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호

다시,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사학

    입력2006-11-03 11: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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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진달래가 온 산야를 붉게 물들이면서 앙상한 수목에 새 싹이 돋는 4월은 ‘청춘’ 또는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기 마련이다. 4월혁명 또한 음울한 겨울을 벗어나 희망을 기약하는 새로운 역사를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래서 4·19 그날은 언제나 새 출발을 다짐하는 ‘영원한 젊음’ ‘푸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4·19 40돌을 맞는 심정은 마냥 젊은 마음일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지만, 40년이면 강산도 여러 번 변할 수 있는 짧지 않은 세월이다. 홍안청년이던 4·19세대는 이제 환갑을 오락가락하면서 거울에 비친 흰 머리카락에 저절로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서 40년의 짧지 않은 세월이 주마등같이 스쳐갈지도 모른다.

    4월 혁명 40년 이후, 무엇이 달라졌나

    다른 나라도 비슷하지만, 우리의 경우 40년 동안 변한 것을 꼽으라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300만명도 안 되던 서울이 1000만명의 인구를 포용하게 됐고, 4·19 때는 꿈도 꾸지 못하던 첨단기기가 넘쳐흐르고 있다. 그렇지만 40년 동안 모든 것이 변한 것은 아니다. 변하지 않은 것도 많은데, 그중에는 4월혁명 정신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도 적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1950년대는 ‘빽’이면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했는데, 그러한 정실주의는 고도산업 사회를 구가하는 한국 도처에서 오늘도 볼 수 있다. 공중도덕이나 시민의식은 어떨까. 교통질서도 지킬수록 손해라는 관념이 강하게 남아 있다. 이웃에게 해가 되더라도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한테 이익이 되면 거리낌없이 해치우는 것도 습관이 되다시피 했다. 휴대폰 문화는 한국인 정신상태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오늘날의 도덕불감증이나 이기주의는 따뜻한 인정이 남아 있던 40년 전보다도 더욱 심한 상태 아닐까. 경제의 변화에 정신과 문화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고, 양자간의 간격은 좁아지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정치다. 40년 전의 정치에 비교하여 오늘의 정치가 나아진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1960년 4월19일 ‘피의 화요일’이 있은 지 1주일 만에 ‘승리의 화요일’이 와 4월26일 이승만이 물러나겠다고 발표했을 때, 한국인은 이제는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불과 1년 만에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자유민주주의 실험은 혹독한 시련기를 맞았다. 군사정권이 출현했고 행정독재하에 정보정치가 횡행하더니 3선개헌을 거쳐 전대미문의 유신독재가 자행됐다. 1979년 10·26과 함께 기대했던 ‘서울의 봄’은 4월혁명기보다도 짧았고, 신군부에 의한 강권통치로 이어졌다. 1987년 6월 민주대항쟁으로, 4월혁명의 피로 쟁취했던 자유민주주의가 다시금 소생했지만, 그 동안 정치는 망가질 대로 망가졌고, 그것에 민주의식이 미약할 수밖에 없었던 대중의 지역이기주의가 가세하여 정치는 참담한 상황을 연출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제헌국회 시기나 전쟁기였던 2대 국회에는 그래도 정치가 있었는데, 그 이후 한국 정치는 어떻게 보면 후퇴를 거듭한 것이다.

    최근 낙천낙선 운동과 4월혁명기의 선거계몽운동

    한국 정치는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다. 우리는 현대사를 언제나 위기와 격동 속에 살아왔는데, IMF사태 이후 최근 몇 년간의 정치도 항상 마음이 조마조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번 선거는 얼마나 혼탁할지 예견하기도 쉽지 않다. 세계화 또는 신자유주의의 강풍이 매섭게 불어오고 있는데, 정치가 표류하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기 마련이다. 국내외의 여러 조건으로 경제가 회복돼 일단 IMF사태를 벗어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지금과 같은 정치가 계속될 경우 언제 또다시 경제가 수렁에 빠질지 알 수 없다. 교육개혁 등의 장기적인 계획도 세울 수 없고, 문화·학술계도 혼란이 계속될 것이다.

