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일부다처제는 인도주의적 목적으로만 이용되지는 않았다. 돈 있고 힘 있는 남자들이 많은 여자들을 합법적으로 거느릴 수 있는 장치로 이용된 경우가 더 많았던 것이다. 능력 없는 남자들은 평생 여자 구경도 못 하고 노총각 홀아비로 늙어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낡은 전통을 허물고 새로운 세계를 제시하려 했던 마호메트는 이처럼 불공평한 결혼제도를 시정하지 않고는 그가 바라는 세상이 실현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코란에다 ‘누군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다면 두 명, 세 명, 네 명의 여자와 결혼해도 좋다’는 구절을 두어 아내를 네 명까지로 제한했다. 지금과 같은 ‘4인처제’는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그러나 4인처제는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므로 그것이 무리없이 굴러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난 택시기사가 두 아내와 산다고 하기에 “두 여자를 데리고 사니 정말 좋겠소”라고 했더니, 그는 “물론 그렇긴 하죠. 그렇다고 내가 여자를 밝힌다거나 마냥 행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시오. 내게도 나름대로 어려움은 있으니까요”라며 두 여자와 공평하게 잠자리를 함께 해야 하는 고충을 털어놨다.
그가 말하는 공평함이란 질(만족감)보다는 양(횟수)이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굴레려니 싶었다. 하긴 코란에도 “만일 공평하지 못하다고 스스로 판단되거든 한 명으로 족하라”는 단서조항을 달아놓았다.
여성 할례, 일부다처제의 유산
지금과는 달리 일부다처제가 일반적이던 전통사회에서는 ‘모든 아내에게 골고루 사랑을 베풀라’는 도덕적 의무만 강요한다고 해서 그 제도가 제대로 굴러갈 리 없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제도적 장치 내지 신화가 존재해야 했다. 여성 할례는 바로 그걸 위해 등장했다.
그곳에선 물론 남자들도 할례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성 자신의 위생을 위해 행해질 뿐이다. 물이 귀한 땅이라 성기를 자주 씻을 수 없으므로 음경 표피 안에 때가 낄 수 있는 여지를 아예 없애버린 것이다(요즘은 한국 아이들도 너나 할 것 없이 포경수술을 받는다. 이것도 할례의 일종인데, 이는 미국의 소아과 의사들이, 같은 사막문화권인 유대인들의 할례의식이 소아 위생에 좋다고 해서 시행한 것을 ‘미국 것이라면 다 좋은 것’이라며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다).
이에 반해 여성의 할례는 여성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본능적인 성욕을 억제하고자 성기 일부를 잘라내는 여성 할례는 일부다처제라는 울타리 안에서 투정부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다시 말해서 공동체 유지를 위해 여성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제도다.
그런 문화권에선 할례를 받아야 비로소 여성으로 대우받는다. 막대한 수술비(그들의 소득수준에 비해 큰 돈이다)를 감당하기 어려운 집에서도 딸아이가 서너 살이 되면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생일선물’로 할례를 시킨다. 그리고 할례를 받은 당사자는 그런 불완전한 몸으로 평생을 살아간다. 고등교육을 받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아는 머리 큰 여자들이 결혼을 기피하는 것은 자신이 그런 식의 할례를 받은, 그래서 ‘문제가 있는 여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질투 모르는 이슬람 여인들
아프리카 북동부의 소말리아. 그 어느 시골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와리스 디리는 14살 때 60살 먹은 돈 많은 노인에게 낙타 다섯 마리에 팔려 시집을 갔다. 그녀가 남편의 늙은 얼굴을 처음 본 것은 신혼 첫날 밤이었다.
더 이상 살맛을 잃어버린 디리는 그 자리에서 빈손으로 집을 나가 며칠 밤낮을 걷고 또 걸어 수도 모가디슈로 도망갔고, 거기에서 어느 패션 사진작가의 눈에 띄어 런던으로 건너가 세계적인 패션모델이 됐다. 그녀는 고향땅에서 보고 겪은 여성에 대한 억압구조를 ‘사막의 꽃’이라는 자전적 에세이에서 리얼하게 그려냈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바깥으로 튀어나온 클리토리스, 소음순, 대음순이 차례로 잘려나갔다. 상처가 아물면 거기엔 성기가 있었다는 흔적만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납작한 흔적만이 배뇨와 월경통로 구실을 할 것이다. 그런데 누구 한 사람 이런 할례가 무엇 때문에 행해지는지 설명해주지 않는다.”
디리는 자기네 마을에서 이 ‘성스러운’ 의식을 도맡아 행하는 하나밖에 없는 ‘무당 겸 의사’에게 ‘살인녀’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녀의 손에 수많은 어린 딸이 죽어갔다며.
아프리카를 여행하다 비인간적인 할례 현장을 직접 목격했던 미국 남부 태생의 흑인 여성 작가 앨리스 워커 또한 ‘컬러 퍼플’이란 소설에서 할례를 받은 주인공 타쉬가 어떻게 자아를 찾아가는지를 그려 미국에서 할례 반대운동을 촉발하기도 했다. 워커는 어느 방송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 사회에서 ‘왜 할례를 해야 하는가’ 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그 사회가 그때껏 가꿔왔던 신화를 깨뜨리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져 엄청난 사회적 압력을 받게 된다.”
그렇게 길든 탓일까. 이슬람 세계의 여자들은 좀체 질투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국경사무소에서 한 남자가 여러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출국수속을 밟는 광경을 봤는데, 아내들은 한곳에 둘러앉아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한 아이가 어딘가로 뛰어가자 그 아이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여자가 쫓아가 아이를 데려왔다. 친어머니로 보이는 또 다른 여자는 그 아이가 다가와 손을 내밀 때에야 비로소 손을 잡아줬다.
