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PC(퍼스널 컴퓨터) 제조업체의 대명사라 할 삼보컴퓨터의 인터넷 홈페이지(www.trig em.com)는 무척 단순하다. 검은 바탕에 보석을 상징하는 붉은색 심벌 마크가 가운데 있고 좌우로 5개의 흰색 단어만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이 단어를 마우스로 클릭하는 순간 삼보컴퓨터의 거대한 왕국이 펼쳐진다. 이 왕국안에는 연간 1080만대의 PC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과 올해말까지 3조5100억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는 판매망이 자리잡고 있다.
이 왕국의 주인은 바로 이용태(李龍兌·67) 삼보컴퓨터회장이다. 1980년 서울 청계천의 자그마한 방에 6명이 모여 무명의 벤처기업으로 출발한 삼보컴퓨터를 경기도 안성과 중국 선양(沈陽)에 대규모 공장을 갖추고 미국과 일본에 현지 판매조직을 둔 세계적인 회사로 성장시킨 주인공이다.
지금은 비록 삼보컴퓨터의 경영권을 장남인 이홍순(李洪淳·40) 부회장에게 물려줬지만 자신이 세운 왕국의 영토 확장을 위해 ‘갑옷’을 벗지 않고 있다. 올해초 삼보컴퓨터는 이용태 회장의 ‘전략구상’에 따라 정보화시대의 새로운 영토인 사이버 공간을 제패하겠다며 ‘인터넷 토털 서비스 그룹’으로 변신하겠다는 기치를 내걸었고 진용도 새롭게 짰다.
컴퓨터 제조 전문회사에서 인터넷 정보통신 종합회사로 변모하기 위해 기존 조직을 ‘컴퓨터 통신 부문’과 ‘인터넷 부문’, 그리고 이 부문들을 지원하는 ‘관리지원 부문’ 등 3개 사업부문과 이들을 총괄 지휘하는 ‘코퍼레이트 센터’로 전면 개편한 것이다.
특히 신설되는 인터넷 부문은 휴대형 인터넷 단말기 등 하드웨어 사업과 네트워크, 콘텐츠, 인터넷 서비스 등을 담당하는데 삼보컴퓨터가 인터넷 전용 단말기를 개발하고, 삼보의 자회사인 나래이동통신, 두루넷, 메타랜드, (주)솔빛, 삼보정보시스템 등 인터넷 관련 업체들이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런 조직 변화에 따라 삼보컴퓨터는 3월17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사업목적을 담은 정관도 바꾸었다. 기존 사업목적 중 몇가지를 삭제하는 대신 전자 상거래 관련 통신 서비스, 정보 제공, 중개, 마케팅을 새 사업 목적으로 추가했다.
삼보컴퓨터의 올해 사업 전망은 벌써부터 청신호를 켜고 있다. 올해 1, 2월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15% 늘어난 7억1000여억원에 달했다는 것. 1MF사태로 한때 부도설까지 나돌았던 삼보컴퓨터를 이처럼 급성장시킨 이용태 회장을 3월7일 오전 10시 서울 여의도 삼보컴퓨터 회장실에서 만나보았다.
컴퓨터와는 천생연분
─이회장은 연륜으로 볼 때 정보통신업계에서 원로입니다. 서정주 시인은 자신이 쓴 시에서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는 표현을 했습니다만 오늘날의 이회장을 만든 것은 ‘10할이 컴퓨터’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컴퓨터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습니까. 서울대 문리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당시에는 컴퓨터를 제조하는 사업가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미국 유학중 통계물리학을 연구하는데 컴퓨터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실험물리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실험실에서 밤을 새우듯 저는 시뮬레이션을 위해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최신 컴퓨터가 있는 전자계산실에서 수많은 밤을 새우며 컴퓨터와 씨름했어요.”