    정치에 한 가닥 희망을 가질 것이 있다면, 선거기에 접어들면서 총선연대 등 여러 시민운동단체가 패거리정치, 타락선거를 척결하기 위한 낙천낙선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기득권층의 벽과 지역이기주의가 워낙 두텁기 때문에 그러한 운동이 구호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도 만만치 않다. 실제로 시기에 따라 적당히 변신하면서 수십년간 권력과 재력을 장악했던 기득권층은 낙천낙선 운동을 무시하면서 ‘금권’ ‘색깔’ ‘지역주의’ 등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고 있다. 그렇지만 시민운동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을 왜곡된 형태로나마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부분적으로 수용했고, 그 운동이 50대 이상의 보수층을 겨냥했다기보다는 유권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20, 30, 40대의 양식에 호소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효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문제는 거듭 강조하지만 현재와 같은 정치가 계속돼서는 안 된다는 점에 있다. 1950년대에 영국의 한 신문이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된다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비꼬아 논란이 되었지만, 우리는 민주정치를 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아를 상실한 허무주의적 패배주의의 산물일 터이다.

    최근의 낙천낙선운동을 보면서 생각나는 것이 4월혁명기의 선거계몽운동이다. 그때도 지금과 흡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공명선거운동을 벌인 바 있었다.

    자유민주주의가 확고한 기반을 갖기 위해서는 건실한 경제, 건강한 사회가 필요했다. 민석홍은 ‘사상계’ 1960년 6월호에 기고한 ‘현대사와 자유민주주의’에서 “어떠한 이유로 4월혁명을 ‘혁명’이라고 부르는가. 첫째 이유는 그것이 독재정권을 타도했기 때문이요, 둘째 이유는 이와 결합돼 있던 특권적인 재벌이나 기업가층이 몰락하는 바탕을 마련했기 때문이다”라고 설파했지만, 올바른 자립경제를 이룩하고 백색 독재정권이 또다시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정경유착의 주범인 부정축재자의 처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당시의 인식이었다.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라는 요구가 얼마나 강했는가는 민주당정부의 여론조사에서도 드러났다. 33.1%가 3·15 부정선거범을 엄벌하라고 했는데, 부정축재자를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은 37.3%나 되어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응답이 부정선거범 쪽보다 높았다.

    이승만 정권이 붕괴하자마자 학생들은 거리를 청소하고 교통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활동에 나섰다. 6, 7월 이후 학생들은 신생활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해나갔다.

    학생들은 빈곤한 농촌의 실상을 무시한 도시인들의 허영과 사치, 향락과 안일을 몰아내고 독재정권에 기생했던 모든 사회악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망국 사치품, 건국 국산품’ ‘한 개비 양담배에 불타는 우리 조국’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시가를 행진했다.

    학생들의 관용차 부정사용 단속은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학생들은 “부당한 압력으로 불법 운행되고 있는 가(假)넘버 차를 즉시 폐차 처분하라”고 외치면서, 국회앞에 세워둔 가넘버 지프 50여대를 ‘실력’으로 시청 앞 광장으로 끌고가 국민 앞에 전시했던 것이다. 거창양민학살사건 등 전쟁중의 각종 양민학살사건 진상을 밝히라고 요구하면서 유가족회가 잇달아 조직된 것도, 학원모리배를 척결하라는 시위가 일파만파로 번져간 것도, 교원과 사무직 노동자를 중심으로 민주노동운동이 일어난 것도 모두가 건강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진통이었다.

    ‘4월혁명을 비웃는 민주반역 도배의 대거 입후보’

    1960년대의 낙천낙선운동도 계몽운동 또는 신생활운동과 관련이 많았다. 이 시기 낙천낙선운동의 주 대상은 이승만정권의 국무위원 등 고위관료, 자유당 간부, 명망가로 이승만·이기붕 후보를 지지한 자들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투옥되어 있었다. 일부는 민주당 공천을 받았다가 물의를 일으켜 공천이 번복되기도 했는데, 무소속 입후보가 많았고, 아예 자유당으로 출마한 강심장도 있었다. 또한 대상자 다수는 처음으로 실시된 참의원에 입후보하여, ‘동아일보’에는 ‘참의원이 민주반역자의 소굴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1960. 6. 28.)는 제하의 사설이 실리기도 했다. 지역구의 규탄을 받지 않아도 되고 지명도가 있기 때문에 참의원으로 출마한 것이었다.

