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은 차도르 너머로 살짝 드러난 아랍 여인의 푸른 눈과 붉은 입술을 훔쳐본 적이 있는가. 새벽 기도를 올리던 발리 여인의 풋풋한 미소에 가슴 설레본 일이 있는가. 대륙을 가로지르며 접한 여성들의 체취.》
그녀는 이미 두 사람의 외국 여성에게 포위돼 있었다. 그들은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호주 캔버라 국립박물관에서 온 보존과학 전문가였다. 두 사람 모두 10대의 딸을 둔 40대 후반의 중년 여성이었다.
관심사가 같다 보니 우리는 금방 가까워졌다. 우리는 람세스 대왕이 사랑하는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해 남자라곤 한 사람도 그려넣지 않은, 그래서 벽화에 오직 여자들만 등장하는 특이한 무덤을 만든 것에서부터 자신과 어머니, 왕비, 왕자와 공주 등 가족들의 모습을 아부심벨의 거대한 바위벽에 새겨 그의 애틋한 가족 사랑을 후세에 길이 전하려 했던 것, 전세계의 보존과학 전문가와 최신 장비를 다 동원하다시피 해 왕비의 무덤을 복원한 과정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어느새 점심시간을 훌쩍 넘겼지만, 우리는 카이로 구시가에 있다는 네크로폴리스를 함께 둘러보기로 했다. 안내는 물론 나디아가 맡았다. ‘죽은 자의 도시’라는 네크로폴리스에는 말 그대로 거대하고 특이한 탑 모양 무덤들이 즐비했다. 내친 김에 주위에 있는 오래된 모스크도 둘러본 다음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갈 즈음에야 신시가지에서 작은 레스토랑을 찾을 수 있었다.
나디아의 ‘독신의 행복’
식사를 하다 말고 나디아는 “내 아파트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으니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나디아가 미혼인지 기혼인지 몰랐다. 아니, 아예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직감적으로 ‘미혼이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면서 호기심이 생겼다.
여행자란 특이한 안내자가 없으면 방문지 문화의 속살을 살펴보기가 쉽지 않다. 대개는 밖으로 드러난 겉모습만 보고 와서 이러쿵 저러쿵 떠들어댄다. 나는 가능하면 여행지 주민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저 ‘보는 여행’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여행’을 하자고 마음먹고 길을 떠났기에 그녀의 제안을 뿌리칠 이유가 없었다. 세상에서 이렇게 단 음식이 또 있을까 싶은 케이크를 하나 사들고 나디아의 아파트로 따라갔다.
그녀의 아파트는 5층 건물의 꼭대기, 다시 말해서 옥상에 있었다. 크지는 않았으나 제법 격식을 갖춰 지은 듯했고, 미술전공자답게 거실과 침실 부엌을 정성스레 꾸며놓아 밖에서 본 것과는 딴판이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온 여자가 ‘원더풀’을 연발한 것은 당연했다. 중국의 집들이 대개 그렇지만 중동지역의 집들도 우중충한 겉모습과는 달리 내부는 화려하고 세련되게 치장돼 있다.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그곳 젊은이들과 어울리다 한 친구의 집에 따라가본 적이 있는데, 그 집이 꼭 그랬다.
나는 꽤 괜찮은 그림이 걸려 있고, 골동품 가게에서나 구할 수 있을 듯한 찻잔과 티스푼, 가구들이 놓인 나디아의 방을 보면서 왜 그녀는 그 나이에 아직 혼자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렇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이슬람지역에서는 좀 배웠다는 여자들이 결혼을 굴레로 여기며 혼자 사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중동을 여행하면서 그곳 교민들로부터 여러 번 들었다. 어릴 때 받은 할례(성기 절제), 자신의 의사가 아니라 부모의 뜻에 따라 짝을 맞아야 하는 결혼제도, 그리고 결혼해서는 커리어 우먼의 길을 접고 오로지 남편의 뜻에 따라 평생을 살아야 하는 현실이 그들로 하여금 결혼을 기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미 커리어 우먼으로서 입지를 굳건히 다졌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있는 데다, 처음 보는 이국의 사내와도 아무런 거리낌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독신의 행복을 나디아는 포기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녀가 줄곧 두르고 다니는 흰색의 차도르가 그녀의 행복을 지켜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것도 아주 역설적인 방법으로.
이슬람 여자들은 흰색 또는 검은색 천으로 몸과 얼굴을 가린다. “그대 아내와 딸들의 몸을 외투로 감추어라”는 코란의 말씀에 따른 것이다. 이를 대개 ‘차도르’라 하고 이란에서는 ‘헤잡’이라고 부르는데, 같은 이슬람 국가라 하더라도 차도르의 착용강도가 조금씩 다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걸프지역, 아프가니스탄에선 눈과 코만 내놓게 하는 데 비해 이란 이라크 요르단 이집트 터키 같은 곳에선 머리카락만 가리면 된다.
