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7월호

‘김정일 쇼크’ 은둔자에서 슈퍼스타로

  • 신동아 특별취재반

    입력2006-09-22 13: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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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모습들을 적지 않게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김정일은 서방세계에 그저 ‘수수께끼의 인물’ 혹은 ‘위험한 인물’ 정도로 인식되어온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는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탈색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6월14일 2차 단독 정상회담에 앞서 “구라파에서 나를 은둔생활한다고 말한다는데, 나는 그동안 외국에도 많이 다녔다. 이번에 김대통령이 찾아오셔서 나를 은둔에서 해방시켰다”고 농담을 건네는 등 시종일관 여유있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공항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맞이하는 그의 행동은 자연스럽고 활기차며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안주섭 대통령 경호실장과 악수하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라면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 좌중의 웃음을 유도했다.

    그는 김대통령에게 “지금 세계가 우리를 주목하고 있다. 김대통령께서 왜 방북했는지, 내가 왜 방북을 승낙했는지에 대해 의문 부호를 갖고 있다. 2박3일 동안 대답해줘야 한다”고 호기있게 말했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의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으로 직접 찾아가 장시간 정상회담을 가짐으로써 김대통령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연장자’인 김대통령에게 감동적인 방법으로 예우를 차렸고, ‘겸손하고 적극적으로 일하는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외신을 통해 세계에 알렸다.



    한마디로 그는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중국 장쩌민 주석과의 정상회담→김대중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밟으면서 전세계의 이목을 평양과 자신으로 돌려놓은 다음, 단번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부각시킨 것이다. 그는 분명히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세계 속의 김정일’이라는 이미지를 심으려 했고, 남한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상대로 하한가였던 자신의 주가를 일거에 상종가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김정일에 대한 세 가지 평가

    그러면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보여준 그의 모습이 참모습인가. 아니면 우리가 그 동안 너무 몰랐기 때문에 그의 새로운 모습이 더 크게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인가? 우리는 그동안 김정일을 제대로 본 것일까, 아니면 허상을 보아온 것일까?

    지금까지 남한에서의 김정일에 대한 평가는, 인상 비평의 기준으로 보면 대체로 세 갈래로 나타난다.

    하나는 과거부터 김정일을 결론적으로 ‘나쁜 사람’으로 보아온 ‘전통적인’ 평가다. 또 다른 한 갈래는 비록 일부의 주장이긴 하지만 ‘대단한 인물’로 보려는 듯한 평가다. 북한에서 발간한 ‘김정일 전기’ 류에 바탕하여 이른바 ‘내재적 연구’ 방식으로 북한의 선전물을 별 여과없이 답습한 책도 있다. 이러한 책들은 김정일에 대한 관점이 문제가 아니라, 대체로 사실 관계조차 제대로 검증이 안된 것들이다.

    나머지 한 갈래는 김정일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긍정적인 평가를 동시에 다룬 것이다. 최근 들어 비교적 사실에 바탕한 책들이 나오면서 이러한 시도도 활발해지고 있는 편이다.

    중요한 것은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김정일에 대한 인상이 180도 바뀌었다고 해서 흥분할 필요도 없고, 또 괜히 깎아내릴 필요도 없다는 게 북한전문가들의 말이다.

    그는 김일성으로부터 수십 년 동안 ‘제왕학’을 습득해왔고, 20여년 간 북한 사회의 지도체제인 수령주의 하에서 독재자로 군림해왔다. 그의 말대로 ‘젊은 통치자’이긴 하지만 여러 가지 경험을 겪어본 정치인이다. 그런 사람에게 자신감 있고 여유있는 태도나 유머 등이 없을 것이라고 미리 예단하는 것이 잘못된 일일 것이다.

    이와 동시에 TV에 비쳐진 몇몇 장면을 보고 그에 대한 평가를 굳히는 것 또한 경솔한 태도일 것이다.

    어느 정치 지도자를 평가할 때 크게 두 가지 경로를 택하게 된다. 하나는 정치 지도자로서의 평가, 또 하나는 ‘인간’으로서의 평가다. 말하자면 ‘정치인 김정일’과 ‘인간 김정일’에 대한 평가가 병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정치인 김정일’일 것이다. ‘인간 김정일’은 그의 사생활과 관련한 주변의 소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정치인 김정일’은 북한의 2300만 인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남북한과 동아시아에 포괄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부분이 아마도 ‘정치인 김정일’의 측면일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 김정일’의 측면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김정일의 정치’도 결국 ‘인간 김정일’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 정치인 김정일을 차분하게 바로 보고, 그가 그동안 해온 정치적 행위들을 바탕으로 엄밀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해주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주체사상의 유일한 해석권자

    먼저 북한에서 김정일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에 대해 ‘북한식 관점’에서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남한의 대통령과 북한의 ‘지도자 동지’는 그 지위에서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현재 북한에서는 공식적으로는 김정일을 수령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냥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나 ‘김정일 장군님’으로 부른다. 북한에서의 ‘공식 수령’은 아직도 김일성이다. 수령은 호칭이지 직함이 아니다. ‘어버이 수령’ 김일성의 직함은 당 총비서 겸 국가주석이었고, 김정일은 당 총비서 겸 국방위원장이다.