그들의 행동에서 투기나 긴장감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 아내에게 따로따로 집을 얻어주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집에서 허물없이 함께 지낸다고 하니 서로 마찰없이 살고 있다는 것을 이보다 잘 설명해주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일부다처제라는 제도가 있다고 해서 누구나 여러 여자를 거느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선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 결혼생활에 필요한 살림도구를 장만하는 돈이야 당연한 것이고, 살아가다가 이혼할 수도 있으므로 그럴 경우에 대비해 신부의 아버지가 보험금 차원에서 요구하는 돈까지 지불할 재력이 있어야 결혼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 누가 감히 한 여자도 아니고 둘, 셋을 넘보겠는가.
시리아의 작은 도시 데이르 알 조르에서 만난, 사히르라는 스무 살 난 청년이 필자를 자기 집으로 초대,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형과 형수를 소개하면서 결혼비용을 귀띔해줬는데,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앞으로 15년 동안 번 돈을 한푼도 쓰지 않고 꼬박꼬박 모아야 그만한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했다.
극진한 자식 사랑
정상적인 이슬람 사회의 사정이 이럴진대, 걸프전을 일으킨 벌로 서방세계로부터 몇 년째 가혹한 경제제재를 받고 있어 빵조차 먹기 힘든 이라크 총각들의 처지는 어떻겠는가. 노총각은 해마다 늘고, 데리고 갈 사내가 나타나지 않으니 처녀들도 덩달아 나이를 먹는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후세인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라는 경제제재가 많은 이라크 젊은이들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 셈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결혼을 하게 되면 여자들은 ‘코흘(kohl)’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중동의 시골지역을 다니다 보면 지금도 쉽게 볼 수 있는 코흘은 상류계층에 속하지 않는 보통 여자들이 결혼했다는 표시로 안티몬이라는 광물에서 추출한 검은색 안료로 이마와 턱에 몇 가닥 선을 그은 것을 말한다.
이슬람 전통사회에서 여성들은 코흘을 통해 기혼녀로 대접받았고, 남성들은 코흘을 한 여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결혼한 인도 여성들이 눈썹과 눈썹 사이에 찍는 ‘빈디(bhindi)’라는 붉은 점과는 달리 코흘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은 집단적 결속이나 부족간의 동질성을 나타내는 문신에 가깝다. 이것 또한 여성에게 굴레라 하겠다.
아랍 여성들은 아이를 많이 낳는다. 7∼8명이 보통이다. 그들의 다산풍습은 유목생활을 해온 그들의 삶의 방식으로 봐서는 당연한 것이나, 지금에 와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은 전통의 보존이라는 이유 외에 피임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
지난 20세기에 여성들은 크게 두 가지 전쟁을 치렀다. 19세기 말에 시작되어 1920∼30년대에 타올랐던 참정권 투쟁이 그 하나였고, 다른 하나는 60년대에 제기된 출산 자율권 투쟁이었다. 특히 출산자율권, 즉 피임권의 획득은 여성의 신체에 가해졌던 갖가지 억압을 걷어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런 노력이 하나 둘 성과를 거둬 여성들은 마침내 복종과 예속의 굴레를 벗고 세계 곳곳에서 변화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피임법 쟁취가 이런 변화를 가능케 했다면 이슬람 여성들이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많다고 할 수 있다. 그곳에는 다른 진료과목에 비해 산부인과와 소아과가 유난히 많으며, 여성들은 평생 아이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직장에 나가더라도 아이를 데리고 가 젖을 빨리고 함께 놀아줘야 한다. 이를 서구적 시각에서 보면 후진적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 무엇보다 자녀를 귀중한 존재로 보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존경스럽기도 하다.
이슬람 사회의 할례와 다산, 그리고 자녀에 대한 극진한 보살핌은 유대인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예루살렘 거리를 걷다 보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다니는 유대인 아버지들을 심심찮게 목격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것은 옛날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다는 ‘통곡의 벽’을 향해 자녀들과 함께 기도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다함께 기도를 올림으로써 자식들에게 그들의 하나님, 야훼의 가르침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남녀 구분이 엄격한 유목사회의 전통에 따라 통곡의 벽에서는 남자들의 공간과 여자들의 공간이 나뉘어 있어 아버지는 아들와 함께, 어머니는 딸의 손을 잡고 기도를 올린다. 하지만 집에서는 그런 구별이 없으므로 가정에서의 가르침은 어머니가 전담하다시피 한다. 그래서 유대인 천재들은 모두 어머니들이 만든다고도 한다.
중동을 지나 알프스를 넘어 다시 그 북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넘어가면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차도르’ ‘일부다처제’ ‘할례’와 같은 단어 대신 어쩐지 가볍고 화사한 느낌을 주는 ‘프리섹스’란 말이 귀에 자주 들려온다. 입센이 ‘인형의 집’을 썼던 그곳은 여성해방운동의 진원지이자 프리섹스의 고향이다.
그곳을 처음 찾았을 때만 해도 프리섹스를 무슨 성개방주의쯤으로 생각한 나머지, 거리에서 성을 사고파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곳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그렇긴 해도 그들은 성에 관한 한 철저한 리버럴리스트였다. 아주 활짝 열려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성은 오직 사랑와 결부되어 있을 뿐, 다른 어떤 것과도 무관했다. 심지어 돈과도. 그런 이유로 성이 거래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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