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을 각오로 뭔가 뜻있는 일을 해보자고 결심한 겁니다. 만약 나에게 문제가 있었다면 이제까지 어떻게 버틸 수 있었겠습니까. 벌써 나는 죽었을 겁니다.” 》
─98년 12월 병무비리수사를 위한 군·검합동수사본부 구성에 청와대가 관여했지요?
“내가 한 일은 합수부를 편성하는 것이 좋겠다는 군검찰의 건의를 받아 대통령께 보고 드려 허락을 받아낸 것입니다. 검찰총장한테 국방부에서 이렇게 한다는데 협조해주면 좋겠다고 말해주고, 경찰청장에게는 인력을 검찰 쪽에 지원해주라고 얘기했죠.”
─국방부에서 먼저 안을 올렸다지요?
“그렇죠. 박선기 소장(국방부 법무관리관)과 고석 중령(당시 국방부 검찰부장. 99.12 대령 진급. 현재 3군사령부 법무참모) 두 사람이 찾아와서.”
─병무비리수사과정에 발생한 군검찰 내 갈등에 대해 들은 바 있습니까.
“전혀 몰라요.”
─K씨에 대한 면책약속이 청와대에도 보고됐습니까.
“군검찰쪽 얘기를 들으니 과거에 병무비리로 수감생활했던 사람이 수사를 돕겠다고 찾아왔는데, 그 사람이 병무비리혐의를 찾아내는 데 엄청난 능력이 있어 협조를 받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기무사가 K씨 처벌을 요청한 적 있습니까.
“8월 중순(99년) 기무사 조창현 참모장이 그 문제로 청와대에 찾아온 적 있어요. K가 장난을 치고 다니는 것 같으니 처벌해야 한다고. 검찰에 얘기하니 무혐의라든가 면책이 마땅하다든가, 뭐 그렇게 말했다는 거예요. 또 박선기 소장도 (K의 범죄는) 문제삼을 수 없다고 그랬다는 겁니다. (기무사 참모장이) 내게 자기들이 만든 K의 범죄사실 일람표를 보여주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박소장한테 확인해보니, K에 대한 진정 사건은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됐고, 몇 개 가벼운 병무비리알선사건은 자복하고 수사에 협조했기 때문에 면책을 해야 한다고 그래요. 그 외 범죄사실이 나타나면 처벌하려 하는데 더 드러난 게 없다는 겁니다. 검찰도 그렇게 얘기하고. 그래서 박소장에게 ‘K가 병무비리로 소환된 민간인들에게 선처를 약속하며 돈을 요구한다는 첩보가 있다더라. 이건 문제삼아야 되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9월말까지 병무비리 잔여수사를 해야 하는데 K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그래요. 박소장은 ‘수사가 끝난 다음에 자복한 것 외에 다른 비리가 확인되면 K를 구속하겠다’고 했어요.”
─K씨의 비위 관련 첩보는 결국 기무사쪽에서 들은 것이군요.
“그렇죠. 그때 한 번.”
─K씨가 민간인인데, 기무사가 민간인 구속을 청와대에 요청할 수 있습니까.
“검찰이나 국방부에 얘기해도 처리가 안 되니 첩보보고 차원에서 나한테 얘기한 거지요.”
육군 3군사령부 법무참모인 고석 대령은 병무비리수사와 관련해 기자와 몇 차례 전화통화를 한 후 서면인터뷰에 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것은 국방부 대변인실과도 합의된 사항이었다. 그러나 질의서를 받아본 후 그의 태도는 바뀌었다. 국방부가 갑자기(?) 방침을 바꿔 인터뷰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것은 그가 지난해 병무비리수사 당시 국방부 검찰부장으로서 석연치 않은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참여연대는 이와 관련, 지난해 11월 그를 군검찰에 고발한 바 있다. 물론 고대령은 자신을 둘러싼 의혹에 대해 펄쩍 뛰고 있다.
축소·은폐 의혹
지난 1년여 동안 진행됐던 병무비리수사의 가장 큰 성과는 병역실명제법을 통과시킨 것. 그러나 수사 자체만 놓고 볼 때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1년 동안 수사팀이 네 차례나 바뀐 데서도 알 수 있듯 축소·은폐시비와 외압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대통령 특명사항이기도 한 병무비리수사가 이처럼 흔들린 것은 수사를 둘러싸고 군내 정보기관인 기무사와 수사기관인 군검찰 간에 치열한 물밑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일부 기무요원의 병무비리혐의가 드러나자 부담을 느낀 기무사쪽이 방어에 나서면서 혼란이 빚어진 것. 기무사측은 군검찰이 기무사를 ‘표적수사’한다고 판단, 적극적인 대응에 나섰다. 양측의 공방은 수사팀의 잦은 교체와 맞물려 수사의 본질을 훼손했다. 마침내 기관(기무·헌병)관련혐의를 전담하는 특별수사팀이 만들어지면서 병무비리수사는 급류에 휘말렸다. 병무비리 근절을 위한 군검찰의 수사가 ‘기무와의 전쟁’으로 바뀐 것이다.
기무사와 군검찰의 충돌 못지 않게 병무비리수사를 비틀거리게 만든 것은 군검찰 내부의 갈등과 분열이었다. 고석 대령은 분란 당사자다. 분란의 또다른 당사자는 98년 12월부터 99년 4월까지 진행된 1차 군·검합동수사에서 군수사팀을 이끌었던 이명현 소령. 그해 5월 시작된 2차수사를 주도한 고대령(당시 중령)은 1차수사팀이 수사를 축소했다고 비난했다. 이소령은 이소령대로 국방장관 앞으로 고대령 수사방식의 문제점과 기무사 유착 의혹을 제기하는 편지를 쓰는 등 직속상관인 고대령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드러냈다.