    그렇다고 해서 김정일을 수령으로 인정하지 않는 북한 사람은 거의 없다. 속마음이야 어떻든 적어도 겉으로는 김정일을 수령으로 받들어야 한다. 그게 제도화되어 있다. 김일성 사망 후 ‘김일성이 김정일이고, 김정일이 김일성이다’는 구호가 나왔다. 이는 김정일이 실질적인 수령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수령’은 사상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유일한 지도적 권한을 갖는다. 스탈린의 이론에 따르면 수령은 ‘가장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상 분야의 리더십이 중요한데, 김정일은 북한의 지도이념인 주체사상의 ‘유일한 해석권자’로 되어 있다.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자신이 ‘사상의 대가’처럼 행세하길 좋아했다. 72년 닉슨이 모택동을 만나 미·중간의 현안에 대해 언급하자, 모택동은 “그런 것은 총리(주은래)와 상의하시고, 우리는 철학이나 토론하자”고 말했다. 자신은 중국과 세계 인민의 사상적 지도자이지, 시시하게 현안문제를 말할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이 다 그랬고 김정일도 마찬가지다. 김정일은 82년 ‘주체사상에 대하여’를 자신의 명의로 발표했고, 그 외 모든 노동당의 사상 관련 공식 문건들은 김정일의 이름으로만 발표되어야 한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수령’으로 불린 사람은 두 명 있었다. 스탈린과 김일성이다. 스탈린 체제는 1953년에 끝났다. 그후 50년 가까이 지났지만 현재의 북한은 아직도 분명한 스탈린 체제다. 프랑스의 유명한 좌파 신문 ‘리베라시옹’은 지난 4월18일자 보도에서 평양 등지를 현지 취재해 북한사회를 ‘지구상 남아 있는 유일한 스탈린 체제, 공산주의의 쥬라기 공원’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으로 남북관계는 새로운 역사의 장(場)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는 분단 55년만의 일대 전환점이자 민족의 쾌거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김정일 체제의 성격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1인 독재의 수령주의를 계속 고수하면서 경제발전과 외교 수립에 박차를 가할지, 아니면 노동당을 민주화시키고 적어도 스탈린 체제 이후의 소련 체제나 중국식으로 진입할지는 더 두고 봐야 한다.

    그러면 정치인 김정일은 어떤 자격으로 북한을 다스리는가. 북한은 기본적으로 주체사상이 제시하는 지도 노선에 따라 당에서 모든 주요 정책이 결정되면, 국가가 이를 받아 집행하는 체제다. 즉 당은 지도기관, 국가는 집행기관인 것이다. 군도 당의 지도와 통제를 받는다. 따라서 당이 모든 주요 권한을 갖고 있다.

    김정일은 당 총비서의 자격으로 북한을 다스린다. 다만 북한이 김일성 사망 후 체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김정일이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되면서 국방위원회에 국가 수호의 권한을 준 것일 뿐이다.

    북한은 당과 사상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당과 사상을 장악해야만 1인자가 될 수 있다. 현재 북한에는 ‘주체사상의 유일한 해석권자’인 김정일 다음으로 당과 사상을 틀어쥐고 있는 사람이 없다. 오로지 1인자 김정일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김정일의 대표적인 스타일로 크게 두 가지가 확인되었다. 하나는 분위기와 좌중을 장악하는 능력이다. 유머감각은 여기에 덧붙인 양념이다. 다른 하나는 처음부터 자기 페이스대로 몰고 나가는 연출 능력이다.

    정상회담 2박3일 동안 그가 밖으로 드러낸 ‘실수’는 은둔생활 발언을 하던 중 외신을 두고 “적들은…”으로 표현했다가 금방 다시 고친 것 정도다. 그 외에는 적절한 유머와 자신감을 바탕으로 시종일관 주도권을 잡아갔다. 서방세계를 ‘적들’로 표현하는 것은 그의 평소 생각과 습관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대체로 ‘형식주의’를 싫어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고상하고 유식하게 말하는 것보다 직설적 표현이 더 ‘노동계급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김정일이 사람을 장악할 줄 알고 자신의 계획대로 몰고 나갈 줄 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김정일에 대해 “사람 다루는 솜씨는 오히려 나보다 한 수 위”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황장엽씨는 망명 후 언론을 통해 “그는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분위기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해 가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황장엽씨는 회고록 등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김정일은 이러한 재주를 갖고 있었다고 언급했다.