이회장은 1960년대 후반에 미국 유타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 1970년에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당시 한국에서는 KIST가 가장 큰 컴퓨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제 생각으로는 근무시간에는 연구원들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을 돕고 저녁시간 이후에는 개인적으로 물리 연구를 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을 했어요. 그런데 막상 들어가보니 제가 너무 안이한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 KIST 전산센터는 컴퓨터를 이용해서 정부 기업 은행 등의 전산화 작업을 본격적으로 도와주는 기관이었다. 정부와 기업에 있는 사람들에게 컴퓨터 사용법을 가르치고 전산센터의 운용 비용을 벌어들이기 위해서는 용역을 맡아야 했기 때문에 이회장이 개인적으로 물리공부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리공부를 위한 수단으로 선택한 KIST의 생활이 결국은 이회장의 인생을 ‘컴퓨터쟁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남들이 컴퓨터 쓰는 것을 도와주는 일을 하다가 나중에는 남들이 컴퓨터를 만들 수 있게 도와주게 되었고 결국은 스스로 컴퓨터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말았어요.”
─컴퓨터를 만들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입니까.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출현입니다. 미국의 인텔사가 1971년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만들어냈을 때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한국이 첨단산업을 일으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이크로 컴퓨터 분야는 한국이 세계에서 앞서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70년대 초에 마이크로 컴퓨터의 국산화를 외쳤습니다. 1974년 무렵에는 KIST에 전자계산기 국산화 연구실을 만들어서 정부에서 100명의 연구원만 대주면 3년내에 세계 제일의 마이크로 컴퓨터 개발그룹을 만들어보겠다고 간청을 했어요.”
이회장은 마이크로 컴퓨터의 국산화를 위한 프로젝트를 얻으려고 여러해동안 정부를 조르고 대기업의 문을 두드렸지만 메아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회장이 이렇게 헛수고를 하고 있는 동안 대만과 싱가포르는 1980년에 컴퓨터 산업을 국가 주요산업으로 지정하고 10개년의 장기계획을 출발시켰다. 이에 자극을 받은 이회장은 스스로 컴퓨터 제조회사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오늘날의 삼보컴퓨터를 설립했다.
한민족의 교육열에 대한 자부심
─당시 우리나라의 산업이래봐야 라디오나 흑백 텔레비전을 조립하는 수준이었는데 무엇을 믿고 국산 컴퓨터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했습니까.
“우리 민족의 교육열을 믿었습니다.”
이회장은 그 교육열의 원인(遠因)을 조선시대에서 찾았다. 퇴계 이황에 대해 남다른 조예가 있는 이회장은 조선시대를 문약했던 시대로 보는 것은 식민 시대를 일본이 심은 잘못된 역사의식의 결과라며 ‘조선시대 예찬론’를 꽤 오랫동안 펼쳤다. 말끝마다 “그런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를 붙였다.
“세계 인류 역사 중에서 무력이나 권력이 아니고 교화와 교육으로 나라를 500년 동안 유지한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조선시대 500년을 두고 보면 다른 나라를 침범할 만한 군대는 거의 없었거든요. 의장대 스타일의 군대가 있었을 뿐이지요. 그러니까 일본의 일개 소대가 조선왕궁을 점령할 수 있을 정도였어요.
그 다음에 지방에 내려가면 수령 방백들이 군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행정요원인 아전들은 있었지만 경찰 병력은 거의 없었어요. 아마 칼 차고 창 든 포졸들도 의식용이었을 뿐이지 실제로 범인을 잡기 위해서 칼 빼고 돌아다닌 것은 아닙니다. 무력 없이 그렇게 유지된 나라가 세계에 어디 있습니까.
조선시대에는 방방곡곡 어느 산골을 가더라도 글 읽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곳에는 반드시 선비가 있고 그 선비는 시를 지을 수 있고 역사를 논할 수 있었습니다. 명색이 양반이면 농부의 자식이라도 과거에 급제할 경우 정승도 될 수 있었어요. 그런 나라가 세계에 어디 있습니까.”
─그런 조선이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문약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나라가 산업화에 뒤져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잠재력으로 봐서 한국은 선진국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세상에 한국보다 열심히 교육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한국의 교육열이라는 건 일종의 유전자(DNA)거든요. 우리 민족의 몸속에 체화된 거란 말이죠. 어느 누구든지 자기 자식을 대학 보내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우리나라는 영토도 작고 풍부한 지하자원도 없는데 교육열만으로 선진국이 될 수 있을까요.