군 안팎에선 지난 2월 군·검합동수사반이 구성되는 계기가 된 ‘반부패국민연대 명단파동’도 이러한 군내 갈등의 부산물로 보는 시각이 유력하다. 군검찰과 기무사의 대립, 수사팀 내부의 불화에 정치권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촉발된 사건이라는 것. YMCA 흥사단 등 800여 개 단체로 구성된 반부패국민연대는 지난 1월19일 기자회견을 통해 이른바 병무비리 혐의가 있는 사회지도층 명단과 수사자료를 제보 받았다고 밝혔다. 이 자료들은 1월24일 청와대를 거쳐 검찰로 넘겨졌다.
애초 제보자로 의심받은 사람은 K씨(40)였다. 지난해 1차수사 당시 민간인 신분으로 군검찰팀에 합류한 K씨는 지난 1년 동안 진행된 병무비리수사에 핵심이 됐던 인물. 그는 수사를 둘러싼 군내 갈등의 한가운데 서 있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군검찰 내의 불화나 군검찰과 기무사의 충돌은 하나같이 그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이다. 그를 보호하려는 쪽과 제거하려는 쪽의 전쟁은 병무비리수사의 모양새를 망가뜨렸고 수사력을 낭비하게 만들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전쟁에서 ‘살아남은’ K씨가 현재 진행중인 군·검합동수사에서 군검찰쪽 정보원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점이다. ‘K의 전쟁’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문제의 ‘반부패국민연대 자료’는 지난해 3월 1차수사 당시 팀장이었던 이명현 소령과 K씨가 함께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이소령은 지난해 7월 미국 유학길에 올랐으며 지금도 그곳에 체류하고 있다. K씨는 자신이 그 자료를 작성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유출 및 제보 혐의에 대해선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이는 이소령도 마찬가지.
두 사람은 자료 유출자로 ‘제3자’를 유력한 용의자로 꼽고 있다. 군검찰 주변에 따르면 반부패국민연대로 넘어간 수사자료는 ‘원본’과 거의 똑같다고 한다. 다만 정치인 명단의 경우 누군가의 ‘손질’이 가해져 몇 명이 빠지는 대신 그보다 많은 수의 정치인이 새로 들어가 전체적으로는 대상자수가 늘어나는 변동이 생겼다는 것.
문제의 K씨에겐 ‘사기꾼’ ‘파렴치범’이라는 비난과 더불어 ‘병무비리수사의 1등공신’이라는 찬사가 따라다닌다. 민간인인 그가 왜 병무비리 수사에 뛰어들어 군조직을 뒤흔들어놓은 걸까. 기무사 장성은 왜 청와대까지 찾아가 그의 구속을 요청했을까. 또 군검찰이 분란의 주인공인 그를 다시 병무비리수사에 합류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K의 전쟁’의 내막을 알면 병무비리수사의 과거와 현재가 보인다. 그의 수사참여 자격에 대한 논란을 떠나 그는 분명 과거 병무비리수사의 숨은 주역이었고 현재 진행되는 병무비리수사에서도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는 것이다.
‘K의 전쟁’
지난 1년 동안 병무비리수사를 주도한 것은 군검찰이었다. 98년 12월 제1차 군·검합동수사본부가 출범한 이래 군검찰의 수사는 모두 네 단계에 걸쳐 진행됐다. 이를 순서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차수사팀을 이끈 것은 국방부 검찰부의 이명현 소령. 98년 12월∼99년 4월까지 맡았다. 1차수사 후 합동수사본부는 사실상 해체됐다. 서울지검 수사팀이 원대복귀했기 때문. 그에 따라 2차수사팀은 군검찰만으로 구성됐다. 99년 5월부터 약 2개월 동안 진행된 2차수사는 고석 검찰부장이 주도했다.
그해 7월 구성된 3차수사팀은 1, 2차 수사 때와는 달리 기무·헌병 관련 부분만 수사했다. 2차수사 후 기관요원들의 수사방해 의혹이 제기된 데 따른 것이다. 그런 까닭에 1차 특별수사팀으로도 불린다. 팀장은 김의형 소령. 이 팀은 기무사 장성의 병무비리 연루의혹을 조사하는 등 강한 의욕을 보였으나 2개월만에 해체됐다. 4차수사팀이자 2차특별수사팀이 구성된 것은 10월 중순. 조동양 중령이 팀장을 맡았다. 이 팀에 맡겨진 일은 1차특별수사팀 해체 후 군 안팎에서 제기된 축소수사 의혹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네 차례에 걸친 수사 중 가장 큰 성과를 낸 팀은 1차팀. 모두 137건의 면제비리를 적발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2차팀은 면제비리 외 의병전역과 공익요원 판정비리를 적발했으나 1차팀처럼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3차팀이 실제 수사한 기간은 한 달 정도. 기무·헌병 관련 비리를 파헤쳤으나 워낙 수사기간이 짧았던 탓인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3차팀의 전격 해체는 외압 의혹을 낳았다. 그에 따라 4차팀이 만들어졌다. 4차팀은 기무·헌병 고위간부 24명의 병무비리 의혹을 수사했다. 그 결과 모두 10명을 적발, 기무사 중령과 헌병대 상사 등 2명을 구속하고 비교적 혐의가 가벼운 8명을 징계 처리했다.
