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9월 전국 인문대학 학장들은 “이성의 회복과 학문의 기반이 되는 인문학이 존폐의 갈림길에 서 있으며… 정부는 인문학 연구와 교육에 대해 정책적 배려와 지원을 다해야 한다”는 요지의 ‘제주선언’을 발표했다.
다음해인 97년, 14개 대학 인문학 연구소는 공동 학술 심포지엄을 통해 인문학의 위기와 그 해결책을 다각도로 모색했고, 98년에는 대표적인 학술단체라고 할 수 있는 학술단체협의회에서 인문사회과학의 위기에 대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어 작년 4월부터 6월까지 신문지면에서 염무웅, 김성도, 복거일, 장정남, 김학수, 신명아, 박정신과 같은 인문·사회과학자들이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논쟁적인 의견을 개진했다.
이러한 토론과 논쟁에서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에 위기를 불러일으킨 원인을 여러 가지로 진단했고, 그에 대응하는 처방을 제시했다. 전통과 단절이라는 질곡된 근대화의 문제, 세상의 모든 것을 돈과 효용으로 환원하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논리로부터, 대학에 도입된 세계화 이데올로기와 경쟁력 지상주의, 교육부의 잘못된 대학 개혁 정책, 학부제의 급속한 도입, IMF, 대학의 팽창과 대학생의 질 저하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이고 다양한 현상과 요인들이 위기의 원인으로 제시됐다.
소수의 인문학자들은 이에 덧붙여 한국 인문학이 외국의 이론과 해석을 소개하는 데 급급했고, 이런 인문학의 ‘식민성’이 인문학 연구를 현실과 우리의 삶이라는 토양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인문학에 위기를 가져왔다고 강조했다.
왜 인문학의 위기를 재론하는가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원인만큼이나 다양한 처방이 제시됐다.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복원하고, 신자유주의와 시장논리로부터 대학과 공공영역을 보호하고, 정부의 지원을 유도해서 ‘인문학연구소’를 만들어 적체된 인력을 활용하고, 학부제 도입을 늦추거나 대안을 모색하고, 세분된 전공의 벽을 넘어 문화연구·여성연구·지역연구와 같은 다양한 통합학문을 지향하고, 인문학이 정보화의 내용을 채워줄 수 있도록 인문학과 자연과학, 공학의 ‘절합’을 모색하고, 순수학문 중심의 학부와 응용학문 중심의 대학원을 효과적으로 연계하고, 연구교수제를 도입하고, ‘우리’ 학문을 하고, 현실과 밀접한 학문을 모색하고, 논문과 원전 중심의 글쓰기를 지양하는 것 등이 위기 극복을 위한 처방이었다.
이러한 논의 대부분이 “인문학이 무엇을 하는 학문이며, 무엇을 위한 학문이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었음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인문학이 무엇인가를 다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서 인문학의 위기와 그 처방을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분석하려 한다. 인문학의 현재 위기와 미래에 대한 논의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반성적인 고찰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학교수들의 연구와 교육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따라서 인문학의 본령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바람직한 인문학 교육을 생각할 때 무시할 수 없는 주제다. 그렇지만, 대학에서의 인문학 교육의 목표가 교수가 될 인문학자를 키워내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 역시 자명하다. 학생들 중에는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유학을 가서 10년 가까이 더 공부하는 학생도 있지만, 대학교육의 초점을 이들에게, 즉 교수를 재생산하는 데 맞출 수는 없는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는 인문학이 무엇을 하는 학문인가에 초점을 맞추었거나, 교육에 대해 얘기할 경우에도 교양교육과 인성교육만을 인문학이 제공하는 교육으로 국한했다는 문제가 있었다.