    1960년 7월 초순 서울에서 참의원 첫 합동연설회가 개최됐을 때, 청중들은 최규남·김현철·조정환 후보는 물러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한희석 후보의 출마지역인 천안에서는 천안농고생 약 800명이 “한희석의 등록을 취소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

    7월29일 총선 막판을 앞두고 낙선운동은 한층 고조됐다. 특히 자유당 관련 후보자들이 다수 입후보한 경남 일원에서는 시위가 격렬해졌다. 삼천포(李在賢), 진양(具泰會), 의령(李泳熙), 함안(趙瓊奎), 창녕(辛泳柱), 창원 갑(金炯燉), 창원 을(李龍範), 고성(崔奭林), 남해(金正基), 합천 갑(兪鳳淳) 등에서 입후보 사퇴, 부정축재 국고 환원 등을 요구하는 성토대회가 일어났다. 고성에서는 5000여 군민이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경남 지역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고성 삼천포 함안 마산 지역 등의 선관위원들이 사퇴하는 사태도 일어났다.

    당리당략도 개입하여 낙선운동이 꽤 광범위하게 전개됐지만, 결과는 아주 나빴다. 이재학 등이 옥중당선되는 등 20명 내외가 당선돼 혁신세력보다도 당선자가 많았는데, 예상했던 대로 참의원 당선자가 많았다. 반혁명세력 규탄시위가 잇따랐고, 투표함 방화 등 방화 파괴 납치 폭행이 여러 곳에서 일어나 재선거를 치러야 할 곳도 적지 않았다. 이재학이 당선된 강원도 홍천선거구 반혁명세력규탄데모대 일행 70여명은 7월31일 서울로 올라와 즉시 사퇴를 요구했다. 고성의 서울 유학생들은 귀향하여 30여명이 단식하면서 최석림의 사퇴를 요구했다.

    선거 결과는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일찍이 ‘동아일보’가 7월3일자 사설 ‘4월혁명을 비웃는 민주반역도배의 대거 입후보’에서 지적한 그대로, 자유당 국회를 즉각 해산하고 새 국회를 구성하여 헌법과 선거법을 개정하는 것이 혁명의 과정인데도, 선개헌 후선거의 역코스를 취함으로써 자유당 세력을 온존시키고 국민의 혁명 기운을 냉각시켰던 것이다.

    또한 자유당 국회는 소수파인 민주당 의원을 견제하여 개헌과 선거법 개정에서 민주반역자의 재산 몰수, 공직 추방, 입후보 금지 등의 ‘숙청’ 조항을 삽입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4·19 이후 상층 정치인은 바뀌었지만, 검찰 경찰 군 사법부 관료 등은 그대로였고, 자유당의 지방조직은 건재했으며, 자금도 튼튼했다. 유권자도 정실이나 향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예컨대 고성의 경우 13개면, 1028개 마을의 면장과 반장을 자유당계 후보가 추천하거나 임명한 것으로 보도됐다. 여러 지역에서 자유당계 후보들은 공공연히 매표, 대리투표 등의 부정을 저질렀다.

    학생·시민들의 선거 관여는 그 뒤에도 있었다. 1971년은 대선과 총선이 있는 해였을 뿐만 아니라 사법부파동, 교수선언, 광주단지사건과 KAL빌딩 난동사건, 실미도사건, 교련반대 시위 등이 일어난 해였다. 1950년대처럼 장기독재체제로 가느냐, 변화의 요구를 수용하여 건강한 사회 건설을 지향할 것이냐의 갈림길에 있었기 때문에 선거운동도 치열했고, 유권자의 관심도 자못 높았다.