“벌거벗고 혁명한 여자는 없다”
볕이 뜨겁고 모래바람이 강한 기후에서는 천으로 몸과 얼굴을 가리는 것이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경제적인 방법일 수 있다. 남자들도 머리에 터번을 두르지 않는가. 그러나 머리카락은 물론, 눈과 코를 빼고는 얼굴을 모두 천으로 감싸는 차도르를 단지 햇빛과 모래바람을 막기 위한 도구로만 보기는 힘들다. 거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자고 나면 전날 동침한 여자를 죽여버리는 괴팍한 왕에게 한 슬기로운 여인이 매일 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어 마침내 그를 바른 길로 이끌었는데, 그 이야기를 담은 고전 중의 고전, ‘아라비안 나이트’의 고향, 이란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테헤란 공항 곳곳에는 ‘헤잡은 여성을 더욱 여성답게 만든다’는 문구와 헤잡을 쓴 여성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거리는 한마디로 헤잡투성이였다. 13살이 넘은 여자는 집 밖에선 반드시 헤잡을 둘러야 하고, 외국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며, 이 원칙은 식당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이를 위반하면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식당 주인도 그걸 방조했다는 이유로 영업정지 같은 문책을 받게 된다고 했다. 서구 지향의 팔레비 왕정 때는 헤잡을 벗으라고 강요했는데, 79년 이슬람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반대로 헤잡 착용을 강요했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여성 저널리스트 오리아나 팔라치는 혁명이 터지고 1년 뒤 이란의 최고지도자 아야툴라 호메이니를 만나 그 이유를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당신들은 왜 여성에게 이 거북하고 우스꽝스러운 옷 속에다 몸을 감추라고 강요하는가? 이 나라에서도 여성들은 남자들과 똑같이 투옥되고 고문당하며 혁명을 돕지 않았던가?”
호메이니의 대답은 이랬다.
“혁명에 기여한 여성은 예나 지금이나 이슬람 복장을 한 여성들이었지, 당신처럼 살갗을 드러내놓고 남자들에게 꼬리치는 멋쟁이가 아니었다. 얼굴에 화장을 하고 머리카락과 목덜미, 몸매를 과시하면서 거리에 나서는 요염한 여자치고 팔레비에 대항해서 싸운 사람은 없다. 그들은 좋은 일이라곤 한 적이 없고, 사회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쓸모있는 여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벌거벗음으로써 남자들의 주의를 흩트리고 마음을 뒤흔드는가 하면 다른 여성들까지 동요시킨다.”
얼굴도 이렇게 가리도록 하는데 몸은 어떻겠가. 속옷으로 단단하게 무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을 확인해준 것은 다마스쿠스에서 카이로로 가는 비행기에서 내 옆자리에 앉았던 카이로 의과대학 여학생이었다.
손에 코란을 쥔 그녀가 대뜸 내게 무슨 종교를 믿느냐, 한국은 어디쯤에 있으며 어떤 나라냐고 묻기에 대답해주고는 “이슬람 여성들은 왜 그렇게 몸을 감싸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이런 저런 설명을 늘어놓다가 겉옷을 살짝 걷어올리더니 두 다리를 감싼 검고 두껍고 긴 속옷을 내게만 보여줬다.
구두 스타킹 속옷으로 개성 표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여성의 본능인가. 헤잡을 두르긴 했어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난 파란 눈, 살짝 그어놓은 쌍꺼풀, 짙은 눈썹, 오똑하면서도 날카롭지 않은 콧날, 립스틱을 붉게 바른 입술, 순백의 피부, 적당한 몸집, 약간 물기를 머금은 눈망울로도 눈이 부실 정도인데, 그것도 모자라 이란의 젊은 여자들 사이에는 앞머리를 약간 틀어올려 이마를 많이 드러냄으로써 얼굴이 길어 보이게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렇게 해서 갸름해진 얼굴은 더욱 아름다웠다.
헤어스타일을 바꾸는 것 다음으로 그들이 신경쓰는 것은 구두와 스타킹이었다. 한 가지 색깔의 천으로 몸을 감싸는 헤잡으로는 가려지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들은 여기에서 개성을 마음껏 발휘했다. 그래서 구두와 스타킹은 그 모양이 다양했고, 젊은 여자들은 거리를 걷다가도 구두 가게 앞에 이르면 으레 멈춰서서 한동안 진열장 안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들이 발걸음을 멈추는 곳이 또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속옷 가게였다. 남에게 보여주는 겉옷은 이슬람의 법인 ‘샤리아’ 때문에 어쩔 수가 없지만, ‘남편 전용’인 속옷은 그런 법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속옷가게를 보니 불빛이 더 화려한 것 같았다.
이슬람 사회에는 또 ‘하렘(harem)’이라는 것이 있다. 차도르와 마찬가지로 자기 여자를 외부인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장치인데,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이집트 왕조시대에 이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렘이라고 하면 아랍의 왕궁이나 가정에서 여자들을 격리해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니고는 접근할 수 없게 만든 시설이나 제도를 일컫는다. 나스타샤 킨스키와 벤 킹슬리가 공연(共演)한 ‘하렘’이란 영화로 우리에게도 웬만큼 알려졌는데, 이스탄불의 톱카피 궁전에 있는 하렘이 그 극치를 보여준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최고지도자였던 술탄 것이었으니까.
그 하렘은 20세기 초 제국의 패망과 함께 폐쇄되고 그 후 박물관이 되어 지금은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는데, 이곳이 어떤 곳이었는지 일반인들에게 소상히 알려진 것은 몇 년 전에 나온 ‘하렘, 베일 뒤의 세계’란 책 덕분이다. 하렘의 여자를 어머니로 둔 터키 여성 알레브 쿠르티에가 쓴 이 책에 따르면 피지배 민족의 여자들 가운데서 고르고 고른 미인들을 톱카피 궁전의 하렘에 모아놓고 최고의 화장품과 향수, 목욕과 마사지로 얼굴과 몸매를 다듬어서 술탄에게 바쳐 욕정을 채우게 했다고 한다.
