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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기획|‘문화 21세기’뉴리더 뉴트렌드 ② 미술

디지털 시각예술을 창조하는 베스트 9

  • 이영철 계원조형예술대학 교수

디지털 시각예술을 창조하는 베스트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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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수도 브뤼셀 다운타운 일대를 전시장으로 이용해 열린 전형적인 유럽형 비엔날레 마니페스타의 두 번째 전시 행사에서, 지도를 따라 한 건물을 찾아 들어가는 순간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평평하지만 거대하고 깊은 느낌인 코발트 블루의 평면이 건물 중간 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물이 가득 찬 풀이다. 마치 아직 특정한 이미지가 나타나지 않은 채 한순간 정지하고 있는 아주 거대한 영상 스크린처럼 그것은 우리 눈앞에 떡 버티고 누워 있다. 가로 세로가 각기 3~4m 크기의 자유로운 페인팅이 물 속에 비스듬히 처박혀 있고 풀 옆 벽면에는 크기가 다른 여러 개의 유화 작품이 바닥에 놓여 있다. 이것이 바로 자르네 멜가드(Bjarne Melgaad)의 작품이다.

어수선하게 흩어진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마치 네트 위를 서핑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한쪽 벽에는 고양이와 개의 대가리가 그려진 스티커들이 중얼거리듯 내뱉은 낙서들과 함께 벽을 가득 메웠고 키가 큰 지저분한 나무 한 그루에다 꼭대기부터 바닥까지 싸구려 두루마리 화장지를 무질서하게 늘어뜨려 일견 거대한 파티가 막 끝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한 귀퉁이에는 펭귄이 뒤뚱거리며 걷는 장면이 나오는 소형 TV세트가 자연스럽게 놓여 있다. 이 작가의 극히 산만한 설치 작업은 사라져가는 것들이 한순간에 중첩된 ‘지금 여기’의 디지털 세계를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신선하게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모든 사물은 아트 오브제의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일종의 사건 현장의 참가자들로 존재 의미가 있다. 이 작업은 인터넷 사이트의 디지털 세계를 경험하는 것과 유사한 정서를 환기시킨다. 상황을 지켜보는 관객은 대상에게서 거리를 유지하는 관조적인 주체가 아니라 사건의 일부인 매개 관조자(tele-spectator)가 된다.



사라 제 : 허공을 가르는 인텔 펜티엄의 칩들

1969년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난 여성 작가 사라 제(Sarah Sze)는 1997년 첫 개인전을 열었고 지금은 국제적으로 알려진 작가가 되었다. 그녀는 패스트 푸드, 마이크로 소프트화한 사물들, 지겨운 비디오 게임 등을 연상시키는 자유로운 공간 설치 작업을 하지만 어떤 구심력이나 무게중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라 제의 작품은 물리적인 공간을 독특하게 연극적인 구조로 해체, 재구성해서 ‘일시적인’ 스펙터클한 버전을 보여준다. 그것은 뉴욕·홍콩과 같은 국제적인 도시와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픽션 과학도시의 중간쯤인 독특한 지대로 보인다. 혹은 어린이가 꿈꾸는 우주정거장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가 익숙하게 다루는 소재는 일상 소품들, 즉 비누, 성냥, 의료약, 면도칼, 사탕, 박스 등으로 마치 손오공의 아주 작아진 여의봉이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나 봄직한 방 안 풍경처럼 신비한 분위기마저 감돈다. 그러나 동시에 복잡하게 접합·병렬되어 있는 이 물건들의 전체적인 이미지는 디지털 세대의 감수성을 직접적으로 전달해주는 일종의 인텔 펜티엄의 칩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밀폐된 작은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상상의 거대 공간, 아주 짧은 기억들의 무질서한 교차, 즉 시간들의 엇갈림, 원근법적인 시점을 도무지 찾을 수 없는 다시점적 공간구성, 물체를 극미시적으로 접근하는 방식 등은 오늘날 젊은 작가들이 만들어내는 ‘미래형’ 미술의 공통된 특성이라 할 수 있다.