    4월27일 격전 끝에 박정희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것으로 발표되자, 일부 대학생들은 4·27선거를 성토하면서 신민당에 총선을 거부하라고 요구했고,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등도 이에 호응했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5·25총선에 수천명의 대학생들이 선거참관을 하기 위하여 지방에 내려갔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 총선은 그때까지의 총선 가운데 야당이 가장 많이 득표하고(공화당 546만581표, 신민당 496만9050표), 가장 많은 당선자를 낸 것으로(공화당 113명, 신민당 89명) 역사에 기록됐다. 유권자의 견제심리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1985년 2·12총선은 한층 극적이었다. 이 선거에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신군부의 작품인 민정당과 민한당, 국민당이 여·야당의 형태로 나왔는데, 김영삼 김대중이 이끄는 신당이 참여함으로써 신군부체제에 금이 갔다. 이 선거처럼 낙선운동이 주효한 예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유세장마다 수백명의 학생이 몰려가 시민과 함께 신군부체제 후보가 연설하면 야유를 퍼부었고, ‘민주후보’가 등단하면 열렬히 환영했다. 결국 신당은 이 선거에서 약진했을 뿐만 아니라, 민한당이 저절로 붕괴하여 새로운 정치 지형이 그려졌다. 그만큼 민주화는 도도히 흐르는 대하처럼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대세라는 것을 이 선거는 뚜렷이 보여주었다.

    올해가 선거의 해이고 낙천낙선운동이 주목을 받고 있어서 4·19와 연관시켜 그 부분을 생각해보았지만, 4월혁명 하면 떠오르는 것은 그보다는 학생운동이 아닐까 한다.

    일각에서는 4월혁명기 하면 학생데모, 그리고 혼란을 연상하지만, 4월26일 이후 정치문제와 관련하여 학생데모가 빈번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학생들은 학원모리배 축출이나 신생활 운동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1961년에는 전반적으로 데모가 줄어들었는데, 학생들의 경우도 반공법과 데모규제법 제정을 반대하는 2대악법반대 등에 부분적으로 참여했고, ‘기대’와는 달리 4·19 1주년에도 침묵시위가 있었을 뿐이었다. 통일운동도 교내집회 형태로 전개됐다.

    학생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199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 것은 군정기의 두세 차례 시위를 제외한다면 1964년 3·24데모 이후부터였다. 그때부터 1965년 하반기까지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대규모로 격렬하게 전개됐다. 4월혁명기도 그러했지만, 이 시기 대학생들은 사회에서 상당한 대접을 받았고, 학생데모에 호의적인 반응도 있었다. 사실 이 시기의 학생운동은 낭만적인 성격이 짙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서울대 문리대의 4·19탑은 여러 모로 ‘성소’였고, 지금은 다 복개되어 없어지고 대학로로 불리지만, 미라보다리나 개천 주변에는 낭만이 넘쳐흘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4월19일은 ‘수난의 날’이 되었다. 그날이 되면 대학에 문이 닫혀 들어갈 수 없었다. 데모를 막기 위해서였다. 4·19 그날은 권력자한테는 두려움의 표상이었다.

    그런데 이미 수난은 그 이전에 용어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1960년 4월26일 이후에도 4·19를 사건으로 말하기도 하였고, 4월혁명기 청년·학생운동과 통일운동에 영향을 주었던 이종률은 4·26 직후 4월혁명을 3, 4월항쟁이 정확하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4·19혁명 또는 4월혁명으로 불렀다. 언론에서는 4월혁명기에 ‘혁명과업’ 또는 ‘4월혁명과업’이라는 용어를 빈번히 사용했다.

    4월혁명은 쿠데타가 일어나고서 ‘의거’ 또는 ‘학생의거’로 변하였다. 쿠데타정권이 처음부터 의거라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 등 쿠데타 주동자들은 초기에 4·19혁명이라는 말을 쓰고, 또 그것과는 모순되게 ‘두 번 혁명해서는 안 된다, 우리 혁명이 마지막’이라는 말도 썼다. 그렇지만 얼마 안 있어 쿠데타만 혁명으로 부르고, 4·19를 의거로 낮추어 불렀다. 그리고는 교과서에 그렇게 사용하게 해서 ‘정착’시켰다.