하렘의 여자들은 술탄의 눈에 들기 위해 피눈물나게 노력했는데,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 순간을 기다리다가 늙어갔다고 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하렘은 오직 술탄 한 사람을 위해 만든 여자사냥터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하렘은 폐쇄의 상징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폐쇄와 단절은 사막문화권의 전통이다. 한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 그리고 강한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서는 두꺼운 벽돌로 집을 지을 수밖에 없고 문과 창도 작게 내야 한다. 나무가 귀해 목조가옥을 지을 수도 없으므로 안과 밖이 통할 리 없다.
그런데다 전사(戰士) 중심의 남성사회라 남녀의 구별이 엄격하다.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거느리려면 자기 여자가 외간 남자와 만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자는 길 가는 여자와도 눈을 맞춰서는 안 되며, 남편이나 아버지의 허락 없이 여성의 사진을 찍어서도 안 된다. 자칫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
또한 아랍인들은 손님을 집으로 초대해도 접대를 남자들이 도맡는다. 파키스탄의 페샤와르를 지나다가 그곳에서 기독교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 선교사 부부의 집으로 초대받은 적이 있다.
마침 크리스마스 이브라 파키스탄 사람들도 여럿 초청됐는데, 선교사는 남자손님들하고만 어울릴 뿐 여자손님들과는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여자손님의 상대는 선교사 부인의 몫이었다.
그날 밤 나는 여자손님들의 그림자만 보고 돌아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다른 사회라면 여성들이 주로 맡는 버스 안내, 식당 웨이트리스 같은 서비스도 남자들이 담당했다. 다만 현대적 비즈니스 업종으로 현지 주민들과 접촉이 상대적으로 적은 은행, 고급호텔, 여행사 등에서만 양장을 한 여자들(그들도 차도르는 두른다)을 볼 수 있었다. 이나마 세상이 많이 바뀌었기에 가능해진 것이라고 했다.
여성에 대한 이와 같은 굴레는 그들의 특이한 결혼제도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이슬람 전통사회에서의 결혼제도는 잘 알려진 대로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거느릴 수 있는 일부다처제다. 일부다처제는 이웃 부족과의 잦은 전쟁으로 남자들이 모자라는 전통 유목사회에서 생활능력이 없는 과부와 고아들을 구제하기 위한 사회보장 차원에서 생겨났다. 그런만큼 역사도 오래고 뿌리 또한 깊다.
그러나 일부다처제는 인도주의적 목적으로만 이용되지는 않았다. 돈 있고 힘 있는 남자들이 많은 여자들을 합법적으로 거느릴 수 있는 장치로 이용된 경우가 더 많았던 것이다. 능력 없는 남자들은 평생 여자 구경도 못 하고 노총각 홀아비로 늙어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낡은 전통을 허물고 새로운 세계를 제시하려 했던 마호메트는 이처럼 불공평한 결혼제도를 시정하지 않고는 그가 바라는 세상이 실현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코란에다 ‘누군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다면 두 명, 세 명, 네 명의 여자와 결혼해도 좋다’는 구절을 두어 아내를 네 명까지로 제한했다. 지금과 같은 ‘4인처제’는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그러나 4인처제는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므로 그것이 무리없이 굴러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난 택시기사가 두 아내와 산다고 하기에 “두 여자를 데리고 사니 정말 좋겠소”라고 했더니, 그는 “물론 그렇긴 하죠. 그렇다고 내가 여자를 밝힌다거나 마냥 행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시오. 내게도 나름대로 어려움은 있으니까요”라며 두 여자와 공평하게 잠자리를 함께 해야 하는 고충을 털어놨다.
그가 말하는 공평함이란 질(만족감)보다는 양(횟수)이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굴레려니 싶었다. 하긴 코란에도 “만일 공평하지 못하다고 스스로 판단되거든 한 명으로 족하라”는 단서조항을 달아놓았다.
여성 할례, 일부다처제의 유산
지금과는 달리 일부다처제가 일반적이던 전통사회에서는 ‘모든 아내에게 골고루 사랑을 베풀라’는 도덕적 의무만 강요한다고 해서 그 제도가 제대로 굴러갈 리 없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제도적 장치 내지 신화가 존재해야 했다. 여성 할례는 바로 그걸 위해 등장했다.
그곳에선 물론 남자들도 할례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성 자신의 위생을 위해 행해질 뿐이다. 물이 귀한 땅이라 성기를 자주 씻을 수 없으므로 음경 표피 안에 때가 낄 수 있는 여지를 아예 없애버린 것이다(요즘은 한국 아이들도 너나 할 것 없이 포경수술을 받는다. 이것도 할례의 일종인데, 이는 미국의 소아과 의사들이, 같은 사막문화권인 유대인들의 할례의식이 소아 위생에 좋다고 해서 시행한 것을 ‘미국 것이라면 다 좋은 것’이라며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다).
이에 반해 여성의 할례는 여성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본능적인 성욕을 억제하고자 성기 일부를 잘라내는 여성 할례는 일부다처제라는 울타리 안에서 투정부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다시 말해서 공동체 유지를 위해 여성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제도다.