한편 국방부 감사관실은 기무사의 수사방해 혐의와 수사 축소·은폐 의혹, 그리고 일부 군검찰 관계자의 수사기밀 유출혐의에 대해 한달에 걸쳐 감사했다. 감사 결과의 핵심은 기무사의 수사방해와 축소·은폐 의혹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 수사기밀 유출혐의와 관련해선 고석 대령, 이명현 소령, 김의형 소령 등 수사팀을 이끌었던 검찰관 3명에 대한 징계를 결정했다. 아울러 군검찰의 최고위직인 박선기 법무관리관(소장)도 지휘책임을 물어 징계 대상에 올렸다. 반면 기무사에는 기무사 감찰실 장교 2명을 징계하라고 요구했다. ‘수사방해라는 오해의 빌미를 줬다’는 이유에서였다.
국방부 감사결과는 책임은 묻되 구체적 혐의는 인정하지 않는 두루뭉실한 것이었다. 2차 특별수사팀의 수사결과가 나온 후 전면 재수사를 촉구했던 참여연대는 국방부 감사결과를 ‘축소·은폐감사’로 규정하고 ‘기무사 면죄부 주기’라며 강력히 비판했다(‘개혁 통신’ 99.12.30). 대통령 특명사항으로 ‘성역 없는 수사’의 기치를 내걸었던 병무비리수사는 이처럼 개운찮은 뒷맛을 남긴 채 막을 내렸다.
네 차례의 수사 중 K씨가 직접 참여한 것은 1차와 3차수사였다. 1차수사팀장이었던 이명현 소령과 자신이 2차수사팀에서 배제된 것을 특정 세력의 ‘공작’ 탓으로 여긴 그는 한때 양심선언을 준비하기도 했다. 또한 기무사 관련 혐의를 추적하던 3차수사팀이 ‘갑작스레’ 해체되자 일부 언론에 병무비리수사 과정의 문제점을 제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기무사의 추적을 받던 99년 8월엔 참여연대에 신변보호를 요청하기도 했다.
운명적인 만남
98년 7월9일. 국방부 검찰부 수석검찰관인 이명현 소령은 대구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경상도 억양의 상대방은 자신의 전과사실부터 털어놓았다. 협박죄로 1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이틀 전 출소했다면서 병무비리수사를 돕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자신이 군복무 시절 병무비리에 관여한 적이 있어 전국적인 병무비리 커넥션을 잘 안다는 것이었다.
당시 국방부 검찰부는 원용수 준위(국방부 인사참모부 소속 병무청 모병연락관) 구속을 계기로 병무비리수사를 벌이다 ‘병무비리의 대부’라는 박노항 원사의 도피와 수사력의 한계로 더 이상 수사를 진척시키지 못하던 상태였다. 수사팀장이었던 이명현 소령은 당시 상황에 대해 99년 7월 국방부장관에게 보낸 편지(‘병무비리수사 전반에 대한 보고’)에서 “‘원준위 사건’으로 대규모의 병무인사 비리를 적발할 수 있었으나 검찰관으로서 수사기법이나 전문 의학지식 부족의 한계로 신검관련 비리를 심도 있게 밝히지 못한 아쉬움을 절실하게 느꼈다”고 고백했었다.
사정이 그랬던지라 이소령은 경상도 사내의 ‘엉뚱한’ 제의에 귀가 솔깃해졌다. 그는 얘기 끄트머리에 이소령에게 “이 수사를 제대로 하려면 엄청난 압력을 받을 텐데 정말 끝까지 수사할 용기와 의지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소령이 “끝까지 가겠다”고 하자 그는 “만나자”고 했다. 뒷날 건국 이래 최대의 병무비리수사를 주도하며 군 안팎에 파란을 일으킨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은 이렇게 이뤄졌다. 이것이 ‘K의 전쟁’의 시작이다.
두 사람은 다음날 오후 1시 서울 C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재미있는 것은 이날 K씨의 부인이 함께 나타났다는 점이다. 출감하자마자 갑자기 병무비리를 수사하러 떠난다는 남편의 말이 믿기지 않아 따라왔다고 했다. 이소령은 K씨 부부를 국방부 검찰부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K씨의 부인은 남편 얘기가 거짓이 아님을 확인하고 먼저 대구로 내려갔다. 이소령은 K씨를 직속상관인 고석 검찰부장에게 인사시킨 후 CCTV가 설치된 조사실로 데려갔다.
이날 K씨는 몇 시간에 걸쳐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은 한편 자신이 알고 있는 병무비리 커넥션에 대해 설명했다. 그동안 조사실 밖에선 K씨에 대한 신원조회가 진행됐다. K씨의 신분과 전력은 그가 밝힌 대로였다. K씨는 이날 자신이 과거 관련했던 4∼5건의 병무비리도 털어놓았다. 이소령에 따르면 그가 관련된 병무비리사건들은 대부분 공소시효가 지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중엔 법적으로 문제삼을 만한 것도 있었다. 군검찰 지휘부는 수사협조 대가로 K씨에게는 면책을 약속했다. 이는 나중에 군검찰팀 내부 갈등의 한 원인이 됐다.
K씨와 이명현 소령의 만남은 꺼져가던 병무비리수사의 불꽃을 되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소령의 고백대로 초보 수준에 지나지 않던 군검찰의 병무비리수사가 병무행정에 정통하고 의학지식이 풍부한 ‘전문가’를 영입함으로써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K씨는 서울시내 C호텔에 묵으면서 이소령이 가져다주는 각종 자료를 토대로 기초수사자료를 만들어 나갔다. 이소령은 당시 K씨가 밤새 일하는 모습을 보며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뒷날 국방부장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K씨를 ‘이 땅의 병무비리 근절에 온몸을 내던진 사람’으로 표현했다.
