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방송의 연속극 ‘허준’의 인기가 대단하다. 조선시대 헐벗고 병든 민중들에 대한 헌신적인 의사의 모습에 시청자들이 매료된 것으로 보인다. 의사인 나는 이 연속극을 보면서 시청자들이 ‘참된 의사상’에 얼마나 갈증이 심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1991년 2월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의사 면허를 취득하고 그해 3월부터 서울대병원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했다. 그후 96년 2월에는 내과 레지던트 과정을 수료하고 내과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소위 남들이 부러워하는 ‘의사 코스’를 평탄하게 밟아왔다. 그러나 96년 3월부터 98년 2월까지 서울대병원과 삼성의료원 등 대형 종합병원에서 혈액종양내과 전문의로 일하면서 나는 의사로서 부끄럽고 참담한 사건을 수없이 목격해야만 했다.
사람을 살리라는 정식 면허를 받은 의사가 무지와 미숙으로 ‘살인자’가 될 수 있고 병을 고쳐야 할 병원이 ‘죽음의 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지방병원에서 올라오는 환자의 ‘차트’를 보고 전국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전율을 느꼈다.
나는 동료 의사나 선후배 의사들에게 진단이나 치료가 잘못됐다는 고언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내 환자만 돌보고 다른 환자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는 편이 처세에는 나을지 모르지만 나는 잘못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물론 의사들 중에는 나의 충고를 받아들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기분 나빠 하거나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의사 사회의 침묵이 무서웠다. 의사의 실수나 잘못은 교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환자의 건강과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따’를 당하면서도 나는 고독한 목소리를 냈지만 침묵의 벽은 두터웠다.
결국 나는 환자를 치료하는 일선에서 물러나 서울대병원 임상의학연구소에서 6개월 정도 근무하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의사로서 한 사람의 환자를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사 사회의 무거운 침묵의 벽을 부수기 위해 혼자서라도 싸워야겠다는 각오를 한 것이다. 비록 이 길이 멀고 험할지라도 나는 포기할 수가 없다. 동료 의사나 선후배 의사들로부터 ‘너는 얼마나 잘났나”하는 손가락질을 받고 따돌림을 당할지라도 더 이상 의사들의 잘못과 무지를 방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내가 증언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직접 목격하고 관련자료들을 검토한 것들이다.
양성종양을 악성종양으로 잘못 치료
97년 8월경의 일이다. 서울 강남 S병원 병동의 칠판에 ‘근상피종’이라는 진단명이 적혀 있는 40대의 남자 환자가 있었다. 근상피종은 양성종양인데 악성종양과 달리 항암화학요법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종괴로 인해 장기의 기능 장애나, 증상이 있을 때 혹은 미용상 문제가 있을 때 외과에서 수술로 제거하면 된다. 그 환자는 내과에서 더 이상 치료할 필요가 없는데 내과 병동에 입원해 있기에 의아해서 담당 전공의에게 “저 환자는 왜 입원해 있느냐, 지금 무슨 치료를 하고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전공의는 지금 수술 후 보조적 항암화학요법(adjuvant chemotherapy)을 받고 있다고 했다. 이 요법은 수술로 종양을 제거한 후 재발 방지를 위하여 보조적으로 하는 치료다. 현재 많은 환자를 대상으로 한 대단위 임상연구를 통하여 그 효과가 입증된 종양은 유방암, 대장암, 직장암, 연부조직육종, 골육종 밖에 없다.
나는 담당 전임의에게 가서 따지듯이 말했다.
“지금 전공의가 양성종양 환자를 항암화학요법으로 치료하고 있다. 왜 양성종양 환자가 필요 없는 치료로 3주 마다 1주일씩 입원해서 고통을 받아야 하나. 사회생활을 못하기 때문에 겪는 경제적, 정신적 손실은 고사하고라도 항암화학요법의 부작용이 클 뿐만 아니라, 만약에 화학요법으로 인하여 백혈구가 감소해 감염으로 사망하면 어떻게 할 거냐. 빨리 담당 스태프에게 말해서 지금이라도 그 요법을 중지하게 하라.”
전임의의 대답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 와서 환자에게 어떻게 필요 없는 치료를 받고 있다고 그만두자고 하느냐, 담당 전공의가 하겠다는데 내가 상관할 바 아니다.”
너무나 무책임한 대답에 흥분한 나는 재차 이야기했다.