그런 문화권에선 할례를 받아야 비로소 여성으로 대우받는다. 막대한 수술비(그들의 소득수준에 비해 큰 돈이다)를 감당하기 어려운 집에서도 딸아이가 서너 살이 되면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생일선물’로 할례를 시킨다. 그리고 할례를 받은 당사자는 그런 불완전한 몸으로 평생을 살아간다. 고등교육을 받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아는 머리 큰 여자들이 결혼을 기피하는 것은 자신이 그런 식의 할례를 받은, 그래서 ‘문제가 있는 여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질투 모르는 이슬람 여인들
아프리카 북동부의 소말리아. 그 어느 시골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와리스 디리는 14살 때 60살 먹은 돈 많은 노인에게 낙타 다섯 마리에 팔려 시집을 갔다. 그녀가 남편의 늙은 얼굴을 처음 본 것은 신혼 첫날 밤이었다.
더 이상 살맛을 잃어버린 디리는 그 자리에서 빈손으로 집을 나가 며칠 밤낮을 걷고 또 걸어 수도 모가디슈로 도망갔고, 거기에서 어느 패션 사진작가의 눈에 띄어 런던으로 건너가 세계적인 패션모델이 됐다. 그녀는 고향땅에서 보고 겪은 여성에 대한 억압구조를 ‘사막의 꽃’이라는 자전적 에세이에서 리얼하게 그려냈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바깥으로 튀어나온 클리토리스, 소음순, 대음순이 차례로 잘려나갔다. 상처가 아물면 거기엔 성기가 있었다는 흔적만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납작한 흔적만이 배뇨와 월경통로 구실을 할 것이다. 그런데 누구 한 사람 이런 할례가 무엇 때문에 행해지는지 설명해주지 않는다.”
디리는 자기네 마을에서 이 ‘성스러운’ 의식을 도맡아 행하는 하나밖에 없는 ‘무당 겸 의사’에게 ‘살인녀’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녀의 손에 수많은 어린 딸이 죽어갔다며.
아프리카를 여행하다 비인간적인 할례 현장을 직접 목격했던 미국 남부 태생의 흑인 여성 작가 앨리스 워커 또한 ‘컬러 퍼플’이란 소설에서 할례를 받은 주인공 타쉬가 어떻게 자아를 찾아가는지를 그려 미국에서 할례 반대운동을 촉발하기도 했다. 워커는 어느 방송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 사회에서 ‘왜 할례를 해야 하는가’ 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그 사회가 그때껏 가꿔왔던 신화를 깨뜨리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져 엄청난 사회적 압력을 받게 된다.”
그렇게 길든 탓일까. 이슬람 세계의 여자들은 좀체 질투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국경사무소에서 한 남자가 여러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출국수속을 밟는 광경을 봤는데, 아내들은 한곳에 둘러앉아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한 아이가 어딘가로 뛰어가자 그 아이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여자가 쫓아가 아이를 데려왔다. 친어머니로 보이는 또 다른 여자는 그 아이가 다가와 손을 내밀 때에야 비로소 손을 잡아줬다.
그들의 행동에서 투기나 긴장감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 아내에게 따로따로 집을 얻어주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집에서 허물없이 함께 지낸다고 하니 서로 마찰없이 살고 있다는 것을 이보다 잘 설명해주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일부다처제라는 제도가 있다고 해서 누구나 여러 여자를 거느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선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 결혼생활에 필요한 살림도구를 장만하는 돈이야 당연한 것이고, 살아가다가 이혼할 수도 있으므로 그럴 경우에 대비해 신부의 아버지가 보험금 차원에서 요구하는 돈까지 지불할 재력이 있어야 결혼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 누가 감히 한 여자도 아니고 둘, 셋을 넘보겠는가.
시리아의 작은 도시 데이르 알 조르에서 만난, 사히르라는 스무 살 난 청년이 필자를 자기 집으로 초대,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형과 형수를 소개하면서 결혼비용을 귀띔해줬는데,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앞으로 15년 동안 번 돈을 한푼도 쓰지 않고 꼬박꼬박 모아야 그만한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했다.
극진한 자식 사랑
정상적인 이슬람 사회의 사정이 이럴진대, 걸프전을 일으킨 벌로 서방세계로부터 몇 년째 가혹한 경제제재를 받고 있어 빵조차 먹기 힘든 이라크 총각들의 처지는 어떻겠는가. 노총각은 해마다 늘고, 데리고 갈 사내가 나타나지 않으니 처녀들도 덩달아 나이를 먹는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후세인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라는 경제제재가 많은 이라크 젊은이들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 셈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결혼을 하게 되면 여자들은 ‘코흘(kohl)’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중동의 시골지역을 다니다 보면 지금도 쉽게 볼 수 있는 코흘은 상류계층에 속하지 않는 보통 여자들이 결혼했다는 표시로 안티몬이라는 광물에서 추출한 검은색 안료로 이마와 턱에 몇 가닥 선을 그은 것을 말한다.
이슬람 전통사회에서 여성들은 코흘을 통해 기혼녀로 대접받았고, 남성들은 코흘을 한 여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결혼한 인도 여성들이 눈썹과 눈썹 사이에 찍는 ‘빈디(bhindi)’라는 붉은 점과는 달리 코흘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은 집단적 결속이나 부족간의 동질성을 나타내는 문신에 가깝다. 이것 또한 여성에게 굴레라 하겠다.