“옛날에는 무력이 강한 나라가 세계를 지배하고 그 다음에는 지하자원이 많은 나라가 세계를 지배했지만 앞으로는 지식과 아이디어가 풍부한 나라가 세계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한국만한 잠재력을 가진 나라가 없습니다. 한국은 최고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나라예요. 교육에 대한 에너지입니다. 교육에 대한 에너지는 무서운 폭발력을 가졌거든요. 그러면 어느 때 우리가 그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바로 지식정보화시대입니다.”
이루지 못한 꿈
우리 민족의 교육열이 조선시대에는 붓과 한지에 표출됐다면 정보화시대에는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표출된다고 할 수 있다. 이회장의 사업영역도 컴퓨터 제조업체에서 출발해 정보통신이나 인터넷으로 점차 넓혀왔다.
─1982년에는 삼보컴퓨터에서 잠시 손을 떼고 초창기 데이콤의 사장을 맡기도 했는데 하드웨어 제조만으로는 비전이 없으니까 정보통신쪽으로 눈을 돌린 겁니까.
“그렇죠. PC가 모든 가정에 들어가게 되는데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 연결해야 효과를 발휘하니까 데이터통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죠. 당시 삼보컴퓨터는 젊은 경영자에게 맡기고 나는 88년에 삼보컴퓨터로 오기까지 전적으로 데이콤에 있었어요.”
─소프트웨어 분야에도 진출했는데 성공하지는 못했죠.
“제가 이루지 못한 꿈의 하나가 한국을 세계 소프트웨어 생산 기지로 만드는 겁니다. 이건 제가 오래전부터 줄기차게 주장해왔는데, 결국 한국에서는 그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낮은 인도의 소프트웨어 수출 규모는 20억달러정도입니다. 인도는 2008년이 되면 500억달러를 수출하게 됩니다. 소프트웨어 500억달러면 하드웨어 1조달러에 해당합니다. 인도는 더 이상 후진국이 아니에요. 이미 소프트웨어 생산기지가 됐으니까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발전할 겁니다.”
─우리 나라가 인도보다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뒤떨어진 것은 영어 경쟁력 때문입니까.
“한국을 세계 소프트웨어 생산기지로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하면 사람들이 저한테 하는 소리가 인도 사람들은 영어를 할 줄 알고 인건비가 싸기 때문에 한국은 따라갈 수 없다는 겁니다. 물론 인도는 우리 나라에 비해 그런 이점은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가 소프트웨어 개발을 포기하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소프트웨어는 우리나라에 가장 적합한 산업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현재 전세계적으로 소프트웨어 개발 인력이 부족합니다. 미국에서는 매년 10만명 정도의 소프트웨어 인력을 수입하고 있지만 30만명 정도가 부족합니다. 일본, 독일, 프랑스도 3만~5만명이 부족하고 캐나다도 2만명이 부족합니다.
그건 소프트웨어 특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소프트웨어 산업이 발달한 나라일수록 인력이 부족해요. 하드웨어는 일단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오래 쓰지만 소프트웨어는 기능을 추가하고 싶고 예쁘게 만들고 싶고 역동적으로 만들고 싶어하기 때문에 버전을 자주 업그레이드합니다.
가장 좋은 예로 윈도우95가 98로 업그레이드 됐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2000으로 업그레이드 됐는데 다른 소프트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일거리가 많으니까 인력도 많이 필요합니다. 미국이 부족한 소프트웨어 인력 30만명을 채우면 채우는 그 날로 또 부족할 겁니다. 그런 것이 소프트웨어의 특성입니다. 따라서 교육 수준이 높은 우리나라 인력들이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얼마든지 두각을 드러낼 수 있다고 봅니다.”
