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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태르포|정자은행을 찾는 사람들

“의대생 OK, 곱슬머리는 안돼”

  • 하태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의대생 OK, 곱슬머리는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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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은행이 중요시하는 것 중 하나는 정자를 공여받아 장래 부모가 될 사람들의 경제력과 사람 됨됨이. 남편의 경우 자신의 정자로 임신된 아이가 아니라는 의식이 잠재해서 아이가 지나치게 말썽을 부리거나 정신적인 질환 등 병리현상을 보일 경우 아이를 내팽개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경제적인 위기에 몰릴 경우에도 아이에 대한 양육책임을 다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주민등록등본이나 재산세 납부증명서 등을 요구하기도 한다.

여성전문 종합병원인 미즈메디병원(옛 영동제일병원)은 부산대보다 일러 1996년부터 본격적으로 정자은행을 운영하고 있는데 현재 보유하고 있는 정액캡슐 수만 해도 100여개다. 미즈메디병원은 19~29세까지의 대학생과 대학원생을 정자제공 ‘인력풀’로 삼고 있다. 정자공여자의 연령층을 19~39세로 정한 미국보다도 엄격한 기준이다. 이 병원의 정자제공자는 조정현 부원장의 출신대학교 학생이 대부분이다. 주로 인적인 연결고리를 이용한 ‘점조직’식 정자수급방식을 택하고 있는 셈이다. 예과 학생들이 회식을 할 경우 조박사에게는 고급 정자를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조정현 박사는 “서울대 연세대 등 대학신문에 정자 모집 광고를 내려고 했으나 학교측에서 난색을 표명하는 바람에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며 “정자공급이 양성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재 상황에는 안정적으로 양질의 정자를 확보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즈메디병원은 정자제공자의 신체적인 특성과 혈액형 등 기본사항은 물론 고객의 요구가 있을 경우 출신학교와 전공정도는 알려준다. 시술비는 40만∼50만원 정도.

한달에 3,4건의 인공수태시술을 해주는 삼성제일병원도 정자은행에 관한 한 국내 최상급 수준을 갖추고 있다고 자부한다. 300여 개의 정자샘플을 보유하고 있는 삼성제일병원은 신장 165∼185㎝의 평균적인 20대 대학생의 정자를 보유하고 있다. 연세대 성균관대 한양대 재학생이 대부분.



서울대가 정자은행을 열기 전까지 서울대에서 의뢰한 비배우자 인공수정을 전담하던 산부인과 전문병원 함춘클리닉은 서울의대생의 정자만 고집한다. 자신의 정자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면 가능한 한 가장 양질의 정자를 택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비교적 두뇌 능력이 뛰어난 서울의대생의 정자를 선호한다는 것. 김기철 박사는 “이외에도 우리 병원에서는 다른 병원과는 달리 염색체 검사까지 정액검사 항목에 포함하고 있어 비배우자 인공수정으로 인해 유전적으로 이상이 발생할 가능성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술비는 25만원선.

그렇다면 불임부부들이 정자은행에 와 자기가 원하는 정액을 마음대로 고를 수 있을까? 미국 등 상업적 정자은행이 발달한 곳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 불행히도 우리나라에서는 안 된다. 정자공여자의 사진이나 자세한 신상을 공개할 경우 익명성이 보장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밖에 각 병원이 확보하고 있는 정자 샘플 수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객의 수요에 부응하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 한 병원의 정자은행 관리자는 “시장이 공개되지 않은 탓에 정자은행에 정자를 제공하는 예금자가 태부족인 상황”이라며 “불임부부가 찾을 때 즉시 필요한 정자를 공급하는 것만도 벅찰 때가 많다”고 털어 놓았다.

구두닦이의 정액(精液)

갓 받아낸 따끈따끈한 정자를 그대로 예비엄마의 체내에 집어넣어 인공수정하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는 그야말로 아무 대책없이 즉흥적으로 정자를 모았다. 물론 좋은 환경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의대생들이 주요 ‘희생자’였기 때문에 위험하지는 않더라도 감염된 정자가 제공될 가능성을 늘 안고 있었던 셈이다. 우스갯소리로 들리지만 지도교수로부터 정액을 받아오라는 추상 같은 명령을 받은 예과학생이 학교구내에서 구두를 닦는 사람에게 소정의 수고료를 주고 정자채취 ‘하청’을 맡기기도 했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던 시절도 있다.