아랍 여성들은 아이를 많이 낳는다. 7∼8명이 보통이다. 그들의 다산풍습은 유목생활을 해온 그들의 삶의 방식으로 봐서는 당연한 것이나, 지금에 와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은 전통의 보존이라는 이유 외에 피임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
지난 20세기에 여성들은 크게 두 가지 전쟁을 치렀다. 19세기 말에 시작되어 1920∼30년대에 타올랐던 참정권 투쟁이 그 하나였고, 다른 하나는 60년대에 제기된 출산 자율권 투쟁이었다. 특히 출산자율권, 즉 피임권의 획득은 여성의 신체에 가해졌던 갖가지 억압을 걷어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런 노력이 하나 둘 성과를 거둬 여성들은 마침내 복종과 예속의 굴레를 벗고 세계 곳곳에서 변화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피임법 쟁취가 이런 변화를 가능케 했다면 이슬람 여성들이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많다고 할 수 있다. 그곳에는 다른 진료과목에 비해 산부인과와 소아과가 유난히 많으며, 여성들은 평생 아이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직장에 나가더라도 아이를 데리고 가 젖을 빨리고 함께 놀아줘야 한다. 이를 서구적 시각에서 보면 후진적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 무엇보다 자녀를 귀중한 존재로 보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존경스럽기도 하다.
이슬람 사회의 할례와 다산, 그리고 자녀에 대한 극진한 보살핌은 유대인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예루살렘 거리를 걷다 보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다니는 유대인 아버지들을 심심찮게 목격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것은 옛날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다는 ‘통곡의 벽’을 향해 자녀들과 함께 기도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다함께 기도를 올림으로써 자식들에게 그들의 하나님, 야훼의 가르침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남녀 구분이 엄격한 유목사회의 전통에 따라 통곡의 벽에서는 남자들의 공간과 여자들의 공간이 나뉘어 있어 아버지는 아들와 함께, 어머니는 딸의 손을 잡고 기도를 올린다. 하지만 집에서는 그런 구별이 없으므로 가정에서의 가르침은 어머니가 전담하다시피 한다. 그래서 유대인 천재들은 모두 어머니들이 만든다고도 한다.
중동을 지나 알프스를 넘어 다시 그 북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넘어가면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차도르’ ‘일부다처제’ ‘할례’와 같은 단어 대신 어쩐지 가볍고 화사한 느낌을 주는 ‘프리섹스’란 말이 귀에 자주 들려온다. 입센이 ‘인형의 집’을 썼던 그곳은 여성해방운동의 진원지이자 프리섹스의 고향이다.
그곳을 처음 찾았을 때만 해도 프리섹스를 무슨 성개방주의쯤으로 생각한 나머지, 거리에서 성을 사고파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곳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그렇긴 해도 그들은 성에 관한 한 철저한 리버럴리스트였다. 아주 활짝 열려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성은 오직 사랑와 결부되어 있을 뿐, 다른 어떤 것과도 무관했다. 심지어 돈과도. 그런 이유로 성이 거래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날 스톡홀름의 한 가게에서 거리의 여자를 두고 영업을 하려 했다가 문을 처음 열던 날 사람들이 몰려와 이것 던지고 저것 던져대는 바람에 문을 닫은 뒤로는 아무도 그런 가게를 내려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다.
그들은 부부 사이라 해도 사랑이 오갈 때만 그 관계가 유지될 뿐, 어느 한쪽에서 “내게 새 애인이 생겼어”라고 하면 이유도 묻지 않고 그 순간 모든 것을 끝내고 만다.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부부관계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프리섹스는 아무하고나 난잡하게 성관계를 갖는다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만 존재하는, 다시 말해서 사랑이 주인이 되는 섹스를 뜻하는 것이다.
그곳 사람들이 부부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자녀까지 낳아 기르면서도 결혼식은 물론 혼인신고도 하지 않고 지내는 경우가 많은 것은 결혼이라는 형식에 얽매이기보다는 사랑이 있는 부부관계를 갖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부부는 서로에게 늘 긴장할 수밖에 없는데, 그들은 그걸 오히려 삶에 활력소로 받아들인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결혼식을 치르지 않고 남녀가 함께 사는 가정의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아이를 낳으면 아이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어머니 성을 따른다. 모계사회의 성격이 강하다.
또한 그들은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자녀양육 휴가제도를 갖고 있다. ‘파파레직(papaledigt)’이 그것이다. 아이를 낳으면 대개 출산 전후에 일정 기간 출산휴가(한국은 60일)를 갖는데,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는 출산휴가 외에 아이가 두 살이 될 때까지 1년의 양육휴가를 별도로 준다. 이 휴가는 유급이며 부모 모두에게 제공된다. 어머니가 갖는 휴가를 흔히 ‘마마레직’이라 하고, 아버지의 휴가를 ‘파파레직’이라 부른다.
이런 휴가 동안 생계에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서 자녀 양육에만 신경쓰게 함으로써 산모의 건강을 도모함은 물론, 생활에 활기를 되찾게 해준다. 이때 아내는 독서를 한다든가 평소 시간을 내지 못해 미뤄뒀던 취미활동을 하며, 남편은 집안일을 거들면서 아내의 그런 활동을 도와준다.
일찍부터 여성할당제를 실시해 여성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온 그곳에선 이미 여성장관과 국회의원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탄생시켰으며, 총리도 여럿 배출했다. 핀란드에선 올해 여성 대통령까지 나왔다.
