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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대특집|역사의 대전환, 남북화해시대

‘김정일 쇼크’ 은둔자에서 슈퍼스타로

  • 신동아 특별취재반

‘김정일 쇼크’ 은둔자에서 슈퍼스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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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김정일의 대표적인 스타일로 크게 두 가지가 확인되었다. 하나는 분위기와 좌중을 장악하는 능력이다. 유머감각은 여기에 덧붙인 양념이다. 다른 하나는 처음부터 자기 페이스대로 몰고 나가는 연출 능력이다.

정상회담 2박3일 동안 그가 밖으로 드러낸 ‘실수’는 은둔생활 발언을 하던 중 외신을 두고 “적들은…”으로 표현했다가 금방 다시 고친 것 정도다. 그 외에는 적절한 유머와 자신감을 바탕으로 시종일관 주도권을 잡아갔다. 서방세계를 ‘적들’로 표현하는 것은 그의 평소 생각과 습관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대체로 ‘형식주의’를 싫어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고상하고 유식하게 말하는 것보다 직설적 표현이 더 ‘노동계급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김정일이 사람을 장악할 줄 알고 자신의 계획대로 몰고 나갈 줄 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김정일에 대해 “사람 다루는 솜씨는 오히려 나보다 한 수 위”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황장엽씨는 망명 후 언론을 통해 “그는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분위기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해 가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황장엽씨는 회고록 등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김정일은 이러한 재주를 갖고 있었다고 언급했다.

김일성은 59년 1월 소련공산당 21차 대회에 참석하면서 김정일을 데리고 간 적이 있다. 김정일이 남산 고중(고교) 재학 시절인 17세 때의 일이다. 이때 황장엽 서기(비서)도 김일성을 수행했는데, 김일성이 방에서 나와 구두를 신으려 하자 다른 수행원들을 제치고 김정일이 아버지의 어깨를 부축하면서 신발을 신도록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그때 김일성의 나이는 47세였다. 젊은 김일성이 신발을 혼자 싣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17세의 김정일이 ‘맹랑한 제스처’를 보인 것이다.

아울러 김정일은 김일성의 소련방문 일정을 자신이 주도해서 짰다고 한다. 저녁에 수행원들에게 아버지가 무엇을 했으며, 기분은 어떠했는지 등등을 열심히 묻더라는 것이다. 따라서 김정일의 사람 다루는 솜씨는 타고난 ‘끼’에다 오랫동안 정치생활을 하면서 갖춰진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북한선전 기관에서는 김정일을 ‘사람을 자애롭게 아낄 줄 아는 인덕(仁德) 정치의 화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용인술은 대체로 궁지에 빠진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거나, 아니면 정치적으로 무자비하게 제거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 용인술은 모택동-김일성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모택동, 김일성에게 배운 용인술

궁지에 빠진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자기 사람으로 만든 대표적인 예가 오진우의 경우다. 사망한 오진우 전 인민무력부장은 항일 유격대 시절 김일성의 당번병이었다. 오진우에 대한 김일성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김일성과 맞담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오진우였다. 이 때문에 김정일은 노(老) 빨치산 출신 중에서도 오진우의 신임을 얻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오진우는 87년 봄 김정일의 측근들만 참석하는 비밀연회에 참석했다가 크게 교통사고를 당했다. 일은 이렇게 전개됐다. 비밀연회에서 술을 많이 마신 오진우는 새벽 3시경 스스로 벤츠를 몰고 귀가하다 전승기념관 부근에서 가로등을 들이받았다. 차는 크게 부숴졌고, 오진우는 피투성이가 되었다. 이 광경을 교통안전원이 순찰을 돌다 발견했다. 안전원은 고급 승용차인 점을 미루어 다친 사람이 어느 고위간부의 운전기사려니 생각하고 인근 병원으로 옮겼다.

당직 의사가 살펴보니 이미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머리에 상처가 심했고, 갈비뼈가 여러대 부러져 있었다. 이들은 노인의 신원을 파악하려다 문득 손목에 찬 시계를 발견했다. 의사가 처음보는 순금 오메가 시계였고, 시계 중앙에 김일성이라고 새겨진 빨간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당직 의사는 노인이 예사 인물이 아니라고 직감하고 중앙당에 보고했다.

노인은 오진우로 판명됐고 이 사실은 김정일에게 직보됐다. 사고가 난 오진우의 벤츠는 문이 하나 달린 280형이다. 김정일은 측근들에게 이 차를 선물로 준 적이 많은데, 선물을 받은 사람이 직접 몰게 되어 있다. 김정일은 병원 당비서를 통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서 오진우를 살려내라”고 지시했다. 오진우는 마취상태로 모스크바로 공수됐다. 세간에서 ‘오진우를 회생시키는데 금으로 탑을 쌓았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김정일은 최대한의 배려를 했다.

오진우는 치료과정에서 보여준 김정일의 배려에 감동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진우는 김정일에게 충성을 다짐한다. 92년 오진우는 원수 계급장을 달았다. 이때 원수 계급장을 달아준 사람은 김일성이 아니라, 최고사령관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김정일이었다.