    김일성은 59년 1월 소련공산당 21차 대회에 참석하면서 김정일을 데리고 간 적이 있다. 김정일이 남산 고중(고교) 재학 시절인 17세 때의 일이다. 이때 황장엽 서기(비서)도 김일성을 수행했는데, 김일성이 방에서 나와 구두를 신으려 하자 다른 수행원들을 제치고 김정일이 아버지의 어깨를 부축하면서 신발을 신도록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그때 김일성의 나이는 47세였다. 젊은 김일성이 신발을 혼자 싣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17세의 김정일이 ‘맹랑한 제스처’를 보인 것이다.

    아울러 김정일은 김일성의 소련방문 일정을 자신이 주도해서 짰다고 한다. 저녁에 수행원들에게 아버지가 무엇을 했으며, 기분은 어떠했는지 등등을 열심히 묻더라는 것이다. 따라서 김정일의 사람 다루는 솜씨는 타고난 ‘끼’에다 오랫동안 정치생활을 하면서 갖춰진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북한선전 기관에서는 김정일을 ‘사람을 자애롭게 아낄 줄 아는 인덕(仁德) 정치의 화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용인술은 대체로 궁지에 빠진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거나, 아니면 정치적으로 무자비하게 제거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 용인술은 모택동-김일성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모택동, 김일성에게 배운 용인술

    궁지에 빠진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자기 사람으로 만든 대표적인 예가 오진우의 경우다. 사망한 오진우 전 인민무력부장은 항일 유격대 시절 김일성의 당번병이었다. 오진우에 대한 김일성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김일성과 맞담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오진우였다. 이 때문에 김정일은 노(老) 빨치산 출신 중에서도 오진우의 신임을 얻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오진우는 87년 봄 김정일의 측근들만 참석하는 비밀연회에 참석했다가 크게 교통사고를 당했다. 일은 이렇게 전개됐다. 비밀연회에서 술을 많이 마신 오진우는 새벽 3시경 스스로 벤츠를 몰고 귀가하다 전승기념관 부근에서 가로등을 들이받았다. 차는 크게 부숴졌고, 오진우는 피투성이가 되었다. 이 광경을 교통안전원이 순찰을 돌다 발견했다. 안전원은 고급 승용차인 점을 미루어 다친 사람이 어느 고위간부의 운전기사려니 생각하고 인근 병원으로 옮겼다.

    당직 의사가 살펴보니 이미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머리에 상처가 심했고, 갈비뼈가 여러대 부러져 있었다. 이들은 노인의 신원을 파악하려다 문득 손목에 찬 시계를 발견했다. 의사가 처음보는 순금 오메가 시계였고, 시계 중앙에 김일성이라고 새겨진 빨간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당직 의사는 노인이 예사 인물이 아니라고 직감하고 중앙당에 보고했다.

    노인은 오진우로 판명됐고 이 사실은 김정일에게 직보됐다. 사고가 난 오진우의 벤츠는 문이 하나 달린 280형이다. 김정일은 측근들에게 이 차를 선물로 준 적이 많은데, 선물을 받은 사람이 직접 몰게 되어 있다. 김정일은 병원 당비서를 통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서 오진우를 살려내라”고 지시했다. 오진우는 마취상태로 모스크바로 공수됐다. 세간에서 ‘오진우를 회생시키는데 금으로 탑을 쌓았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김정일은 최대한의 배려를 했다.

    오진우는 치료과정에서 보여준 김정일의 배려에 감동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진우는 김정일에게 충성을 다짐한다. 92년 오진우는 원수 계급장을 달았다. 이때 원수 계급장을 달아준 사람은 김일성이 아니라, 최고사령관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김정일이었다.

    김정일의 통치 스타일을 언급할 때 흔히 등장하는 것이 ‘광폭(廣幅) 정치’와 ‘인덕(仁德) 정치’다. 한마디로 김정일이 ‘통 크고 자상한’ 스타일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선전기관들은 김정일을 그렇게 이미지 메이킹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북한방송은 어차피 김정일 개인의 선전도구에 불과하긴 하지만, ‘김정일 장군님은 21세기의 태양’과 같은 유치한 표현들도 적지 않게 구사한다.

    평양시 서성구역 연못동에 있는 ‘3대 혁명 전시관’ 제2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조선이 없는 지구는 필요없습니다. 김정일.”

    안내원들은 이 문구가 나오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93년 3월 북한이 핵 비확산조약(NPT)에서 탈퇴했는데, 이로 인해 한반도에 위기가 조성되었다. 김일성은 군단장급 이상의 군 수뇌부 회의를 열고, 참석자들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지금 미국이 전쟁을 하자고 하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이길 수 있는가?”

