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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르포|위기의 동대문 시장

모조품 천국에서 패션벤처로 변신해야

  • 하태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모조품 천국에서 패션벤처로 변신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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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려한 조명과 활기찬 음악, 쇼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대형 쇼핑몰, 그리고 거리를 가득 메운 자동차로 24시간 몸살을 앓는 동대문 시장. 97년 말 경제위기를 벤처정신으로 극복해 ‘패션의 실리콘 밸리’란 찬사를 한몸에 받았던 동대문 시장이지만 이제는 새로운 아이디어의 빈곤, 상인과 디자이너들의 벤처정신 퇴색, 외국 바이어들과 국내 고객들의 외면으로 위기를 겪고 있는데…. 재래시장의 이미지를 벗은 동대문 시장이 세계적인 패션시장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도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
남산에서 내려다본 동대문 시장 주변은 그야말로 불야성(不夜城)이다. 두산타워에서 뿜어올리는 불빛은 하늘을 찌를 듯 찬란하고 밀리오레를 알리는 붉은 네온사인은 천리 밖에서도 알아볼 만큼 선명하다. 어디 그뿐이랴. 디자이너클럽을 알리는 형형색색의 알림판, 혜양엘리시움, 팀204, 누존, 신평화상가 등 32개의 동대문 상가는 저마다 독특한 멋을 뽐내며 쇼핑객들을 유혹한다.

돋보기를 대고 동대문 시장 주변 거리를 보면 동대문 시장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더욱 분명해진다. 차도(車道)는 24시간 시속 20㎞미만의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고 인도(人道)는 노점상과 쇼핑객들로 점거돼 실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을 정도다. 대형 쇼핑몰 앞에는 젊은이들을 위한 이벤트가 끊이질 않고 10대들은 스피커를 통해 귀를 찢을 듯 터져나오는 음악과 화려한 조명에 열광한다. 2000년 6월 현재 동대문 시장의 겉모양은 이렇다. 대단한 호황 같아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안을 살펴보면 동대문 시장이 겉에서 보는 것처럼 장밋빛 미래만을 갖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곧 느낄 수 있다.

‘짜가천국’ 동대문

회사원 박모씨(32·서울 종로구 효자동)는 부인이 동대문 시장에 쇼핑하러 가자고 하면 짜증스럽다. 지난번 쇼핑 때 당한 진저리나는 기억 때문. 5월13일 오후 11시 박씨는 부인과 처제들과 쇼핑에 나섰다. 하지만 청계천에 다다른 버스는 움직일 줄 몰랐다. 도로 3,4차로를 무단 점유한 화물차와 관광버스, 자가용들 탓에 버스와 택시들은 그야말로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거의 한시간이 다 돼 동대문 시장에 내린 박씨는 엄청난 인파에 또 한번 질렸다. 세밑의 명동거리를 연상시킬 만큼 거대한 인파 속에 구겨지듯 파묻힌 박씨는 조금씩 조금씩 밀려 두산타워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미 파김치가 된 박씨와는 달리 부인과 처제들은 이 가게 저 가게를 기웃거리며 신나게 쇼핑을 했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돌아가자고 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쇼핑을 마친 박씨. 하지만 집에 돌아가는 길도 순탄치 만은 않았다. 또다시 인파를 뚫고 지하도로 내려간 뒤 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택시는 도통 멈추질 않았다. 어렵사리 모범택시를 잡아탄 박씨는 속으로 ‘내가 여기 또 오면 성을 간다, 성을…’이라고 되뇌고 있었다.

