
가난하게 살아본 경험의 소중함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79년까지 고향 마산을 떠나본 적이 없다. ‘물 좋은’ 마산은 내게 어쩌면 ‘생각의 고향’이기도 하다. 1970년 박정희 개발독재 시절에 세워진 수출자유지역과 그 이후 중화학 공업의 요람으로 만들어진 창원공업기지는 내게 일하는 사람들의 삶과 고통의 문제를 소박한 형태로나마 깨닫게 해주었다. 또 내가 뛰놀기도 하고 낚시꾼의 즐거움을 누리며 바지락을 캐던 바닷가 개펄과 가포 해수욕장, 노래 ‘가고파’에 나오는 그 푸른 마산만, 또 그 가운데 ‘그림 같이’ 떠 있는 돝섬의 낭만, 이런 것들이 산업화 과정은 물론 산업주의적 생활양식에 의해 무참히 파괴돼 가는 과정은 내게 초보적인 생태적 감수성을 일깨워준 듯하다.
1980년부터 시작돼 89년 독일로 떠나기 전 10년 가까이 계속된 서울생활은 나와 나의 삶을 ‘객관화’해 보는 계기가 됐다. 중앙대학교 부근 한 선배님댁에서 나는 종로학원 재수생 신분으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이 시절 세 가지 ‘작은 충격’을 받았다. 하나는 당시 인기 드라마였던 ‘달동네’를 보면서 “마산에서 내가 살던 곳이 바로 ‘달동네’였구나!”라는 사실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우리집이 약간 가난한 줄은 알았어도 그렇게 ‘쪼들리는’ 살림인 줄 몰랐다. 친구들과 숨바꼭질하며 뛰놀던 우리 동네가 바로 지지리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달동네’인 줄 몰랐던 것이다.
둘째 충격은 종로학원 친구들이 나를 ‘시골’ 출신이라고 부른 것이다. 마산은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큰’ 도시이며 나는 그 마산에서도 ‘명문고’ 출신이니까 함부로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나를 ‘시골’ 출신이라 무시하는 서울내기들의 태도에 나는 자존심이 상했고 동시에 ‘서울 아니면 모두 시골’이라는 서울 중심의 의식구조에 놀라고 말았다.
셋째 작은 충격은 저 유명한 80년 ‘5월의 봄’이었다. 수천 명의 대학생들이 서울역 광장 앞에 모여 ‘독재 타도’와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며 무시무시한 전투경찰들과 대치하던 광경, 그리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시위대에 적대적인) 누군가가 버스를 탈취해 불을 질러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던 장면 등은 나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이른바 ‘명문고 우등생’ 출신으로 ‘일류대학’ 입시에 낙방하고 깊은 좌절감 속에 오로지 합격만을 위해 이를 악물고 살아가던 내가 ‘왜 공부를 하며, 왜 일류대학에 가려고 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출세하려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했다.
당시에는 이러한 ‘자기 객관화’ 과정과 ‘자기 질문’들에 대해 별다른 해답을 찾을 수 없었지만 4년간의 대학생활과 ‘피라미’ 학생운동을 통해 나는 절대빈곤의 문제, 빈부격차의 문제, 지방과 서울의 격차 문제, 사회민주화 문제 등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를 되묻게 됐고, 결국 그런 문제들의 핵심 중 하나가 ‘일하는 사람들이 잘 사는 것’이라 생각하게 됐다.
그런 맥락에서 마침내 ‘일하는 사람들이 잘 사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이 내 삶에 작은 보람일 거라고 설정했다. 특히 졸업이 가까워지자 진로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솔직히 말해 내게는 화끈하게 ‘D를 치고’ 강제징집을 당할 용기도 없었고, 그렇다고 현장으로 가서 노동운동을 할 용기도 없었다. ‘출세와 돈벌이’를 원하던 부모님과 형님들의 기대를 저버리며 내가 마침내 선택한 ‘제3의 길’은 깊이 있는 ‘노사관계’를 연구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며 동시에 새로운 사회 창조의 길도 밝혀보자는 것이었다. 1987년 4월 결혼할 때까지 7년 동안 나를 먹여주고 재워준 선배님 부부가 해준 “산 입에 거미줄 치랴”는 말씀은 이런 나의 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지금 서당골에 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절대빈곤은 극복돼야 한다. 그러나 바로 그 빈곤이야말로 인간을 진실로 성숙시켜주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요즘은 산업주의와 물질만능주의, 권력지상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자발적 간소함’ 내지 ‘스스로 청빈하게 살기’ 등이 강조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당시는 몰랐지만, 결국은 가난한 상황 때문에) 부모님을 원망하던 철부지 시절도 겪었으나, 흥청거리는 서울생활을 직·간접으로 경험하면 할수록 가난하게 살아 본 경험이 소중함을 거듭 깨닫는다. 아이들에게도 일부러 결핍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전이 됐을 때 전기의 소중함을 깨닫고, 수도꼭지에서 물이 안 나와야 얼마나 귀중한지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회 전체적으로, 지구촌 전체적으로 절대빈곤이 존속하는 것은 결코 생산 총량이 적어서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모든 게 남아돈다. 문제는 집중과 독점이다. 그러한 독점과 불평등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사회 관계들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 것에만 신경 쓴 나머지, 불필요하고 해로운 것들도 돈이 된다는 명분으로 너무 많이 만들고 있다. 어느새 우리 속에 굳게 내면화한 이윤논리, 간편주의, 생산력주의, 그리고 부자유와 불평등을 지탱하는 사회적 관계들을 철저하게 털어내느냐 아니면 그대로 두느냐에 따라 사회적으로 ‘야만이냐 해방이냐’가 결정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인적 생활방식과 사회적 변화과정은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