    그러자 모든 지휘관들이 “이길 수 있다”고 대답했다. 김일성이 정색하고 한번 더 물었다.

    “그러다 지면 어떻게 하겠는가?”

    순간 장내는 조용해졌다. 91년 12월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된 김정일이 그때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다.

    “수령님, 지구를 폭파해버리고 말겠습니다. 조선이 없는 지구는 필요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유치하게 들리지만 이 사례는 북한에서 김정일이 ‘통 크고 대담한 인물’이라는 점을 선전하는 데 적절히 이용되고 있다. 실제 김정일이 벌인 사업 중에는 서해갑문 공사, 105층짜리 유경호텔(공사중단 상태), 평양산원, 인민대학습당 등 ‘통 크고 대담한’ 것들도 있다.

    91년 걸프전을 계기로 김정일은 미군 무기의 약점을 분석하고 이를 격파하는 영화를 제작, 군 간부들에게 시청케 함으로써 미군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실시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미국과 대결한다는 강경한 자세와 입장만이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라크가 걸프전에서 패한 주요 원인을 “미국과 강경하게 맞서 결판을 내겠다는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김정일은 “당초 계획대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집결한 미군을 강하게 타격하고 가스관과 송유관을 폭파하는 등 대담한 군사작전을 폈더라면 이라크가 이겼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의 이와 같은 주장은 진짜 미국과 전쟁을 하겠다는 뜻을 염두에 두고 한 발언은 아닐 것이다. 다만 미국과 상대하면서 ‘통 크고 담대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교육시키고 싶어했을 것이다.

    이해타산에 빨라

    중요한 것은 김정일이 국제관계 속에서의 이해타산에는 매우 빠르고 정확하다는 점이다. 북한은 지난 55년간 ‘정치에서의 자주’가 외교 노선의 기본이었다. 중-소 이념분쟁 틈바구니 속에서 외교적 실리를 챙겼고, 김일성은 여기에 한 술 더 떠 이러한 국제관계 변화를 자신의 권력을 절대화하는 방향으로 적절히 이용했다.

    김정일은 현재 중국과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복원시키는 한편, 향후 북-일, 북-미 관계도 계속 개선시켜 나갈 것이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 경우처럼 자신의 주가를 최대치로 높여가면서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으로 나갈 것이다.

    그는 모든 보고서를 일일이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체제 단속과 관련한 보고서는 빼놓지 않고 본다. 이 때문에 밤늦게까지 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 많은 보고서를 일일이 검토하려면 올라오는 정보보고가 간결해야 한다. 간결하고 핵심적인 보고서는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가 선호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정일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당 간부와 국가안전보위부 간부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다.

    “나는 정확하고 솔직한 것을 좋아한다. 나치 독일의 제국안전 총국장이었던 칼텐 브루너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히틀러에게 항상 간단 명료하고 정확하게 보고했다. 부총통 히믈러가 히틀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거짓보고하면 바로 그 앞에서 ‘사실과 다르다’고 말한 배짱있는 인물이었다. 나에게도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

    94년 김일성 사망 후 그에게 주어진 최대 과제는 체제 생존이었다. 그는 그 위기를 대외적으로는 핵과 미사일을 국제 문제화하면서 탈출을 시도했고, 대내적으로는 철저한 보고 체계 구축과 주민들에 대해 지속적인 긴장감을 주는 방법으로 체제 누수현상을 방어했다. 주민들에게 지속적인 긴장을 줄 수 있는 판단의 근거가 모든 보고서를 검토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다.

    여기에는 중앙당 조직부, 국가안전보위부, 군 보위사령부 및 군 총정치국의 보고 라인이 핵심이다. 탈북자 등 체제 이탈 행위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방법으로 처단한다. 이러한 그의 방법이 결코 올바르다고 볼 수 없다. 그 과정에 수백만 명의 인민이 굶어죽었고, 인권문제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러한 문제는 향후 반드시 풀어야 과제다.

    그의 또 다른 특징은 자신이 힘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을 상대방에게 ‘확실히’ 전달한다는 것이다. 이는 제왕학 수업의 결과일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 과정에서 그는 남북간의 상호비방 금지 등을 그 자리에서 군 관계자에게 해결하라고 지시했다.

    94년 6월 북한을 방문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김일성과 두 차례 선상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을 김정일이 뒤에서 조정했다. 회담 중 카터가 미군 유해 송환을 언급하자 김일성이 즉답을 유보했다. 김정일은 그때 선실 바깥에 있던 김성애(김일성 후처)를 들여보내 카터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고 귀띔해 주었고, 김일성은 유해 송환을 결정했다.