한편 이소령은 K씨와 함께 넉 달 동안 자료분석을 하고 신검판정과 관련한 의학상식을 공부하면서 효과적인 수사기법을 터득했다. 고석 검찰부장은 박선기 법무관리관과 함께 박주선 당시 청와대법무비서관에게 ‘원준위 사건’ 수사에 이은 후속 병무비리수사계획을 보고하며 군·검합동수사본부 설치를 건의했다. 이소령에 따르면 이 청와대 보고서의 1차 작성자는 K씨였다. 그해 12월 제1차 군·검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되기 전까지 K씨와 이소령이 넉 달 동안 작성한 수사대상자료는 400여건에 이르렀다. 그후 1년 동안 진행된 병무비리수사는 이 자료들을 토대로 이뤄진 것이다.
그렇다면 K씨는 어떤 경위로 병무비리수사의 전문가가 됐을까. 병무비리는 대개 청탁자(본인 또는 부모)─알선자(브로커)─해결사(군의관)라는 3단계를 거쳐 이뤄진다. 병무비리를 제대로 밝히려면 무엇보다 군의관의 자백을 받아내야 한다. 군의관이 부정면제의 최종 관문이기 때문이다. 이전까지의 병무비리수사가 초보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군의관을 다그칠 만한 의학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의학전문용어를 모르니 신검관련서류를 판독하기도 어려웠고 뭘 어떻게 물어야 할지도 몰랐던 것. 그런데 K씨가 참여하면서 군의관들의 ‘철벽수비’가 흔들렸다.
한 군의관의 증언.
“수사관이 돈 받은 의혹을 제기하며 허위판정 아니냐고 아무리 다그쳐도 군의관이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죠. 그런데 K씨는 의학지식이 풍부했어요. 또 병무에 밝아 면제 판정이 나기까지의 과정과 절차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 앞에선 거짓말을 하기 힘들어 당황했죠.”
K씨가 이처럼 의학지식에 해박한 것은 군복무 시절의 경험 덕분이다. 의정하사관으로 입대한 그는 약 4년반 동안 의무행정 업무를 봤고 군의관들 덕분(?)에 의학까지 공부했다고 한다. “내가 많이 아는 이유가 있어요. 군에 있을 때 군의관들이 하사관들을 굉장히 무시하더라구요. 자존심이 상했죠. 그래서 업무로 그들을 이겨야겠다는 생각에 나름대로 의학을 공부했어요.” 게다가 국군대구병원 근무 당시 병무비리에 연루돼 구속된 적이 있어 병무비리 커넥션에 훤하다. 그 사건으로 그는 이등병으로 강등, 강제전역 조치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K씨는 제대 후 한때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S병원 운영에 관여했다. 당시 의사 면허는 없었지만 간단한 수술 정도는 했다고 한다. S병원에 확인한 결과 K씨가 90년대 초 이 병원과 인연을 맺은 것은 사실로 드러났다.
군·검합수부팀은 서울 후암동에 있는 옛 병무청 건물에 수사본부를 차렸다. 1차 수사대상은 서울 지역의 군면제자들이었다. 서울병무청과 국군수도병원에서 트럭으로 나른 약 5만 건의 병적카드 진료기록 등이 강당을 가득 메웠다. 그중에서 ‘냄새가 나는’ 자료들을 뽑아내는 작업은 K씨 몫이었다.
99년 1월12일 새벽. 그동안 부인으로 일관하던 군의관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수사팀이 면책을 약속한데다 K씨를 앞세운 수사팀의 날카로운 추궁에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날 하루에 자백한 병무비리만 150여건에 이르렀다. 합수부에 파견된 서울지검팀의 수사도 이때부터 활기를 띠었다. 군검찰이 군의관들의 진술서와 병적카드 진단서 등을 서울지검 수사팀에 넘기면 서울지검 수사팀은 그에 관련된 민간인들을 불러 조사했다.
수사에 참여했던 한 검찰관은 K씨의 능력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사건을 찾아내는 데 비상한 재주가 있어요. 군의관들은 (면제)판정만 했을 뿐이지 행정이나 서류에 대해선 몰라요. 기억이 정확지 않으니 대충 몇 년 몇 월 경 누구에게 청탁 받아 부정면제판정을 한 것 같다고 진술해요. 그 정도만 얘기하면 K씨가 귀신같이 찾아내요. 병무청에서 보내준 5만 건의 자료는 뒤죽박죽 돼 있었어요. 일부러 막 흩뜨려 놓은 거죠. 찾다가 지치게. 옛날부터 쓰던 수법이죠. 그런데 K씨는 찾아내요.”
C호텔에 머물고 있던 K씨는 수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군검찰팀과 합숙하다시피 했다. 각 조사실을 돌아다니며 신문방법을 조언해주거나 수사관들에게 받은 비리 관련자들의 진술내용을 분석해 다시 수사관들에게 넘겼다. K씨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에게 ‘족집게’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딱 보면 표가 나요”
─군의관들이 청탁자나 면제자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기는 힘들지 않습니까.
“이름과 시기를 정확히 기억한다는 건 무리지요. 하지만 상황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어요. 기억을 잘 못하면 내가 비슷한 시기의 관련 자료들을 뽑아다 군의관 앞에 늘어놓고 하나하나 물어보며 기억을 되살리게 해요. 브로커 노릇을 하는 사람은 대개 평소 안면 있는 사람이고, 또 같은 사람에게 한두 번 부탁 받은 게 아니니까. 만약 한두 달 범위에서 못 찾으면 1년치를 다 갖다 보여주는 겁니다. 군의관들의 기억을 자꾸 되살려 면제비리 관련자들의 이름을 끄집어내는 게 내 일이었습니다.”