“지금 중단하지 않으면 앞으로 최소한 4차례나 더 치료를 받을 건데 그러다 부작용으로 환자가 목숨을 잃으면 어떡하냐.”
그러나 전임의는 “내가 상관할 바 아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냐” 라고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뭐라고 말할 기분이 나지 않아 돌아서고 말았다. 그 전임의 말대로 환자가 모르는 게 당장은 아무 말썽이 없을 지 모른다. 그리고 대한민국 병원에서 어디 이런 일이 한둘인가 하며 자위도 해보았다. 그러나 환자나 보호자 입장에서 보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인데 치료하는 의사가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똑같은 과실을 반복한다면, 그리고 동료 의사가 이를 방관한다면 도대체 환자들은 누구를 믿는단 말인가. 나는 치미는 분노와 자괴감에 어쩔 줄 몰랐다.
과다 투여된 항암제의 독성으로 사망
96년 3월경 강북의 S병원에서 일어난 일이다. 악성 림프종(malignantlymphoma)에 걸린 남자 환자가 자가골수이식술(autologous bone marrow transplantat ion)을 받던 중 상태가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사망했다. 환자 보호자들은 중환자실 창문을 부수며, 의사가 잘못하여 환자를 죽게 만들었다고 거세게 항의했다. 진료를 담당했던 병원 스태프는 보호자들에게 시달려 외래진료도 제대로 못보고 병원 내에서 도망다니고 있는 상태였다.
동료 의사들은 “열심히 치료를 해주었는데 보호자들이 이렇게 난동을 부리면 어떡하냐. 진료담당 스태프가 지금 상당히 고통을 받고 있는데 환자 보호자들이 나쁜 사람들 아니냐”고 말했다. 당시 나는 외부 파견근무 중이었기 때문에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었다.
이후 파견근무를 끝내고 돌아와 지내던 중 그 환자를 담당했던 스태프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사건이 궁금해 조심스럽게 거론했다. 그 스태프는 “예전과 달라 환자나 환자 보호자들이 의사에 대한 고마움이나 존경심은 고사하고, 열심히 진료하다가 어쩔 수 없이 상태가 나빠지면, 난동이나 부리는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환자를 볼 수 있겠느냐”고 한탄했다. 나도 심정적으로 공감이 갔다.
그런데 얼마 후 사망한 그 환자의 의무기록지를 볼 기회가 생겼다. 의무기록지를 보는 순간 이것이 문제의 그 환자 기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자세히 검토해 보았다.
환자는 악성 림프종으로 진단 받고, 종양내과에서 항암치료를 받은 경력이 있었다. 이후 재발해, 구제항암화학요법(salv-age chemotherapy)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항암제가 효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구제항암화학요법이란 재치료로 완치 가능성이 있을 때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 재래적 항암화학요법(conven- tional chemotherapy)으로는 더 이상 치료 효과를 거둘 수 없기 때문에 고용량 항암화학요법(high dose chemotherapy)과 자가골수이식술을 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환자는 자가골수이식술 후 완전히 회복되기 전에 사망했는데 의무기록지의 기록으로만 보면 사망원인은 심부전(heart failure)으로 추정되었다. 나는 심부전의 원인을 찾기 위하여, 의무기록지를 자세히 검토했다. 그 결과 림프종 치료 시 사용한 항암제 독소루비신(doxor ubicin)의 심장독성으로 인한 심부전이었다.
독소루비신은 가장 널리 사용되는 항암제의 일종이어서 심장에 미치는 독성에 대하여 아주 자세히 알려져 있다. 이 약을 오래 사용하면 독성이 체내에 축적된다. 일반적으로 축적된 치료용량이 체표면적 1㎡당 550mg 이상이 되면 심장독성으로 인하여 심부전이 발생, 환자의 생명이 위험하기 때문에 더 이상 치료제로 사용할 수가 없는 약제다. 그러므로 이 약제를 사용할 때는 그동안 환자의 치료 경력을 자세히 물어 이 약을 사용했는지, 사용했으면 어느 정도나 사용했는가를 확인, 앞으로 얼마나 더 사용할 수 있는지 충분히 검토한 후에 치료 계획을 세워야 한다. 특히 요즈음은 해외에서 치료 받다가 오는 환자도 많아 외국 병원의 기록도 검토해야 한다.