    카터는 이를 눈치챘는지 김정일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이를 적당히 둘러대고 거절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버지 앞에서 나서지 않는다는 점과,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힘을 가진 인물’임을 미국에 알린 것이다.

    다만 이번에 확인됐듯이 그의 말은 빠르고 다변적이다. 방금 했던 말로 다시 돌아가 수정 보완하기도 하고, 상대방의 말허리를 자르고 자기 말을 끼워 넣기도 한다. 때로는 목소리의 톤이 갑작스럽게 올라가기도 한다. 이 때문에 그의 말을 그대로 글로 옮겨놓으면 정연한 문어체 문장으로는 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논리정연한 논객의 소질은 갖고 있지 못하다고 보면 된다. 논객으로서의 자질이 뛰어난 김대중 대통령과 대비되는 측면이다.

    그는 문장보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한다. 이 때문에 김정일의 통역관들은 애를 먹는다. 통역관들은 일차적으로는 ‘문장’을 틀림없이 전달하는 기능을 가진 사람들이다. 반면 메시지는 함축된 뜻과 말하는 사람의 순간의 표정까지도 ‘통역’해내야 한다. 이는 김정일을 잘 모르고서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중국 소식통들에 의하면 이번 장쩌민과의 정상회담에서도 중국측 통역관들은 김정일이 빠르고 많은 말들을 일시에 쏟아놓는 바람에 진땀을 흘렸다고 한다. 현명한 통역관이라면 그의 말들을 죄다 통역할 것이 아니라,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통역하는 데 더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이번에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에서 말을 많이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손님으로서 주인에 대한 예절일 것이다. 다만 김정일이 서울에 답방해서 김대통령처럼 ‘예절’을 지킬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다변적이고 거침없는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할 것으로 보는 것이 좀더 정확할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의 주요 특징 중 하나가 형식주의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항영접 때 김정일이 입고 온 점퍼를 놓고 말이 있었지만, 자신이 늘 입는 대로 입는다는 식, 즉 ‘형식’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사실과 자신이 소탈하다는 점,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계속 ‘혁명전사’로 보이고 싶어하는 뜻이 혼재돼 있었을 수도 있다.

    김정일이 대외적으로 정장을 하고 나타난 것은 자신의 50회 생일인 지난 92년 2월16일 때 딱 한번이다. 그는 주로 점퍼가 아니면 인민복, 야전 점퍼 등을 입고 나타난다. 점퍼는 ‘혁명하던’ 때 입던 옷이다. 김정일은 자신을 혁명전사로 보이고 싶어한다. 아울러 점퍼는 소박해 보인다. 김일성도 김정일의 소박한 모습을 칭찬한 적이 있디.

    김정일의 ‘원 샷’ 술문화

    김대중 대통령과 남북공동선언문에 서명한 후 김정일은 건배를 제의하면서, 자신이 가장 먼저 ‘원 샷’으로 술을 들이키는 장면이 TV에 보도되었다. 김정일은 “남한 언론에서 김위원장은 역시 술을 잘 한다고 썼다”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술에 관한 한 김정일은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다음은 김정일과 술에 얽힌 비화들이다.

    80년대 들어 북한군은 군 현대화 사업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남한이 지속적으로 군 현대화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군 현대화 사업은 소련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정일은 84년 10월 당 정치국 회의에서 85년 8월15일 해방 40돌을 맞아 소련 태평양 함대를 북한에 초청할 것을 제안하여 이 안을 통과시켰다.

    8월14일 소련 태평양 함대 제1 총부사령관이 포함된 소련군사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했다. 군사대표단장은 당시 소련군 수뇌부에 속해 있던 페트로브 소련국방성 제1차관보(원수)였고, 극동군 관구 야조프 사령관이 동행했다. 북한군으로서는 오랜만에 찾아오는 귀빈이었다.

    대표단 일행은 원산에 있는 김정일의 특각(초대소)으로 안내됐다. 이날 저녁 김정일이 주재하는 만찬이 열렸다. 음식과 술이 차려지고 만찬이 막 시작되려 하자, 페트로브 단장이 점잖게 인사말을 하기 위해 일어서려고 했다. 그때 김정일이 페트로브의 어깨를 탁 치며 말했다.

    “장군이 쩨쩨하게 연설은 무슨…자, 술이나 마십시다. 길게 이야기할 게 뭐 있습니까? 우리는 작은 나라이고, 소련은 대국 아니요? 당신네들 지난번 조국해방전쟁(6·25전쟁) 때도 우리를 도와주었지 않았소. 그러니 이번 우리 군 현대화 사업도 좀 도와주시오.”