─진단서를 보고 부정면제라는 걸 어떻게 알아냅니까.
“딱 보면 표가 나요. 병무비리를 파악하려면 의학상식 신검규정 병무행정 등 16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5급 판정을 받은 사람은 정상인 생활이 힘든, 한마디로 병신이라는 얘기예요. 만약 신검 당시 진짜 문제가 있었다면 신검에서 빠지는 게 자연스럽죠. 치료가 급하지 판정은 나중 일이거든요. 그런데 입영일 일주일을 남기고 억지로 재검 신청을 해요. 누군가 방법을 일러줬다는 얘기지요. 병적카드에 기록된 발병일 신검일 병명 발병부위 등을 비교해 보면 표가 납니다.”
─만약 청탁자가 군의관에게 돈 준 일 없다고 잡아떼면 어떻게 밝혀냅니까.
“병무비리는 본인, 보호자 또는 부모, 알선자, 군의관 등 한 건에 보통 네댓 명이 관련돼 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이 아무리 입을 맞춰도 군의관이 불어버리면 소용없어요. 본인과 보호자는 돈만 줬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면제가 됐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심지어 병명도 몰라요. 자신이 어디가 아파 면제가 됐는지. 진짜 아팠다면 그후 치료를 해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러면 병원 다닌 기록이 있어야죠. 현재의 몸상태와 비교하면 빈틈이 보여요. 관련자들에게 수사관들이 따로따로 붙어 동시에 조사하면 말이 다 달라요. 군의관은 허위로 면제판정을 해줬다는데 보호자가 돈 준 사실 없다고 하면, 안 되는 걸 되게 했으니 군의관만 나쁜 놈 되거든요. 그럼 군의관이 가만히 안 있죠. 결국 무너지게 돼 있어요. 수사관이 조사할 때 내가 옆에 앉아 들어보면 다 알죠.”
그 무렵 군의관들 입에선 기관요원 관련 진술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자 기무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99년 2월 들어서는 고석 검찰부장이 자신이 수사팀을 이끌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이를 계기로 군검찰팀 내 불화가 빚어졌다. 수사팀장인 이명현 소령은 수사기밀이 밖으로 새나가는 데 대해 고부장을 의심했다. 고부장이 기무사와 가깝다고 판단했던 것. 그래서 기무요원들이 관련된 사건에 대해선 일절 보고하지 않았다. 이에 고부장은 이소령이 자신에게 수사내용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는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3월20일경 이명현 소령은 박선기 법무관리관 방으로 불려갔다. 박법무관리관에 따르면 고부장이 자신이 수사팀에서 배제된 데 대해 강하게 항의했다는 것. 결국 그 사건 후 고부장은 공식적으로 수사팀을 지휘했다. 그러나 이소령과 K씨는 그를 따르지 않았다.
양측의 갈등은 날로 깊어졌다. 1차 수사결과 발표 이틀 후인 4월29일. 마침내 터질 것이 터졌다. 그날은 이명현 소령이 박법무관리관의 지시로 모든 수사자료를 고부장팀, 곧 2차수사팀에 넘겨준 날이기도 했다. 고부장과 K씨는 욕설에 멱살잡이까지 벌였다. K씨가 그토록 화를 낸 것은 고부장이 군의관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드러낸 것을 알았기 때문.
K씨로서는 흥분할 만한 일이었다. 애초 군검찰은 그를 수사팀에 합류시킬 때 그의 신분과 전력을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정보원 보호라는, 수사의 기본사항이기도 했다. ‘신동아’가 확보한 군의관들 진술에 따르면 당시 K씨의 과거를 알게 된 군의관들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2차수사결과 발표가 끝난 직후인 99년 7월 중순. 당시 김인종 국방부 정책보좌관(현재 2군사령관. 대장)은 수사본부에 찾아와 고부장, 이소령, K씨 등을 한자리에 불러놓고 고부장과 기무사의 관계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그 자리에서 김인종 정책보좌관은 고부장이 K씨의 신분을 드러낸 사실을 한 군의관의 증언으로 확인됐다.
기무요원들의 추적
한편 군의관 면책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열심히 수사에 협조한 군의관들은 구속되고 끝까지 버틴 군의관들은 살아남는 모순이 생겼다. 그후 군의관들은 입을 닫아버렸다. 그에 따라 군의관 자백을 토대로 상당한 성과를 올리던 병무비리수사는 큰 차질을 빚게 됐다. 이에 대해 1차수사팀 관계자들은 군검찰의 방침을 못마땅히 여긴 특정 세력이 언론플레이를 하고 청와대에도 그런 내용을 보고한 것으로 믿고 있다.
군의관 면책과 관련, 이명현 1차수사팀장은 2차수사결과 발표 직후인 99년 7월11일 국방부장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병무비리사건의 특성상 어느 일방의 적극적인 협조 없이는 침묵의 연결고리를 끊을 수 없으며, 병무비리는 면제자 쪽에 대한 비난 가능성이 더 크다는 전제하에 국방장관님, 서울지검과 협의를 통해 군의관을 면책한다는 조건하에 자백을 받아…”라고 밝힌 바 있다. 이소령은 또 이 편지를 통해 고부장의 기무 관련 수사 축소·은폐 의혹을 진정했다. 1차수사팀의 강력한 문제 제기에 국방부는 7월19일 기관(기무·헌병) 관련 병무비리 특별수사팀을 만들었다. 고부장은 배제됐고 대신 2차수사 당시 비켜서 있던 K씨가 다시 합류했다.