이 환자는 처음 림프종 진단을 받고 두 차례의 항암화학요법을 받았을 때 이미 독소루비신 사용이 한계용량을 넘긴 상태였다. 그런데도 혈액내과로 옮겨져 자가골수이식술 전에 치료 효과를 증가시키기 위해 세번째 항암화학요법을 받았다. 이때 독소루비신을 또 사용하는 바람에 심부전이 발생, 자가골수이식술 중 사망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 번째 항암화학요법을 하기 전에 어떤 항암제로 치료를 받아왔는지 검토해보아야 했다. 이는 의사라면 의무적으로 검토해야 할 사항이었다. 항암치료를 오래 받은 환자이기에 항암제에 내성이 생긴 상태이므로 그 이전에 사용해 효과가 없는 항암제를 피하는 것이 첫번째 목적이고, 두번째는 항암제 가운데 한계용량을 초과하면 치명적인 독성이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한계용량에 도달한 항암제는 사용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실제 의사가 이 환자의 이전 치료경력을 검토해 보는 주의만 기울였더라면 독소루비신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독소루비신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환자가 자가골수이식술이 끝나기도 전에 사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환자의 경우 자가골수이식술 전에 이미 심장독성으로 사망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었고 그 증상이 자가골수이식술과 맞물려 나타났을 뿐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 환자의 기록을 보고 의사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으면 최소한 약제의 독성으로 인한 심부전으로 사망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너무나 안타까웠다.
무지하고, 경험없는 의사의 치료로 사망
97년 8월경이었다. 삼성의료원에 입원한 환자는 키가 180cm가 넘는 아주 건장한 20세 가량의 남자 대학생이었다. 내가 처음 보았을 때 그 환자는 숨이 차서 걷지도 못할 상태여서 침대에 누워 지내야 했다. 젊은 대학생의 처지가 너무나 안쓰러워 보호자에게 자세한 사정을 물어보았다.
환자의 보호자는 “림프종으로 진단받고 17번이나 항암치료를 받았는데 숨이 차기 시작하더니, 점점 악화되어 지금은 걸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환자의 보호자가 림프종의 항암화학요법 중에 한 방법인 CHOP(cy-clophosphamide, doxorubicin, vincristine, Pd 등 4가지 항암제를 사용하는 방법으로 현재 악성림프종치료의 표준제제임, 보통 찹이라고 칭함)을 몰라서 잘못 말하는 줄 알았다.
항암화학요법을 할 의사가 독성이 있는 독소루비신이 포함된 CHOP을 17번이나 투여하였으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환자가 삼성의료원에 오기 전에 치료받았던 대구의 C병원에서 치료한 의사가 적어준 기록을 검토해 보았다.
“환자는 NHL-AILD 타이프(악성림프종의 한 종류)로 진단 받고 CHOP 유지화학요법 17 사이클 시행 중 환자가 숨이 차 전원(轉院) 시킴.”
이 기록을 본 순간 나는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가 하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기록을 의사가 썼다고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도대체 항암화학요법을 한다는 의사가 악성림프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치료방법도 모르고, 치료 약의 부작용도 모르고 완치가 가능한 20세의 건장한 청년을 숨이 차 걷지도 못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이 환자는 결국 사망하고 말았는데 이 의사는 앞으로도 완치가 가능한 환자를 죽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림프종은 항암화학요법에 반응이 좋고, 완치가 가능한 암이다. 따라서 완전관해(임상적이나 검사상으로 병의 증거를 찾을 수 없는 상태)를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고, 보통 6사이클로 완전관해가 오면 치료를 끝낸다. 이런 항암화학요법을 관해유도항암화학요법이라고 부른다. 림프종 치료에는 유지화학요법의 효과가 없기 때문에 유지화학요법이라는 말을 사용할 일이 없다.
더구나 림프종 치료에 같은 항암제를 17 사이클이나 사용한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독소루비신의 한계용량을 넘어서기 때문에 이로 인해 심부전으로 사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의사는 환자가 심부전이 온 이유도 모르고 자신이 살인자임을 고백하는 거나 다름이 없는 내용의 치료기록을 스스로 적어놓은 것이다.
완치 가능한 20세의 건장한 청년이 종양이 무엇인지, 치료를 어떻게 하는지, 항암화학요법이 무엇인지 등을 전혀 모르는 의사때문에, 한창 젊은 나이에 생명을 잃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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