같은 유럽인데도 대륙의 서쪽 끝을 지키고 있는 포르투갈 여성들은 다른 유럽 국가 여성들과는 달리 매우 동양적이다. 생활력이 강하고 모든 것을 받아들일 것 같은 포용력이 있다. 포르투갈은 유럽문명의 발상지인 ‘갇힌(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세 대륙 사이에) 바다’ 지중해가 아니라 탁 트인 대서양을 끼고 있다. 그곳의 사내들은 민족시인 카몽이스의 서사시 ‘루지아디스’에 나오는 “보라, 유럽의 끝에 포르투갈이 있다. 거기서 대지는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는 구절을 읊조리며 바다로 떠나가곤 했다. 지리상의 발견은 그렇게 해서 이뤄졌다.
포르투갈 여인들의 포용력
남자가 모두 떠나버린 포르투갈 땅에는 홀로 된 여자들만 남았다. 그들은 사내가 돌아올 때까지 모든 고난을 견디며 살아가야 했다. 집안의 생계 역시 그들이 책임졌다.
바다로 떠난 사내들은 항해가 끝났다고 곧장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닻을 내린 곳에서 낯선 여인의 품에 안겨 살림을 차리고 아이도 낳으며 살다가 나이 들어 문득 고향이 생각나고 두고 온 애인이나 아내가 그리워지면 그때서야 돌아온다. 그들은 떠날 때처럼 건강한 몸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손에 무언가 들려 있지도 않았지만, 포르투갈 여인들은 말없이 그들을 맞아주었다.
혹시 20세기 최고의 파도(fado) 가수 아마리오 로드리게스가 한창 때 부른 ‘검은 돛배’란 노래를 들어보았는가. 항구에 나가 연인을 실은 검은 돛배가 이제나 저제나 돌아올까 애타게 기다리는, 한 많은 여인이 부르는 그 애절한 파도의 선율을. 포르투갈 여인들은 가슴에 사무친 한을 흐느끼는 듯한 파도 가락에 띄워 보내며 그렇게 떠나간 사내의 귀향을 기다렸다.
수다스럽고 제스처가 큰 이웃 스페인 여자들과는 달리 얼굴에 감정을 싣지 않는, 그래서 억척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포르투갈 여자들이 파도를 부르며 고향 땅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기에 포르투갈은 해양대국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다와 배에 대해 잘 알고,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어하는 방랑기 많은 포르투갈 남자들의 작품이 아니었다. 그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말없이 기다려주고, 설령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따뜻하게 받아주는 포르투갈 여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동양적’이라는 말을 하고 나니 생각나는 것이 있다. 과테말라의 산 안토니오 마을에서 만난 인디헤나 여인들이다.
영어의 ‘인디언’에 해당하는 스페인어 ‘인디헤나’는 중남미에 사는 원주민을 일컫는데, 과테말라는 전체 인구 중에서 인디헤나가 차지하는 비율이 아주 높다. 인구 950만명 중 70%인 650만명이 인디헤나다.
마야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강한 인디헤나는 언어나 생활습관 등 문화적인 이유 때문에 퀴체, 켁치, 포콘사, 맘 등 여러 종족으로 나눌 수 있다. 인디헤나의 자주와 자존, 독립을 위해 투쟁한 공로로 92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여성지도자 리고베르타 만추는 퀴체 출신이다.
정치권력은 물론 경제권까지 거머쥔 소수의 백인들이, 인디헤나가 조상대대로 갖고 있던 땅을 빼앗고 혹사하자 인디헤나들은 문명의 손길이 닿기 힘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백인들을 물리칠 궁리를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가난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난은 문맹을 불렀고 무지는 다시 빈곤으로 되돌아왔다.
강인한 인디오 여인들
산 안토니오는 18세기 말까지 과테말라의 수도였던 안티과에서 버스로 30분 거리에 있는 인구 1000명 정도의 순수 인디헤나 마을이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던 정류장은 원색의 물결로 일렁거렸다. 인디헤나 여자들과 아이들이 입은 털스웨터 때문이었다.
버스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렸고, 차 안은 발디딜 틈이 없을 뿐 아니라 고개도 가누기 힘들었다. 승객 대부분은 여자들이었는데, 어린이에서부터 처녀, 아주머니,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노소가 다 모여 있었다. 웬만큼 나이 먹은 여자는 모두 아이들과 함께였다. 포대기에 싸 업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이 손을 꼭 쥔 사람도 있었다. 산아제한과 무관한 곳이라 능력이 닿는 데까지 출산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여인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피부는 까무잡잡하지만 곱다. 머리카락은 직모인데 길게 길러 두 가락으로 곱게 땋았다. 깨끗한 눈망울은 물기를 머금고 반짝거려 순박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다.
다른 차는 보이지 않고 자전거만 가끔 지나갔다. 길을 가는 사람은 꼭 무언가를 들고 다녔다. 남자들은 어깨에 올려놓고,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 다녔다. 60년대 우리의 시골을 보는 듯했다. 같은 몽골족 피를 나누어서인지 생긴 모습에서부터 감정 표현방식, 물건을 나르는 동작까지 닮은점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었다.
산 안토니오의 중심 아르마스 광장 한모퉁이 공동 빨래터에선 알록달록한 스웨터 차림의 젊은 여자들이 빨래에 열중해 있었고, 거기에서 멀지 않은 가게에선 주인여자가 색색의 털실로 스웨터며 벽걸이를 짜기에 바빴다. 외국관광객이 다녀가면서 사진을 찍어줬는지 그녀는 예쁜 액자 안에서도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은 어릴 때 고향에서 늘 보던 이웃집 아주머니였다. 동양은 아시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몽골족 후예는 남미 땅에도 살고 있었다. 그 땅의 원주민인 인디오가 그들이다. 이들 역시 인디헤나처럼 식민지배자의 위력에 눌러 주인 노릇을 못 하고 외딴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페루와 에콰도르, 볼리비아에선 그 숫자가 인구의 절반을 넘을 정도로 많다.