K씨에 대한 기무요원들의 직접 공격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기무요원들은 먼저 K씨의 병무비리 전력을 파고들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K씨는 98년 7월 국방부 검찰부에 찾아갔을 때 자신이 관련된 몇 건의 병무비리를 자백한 바 있다. 그중 기무사의 추적대상이 된 것은 자민련 고위간부 L씨 아들의 면제비리였다. 이는 K씨가 관련된 병무비리사건 중 가장 최근의 것으로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아 문제를 삼을 만한 것이었다.
99년 7월19일. 기무부대 수사관 L씨와 군무원 H씨가 경기병무청과 서울병무청에 찾아가 자민련 간부 L씨 아들의 병적기록표 등 관련자료를 요구했다. 병무청 담당자의 협조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이들은 7월20일 서울병무청에 다시 들러 원하던 자료를 복사했다.
또 일부 기무요원은 병무비리와 관련해 군검찰의 조사를 받은 군의관들을 찾아다니며 K씨의 전과사실을 공개하는 한편 그의 비위사실을 캐내려 했다. 7월23일. 기무사 수사관 H씨를 비롯한 기무요원 3명이 모 지역병원 한 군의관을 찾아갔다. 그들은 군의관에게 K씨 관련 사항을 질의했다. ▲조사 당시 K씨로부터 가혹행위를 당한 적 없느냐 ▲K씨와 검찰관들이 기무사 부분을 의도적으로 집중수사하지 않았냐 ▲K씨가 소환자들에게 면책 약속을 내걸고 금품을 요구하지 않았냐 등 10여 개의 질문이었다.
대부분의 질의에 대해 군의관이 “그런 적 없다”고 부인하자 이번엔 K씨 처벌을 요구하는 진정서 작성을 종용하기도 했다.
8월 초순. 박노항과의 친분 탓에 기무사의 추적을 받던 의정장교 출신 예비역 중령 P씨가 체포됐다. P씨는 K씨의 병무비리, 곧 자민련 고위당직자 L씨 아들의 병역면제와 관련된 사람이었다. K씨는 96년에 P씨에게 L씨 아들의 병역면제를 부탁해 성사시킨 바 있다. 경기도 가평에서 체포된 P씨는 서울지검으로 인계됐다.
기무사 서열2위인 조창현 참모장(2000.1 전역)이 당시 청와대 법무비서관 박주선씨에게 찾아가 K씨 처벌을 요구한 것은 그 직후인 8월 중순이었다. 그러나 글머리에 소개한 대로 박법무비서관은 박선기 국방부 법무관리관과 검찰(민간)쪽에 K씨에 대한 면책사실을 확인한 후 조참모장의 요청을 거절했다. 조참모장이 청와대에 찾아가 설명한 K씨의 ‘비위사실’은 기무사 수사관들이 군의관들에게 시인을 강요했던 내용과 같은 것이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당시 조참모장이 전직 기무사 장성 P소장(모 정보부대 지휘관)과 더불어 병무비리 수사대상에 올라 있었다는 점이다. 국군부산병원 소속 기무사 4급 군무원 K씨가 두 사람의 병무비리 연루 혐의를 털어놓았던 것. K씨와 특별수사팀 관계자는 기무요원 K씨의 자백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기초조사를 토대로 9월 중순 부산지역 기무부대장 J대령을 소환조사했다. J대령은 전직 기무사 장성인 P소장의 병무비리 관련 혐의를 자백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기무사 전·현직 장성 2명의 병무비리 혐의는 뒤에 2차특별수사팀에 의해 벗겨졌다. 수사결과에 따르면 P소장은 병무비리에 직접 관련된 사실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의병전역 대가로 뇌물을 받은 혐의를 받았던 조참모장의 경우엔 의병전역 당사자가 만기전역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99년 10월10일 “기무사 현역 장성 3명이 병역비리에 연루됐다”고 보도했던 서울방송은 기무사 장성 5명에 의해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했다. 이들 5명은 정정보도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제기한 상태. 이와 관련, 서울방송의 변호인측은 “일부 표현에 문제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취재원 보호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99년 9월에 들어서도 일부 기무요원의 ‘K씨 추적’은 계속됐다. 9월3일 기무사 수사관 2명이 모지역 군의관에게 예비역 중령 P씨의 또다른 면제비리 의혹을 추궁, 진술서를 받아갔다. 이는 물론 K씨의 여죄를 캐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성사되진 않았지만, K씨가 과거 P씨를 통해 그 군의관에게 B씨의 병역면제를 청탁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무사는 왜 이토록 K씨 제거에 집착했는가. 그 배경엔 군검찰과 기무사의 힘겨루기가 있다. 기무사는 군검찰이 기무사를 ‘표적수사’하고 있다고 판단했으며 K씨를 ‘기무 죽이기’의 주역으로 여겼다. ‘신동아’가 확보한 관련 증거들에 따르면 기무사는 K씨를 파렴치범으로 보고 수사팀에서 배제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표적수사’냐 아니냐
기무사의 논리가 얼토당토않은 것만은 아니다. 병무비리 전과자에게 면책을 조건으로 병무비리수사를 맡기는 것은 수사의 정당성과 공정성을 해칠 우려가 크다는 기무사의 주장은 2차 수사팀장 고석 대령의 시각과 일치한다. 기무사가 문제를 삼는 K씨의 전과는 대부분 98년 7월 K씨가 군검찰에 수사협조를 자원하면서 자백했던 내용이다(상자 기사 참조).