김정일의 통치 스타일을 언급할 때 흔히 등장하는 것이 ‘광폭(廣幅) 정치’와 ‘인덕(仁德) 정치’다. 한마디로 김정일이 ‘통 크고 자상한’ 스타일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선전기관들은 김정일을 그렇게 이미지 메이킹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북한방송은 어차피 김정일 개인의 선전도구에 불과하긴 하지만, ‘김정일 장군님은 21세기의 태양’과 같은 유치한 표현들도 적지 않게 구사한다.

평양시 서성구역 연못동에 있는 ‘3대 혁명 전시관’ 제2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조선이 없는 지구는 필요없습니다. 김정일.”

안내원들은 이 문구가 나오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93년 3월 북한이 핵 비확산조약(NPT)에서 탈퇴했는데, 이로 인해 한반도에 위기가 조성되었다. 김일성은 군단장급 이상의 군 수뇌부 회의를 열고, 참석자들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지금 미국이 전쟁을 하자고 하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이길 수 있는가?”

그러자 모든 지휘관들이 “이길 수 있다”고 대답했다. 김일성이 정색하고 한번 더 물었다.

“그러다 지면 어떻게 하겠는가?”

순간 장내는 조용해졌다. 91년 12월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된 김정일이 그때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다.

“수령님, 지구를 폭파해버리고 말겠습니다. 조선이 없는 지구는 필요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유치하게 들리지만 이 사례는 북한에서 김정일이 ‘통 크고 대담한 인물’이라는 점을 선전하는 데 적절히 이용되고 있다. 실제 김정일이 벌인 사업 중에는 서해갑문 공사, 105층짜리 유경호텔(공사중단 상태), 평양산원, 인민대학습당 등 ‘통 크고 대담한’ 것들도 있다.

91년 걸프전을 계기로 김정일은 미군 무기의 약점을 분석하고 이를 격파하는 영화를 제작, 군 간부들에게 시청케 함으로써 미군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실시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미국과 대결한다는 강경한 자세와 입장만이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라크가 걸프전에서 패한 주요 원인을 “미국과 강경하게 맞서 결판을 내겠다는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김정일은 “당초 계획대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집결한 미군을 강하게 타격하고 가스관과 송유관을 폭파하는 등 대담한 군사작전을 폈더라면 이라크가 이겼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의 이와 같은 주장은 진짜 미국과 전쟁을 하겠다는 뜻을 염두에 두고 한 발언은 아닐 것이다. 다만 미국과 상대하면서 ‘통 크고 담대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교육시키고 싶어했을 것이다.

이해타산에 빨라

중요한 것은 김정일이 국제관계 속에서의 이해타산에는 매우 빠르고 정확하다는 점이다. 북한은 지난 55년간 ‘정치에서의 자주’가 외교 노선의 기본이었다. 중-소 이념분쟁 틈바구니 속에서 외교적 실리를 챙겼고, 김일성은 여기에 한 술 더 떠 이러한 국제관계 변화를 자신의 권력을 절대화하는 방향으로 적절히 이용했다.

김정일은 현재 중국과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복원시키는 한편, 향후 북-일, 북-미 관계도 계속 개선시켜 나갈 것이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 경우처럼 자신의 주가를 최대치로 높여가면서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으로 나갈 것이다.

그는 모든 보고서를 일일이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체제 단속과 관련한 보고서는 빼놓지 않고 본다. 이 때문에 밤늦게까지 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 많은 보고서를 일일이 검토하려면 올라오는 정보보고가 간결해야 한다. 간결하고 핵심적인 보고서는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가 선호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정일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당 간부와 국가안전보위부 간부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다.

“나는 정확하고 솔직한 것을 좋아한다. 나치 독일의 제국안전 총국장이었던 칼텐 브루너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히틀러에게 항상 간단 명료하고 정확하게 보고했다. 부총통 히믈러가 히틀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거짓보고하면 바로 그 앞에서 ‘사실과 다르다’고 말한 배짱있는 인물이었다. 나에게도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

94년 김일성 사망 후 그에게 주어진 최대 과제는 체제 생존이었다. 그는 그 위기를 대외적으로는 핵과 미사일을 국제 문제화하면서 탈출을 시도했고, 대내적으로는 철저한 보고 체계 구축과 주민들에 대해 지속적인 긴장감을 주는 방법으로 체제 누수현상을 방어했다. 주민들에게 지속적인 긴장을 줄 수 있는 판단의 근거가 모든 보고서를 검토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다.

여기에는 중앙당 조직부, 국가안전보위부, 군 보위사령부 및 군 총정치국의 보고 라인이 핵심이다. 탈북자 등 체제 이탈 행위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방법으로 처단한다. 이러한 그의 방법이 결코 올바르다고 볼 수 없다. 그 과정에 수백만 명의 인민이 굶어죽었고, 인권문제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러한 문제는 향후 반드시 풀어야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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