─흥미로운 것은 원로세대인 이회장은 소프트웨어에 비전을 거는 데 비해 젊은 벤처사업가중에는 소프트웨어 개발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다는 겁니다.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우리는 미국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소프트웨어 개발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하드웨어에 아이디어와 소프트웨어를 접목시키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휠씬 유리하다는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장 눈앞에 보이는 돈을 벌려면 그 방법이 좋겠죠.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세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야 한다는 것은 가능성이라기보다 당위성입니다. 소프트웨어 개발이 쉽고 잘될 수 있기 때문에 하자는 게 아니라 안 하면 큰일나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당위성이 현실이 되려면 가능성이 있어야 하는데 소프트웨어 개발에 적합한 인력이 우리나라에 충분합니까.
“인구 비례로 따져볼 때 우리나라 대학생 수는 세계에서 미국 캐나다 다음입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한국이 미국을 능가합니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은 누구든지 대학에 가려고 합니다. 앞으로 사이버유니버시티가 나오면 전국민이 대학생이 될 겁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에게 어떤 일거리를 줄 겁니까. 기존 제조업은 자동화가 되면서 고용자가 줄어듭니다. 서비스업이 늘어난다고 하지만 이 자리에는 구태여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대학 졸업생들에게 적합한 일자리는 소프트웨어가 최고입니다.”
이회장은 우리 나라가 소프트웨어 개발에 주력하지 못하는 데에는 정부의 책임도 크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소프트웨어 산업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을 질타했다.
“IMF로 그렇게 많은 기업에서 감원 소동이 벌어졌을 때도 블루칼라는 사람이 없어서 수입을 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고학력자는 소용이 없고 블루칼라가 필요하다고 캠페인했는데 그런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한국 사람들이 가진 교육에 대한 에너지를 촉발해 높은 수입을 갖는 소프트웨어 산업을 발전시켜야죠. 제가 수십년간 이런 주장을 열심히 했지만 정부는 나서지 않습니다.”
소신있는 장관이 없어
─정부가 소프트웨어 산업 지원에 나서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성공 가능성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불투명한 거죠. 과연 될까 하는 의구심이 있기 때문에 자기 자리를 걸고 해보겠다는 장관이 없는 거예요.”
─이회장이 보기에는 성공 가능성이 있습니까.
“소프트웨어 시장은 앞으로 늘어나니까 세계 시장에 우리가 만든 소프트웨어를 팔아먹을 수 있어요. 한국도 세계 소프트웨어 생산기지가 되어서 인도처럼 소프트웨어를 세계에 수출해야 합니다.”
─인도는 주로 미국에서 하청받아서 하는 거죠?
“하청이 많았습니다. 맨처음에는 하청을 받아 일하다가 이제는 하청이 아니라 미국에 이어 세계 소프트웨어 시장을 리드할 수 있는 위치로 올라가고 있죠. 그 발전 속도가 굉장합니다.”
─하청을 통해서라도 소프트웨어 개발 인력을 육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인가요.
“시원찮은 사람이 만드는 소프트웨어와 똑똑한 사람이 만드는 소프트웨어는 차이가 큽니다. 블루칼라의 경우 땅을 잘 파는 사람과 못 파는 사람의 차이가 2:1 이상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의 경우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10:1, 100:1 차이가 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유능한 소프트웨어 개발자 한 사람을 육성하면 100명 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중요하면 예전에 직접 컴퓨터를 만들었듯이 이회장이 소프트웨어 개발 인력을 육성하셔야죠.
“삼보컴퓨터는 제가 처음부터 장사하기 위해서 만든 회사가 아니고 정부한테 하라고 해도 안하니까 만든 것이긴 합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의 경우 우리 회사 1년 순이익이 1조원정도 되면 정부 대신에 해볼 수 있어요.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이회장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빈말은 아니다. 예전에 소프트웨어 개발 프로젝트가 성사될 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9년 무렵 당시 포항제철회장이던 박태준 총리가 포철이 1년에 1조원씩 투자하겠다며 정보산업을 일으키는 프로젝트를 저하고 구상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제가 포철 고문으로 정보산업입국방안을 구상했는데 만약 그대로 갔으면 정부에 지원해달라고 요청할 필요도 없지요. 그런데 그때 박태준 회장이 정치 하느라고 너무 바빠서 자주 만날 수 없었고 포철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과감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서 박태준 회장이 정치적으로 실각하는 바람에 성사가 되지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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