    이날 밤 연회에서 신장 190cm의 거구 페트로브 단장은 김정일의 술 공세에 완전히 인사불성이 됐다.

    해마다 12월이면 해외공관장 희의가 평양에서 열린다. 해외 파견 대사, 총영사들이 모여 1년간 각 공관의 사업상태, 김일성 부자의 교시 진행상황 등을 보고하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비판하는 자리다. 회의기간이 길어지면 몇 주 동안 계속된다. 긴 회의가 끝날 무렵이면 김정일이 주재하는 ‘1호 연회’가 개최된다.

    통상 당의 수반이 참석하는 연회는 참석자들이 먼저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가 김정일이 나타나면 박수를 치고, 김정일이 자리에 앉으면 다같이 자리에 앉고 연회가 시작된다.

    그러나 ‘오프닝 세레모니’가 평소와 다를 때도 있다. 김정일과 외교부장, 부부장 등이 먼저 연회장에 들어가고 대사들은 이름을 호명하면 한 명씩 들어가는 것이다. 호명된 대사가 연회장에 들어가면 테이블에 크고 둥그런 크리스털 잔이 놓여져 있다. 담긴 술은 프랑스산 코냑, 양은 300cc 정도. 대사는 잔을 들고 김정일에게 다가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만수무강을 축원합니다”라고 인사하면, 김정일이 잔을 부딪치며 “고맙소” 한다. 그 다음 순서는 대사가 원 샷에 술을 들이키는 것. 이것이 김정일이 주재하는 연회의 ‘입주식’이다. 김정일의 원 샷은 오래 전부터 해온 그의 전매특허인 셈이다. 그는 ‘주량이 도량’이라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다음은 황장엽씨의 회고록에 등장한 술과 관련한 에피소드다. 하루는 김정일이 오랜만에 황비서를 술자리에 불렀다. 황비서는 북한에서도 ‘도덕 교과서’로 불린 인물로, 술 담배와는 아예 거리가 멀었다. 한창 연희가 무르익는데, 김정일이 황비서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황비서가 술을 한잔 쭉 마시는 걸 보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소.”

    그러자 동료들이 황비서의 양쪽에 달라붙어 강제로 술을 먹이려고 했다. 황비서는 입을 꼭 다물고 동료들이 붓는 술을 입에 넣지 않았다. 그 바람에 술이 흘러 옷이 젖고 말았다. 동료들이 질려서 물러가자 이번에는 김정일의 친여동생 김경희(당 경공업부장 역임)가 나섰다. 김경희는 김일성대 총장시절 황비서의 제자다. 황비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가 무안해하지 않도록 조금 마시는 척했다. 그러자 그걸 본 김정일이 직접 나섰다.

    “그만들 두시오. 내가 책임지고 마시게 할테니.”

    김정일은 자기 자리에 있는 술병을 들어 따라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버티려면 끝까지 버텨야지, 경희가 먹인다고 드시면 됩니까?”

    황비서는 하는 수 없이 눈을 질끈 감고 입에 털어 넣었다. 놀랍게도 그 술은 맹물이었다. 그 자리에서 김정일이 맹물을 마시고 있다는 걸 아는 간부는 아무도 없었다. 김정일은 잦은 비밀 연회 등으로 술을 마시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를 몇차례 들었다.

    여동생을 끔찍히 아끼는 오빠

    김정일은 생모 김정숙에게서 태어난 하나뿐인 친여동생 김경희를 끔찍히 생각해왔다. 김경희는 오빠 덕분에 권력의 온실에 오래 있을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북한에서 가장 힘있는 부서인 중앙당 조직부 제1부부장 장성택이다. 조직비서와 조직부장은 총비서 김정일이 겸직하고 있다. 장성택이 말하자면 실질적인 2인자인 셈이다.

    장성택은 김일성 종합대학 시절 김경희와 연애했다. 잘 생기고, 술 잘 먹고, 잘 노는 장성택에게 김경희가 푹 빠진 것이다. 이들의 연애는 단번에 소문이 났다. 이 때문에 김일성이 장성택이 사윗감으로 괜찮은 인물인지 알아보라고 지시를 내렸다. 당 간부들이 여러 차례 조사를 해본 결과 성실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김일성에게 ‘아니올시다’로 보고했다.

    김일성은 둘 사이를 떼놓을 겸 장성택을 원산경제대학으로 내려보냈다. 이렇게 되자 김경희는 밥도 먹지 않고 난리를 피웠다. 김일성의 눈치를 봐가며 이들 둘 사이를 다시 원상 회복해준 사람이 김정일과 계모 김성애였다.

    장성택도 김정일에 의해 ‘혁명화’를 당한 적이 있다. ‘혁명화’는 당성과 혁명성이 약한 사람에게 일정기간 육체노동으로 정신단련을 시키는 일종의 귀양살이다.