내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먼저 나는 대학에서 제공하는 인문학 교육의 핵심이 학생들에게 ‘인문학적 사유’를 교육·훈련하는 것임을 주장하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문학적 사유가 인문학적 질문을 던지고 텍스트에 바탕해서 이를 해결하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는 훈련을 통해 개발할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창조적인’ 인문학적 사유가 ‘실용적인’ 학문이나 사회활동에 필요한 창조성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보이려 한다. 즉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인문학 연구와 교육이 실용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시민을 길러내는 학문
내가 있는 캐나다에서도 인문학이 위기에 처했다고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1997년 온타리오주의 칼턴(Carleton) 대학에서 졸업생이 직장을 잡지 못한다는 이유로 고전(classics), 독문학, 국제언어와 같은 몇 개의 인문학과를 갑자기 폐쇄해서 수십 명의 교수가 직장을 잃고 강사로 전직하는 등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일은 오히려 한국 같으면 더 일어나기 어려웠을 일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토론토대학도 공과대학이 기업과 정부의 지원을 받아 급속하게 팽창하는 반면, 인문학은 제자리걸음이거나 예산이 축소되고 있다. 정부가 인문, 사회과학 연구를 지원했던 ‘사회과학과 인문학 연구 위원회(Social Sciences and Humanities Research Council)’의 연구비도 지난 몇 년간 대폭 삭감됐다. 게다가 최근 이 위원회는 인문학자들에게 자신의 연구가 세상 사람들의 삶에 어떤 바람직한 영향을 주는가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분석철학자들이 전세계에서 10명 정도의 전문가들만 이해할 수 있는 논문을 쓰기 위해 연구비를 타던 ‘순수 연구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대학 기능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19세기까지 서구사회에서 대학은 국가와 제국을 이끌어나갈 소수 엘리트를 키우는 곳이었고,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육은 민족국가를 상징하는 문화에 대한 교육이었다. 문학, 역사, 철학과 같은 인문학이 이러한 ‘문화 대학’에 가장 적합한 교육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19세기를 통해 대학이 떠맡게 된 또 다른 임무가 있었는데, 그것은 산업 인력과 전문 인력의 양성이었다. 이런 필요에 의해 과학·기술 교육이 대학에 도입되었고, 이렇게 도입된 과학·기술 교육과 연구는 인문학을 밀어내고 대학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이 과정은 대학의 양적 팽창과 그 궤적을 같이한다. 대학의 양적 팽창은 특히 20세기 후반부에 두드러졌다. 1950년에서 1980년 사이에 서구 산업국가에서 인구대비 대학생의 비율은 4~30%로 급속하게 성장했고, 한국의 경우 이는 더욱 뚜렷해서 95년 기준으로 18~21세 젊은이 56%가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이 팽창하면서 대학 졸업생의 위상도 변했다. 대학 졸업생 대부분이 ‘제국’을 이끌고 갈 엘리트가 아닌, 지식산업과 서비스산업에 종사하는 사무·지식노동자나 관료체계의 하위직 관료로 흡수됐다.
한국의 경우에도 대학 졸업장을 받으면 ‘엘리트’ 또는 ‘지식인’ 얘기를 듣던 시절은 70년대 말에 끝났다고 볼 수 있다. 박사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대학 졸업생에게 돌아갈 ‘지식인’이란 ‘훈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대학에 다니는 학생 대부분이 졸업 후에 비판적이고 독립적인 시민으로 살아갈 사람들이다.
나는 대학교육과 인문학의 위기를 이러한 현실 위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대학생이 졸업을 하고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시민으로 살아가는 아주 중요한 요소는 직장을 잡고,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그 일에서 작지만 새로운 것을 만들고, 여가를 즐길 줄 알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맞게 자신을 계속 충전할 줄 아는 것은 현대사회를 사는 시민의 기본이다. 학생들이 취직에 눈이 멀어 학과공부를 게을리한다는 한탄이나, 더 이상 사회와 민족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선배와 교수들의 불만이 자주 들리지만, 이들 선배나 교수들이 우리사회가 대학 졸업생들에게 직장을 골라 갈 수 있는 사치를 허용하는 사회가 아님을 모를 리 없다.
학생들이 취직에만 몰두하는 사태를 안타까워하는 대학교수들은, 힘을 합쳐서 대졸자가 치르는 공무원 시험과 고시, 방송사·대기업·언론사와 같은 인기 직장의 입사시험을 대학에서의 공부와 더 밀접하게 바꾸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학생들이 취직을 위해 대학의 전공과는 무관한 공부를 한다고 나무랄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취직할 때 치러야 하는 준비와 대학의 교육을 더 비슷하게 만들어서 학생들을 이중의 부담에서 덜어주어야 대학교육을 정상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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