군검찰은 K씨가 털어놓은 몇 건의 병무비리에 대해 면책을 약속했다. 당시 국방부 검찰부의 수석검찰관이었던 이명현 소령은 “K씨에 대한 면책약속은 국방부장관에까지 보고가 됐으며 98년 12월 박선기 법무관리관과 함께 청와대에 찾아갔을 때 박주선 당시 법무비서관에게도 보고했다”고 증언했다. ‘신동아’가 간접적으로 확인한 박법무관리관의 증언도 이와 다르지 않다. K씨에 대해 적대적인 고석 대령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K씨는 기무사의 ‘뒷조사’에 대해 ‘민간인 사찰’이라고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2차수사 당시 고석 검찰부장 또한 기무사와 마찬가지로 K씨의 병무비리 전과를 추적했다는 사실이다. 고부장은 99년 7월7일 인천·경기지방병무청장에게 이와 관련한 협조공문을 보냈다. K씨가 면제청탁을 알선했던 자민련 고위당직자 L씨 아들의 병적기록표을 보내 달라는 요청이었다. 7월19일∼20일 기무요원들이 경기병무청과 서울병무청에 찾아가 확보하려 했던 바로 그 서류다.
기무사의 ‘표적수사’ 주장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을까. 기무사 감찰실·공보실 관계자들은 “군검찰이 기무요원들을 집중 수사한 데는 기무사에 대한 보복심리가 깔려 있다”고 설명했다. 이들에 따르면 98년 12월 제1차 병무비리수사팀이 발족하기 전 기무사는 법무·군종·의정·의무병과 등 이른바 특과장교들의 근무태도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국방부장관에게 보고한 일이 있다고 한다. 이 보고서엔 ‘출근시간이 늦다’ ‘근무시간에 골프 치러 다닌다’ 등 특과장교들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는 것. 이 보고서 탓에 상부로부터 질책을 당한 법무장교들이 ‘기무를 죽여야 한다’고 결의했고 그것이 병무비리수사에 반영돼 기무사에 대한 ‘표적수사’로 나타났다는 게 기무사측 주장.
이에 대해 군검찰의 한 관계자는 “수사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기무사의 보고서가 있었던 건 맞아요. 하지만 보고서 작성 시기가 달라요. 제가 기억하기론 99년 2월1일로 병무비리수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박선기 법무관리관이 사전에 이를 알고 대응하는 바람에 당시엔 장관에게 보고하지 못했고, 5월15일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육군 법무관들은 작살났어요. 그래서 법무병과 장교들은 ‘왜 병무비리수사를 시작해 이렇게 골치 아프게 만드냐’고 수사에 참여한 검찰관들을 원망했어요.”
기무사가 ‘표적수사’의 유력한 근거로 꼽는 또 하나는 바로 K씨의 수사참여. 기무사는 K씨가 불순한 의도를 갖고 수사에 참여했다고 보고 있다. K씨는 군복무 시절(국군대구병원) 병무비리사건에 연루돼 실형을 선고받고 강제전역조치됐다. 기무사에 따르면 당시 대구병무청에 근무하던 기무사 5급 군무원 L씨가 K씨의 공문서위조를 적발했으며 이것이 강제전역 조치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기무사가 ‘보복’ 의혹을 거론하는 근거는 L씨가 99년 5월 병무비리로 구속됐다는 점이다. L씨를 구속한 것은 2차수사팀이지만 실제로 L씨의 혐의를 추적해 확인한 것은 K씨가 참여했던 1차수사팀이었다. 기무사는 이를 두고 K씨가 L씨에게 보복하기 위해 수사팀에 참여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기무요원들에 대한 ‘표적수사’로 이어졌다는 것. 기무사 관계자에 따르면 기무사가 이같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99년 6월 L씨를 면회했던 L씨의 형을 통해서라고 한다. 당시 L씨는 “병무비리를 저질렀던 놈이 병무비리수사를 하고 있다”며 흥분했다는 것이다.
병무비리 뿌리뽑는 마지막 기회
그러나 군검찰쪽 주장은 다르다. 1차수사팀장 이명현 소령에 따르면 기무사 군무원 L씨에 대한 추적은 99년 1월 청와대 사정팀이 수사팀에 내려보낸 진정서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K씨는 “당시 L씨와 알고 지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내 사건과 그는 아무 관련 없다”고 주장한다. K씨에 따르면 L씨는 당시 병원 담당이 아니어서 자신의 병무비리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 K씨는 또 “L씨를 만난 지 10여 년이 됐다. 설사 감정이 있다 쳐도 민간인인 내가 군에 있는 그에게 복수하겠다고 병무비리수사팀에 합류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냐”고 반문했다.
기무사 관계자들은 또 “교도소에서 병무비리수사가 진행되는 사실을 안 K씨가 출소 후 자신이 저지른 병무비리사건이 드러나 처벌당할까봐 ‘수사 협조’를 내세워 면책약속을 받아냈다”고 주장했다. K씨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자신의 전과와 비리를 밝히면서까지 수사에 참여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98년 6월초였을 겁니다. 교도소에서 우연히 신문을 보다 병무비리수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처음엔 저러다 말겠지 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박노항 이름이 떡 나오더라구요. 그럼 이건 장난이 아니거든요. 나도 군에 있을 때 박노항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거든요. 병무비리 세계에서 그는 한마디로 대부예요. 장군·장관도 함부로 못 건드릴 정도의 거물이에요. 정·재계 고위공직자의 약점을 다 알고 있다고 봐야 해요. 그가 처리한 게 그만큼 많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좋은 자리를 10년 이상 꿰차고 앉는 일이 가능하겠어요(헌병은 병무비리를 감시하기 위해 지방병무청과 국군병원 등에 분실을 설치해 운영한다. 그중 가장 큰 곳이 서울병무청분실인데 박원사는 그곳 책임자였다). 박노항은 무소불위의 존재예요. 그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알리고 수배까지 해놓은 점으로 미뤄 수사팀의 의지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그래서 찾아간 겁니다. 과거의 잘못된 삶을 청산하고 뜻 있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제가 해볼 만한 일이 나타난 거지요. 국방부에 들어가기 전 전화통화에서 이수석(이명현 소령)과 사나이 대 사나이로 맹세했어요. ‘이 수사하려면 목숨 걸어야 한다, 끝까지 가야 한다’고.”