    김일성 김정일 부자는 혁명화의 방법으로 충성을 받아내기도 한다. 전 인민무력부장 최광(사망)은 12년간 혁명화를 한 적이 있다.

    아무튼 결혼 후 열심히 일하지 않고 술을 즐긴 장성택을 보다 못한 김경희가 오빠에게 ‘혁명화’를 건의했는데, 이를 김정일이 받아들인 것이다. 장성택은 강선제강소에서 혁명화를 한 다음 다시 평양으로 불려 올려져 ‘청년 및 3대혁명 소조’ 지도부장과 89년에 열린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준비사업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김일성 김정일의 신임을 얻었다.

    북한에는 퍼스트 레이디 개념이 없고, 따로 역할이 정해진 것도 없다. 이유는 옛날 서구 부르주아 상류사회의 잔재를 흉내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번에 우리는 이희호 여사가 동행했으나, 김정일의 공식부인 김영숙은 나타나지 않았다. 납북됐다가 탈출한 영화배우 최은희는 김정일로부터 김영숙을 소개받은 적이 있다. 김정일은 최은희에게 자기 부인을 이렇게 소개했다.

    “우리 마누라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여편네란 그저 애 키우고 살림이나 잘 하면 되지요.”

    최은희씨의 기억에 따르면 김영숙은 얌전하고 조용한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북한에 남녀평등법이 제정된 지는 오래 됐다. 그러나 아직 여성이 집안 일을 도맡아 한다. 다만 김일성이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좀 강조했을 뿐이다. 가부장적 잔재가 적지 않게 남아 있는 것이다.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은 북한에서 ‘백두산 3대 장군’으로 우상화되어 있다. 김정숙은 항일 유격대 시절 김일성 부대의 작식(作食)대원이었다. 김정일은 권력을 완전히 구축한 다음에도 생모 김정숙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다.

    87년 9월 아프리카 기니아 국무장관이 병 치료를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그는 김일성을 접견한 자리에서 “김정숙 여사가 참으로 훌륭한 분이었다는 사실을 책을 통해 보았다”고 말했다.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에서 김정숙을 알 리가 없었지만, 그는 평양에 오기 전 기니아 주재 북한대사에게 평양에 가면 꼭 김정숙에 대해 언급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이 소식이 김정일의 귀에 들어갔다. 기니아 국무장관은 곧바로 국가수반급 초대소인 주암 초대소로 옮겨졌고, 그가 치료받던 병원도 차관급 이상이 사용하는 남산진료소에서 김일성 부자 전용의 봉화진료소로 옮겨졌다. 치료가 끝난 뒤에는 예정에도 없던 묘향산 여행도 갔고, 김일성 부자만 사용하는 ‘1호 열차’를 이용했다.

    김정일은 자기 자리에 있는 술병을 들어 따라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버티려면 끝까지 버텨야지, 경희가 먹인다고 드시면 됩니까?”

    황비서는 하는 수 없이 눈을 질끈 감고 입에 털어 넣었다. 놀랍게도 그 술은 맹물이었다. 그 자리에서 김정일이 맹물을 마시고 있다는 걸 아는 간부는 아무도 없었다. 김정일은 잦은 비밀 연회 등으로 술을 마시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를 몇차례 들었다.

    아버지보다 떨어지는 카리스마

    김정일의 카리스마는 김일성에 비해 떨어진다는 것이 정평이다. 김일성은 항일유격대 등 고생도 해봤고, 정부 수립 후 수많은 정적들을 제거해가는 과정에서 연륜을 쌓을 수 있었다. 반면 김정일은 자신이 권력을 쟁취한 면도 없지 않지만, 아버지 김일성으로부터 북한을 물려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김일성은 비록 정규 학력은 보잘 것 없었지만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사고를 하는 스타일이었다. 지시를 내릴 때도 듣는 사람이 혹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아예 없앴다. 일하는 과정에서도 첫째가 사람 중시였다. 일은 사람이 한다는 철칙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인지 김일성에 대한 부하들의 신뢰감은 높은 편이었다.

    반면 김정일은 어린 시절 전쟁을 겪긴 했지만 그의 사고방식은 전후 세대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이런 탓인지 김정일은 사람 중시보다는 사회통제 시스템 구축이나 당성, 사상성을 더 강조해왔다고 볼 수 있다. 60년대부터 김일성에 대한 극도의 우상화 작업은 모두 김정일이 진행한 것이다. 세계 최대 높이와 크기의 김일성 동상, 김일성의 시신만 안치된 호화찬란한 금수산 기념궁전, 묘향산 김일성 김정일 선물전시관, 각종 혁명사적관 등은 모두 김정일이 만든 것이다. 70년대 중반까지 그런 대로 꾸려가던 북한경제가 80년대 들어 몰락하기 시작한 것도 김일성에 대한 김정일의 우상화 작업에서 기인한 바 적지 않다.