동대문 시장에 쇼핑하러 왔다 박씨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은 한둘이 아닐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동대문 쇼핑의 참맛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한바탕 전쟁을 치르듯 옷을 산 후 쫓기듯 집에 가기 바쁜 동대문 시장을 ‘10대들의 쇼핑천국’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젊은이들의 ‘패션 특구(特區)’란 그럴듯한 슬로건으로 포장됐지만 재래시장을 현대식 건물에 옮겨 놓았다는 것 이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다. IMF 경제위기를 맞아 상대적으로 저렴하면서도 백화점에 비해 유행성 면에서 앞선다는 이유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동대문 시장. 하지만 동대문 시장은 이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5월18일부터 3일간 대한주택공사가 동대문을 찾은 시민 11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는 동대문 시장이 안고 있는 문제와 개선방향에 대한 시민들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동대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대해 ‘패션시장’을 꼽은 사람이 665명(60.5%)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는 혼잡함(162명·14.7%)을 떠올렸다. 동대문시장 주변에서 가장 불편했던 점을 묻는 질문에는 ▲교통혼잡 565명(51.4%) ▲휴식공간 부족 292명(26.5%) ▲쇼핑공간 협소 182명(16.5%) 등을 꼽았다. 또한 대다수의 시민들은 동대문 시장 주변에 넓은 보행로(49.8%)와 편히 쉴 수 있는 휴식공간(37.6%)을 마련해줄 것을 희망했다.

실제로 상인들도 올해 들어 구매고객이 크게 줄어들고 있다고 말한다. 밀리오레 4층에서 남성 캐주얼복 상가를 운영중인 정모씨(24·여)는 “과거에는 지방에서 단체로 오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제는 지방에도 대형 쇼핑몰이 등장해 예전 같지 않다”며 “매장을 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옷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구경꾼마저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두산타워에서 상점을 운영하고 있는 한 상인도 “‘짝퉁(유명 메이커 제품을 모방한 제품에 대한 속칭)’을 팔면 손님들이 좀 관심을 가질까 요즘은 아예 동대문 패션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동대문 시장에는 점포수만큼의 사장이 있다. 2000년 6월 현재 2만7000여 점포가 있으니 동대문 시장에만 3만명에 조금 못 미치는 사장이 있는 셈. 이들의 목표는 물론 돈을 버는 것이다. 돈을 벌려면 당연히 장사가 잘되는 옷을 만들어 팔아야 하고, 외국 고급 브랜드의 모조품을 선호하는 소비자의 의식은 결국 동대문 시장을 ‘짝퉁천국’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어제 압구정동 갤러리아 백화점에 걸린 신상품이라도 내일이면 동대문 시장에서 볼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동대문 시장의 ‘베끼기’는 가위 신(神)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복제상품의 범람은 스스로 창의적으로 디자인을 개발하지 않아도 순발력 있게 베끼기만 잘하면 장사를 잘할 수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켜 상인들의 디자인 개발의욕을 꺾어버린다. 실제로 동대문 소매시장의 경우 복제품을 파는 가게와 그렇지 않은 가게는 30∼70%까지의 매출액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동대문 시장에 켜진 적신호

이렇게 시장에서 불법 복제품을 만드는 것에 대해 관계당국이 단속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시장에서는 조직적으로 대응한다. 단속반이 들이닥치면 매장에 흘러나오는 음악의 분위기를 확 바꾸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최신 테크노 음악이 흘러나오던 매장에서 갑자기 트로트가 흘러나오면 단속반이 온다는 신호다. 이정현의 ‘바꿔’가 나오다가 이은하의 ‘멀리 기적이 우네’가 흘러나오면 알아서 복제품을 치우란 소리다.

게다가 한때 성시를 이뤘던 외국인 바이어들도 최근에는 발길이 뜸해지고 있다. 지난해 6월 문을 연 동대문 시장 외국인 구매안내소의 방문객 현황을 보면 지난해 9월부터 12월까지 4개월 평균 방문객이 290여명을 기록했지만, 올해 1월부터 4월까지의 방문객 수는 260여명으로 10% 정도 줄어들었다. 동대문에 자리잡은 도매상가 중 가장 호황을 이루고 있는 ‘디자이너클럽’에서 2년째 상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모씨(28·여)는 “디자이너클럽을 찾는 대만이나 일본의 바이어들이 크게 줄어들고 있다”며 “그나마 가장 장사가 잘된다는 디자이너클럽이 이 정도니 다른 곳은 물어보나 마나”라고 말했다.