‘자위행위를 하면 돈을 드립니다’라는 광고가 버젓이 나오는 미국의 경우 전국에 150여개 정자은행이 성업중이며 한 번에 40달러(약 5만원) 정도를 준다. 정자은행의 최적 입지조건은 단연 대학교 주변으로 ‘캘리포니아 냉동은행’ 같은 대규모 정자은행은 하버드, MIT, 스탠퍼드, 버클리 등 명문대생의 정자를 서둘러 사들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정자는 덴마크 남성의 정자로 없어서 못 팔 정도란다. 덴마크의 크리스 정자은행은 호주 미국 동구권 등 세계 25개국에 덴마크 남자의 정자를 수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자은행별로 차이는 있지만 교통비조로 6만∼7만원을 지급하는 것이 상례. 그러나 병원측은 정자제공을 위해서는 매독검사, 간염바이러스검사, 에이즈검사, 소변검사, 염색체 확인 등을 거치기 때문에 돈을 받으면서 건강검진도 공짜로 하는 셈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부산대병원과 서울대병원의 경우는 조금 다른 방식을 채택한다. 현금을 주는 대신 문화상품권이나 도서상품권 등을 지급한다. 이들이 현금 대신 유가증권을 지급하는 논리는 이렇다. 매혈과 헌혈을 비교했을 때 헌혈의 경우가 피의 품질이 좋았듯이 돈을 받고 정자를 공여하는 방식은 자칫 상업적인 목적 때문에 몸을 판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자리잡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 이와 같은 ‘철학(?)’에 기반을 두었는지 함춘클리닉은 공식적으로는 정자제공에 대한 금전적·물질적인 보상을 전혀 하지 않는다.

대신 정자은행은 보관중인 정자를 고객에게 내줄 때 20만∼25만원을 받는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양질의 정자를 제공한 것은 물론 질소탱크 등 특수시설에 넣고 보관해 온 대가인 셈.

어쨌든 정자를 제공하는 대가로 고작 6만∼7만원의 현금을 받거나 문화상품권 정도를 받는 현실적인 여건을 감안할 때 돈을 보고 자발적으로 정자를 공여하는 경우는 드물다.

돈벌이라 할 수 있나요?

그래도 몇 년 전까지는 용돈을 벌기 위해 병원을 찾는 대학생들이 그런대로 정자 공급망 노릇을 했지만 요즘은 이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한 의대 교수는 “과외 허용조치가 정자은행의 씨를 말렸다”고 말했다.

돈벌이가 쉬워진 대학생들이 더는 번거롭고 찜찜한 ‘아르바이트’를 원치 않게 됐다는 것. 정자를 제공하려면 먼저 에이즈 매독 간염 등의 감염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혈액 검사를 받아야 한다. 게다가 원칙대로 하자면 에이즈균의 잠복기를 감안해 6개월 후에 다시 검사를 받아야 비로소 정자를 제공할 자격이 주어진다. 또한 자위행위를 통해 정액을 받아내는 일이 수치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다. 결코 ‘돈 보고 할 짓’은 못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말 정자은행에 자신의 정자를 기탁한 의대생 A씨도 선배의 권유를 받고 어렵사리 정자를 제공한 케이스. 대놓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가끔씩 절친한 친구들과 정자제공에 관한 토론을 벌이는데, 혐오감을 표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혈육이 활보하고 다닌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끔찍하다거나, 다른 사람의 정자를 받아 태어난 사람이 자신의 ‘정자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는 해외토픽 기사가 남의 일 같지 않다는 얘기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A씨는 “선뜻 내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정자를 기증할 수 있었던 것은 예과시절 생명과 윤리라는 시간에 들었던 강의 때문이었다”며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랑하는 자녀를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 보통사람에게 정자를 공여하는 것도 작은 사랑의 실천이라는 생각에 결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자를 제공할 ‘인력풀’을 갖출 수 없다고 해서 아무 정자나 다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미즈메디병원의 전종식 정자은행장은 “고등교육을 받은 육체적·정신적으로 건강한 젊은 남성이라야 대상이 될 수 있다. 유전적 측면을 고려해 키가 너무 크거나 작아도 안 되고, 피부색이 너무 검거나 하얘서도 안 된다. 한국인에겐 드문 편인 곱슬머리도 곤란하다”고 말한다. 정자가 모자라는데도 헌혈 캠페인 같은 대대적인 정자기증운동을 벌일 수도 없는 사정이 여기에 있다.

그나마 몇몇 대학병원이나 대형 종합병원에서는 의대생과 젊은 전문의들에 의해 정자은행의 명맥이 근근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지적 능력이 우수한데다 무엇보다 유전성·감염성 질환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어 비교적 신뢰도가 높은 정자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

게다가 세계보건기구(WHO)가 제시한 정자의 가임 최저선은 1회 사정시 정액 2㏄ 이상, 정액 1㏄당 정자 2000만 마리 이상, 또한 정자의 30% 이상이 정상형태여야 하며 50% 이상이 정상적인 운동성을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어렵사리 받은 정자라도 20% 정도는 폐기처분된다.

정자은행은 정자의 공여과정에 생길 갖가지 윤리적·법적 문제 때문에 정자를 제공하는 사람이건 받는 사람이건 복잡하고도 상세히 기술된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보고 서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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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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