파비안 마르카치오: 회화에 대한 생태학적 접근

디지털 시대의 정서에 걸맞은 회화는 어떤 것일까. 다양한 작품들이 있겠지만 대표적 모델을 예시하자면 1963년 아르헨티나 출생인 파비안 마르카치오(Pabian Marcacchio)의 회화를 들 수 있다.

그의 작품 표면은 붓질(브러시 스트로크)과 배경, 캔버스와 이미지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생태적 변형 과정에 있는 유기물처럼 보인다. 피처럼 붉은 색과 짙은 녹색으로 착색된 각각의 형태는 서로 뒤섞이고 팽창하면서 계속 모양이 바뀌다가 한순간 얼어붙은 모양이다.

비극적이고 그로테스크하고 고딕 분위기를 지닌 그의 작품은 사뮈엘 베케트의 연극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텅빈 무대 세트의 쓰레기더미를 닮은 일종의 세노그라피(senography)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돌연변이적 잡종 ‘상태’를 나타내는 그의 작품은 한마디로 ‘회화의 재난’이라 표현할 만하다. 어떤 희망도 좌절시키는 회화와 조각의 완벽한 붕괴를 보여준다.

그의 작업은 모더니스트적 전통이 회화적 제스처에 제공한 일말의 해방적 기미도 없으며 유일한 믿음은 오로지 힘과 운동뿐이다. 사방으로 팽창하고 서로 갈라치고 섞이는 이질적인 힘, 방향, 자연의 생태를 닮은 ‘카오스’뿐이다. 파비안 마르카치오와 유사하게 생태학적 시각을 취하지만 구상적 이미지를 통해 좀더 현실 비판에 접근하는 작가도 있다.

윌리엄 켄트리지 : 생태학적 시각에서 바라본 식민지 담론

1957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에서 태어난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는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주목을 끌었다.

그는 사실적인 드로잉 수법으로 긴장감 있는 프로젝션 영화를 제작했다. 역사와 기억, 우리의 몸속에 하나의 재난처럼 깃들인 폭력성을 고발해내는 그의 작품은 고야의 ‘전쟁의 재난’(1810~20)을 떠올린다.

그는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정책이 남긴 상처들, 기억, 산업, 인종정치학, 부패와 타락의 풍경을 그린다. ‘프로젝션을 위한 드로잉’이라는, 일곱 개로 나뉜 필름에서 풍경은 기억과 탈기억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언제든 흘러넘치고 변화해가며 예측할 수 없이 전개된다.

그의 작품에 지극히 아름답게 그린 회화적 풍경의 이미지는 아프리카 초원을 ‘그림 같은’ 풍경이라고 말하는 식민지적 수사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끝없이 열려 있고 점유되지 않은 아프리카의 초원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위선임을 고발한다.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도착하기 이전의 아프리카는 텅비어 있고 누구도 소유하지 않았던 땅이라는 식의 표현은 그 자체가 식민적 담론의 수사일 뿐이라고 한다. 켄트리지는 풍경이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순수한 자연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태도를 비판하면서 풍경을 벌거벗은 몸, 즉 야위고 멍들고 파괴된 몸으로 묘사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서 힘차고 율동적인 드로잉들은 고고학적인 발굴과정과 동등해 보인다. 즉 그는 땅을 풀어헤쳐 땅이 스스로를 드러내게 한다. 그의 작업 속에서 땅이라는 풍경은 산업적인 목적으로 채광되든 경작되든 인간의 욕망에 의해 늘 남용되는 현장으로 드러나고 있다.

금년 봄 광주비엔날레에 초대된 그의 작업은 80년대 한국의 민중미술과 그 이후의 작업들과 비교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땅에 대한 사회생태학적 접근은 좀더 넓은 지평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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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철 계원조형예술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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