─기무사쪽에선 자신이 저지른 병무비리를 덮기 위해 의도적으로 수사팀에 접근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는데요.
“아내와 모친이 다 말렸어요. 미친 짓이라고. 교도소에서 나오자마자 왜 고생을 사서 하냐고. 그렇지만 그것은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어요. 수감생활은 과거의 삶을 반성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지방신문에 내 사건이 났는데 딸이 그걸 보고 충격 받아 가출했어요. 감방에서 그 소식을 듣고 몇 차례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자식에게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게 너무 괴로웠습니다. 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오지 않아요. 그래서 다시 아버지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면 뭐든지 하겠다, 죽을 각오로 뭔가 뜻 있는 일을 해보자고 결심한 겁니다. 만약 기무쪽 주장대로 내가 문제가 있다면 이제까지 어떻게 버틸 수 있었겠습니까. 벌써 나는 죽었을 겁니다.
내가 처음 군검찰을 찾아갔을 때 그때까지 내 이름 석자를 누가 알기라도 했습니까. 당시 수사는 중단된 상태였어요. 내가 먼저 얘기 안 했으면 나에 대한 어떤 것도 드러나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수사에 참여하면서 국방부에서 한 푼도 받은 게 없습니다. 호텔 숙박비를 비롯해 모든 비용을 스스로 부담했어요. 내가 자비를 들이면서까지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돈보다 중요한 건 자식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명예입니다. 자식 앞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 면책도 내가 먼저 요구한 게 아닙니다. 군검찰에서 알아서 상부에 보고한 겁니다.”
K씨는 기무사의 ‘표적수사’ 주장에 대해 “병무비리의 커넥션을 알면 그런 얘기를 못한다”고 주장했다.
“병무비리가 저질러지는 곳은 각 지역의 군병원입니다. 그런데 모든 군병원엔 기무요원들이 파견돼 있어요. 군의관에게 직접 병무비리를 청탁하는 경우는 드물죠. 기무요원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는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기무의 임무가 뭡니까. 첩보수집, 정보활동 아닙니까. 건국 이래 50년 동안 계속돼온 병무비리를 기무가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처음부터 기무를 표적으로 삼은 게 아니라 수사를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리 된 것입니다.”
그러나 기무사는 “일부 기무요원의 개인 비리를 두고 기무사 전체가 병무비리에 관련된 것처럼 보는 것은 곤란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군검찰의 한 관계자도 “비리에 관련된 일부 기무 요원들이 움직인 것이지 기무사 전체 조직이 움직인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기무사 감찰실의 한 관계자는 “군검찰이 기무부대를 압수수색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라며 기무사의 ‘상처받은 자존심’에 대한 이해를 구했다. “국방부 감사관실의 감사를 한 달 이상 받는 수모를 당했다”고도 말했다. 군정보기관으로 수십 년 동안 군내 최대의 파워기관으로 군림해온 점을 감안하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러나 ‘방어’를 넘어 ‘공격’의 양상을 띤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1차수사팀은 99년 4월16∼18일에 기무요원 8명을 조사한 적이 있다. 이들에 대한 조사 직후 당시 국방부 기무부대장인 O준장은 합수본부장인 박선기 법무관리관을 찾아가 군수사팀의 수사방식에 대해 거세게 항의했다. 이를 전해들은 수사관계자들은 ‘외압’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99년 5월24일. 부산지역 기무부대 4급 군무원 K씨는 군검찰팀에 자수하러 상경했다가 기무사 감찰실의 ‘만류’로 부산으로 되돌아갔다. 이와 관련, 그는 최근 기자에게 “장성 관련 부분만 빼고, 내가 군검찰에서 기무사에 대해 진술한 내용은 다 사실”이라고 밝혔다.
기무사의 수사방해 의혹 못지 않게 논란이 된 전 국방부 검찰부장 고석 대령의 기무사 유착 의혹은 어떤가. 고대령은 이에 대해 “터무니없는 음해”라고 주장한다. 국방부 주변에선 “육사 출신인 고대령이 병무비리수사과정에서 이명현 소령을 비롯한 법무관 출신 장교들로부터 따돌림당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그러나 ‘출신간 알력’이 사실이든 아니든 ‘신동아’가 확보한 여러가지 증거에 따르면 그가 병무비리수사과정에 보인 행태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특히 기무요원들이 병무비리로 수사를 받고 있던 상황에 중요한 정보원인 K씨의 신분을 드러낸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지난 2월 구성된 군·검합동수사반은 그 어느 때보다 ‘성역 없는 수사’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가진 것으로 전해진다. ‘K의 전쟁’의 ‘라스트 신’은 어떻게 펼쳐질까.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 문제예요. 국민의 모범이 돼야지. 자식을 외국에 보내 그곳 영주권을 갖게 해놓고 여기서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애국심이 있겠습니까. 자기 애들은 다 (병역)면제시켜 놓고. 만약 떳떳하다면 조사에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1차 특별수사팀이 왜 해체됐는지 아세요. 대규모 병무비리 커넥션의 뿌리를 캐려다 중단된 겁니다. 이번 기회에 완전히 뿌리 뽑도록 해야 합니다. 이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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