    ‘의거’라는 말 속에는 박태순이 지적한 바와 같이 민족적 사건, 역사적 사건이란 인식이 결여돼 있고, 자연발생적이라는 뜻이 강하다. 또 ‘4·19의거’는 독재를 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짐으로써 원인 무효가 되어, 그 이후의 문제는 정치인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학생들은 학업이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4월혁명 이후 1990년대까지 30여년간 학생운동이 끊이지 않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 발생했을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4월혁명의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0년 3, 4월항쟁을 대학생들이 주로 펼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피의 화요일’인 4월19일에 서울에서 나이 어린 초등학생만 해도 5명이나 숨졌고, 남녀 중고생의 희생자 수가 대학생의 그것보다 훨씬 많았다. 실제로 4월18일 고려대생이 시위를 벌이고, 다음날 수많은 대학생이 일제히 교문을 박차고 나오기 이전까지는 2월28일 대구 고교생들의 시위로부터 시작하여 거의 대부분이 중고교생들이 한 것이었다. 그리고 4월19일에는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모두가 참여했던 것이다.

    왜 3, 4월의 시위가 중고생 중심으로 전개됐는가. 여러 요인이 있지만, 중고생들이 가장 순수한 정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중고생들은 데모를 하면서 선배들은 썩었다고 외쳤는데, 3, 4월항쟁 직전만 하여도 기성세대는 말할 나위 없고, 요즘 청년과 학생들도 무기력하고 개인주의적이어서 우리나라는 희망이 없다는 얘기를 들어오던 터였다. 이와 같이 한국은 근대세계에 들어오면서 나이 먹은 사람일수록 보수성이 강하여 계급갈등 못지않게 세대갈등이 많은 지역으로 지적되고 있다.

    학생운동이 30여년간이나 지속된 것은 학생세대가 정의감이 강하기 때문에 독재권력이나 극단적인 보수성에 도전할 수 있었다는 점 외에 다른 이유도 있다. 5·16 쿠데타 권력의 철저한 정보정치와 반공통치는 혁신세력의 활동을 불가능하게 하여 학생들이 민족자주성의 문제, 통일문제, 사회문제 등 진보세력이 제기하기 마련인 문제를 발언하게 됐다는 점이 그것이다.

    학생운동은 1980년대에 순수한 정의감에 이념성까지 작용하여 최고조에 달했다. 1980년대 학생운동은 2학기보다는 1학기에 고조됐다. 여기서 4월혁명 기념일은 서전을 담당했다. 4월 그날이 오면 전국의 대학가는 출정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3, 4월의 젊은 혼들이 묻혀 있는 수유리묘지 일대에서는 일대 격전이 붙었다. 5월에는 대학의 함성이 한층 높아지고, 캠퍼스와 학교 주변에는 최루탄가스 때문에 눈을 뜰 수 없는 사태가 계속됐다. ‘5월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투쟁은 1987년 6월민주항쟁으로 클라이맥스에 달한 감을 주었다.

    6월 민주항쟁으로 4월혁명에서 쟁취했다가 쿠데타로 실종된 자유민주주의가 다시 소생했지만, 6월 민주항쟁은 자유민주주의의 쟁취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7, 8, 9월 노동대투쟁과 다음해 초부터의 통일운동, 북한바로알기운동으로 이어졌다. 6월민주항쟁, 7, 8, 9월 노동투쟁, 통일운동은 하나의 세트였다. 그리고 그것은 4월혁명 정신의 계승과도 연결돼 있었다.

    이미 4월혁명기에 4·19, 4·26은 혁명의 종말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지적했고, 5·16 이후 여러 지식인이 4월혁명은 미완의 혁명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강만길은 4·19운동에 포함돼 있던 또 하나의 민족사적 과제, 곧 그것이 민족통일운동 달성으로 연결될 때, 4·19는 어떠한 개념으로도 바꾸어놓을 수 없는 거대한 혁명운동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피력한 바 있는데, 4월혁명기에 자유민주주의의 쟁취에 이어 신생활운동, 민주노동운동이 일어나고 통일운동이 전개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쿠데타로 미완의 혁명이 되고 말았고, 1987년경에 이르러서 폭과 깊이가 달라진 형태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자유민주주의는 상당부분 외형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정치는 참담한 상황을 계속 연출하고 있다.

