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외국 사람들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한국인의 이런 모습을 이해하지 못할 거요…”이번 남북 정상회담 대표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다녀온 문정인 연세대 통일연구원장의 말이다. 지난 55년간 두 눈 부릅뜨고서 서로 으르렁거리던 남과 북이, 막상 한 자리에 앉자마자 수십 년 지기처럼 친밀해진 모습을 보였으니 말이다. 자리에 있던 당사자들마저도 ‘내 마음이 왜 이런지’ 어리둥절한 판에, 외국인이 어떻게 한국인의 그런 ‘오묘한’ 정서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문교수는 또 “만약 술과 노래가 없었다면 반만년 한국 역사를 쓰지 못할 것”이라고도 했다. 그가 전하는 15일 고별 오찬장의 풍경 한 토막.
전날 밤, 우리측이 주최한 만찬에서 ‘의전에 걸맞지 않게’ 걸진 술판을 벌였던 남북은 양측의 최고 안보책임자인 조명록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과 임동원 국정원장의 인사말이 끝난 후 다시 술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김위원장은 “모두들, 역시 김정일 위원장이 술 실력이 날카롭다고 하더구만” 하면서 “술실력이야 통일부장관이 나보다…”라고 공을 우리측 박재규 장관에게 넘겼다.
술잔이 몇 순배 돌았을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우리측 박지원 문광부장관에게 노래 한 곡을 청했다. 박장관이 ‘내곁에 있어주’를 멋지게 불러 젖히자 김위원장이 박수를 치면서 “한 곡 더 하라”고 권해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를 또 불렀다. 국가 간의 공식행사 자리가 아니라 마치 동네 잔치마당 같은 분위기. 술과 노래의 화학작용이 빚어낸 화합의 장이었다.
문교수는 “어떤 점에선 정색하고 마주 앉는 회담장보다 이렇게 흉허물없이 술잔을 돌리는 자리가 남북 화합과 신뢰에 더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소감을 모아봤다.
●손길승(SK그룹 회장)
김정일 위원장을 직접 접해보니 ‘남북경협은 이 사람만 잡으면 일사천리로 진행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사안을 직접 챙기며 결정권을 행사하는 듯 했다. 기업으로 치면 재벌그룹 오너 총수인 셈이다. 오래 생각하거나 모호한 태도를 취하지도 않았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건 거침없는 말투와 태도로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14일 만찬 때 김정일 위원장의 처남인 장성택 조직1부부장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주로 남북경협과 관련한 얘기를 나눴다. 내가 “투자를 하는 기업인이 보기엔 북측의 제도 정비가 가장 중요하다. 투자협정 신분보장 조세문제 등과 관련된 제도 정비가 선행돼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장부부장은 대뜸 “위원장님이 저기 계시니 직접 건의하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위원장께 직접 얘기하겠느냐”고 했더니 그는 “다들 기분 좋은데 말못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나중에 김위원장이 경제인들을 따로 불러내 술을 권할 때 같은 얘기를 꺼냈더니 “그렇게 해야지”라며 즉석 결재를 했다.
만찬장에서 보니 김위원장은 자신의 지위나 격식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듯 했다. 이 테이블, 저 테이블 돌아다니며 참석자들에게 일일이 술을 따라주고 받아 마시며 농담도 던졌다. 그 바람에 처음엔 다소 긴장돼 있던 분위기가 격의 없는 술자리로 변해 버렸다. 테이블간 구분도 자연스럽게 허물어졌다.
술판이 거나해지자 박지원 문광부장관이 서로 술잔을 든 팔을 끼고 마시는 ‘러브샷’을 제의해 마시기도 했다. 누군가 “폭탄주도 한 잔씩 돌리자”고 제의했으나 적당한 잔이며 폭탄주 제조용 ‘장비’가 없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김위원장은 테이블을 돌며 술잔을 주고받느라 상당히 과음했다. 술잔도 많이 받은데다, 받으면 곧장 ‘원샷’으로 잔을 비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김대통령에 대한 각별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취중에서도 매사 김대통령을 세심하게 챙기는 모습이었다. 만찬에는 능구렁이술, 인삼주, 들쭉술 등이 나왔는데, 참석자들은 알코올 도수가 낮은 인삼주를 주로 마셨다. 김대통령이 술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김위원장은 인삼주보다 도수가 더 낮은 포도주를 가져오게 해 권했다. 술을 따를 때도 다른 사람들에겐 잔이 넘치도록 콸콸 부었지만, 김대통령 잔에는 조금씩만 조심스럽게 따랐다.