재미있는 것은 인디오 사회에선 여자들이 경제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디오 여자들도 인디헤나처럼 머리가 길고 두 가닥으로 땋아 엉덩이에 닿긴 하나 그 외에는 다르다. 인디오는 창이 둥근 모자를 쓴다. 어깨에는 포대기를 둘러 아이든 무엇이든 담아 나르며, 아랫도리엔 발레복처럼 길이는 짧으나 펼쳐놓은 우산처럼 부푼 치마를 입는다.
일도 여자들이 도맡아 한다. 밥 짓고, 빨래하는 일이야 당연한 것이고, 털옷을 짜는 일, 그리고 생계의 근본가 되는 양이나 알파카, 라마 등 가축을 기르는 일과 밭일까지도 여자들의 차지다. 그러니 그들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고 얼굴은 늘 검게 그을어 있다.
농사일을 할 수 없는 도회지의 인디오 여인들은 전통복장 차림으로 알파카나 라마를 끌고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출근한다. 거기서 관광객들에게 풍물사진의 모델이 되어주고 돈을 받는 것이다. 옛 잉카 제국시대의 수도 쿠스코의 대성당 앞이나 저 유명한 12각돌이 있는 하툰투미요크 골목이 바로 그런 곳이다.
이렇게 여자들이 생계를 책임지니 남자들은 하는 일이 없어 빈둥거린다. 그러니 그들은 집안 일에 대해 아무런 결정권도 행사할 수 없다. 돈주머니는 실제로 돈을 버는 안사람이 관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디오 성인 남자의 직업은 대개 ‘남편’일 뿐이다.
인디오 여인들의 강인함에는 내력이 있다. 옛 잉카제국 시대에도 나라를 끝까지 지킨 것은 ‘태양의 처녀’들이었으니까.
인디오 여인에게서 어쩐지 억세다는 인상을 받았다면 인도네시아의 발리 여인들에게선 여성의 부드러움이 어떤 것인지를 엿볼 수 있다. 적도 가까운 발리섬은 ‘인류 최후의 낙원’이라는 찬사에 걸맞게 아름답다. 이곳의 여인 또한 자연 못지않게 아름답다.
또한 그들이 신을 모시는 정성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극진하다. 그들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런 신실함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발리 여성들은 매일 아침과 점심, 저녁, 하루 세 차례씩 신에게 공양을 드린다. 집안의 가족사당에 모신 조상신뿐 아니라 마을의 사당에 모신 힌두신, 도로의 신, 다리의 신, 나무나 돌의 신, 그리고 벼농사의 신 등 온갖 신에게 정성을 드린다.
우붓이라는 발리의 작은 마을을 찾았을 때 나는 이른 새벽의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어 논둑길을 걸었다. 그때 한 젊은 여인이 야자수잎에 밥을 싸서는 논둑에 올려놓고 향을 피우며 절을 올리고 있었다. 그 광경은 그대로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러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약간 수줍은 듯이 맑게 미소지으며 조금전 공양으로 바쳤던 야자수잎에 싼 밥을 내게 건네주었다. 우붓은 외국인이 많이 찾는 관광지인데도 그녀는 그렇듯 풋풋했다.
신의 땅, 발리섬에 춤이 없을 수 없다. 발리춤 중에도 백미는 화려한 복장과 머리장식, 무표정한 얼굴, 도전적인 눈동자, 미묘한 손놀림으로 보는 이를 사로잡는 바롱댄스. 선을 상징하는 바롱과 악의 상징인 장다의 싸움을 그리는 바롱댄스는 주로 나이 어린 무희들이 추는데, 바투불란, 우붓 등 바롱댄스 공연이 펼쳐지는 곳에선 표를 구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룰 만큼 인기다.
그렇다면 대륙의 중국 여자들은 어떨까. 상하이에서 만난 20대 후반의 친샤오옌(秦小燕)이라는 한족(漢族) 처녀는 “어떤 남자가 최고의 신랑감인가”라는 내 질문에 “물같이 부드러운 남자가 일등 신랑감”이라고 답해 놀라게 했다.
예로부터 중국은 강한 유교 전통 때문에 아내는 남편이 축첩을 해도 묵묵히 받아들여야 했고, 족보도 재산상속권도 없었으며, 한때는 전족이라는 것이 있어 함부로 밖에 나다니지도 못하는 등 온갖 서러움을 안고 살아야 했는데, 어느새 남자는 ‘부드러워야 한다’고 강요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녀는 이런 말도 들려줬다.