    4·19세대와 386세대

    한국정치에 출구는 보이는가. 양식을 가진 사람들은 수십년간 기회주의적 정상배로 독재의 하수인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패거리정치를 해온 부패정치인은 21세기가 시작된 이제는 사라져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낙천낙선운동의 역사적 의의도 그것에 있다. 그러면 소위 386세대는 믿음직한가.

    386세대와 관련하여 떠오르는 것이 4·19세대다. 그리고 4·19세대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제기되는 것이 왜 4·19세대는 변절자가 많으냐 하는 문제다.

    4·19세대의 변절에 대해서는 당사자들의 항변을 포함해서 이의가 적지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4·19를 내세우면서 유신독재에 가담하고 신군부체제에서 한 몫 한 것을 합리화하려는 주장은 아무래도 궁색하고 측은해 보인다.

    일부 연구자들은 4·19세대의 분화는 4월혁명기 활동에 직결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신생활운동과 같은 소시민적 운동을 주로 한 사람들은 대체로 체제순응의 길을 걸었고, 통일운동 등 변혁 활동을 한 사람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점도 생각해볼 수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됐다고 보기 어렵다.

    이른바 4·19세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60년 3, 4월항쟁의 성격과 4월혁명기의 분위기를 알아야 한다. 4·19세대의 상당수는 학도호국단 간부였고, 자유민주주의나 민족자주정신이 내면화하지 않은 상황에 4월혁명의 분위기에 휩쓸렸다. 또 어느 운동에서나 볼 수 있는 소영웅주의자, 출세주의자들도 적지 않았다. 다른 한 편으로 오랜 세월 정치에 출구가 보이지 않는 것이 자포자기로 이끌어간 점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신동엽은 “껍데기는 가라 / 4월도 알맹이만 남고 / 껍데기는 가라”라고 노래했는데, 4·19세대의 상당수는 껍데기일 수밖에 없었다.

    ‘386세대’는 믿음직한가. 누구나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치계에 입문한 진보적 활동가의 행동거지가 기성 부패 정치인과 무엇이 다르냐는 비판이 최근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혼탁한 정치계에 무언가 새 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했는데, 하나도 새로운 것이 없다는 지적이다. 나아가 기성정치인보다 더 약삭빠르게 현실정치에 야합하여 인기나 얻고 지위를 보장받으려는 일부 재야 입당파 정치인의 추태에 분노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40년 구정치를 상징하는 인물의 행적을 찬양한 민중당 출신 인사도 있었고, 그 사람과 함께 거대 신당을 만들자는 운동권 출신 정치인도 나왔다. 박정희기념관 건립에 막대한 세금이 들어가는데도 꿀 먹은 벙어리인가 하면, 영호남지역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당연하다고 옹호하는 강심장조차 있다.

    비록 일부라고 하지만 재야 입당파 정치인들의 기회주의와 현실추수주의는 끝이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수년 동안 일부 ‘민주인사’가 민주주의를 짓밟는 사태를 목도해왔다. 무슨 짓을 하든 ‘자리’만 유지하면 되는 일일까.

    1990년대에 지긋지긋하게 계속되는 야합정치로 원칙도 없고 양식도 사라진 채 정치가 표류하는 ‘예측 불가능’의 불확실성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데, 일부 ‘민주인사’들이 그런 현상을 한껏 부추기고 있다. 불확실성이란 견강부회가 횡행하고 가치관이 오도되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이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는 증표다.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386세대 정치인을 4·19세대 정치인과 맞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그렇지만 그들에 대한 의구심을 쉽게 떨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신동엽은 “껍데기는 가라. / 한라에서 백두까지 / 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고 /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고 외쳤는데, 386세대가 ‘향기로운 흙가슴’으로 남을지 ‘쇠붙이’나 ‘껍데기’가 될지 지금으로서는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386세대건 다른 세대건 올바른 정치를 기원하는 사람들은 원효가 말한 초발심(初發心)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4월혁명 정신을 살려 우리의 정치를 맑게 할 수 있다. 4·19 직후 초등학교 4년생인 강명희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 엄마 아빠 아무말 안해도 /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하며 울먹이면서 노래했지만, 우리 모두는 4·19희생자들이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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