어디서건 김대통령이 노련한 몸가짐으로 말을 아끼고 행동을 자제하는 기색이 역력한 데 비해 김위원장은 다변과 걸쭉한 농담, 큼직한 제스처로 좌중을 리드했다. 특이한 것은 그러면서도 공식 연설이나 성명 발표는 직접 하지 않고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는 사실이다.
김위원장은 남한 정세를 매우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는 듯 했다. 누가 어떤 글을 썼고, 어느 장관이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는지까지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는 북한 최고의 남한 전문가였다. 남북한 문제를 풀어가는 일은 김정일에서 시작해 김정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허갑범(대통령 주치의)
나는 대통령 주치의인 까닭에 김대통령의 외국 순방 때 항상 동행을 한다. 보통 정상회담을 하게 되면 2∼3일 전에 행사진행 스케줄이 나오는데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달랐다. 평양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는 순간까지도 앞으로의 일정이 어떻게 진행될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나는 전쟁을 겪은 세대라 방북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것을 갖고 있었다. 우리 세대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불안감이랄까.
그런데 순안공항에 내려 보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나와 우리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는 것이 아닌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쩐지 ‘이번에는 뭔가 일이 되겠구나’하는 직감이 왔다.
두 정상은 마치 오랜 지기처럼 대화를 나누었다. 두 정상 사이가 그렇게 화기애애하니까 우리측 수행원과 북측 사람들 사이에도 금방 친밀감이 형성됐다. 같은 핏줄, 같은 정서를 갖고 있는 사람들 아닌가. 민족이란 참 대단한 것이란 생각도 했다.
순안비행장에서 백화원 초대소까지는 20분 정도 거리라고 한다. 그런데 두 정상이 함께 탄 차가 평양의 주요 시가지를 주욱 돌아가는 바람에 50분쯤이나 걸려 도착했다. 그 사이 두 정상은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알고 있다.
도착 후에도 매일의 일과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김위원장이 나타나는 시간은 행사 진행표가 항상 빈 칸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얼마 후에는 빈 칸이 있는 시간에는 김위원장이 등장하는 것임을 짐작하게 되었다.
내 직분이 대통령 주치의인 까닭에 가능하면 김위원장 주치의와 만남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행사장에 나타나지 않아 만날 수가 없었다. 북한에서는 의사의 위치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닌가 하는 느낌도 받았다.
김대통령 주최 만찬에서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아주 인물 좋은 인민배우와 외무성에 근무한다는 이, 그런 몇몇 사람들이 함께 했다. 내가 명함을 건네면 받으면서도 그들은 자기 명함을 내밀지 않았다. 뭐 하는 분들이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누가 누구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 중 누군가가 김위원장을 두고 “우리 장군님은 의리가 대단하십니다” 하고 자랑을 했다. 자신이 뱉은 말은 그대로 지킨다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김위원장은 기분파 같았다. 내 아내가 평안도 사람이고 그 외에도 주위에 평안도 출신들이 많은데, 모두들 대체로 기질이 화끈한 편이다.
만찬장에서 김대통령은 김위원장의 권유로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셨다. 옆에 있던 백낙환 인제대 이사장이 “대통령을 챙기라”고 말했지만 두 정상의 좋은 분위기를 깨뜨릴까봐 간섭을 자제했다. 다음날 아침 대통령 안부를 살폈더니, 잘 잤고 아침도 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사실 이번에는 대통령 주치의로서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외국 순방시 대통령 건강과 관련해서 가장 큰 문제는 시차적응인데, 북한에 가며 그 걱정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사실 김대통령은 국내에 있을 때보다 외국에 머물 때 더 활동적이 된다. 국내에 골치아픈 일들이 더 많아서일까. 해외에 나가 있으면 국내 일은 잠시 접어둘 수 있으니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모양이었다. 이번 방북의 경우에도 김위원장의 환대로 기분이 좋았고 첫날부터 일도 잘 풀려 마음이 편안한 듯 했다. 그런 것들이 대통령의 체력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신명이 나면 힘든 것도 모르는 법이다.