한국무역협회가 운영하는 외국인 구매안내소의 고동철(高東澈) 소장은 남의 물건 베끼기에만 의존한 채 새로운 디자인 개발을 게을리할 경우 가까운 장래에 중국이나 여타 동남아 시장에 비교우위를 빼앗길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고소장은 “중국 시장의 경우 아직까지 주문에서 배달까지 1개월 이상이 걸려 10일에 불과한 동대문 보다 늦고 바느질 마무리가 거칠어 동대문 시장을 능가하지는 못하고 있다”며 “하지만 중국 시장은 동대문 시장보다 인건비 등에서 압도적으로 저렴해, 가격경쟁을 펼칠 경우 동대문 시장을 앞지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고소장은 최근 일본도 섬유산업 등의 불황으로 공장 가동률이 저조해지면서 동대문 시장에서 완제품을 사가기보다는 원단을 가지고 가 현지공장에서 직접 가공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는 동대문 시장측의 서비스 정신. 광고나 안내표지판 등의 영어표기는 물론이고 말이 안 통한다는 문제는 10년 전부터 지적된 문제점이지만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동대문 시장이 안고 있는 이와 같은 위기상황은 최근 삼성패션연구소가 내놓은 ‘재래의류시장 실태 및 문제점’이라는 보고서를 보면 한층 구체화된다. 이 보고서는 4월 전국 20∼49세 남녀 560명을 대상으로 인터넷 설문을 통해 실시한 ‘패션쇼핑몰 소비자 의류구매 행동조사’를 토대로 작성됐다. 이 조사결과는 소비자들의 구매의식이 IMF 경제위기 때와는 크게 달라지고 있음을 시사하며 동대문 시장도 새로운 전략을 구사하지 않으면 생존경쟁에서 뒤처질 것임을 보여준다.

IMF의 영향을 받던 99년에는 동대문 시장을 찾는 소비자 5명 중 3.9명이 ‘비싼 옷 한 벌보다 싼 가격으로 여러 벌을 구매’했으나, 경제가 다시 활성화된 2000년에는 이런 성향을 가진 소비자가 3.19명 수준으로 낮아지고 있다. 대신 ‘비싸더라도 이왕이면 유명 브랜드를 구매하는 소비자’는 오히려 IMF 때 2.76명에서 3.04명으로 늘어났다. 또한 1주일에 한 번이나 2주일에 한 번 동대문 시장을 방문하던 사람은 지난해 27.3%에서 올해는 12.4%로 절반 이상 줄었다. 대신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달에 한 번 정도 방문하는 사람은 38.3%에서 57.1%로 크게 늘었다.

인적 네트워크 결여

삼성패션연구소는 동대문 시장을 찾는 소비자가 줄어드는 이유에 대해 최근 재래시장이 폭발적인 인기를 모을 수 있었던 가격경쟁력과 제품유행성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지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했다. 같은 조사에 따르면 동대문시장을 찾는 고객 10명당 5.7명이 ‘적당한 가격대’의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 방문하는 경향을 보였지만 가격에 대한 만족도는 지난해 4.12점(5점 만점)에서 3.7점으로 하락한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동대문 시장에서 옷을 사는 소비자들은 경기가 호황기에 접어들었는데도 의복구매시 고려하는 속성에서 ‘적당한 가격’의 중요성에 99년 4.24점보다 높은 4.31점을 주었다.