    김일성에게는 유교의 봉건적 잔재가 얼마간 남아 있었다. 김정일의 50회 생일 때는 한시(漢詩)를 지어주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대학시절부터 서양 영화를 많이 보아온 김정일은 일찍부터 ‘현대적’ 감각을 가져왔다. 최근에는 컴퓨터 소프트웨어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다음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고방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예다. 김일성은 학교에서 남학생과 여학생을 갈라놓도록 했다. 그리고 대학졸업 때까지 결혼을 금지시켰다. 70년대에는 소련과 동구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유학파들이 당 간부로 많이 등용되었다. 이들은 남녀공학이 ‘별학’보다 교육 효과가 낫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고, 중앙당 과학교육부와 정무원 교육위원회 간부들이 남녀공학 안을 김일성에게 올렸다. 김일성은 이를 반대했다. 뿐만 아니라 안을 올린 간부들 여러 명을 ‘혁명화’에 보냈다.

    80년대에 들어와 김정일은 남녀공학을 주장했다. 사람은 본성이 남녀가 함께 있어야 더 힘을 내고 능률이 오르게 돼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교육위원회 간부들이 곤란한 입장에 처했다. 남녀공학 안이 김정일을 통과하더라도 김일성이 반대하면 또 여러 명 다칠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묘안을 냈다. 김일성이 지금은 학교에 현지지도를 나가지 않으니 공학인지 별학인지 알아볼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모든 보고가 김정일을 통했기 때문에 김정일이 김일성에게 거론만 안하면 됐다. 이 아이디어는 끝까지 성공했다. 89년 무렵부터 북한 전지역에 초등학교 남녀공학이 실시됐다.

    김정일은 74년 2월13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정치위원으로 선출됐다. 대외적으로는 ‘당과 인민의 지도자’로 발표됐다. 사실상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인된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32세였다. ‘노동신문’은 이때부터 김정일을 ‘당중앙’이라는 말로 지칭했다. 말하자면 김정일이 대중의 스타로 급부상한 것이다.

    74년 무렵 북한에서는 머리를 적당히 기르는 게 유행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김정일이 머리를 아주 짧게 하고 나타났다. 김정일은 주위 사람들에게 ‘속도전 머리’라고 했다. 김정일이 속도전 머리를 하고 다니자, 젊은 당 간부들이 다투어 속도전 머리로 바꾸었다. 속도전 머리는 삽시간에 북한 전역에 퍼져 나갔다.

    그러나 속도전 머리는 김정일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작은 키가 더 작아 보였고, 나이가 더 어려 보였다. 한동안 속도전 머리를 하고 다닌 그는 어느날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퍼머를 하여 앞머리를 높이 세운 채 나타났다. 김정일의 퍼머 머리 때문에 미장원이 한때 초만원을 이룬 적도 있다.

    김정일의 영화취미는 알려져 있다. 대학시절에도 그는 외국영화가 들어오는 중앙영화보급소에 가서 소련영화를 돌려보았다. 북한의 대학생이면 누구나 받아야 하는 두 달간의 ‘어은동 야영훈련’ 도중에 빠져 나와 중앙영화보급소에 간 적이 있는데, 이를 안 삼촌 김영주가 사람을 풀어 찾아내 군사교관에게 인계하기도 했다.

    훈련 기간 중 사격에는 열심이었다. 그의 사격솜씨는 정평이 나 있다. 그는 몬트리얼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이호준으로부터 개인교습을 받았다. 그의 생모 김정숙이 여성으로는 드물게 명사수였다.

    대학졸업 후 당에 들어가 처음 그의 능력을 인정받은 분야가 영화예술이다. 그는 조선예술영화활영소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고, ‘영화’라는 축구팀을 만들어 영화인들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당시 그가 만든 작가단체가 장편소설을 담당했던 ‘4·15 창작단’이다. 여기서 ‘불멸의 혁명총서’라는 김일성 일대기를 만들었다. 이 총서를 만들면서 작가들을 휴양소에 모아놓고 집필토록 했다. 김정일의 독특한 생산개념인 속도전을 벌인 것이다.

    4·15 창작단에서 집필된 소설들이 ‘유격대 5형제’ ‘피바다’ ‘꽃파는 처녀’ 등이었고, 대부분 영화화되었다. ‘피바다’와 ‘꽃파는 처녀’ 등은 김일성 우상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김일성이 그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 작품들을 혁명가극으로 만들 때 그는 음악을 직접 선곡하는 등 감독 역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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