김위원장의 건강에 대해서는 여러 말들이 돌고 있고 나도 들은 적이 있다. 지병이 있다는 소문인데 내가 보기에는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것 같았다. 건강에 관한 한 별 문제는 없어 보였다.
●차범석(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내가 극작가이니만큼 ‘피바다’나 ‘꽃 파는 처녀’ 같은 북한의 정통 혁명가극을 관람하고 싶었다. 그러나 볼 수 없었고 대신 어린이 공연을 비롯해 3개의 무용·연극 공연을 관람했다.
공연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다. 내용(주제)을 떠나 관객을 즐겁게 하고, 또 무대와 객석이 일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당연히 박수 갈채도 뜨거워 부럽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작품의 높은 완성도 때문일 것이다. 기술적으로 뛰어났으며 연기면 연기, 무용이면 무용 할 것 없이 일사불란했다. 작곡, 안무 수준도 상당한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교육 무용’이라는 게 있다. 어린이들이 출연하는데, 우리 식으로 하면 ‘애들인데 뭐’ 하고 한 수 접어줄만한 무대다. 그런데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만큼 숙련돼 있었으며 실제로 뛰어났다. 씨름이나 마라톤 같은 것을 발레 스탭으로 표현하는 것이 어린이들로서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그렇게 ‘생활’에 기반을 두고 ‘인민을 즐겁게 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것 또한 훌륭한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예술’ 한다는 자기 만족에 들떠있을 뿐, 프로 의식이 부족하고 완성도도 떨어지는 남한의 일부 예술인들에게 자극이 될 만한 장점 아닌가. 무대에 오르려면 어느 수준 이상의 자기 검열, 치열성은 필수적이라 할 것이다.
공연 외에 인상적인 게 있었다면 음식이었다. 보통 남한이 북한보다 음식문화가 발달해 있지 않을까 추측하는데 직접 가 먹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냥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음식들을 내오는 게 아니라, 음식 하나하나에 ‘창의성’이 깃들어 있었다. 특히 김치가 맛있었는데 담백하고 순수한 것이, 양념 맛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배추 등속과 같은 원재료의 풍미가 그대로 살아 있었다. 조미료는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최고의 별미라면 통배 속을 파고 거기에 배추김치를 넣어 익힌 ‘배김치’였다. 그것을 순대처럼 똑똑 썰어 내오는데 시원한 배맛이 스며들어 말할 수 없이 맛깔스러웠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될 만한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유머가 풍부하고 허식이 없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면모도 엿보였다. 순발력도 대단했다. 배우가 됐어도 좋았을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가 영화광이라는 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김위원장이 아랫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격의없고 다정다감했다. 만찬 석상에서 북한쪽 인사 누군가의 의자가 불편한 듯 하자 “새 걸로 바꿔 갖다주라”며 직접 챙길 만큼 자상한 면모를 보여줬다. 처음 소개 받고 인사할 때 악수를 했는데 그냥 슬렁 쥐고 마는 게 아니라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손을 꽉 쥐고 “잘 주무셨습니까”하는 말까지 잊지 않고 건넸다. 그런 자세는 아무나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물론 우상화 작업 탓이 크겠지만, 김위원장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열렬한 환호는 리더십과 카리스마에 대한 일종의 ‘존경’의 표시가 아닐까 여겨지기도 했다. ‘인민을 위하는 지도자’다운 풍모가 엿보인다고나 할까. 공항에서부터 내내 환호를 보내던 북한 주민들은 오직 한 마디 ‘김정일’을 연호하고 있었다. 만일 김위원장이 서울을 찾아 우리 국민들이 환영을 나간다면 그렇게 뜨거운 표정으로 ‘김대중’을 연호할 수 있겠는가. 주민들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진심’이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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