또한 경기가 안정되면서 소비자 쪽에서는 패션제품을 구매할 때 ‘제품의 유행성’을 주요 고려사항으로 삼는다. 99년 조사의 경우 유명 브랜드 제품에 3.73점의 만족도를 보인 반면 동대문 시장의 만족도는 4점으로 오히려 높았다. 하지만 1년 후인 2000년 조사에서는 동대문 시장 제품에 대한 유행성 만족도가 3.58로 0.42점이나 감소했다. 즉 동대문시장의 최대강점 중 하나였던 ‘신속한 기획력을 통한 유행성이 높은 제품의 집적지’라는 매력이 저하되고 있어 동대문 시장을 포함한 재래시장에 적신호가 켜진 셈이다.

불행히도 삼성패션연구소의 분석은 동대문 시장에서 이미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동대문 시장을 발전시켰던 원동력이 오히려 동대문 시장발전에 딴죽을 거는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동대문 시장에는 시장 상인들간의 인적 네트워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자 개인 플레이를 하는 상인들이지 동대문 시장 전체를 조정하고 통합하는 구심점을 중심으로 하는 네트워크가 구축돼 있지 않다는 것.

동대문의 발전요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기획-생산-판매’ 간에 이루어진 완벽한 팀플레이였다. 동대문 상인을 명확한 구심점으로 해 제품 구상에서 생산 판매의 전(全)기능이 유기적으로 연계돼 전 세계에서 가장 신속한 생산체계를 갖춘 것이 동대문의 힘이었던 것. 이는 동대문이 공간적으로도 패션에 관련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처리해낼 수 있는 자기완결적 산업집적지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1000만명이 모여 사는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 이와 같은 ‘패션의 실리콘 밸리’가 있다는 것은 신이 내린 최적의 입지인 것이다. 이에 덧붙여 동대문 상인들은 정부의 지원에 의존하지 않는 자생적인 노력으로 재래시장 이미지를 탈피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자생적이고 자기집적적인 동대문 시장은 상인과 상인 간, 상인과 시장 간, 그리고 시장과 시장 간의 횡적 네트워크의 부재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모래알’이라는 비난을 듣고 있기는 하지만 동대문 시장의 상인들이야말로 모래알 중의 모래알이라는 것. 개개인은 그렇게 단단하고 야무질 수 없지만 절대로 뭉칠 수 없는 존재라는 평가가 그것이다.

재래시장에 안주하는 상가 상인들의 전근대적인 경영 마인드도 동대문 시장이 위기에 처했음을 알려주는 적신호다. 동대문 상인들은 최선을 다해 물건을 만들지 않는다. 동대문 시장 상인이면서 동대문 시장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인터넷 사이트 동타닷컴(www.dongta.com)을 운영하고 있는 신용남(申龍男)씨의 말을 들어보자. “동대문 시장은 가짜를 진짜처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곳입니다. 달리 말하면 진짜보다 더 좋은 가짜를 만들 수 있는 저력이 있는 곳이지요. 하지만 그런 상인들의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동대문 시장 제품에 대해 어떤 사람도 동대문 시장 제품이 세계 최고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이유는 있습니다. 물건을 제대로 만들려면 엄선한 재료를 써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동대문 시장은 비싼 원자재를 감당할 수가 없지요. 자연 ‘메이드 인 동대문’ 제품은 최고의 제품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동대문 상인들은 물건하나 하나에 정성을 들여 만들기보다는 대충대충 빨리빨리 만들기에 더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이런 풍토에서는 결국 ‘제목 조르기’식의 단가인하 경쟁만 펼치게 된다. 그리고 다른 점포에서 인기를 끈 상품을 복제하는 소위 ‘샘플 따먹기’가 횡행하는 것이다. 이런 구조에서 생산된 제품은 결국 “시장제품이 그렇지…”라는 싸구려 이미지로 고착될 수밖에 없다. 이런 지적은 외국인들의 입에서도 나온다. 외국인 구매안내소의 고동철 소장은 “많은 일본인 바이어들이 ‘과거와 달리 최근 디자이너클럽을 다녀보아도 눈에 확 띄는 제품이 없다’고 푸념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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