중국 여성의 힘
“중국에선 돈이 있어야 하고 지위도 높고 학벌도 좋아야 출세를 합니다. 그중 하나만 없어도 힘들죠. 그러나 이런 조건을 다 갖췄다 해도 여자에게 잘 해주지 않는다거나 감정이 메말라 있다면 낙제지요. 여자에게 소리를 지르는 그런 남자는 정말 구제불능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여자에게 선택당하는 것이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의 얘기를 듣다 보면 여성해방은 그 진원지인 서양이 아니라 중국에서 먼저 결실을 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중국에는 6억명의 여성이 살고 있다. 이렇게 많은 중국 여자들은 대부분 일을 해야 한다. ‘일’이란 가사노동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지정해준 직장에서 근무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즘은 사회주의 체제의 위세가 옛날 같지 않아 돈을 벌 목적으로 직장에 나가는 경우가 적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것도 따지고 들면 ‘모든 인민은 노동을 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체제의 기본 전제와 맞닿아 있다. 중국 여성은 국가가 정해준 일터에서 일하면서 경제적으로 독립했고, 그리하여 지금은 남성과 대등한 관계가 된 것이다.
베이징에서 만난 30대 후반의 회사원은 아내가 은행에 다닌다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여성의 지위가 높아진 데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남녀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지침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혁명 열기가 식어버린 지금은 경제적인 이유가 여성들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제 경우를 말해 볼까요? 제가 버는 돈으로는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가끔 전자제품이라도 하나 들여놓으려면 집사람이 함께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 퇴근 후 직장동료들과 어울려 한잔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죠. 직장일이 끝나는 대로 귀가해서 집안 일을 거들어야 하니까요.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아이들도 건사해야 합니다. 아내가 힘드니 어떻게 합니까, 도와줘야죠.”
이런 사정은 그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다. 여행중에 만난 많은 중국 젊은이들도 상황이 비슷했다.
중국 여자들은 정말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베이징에서 가장 길고 넓은 장안로 양쪽으로 난 자전거 전용도로를 헤집고 질주하는 여자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 어린 소녀와 아가씨, 주부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부지런히 페달을 밟아댄다. 자전거를 탄 여성 중엔 바지를 입은 사람도 있고 치마를 입은 사람도 있다. 치렁치렁한 머리도 있고 쇼트커트도 있다. 복장도 가지가지고 스타일 또한 천차만별이지만 그들은 모두 바쁘게 움직인다. 아마도 그것이 오늘의 중국을 움직이게 하는 힘일 것이다.
여성문화를 이야기하면서 화장을 빼놓을 수 없다. 아름다워 보이려고 자신을 가꾸고 치장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자라면 예외가 없었다. 이 분야에선 아프리카 여성들이 선두를 달린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굳이 이집트 박물관의 화장석이나 클레오파트라의 화장술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다. 색색의 물감을 얼굴에 칠하고 팔찌 귀고리 코걸이 등 각종 액세서리를 요란하게 달고 있는 누비아 여인들이나 피라미드로 구경나온 귀부인들의 가녀린 하얀 손등 위에 곱게 그려진 ‘헤나’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것도 모자란다면 유행과 예술의 도시 파리로 가보라. 자기 표현에 과감하다는 파리지엔들이 윗눈썹까지 아이섀도로 진하게 칠하고, 젊은 여자들은 그것도 부족해 머리카락을 여러 가락으로 땋아 쭈삣쭈삣한, 아주 야성적인 헤어스타일을 보여준다. 바로 그것이 ‘아프리카 룩’, 다시 말해서 아프리카 여성들의 패션이고 화장법이다.
화장에 숨은 비밀
아프리카는 유럽의 식민지배를 받긴 했으나 문명에 찌든 대륙이 아니어서 구대륙에 새로운 것을 선사할 수 있다. 그래서 모두가 다투어 아프리카 룩을 받아들인다. 머리에 여러 색으로 물을 들이는 우리의 젊은이들 또한 그런 유행에 이미 감염되고 말았으니 우리 또한 아프리카 룩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나는 현대문명이 아프리카의 것으로 세례받지 않고서는 생명을 유지해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울해하다가도, ‘그래도 아프리카가 있지’ 하며 다시 희망을 찾곤 한다. 아프리카는 그만큼 맑은 샘인 것이다.
그러나 앞에 이야기한 헤나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성행하고 있는 손발 화장술이지만 아프리카가 그 원산지는 아니다. 인도가 고향이다. 인도 여성들은 꽃가루와 나무가루, 그리고 식물성 기름을 한데 섞어 만든 검은색 계통의 안료인 헤나(heana)로 손등과 손바닥, 발등에 식물의 줄기나 잎, 나비 등을 예쁘게 그린다. 헤나는 결혼하기 전 처녀들이 남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하는 것이므로 아름다운 꽃무늬가 주로 선택된다. 그것은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순결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고 처녀라면 누구나 헤나를 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손에 물을 묻히지 않을 정도로 신분이 높고 돈이 많은 집안의 딸이어야만 가능하다. 화장은 이렇듯 신분과 계급을 은근하게 드러낸다. 그것을 일본의 게이샤에게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일본 교토(京都)의 지온지(知恩寺) 부근에는 유곽이 많다. 그래서 화려한 기모노 차림에 하얀 얼굴의 게이샤들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워낙 화장이 진해서 그들의 얼굴에선 표정을 읽을 수 없다. 까다로운 손님들을 접대해야 하는 그들의 직업상, 표정을 숨기기 위해 그렇게 화장을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게이샤 화장이라고 하면 ‘하얀 떡칠’과 무표정한 얼굴이 떠오른다. 그건 곧 게이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혼네(本音·속내)와 다테마에(建前·겉표정)를 달리하는 일본인들의 행동양식이 그 속에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게이샤의 화장술은 그런 일본문화의 진수를 알게 모르게 보여주고 있다.
세상의 절반은 아무래도 여성 몫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