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 시장은 향후 유통구조 변화에 대한 인식 미흡으로 유통정보화나 신업태 개발 등에 무관심하다. 현재 장사가 잘되면 됐지 10년 후나 20년 뒤를 내다보는 것은 사치라는 생각. 또 인터넷 마케팅이나 전자상거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필요성을 느낀다 하더라도 목전의 실익이 없어 무관심한 편이다.
또한 공동 수출 마케팅 부재로 세계시장 진출에도 애로를 느낀다. 즉 디자인, 가격, 신속한 납기 등에서 잠재적인 수출경쟁력은 있지만 마케팅에 대한 인식결여와 공동투자 부족으로 수출시장 진출도 부진하다. 일부 상가이기는 하지만 재개발 및 상가소유나 상가운영을 둘러싼 이해 당사자간 대립과 분쟁도 시장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이다.
속된 말로 동대문 시장이 좀 뜨자 뒤늦게 지원책을 발표하고 생색내기식 지원을 약속하는 행정당국의 태도도 동대문 시장 상인들이 보기에는 못마땅하다. 사실 동대문 시장은 관의 지원 없이 자생적으로 발전한 경우다. 재건축이나 재개발의 문제도 민간차원에서 어느 정도는 해결했다는 것. 결국 인프라가 갖춰진 탓에 아직도 민간 개발업자들이 경쟁적으로 재개발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산업자원부, 서울시, 무역협회 등이 지원책을 내놓으면 상인들의 대다수는 “정책은 좋지만 공무원들이 책상에서 머리 굴려 만든 정책이 실효성이 있겠어”라는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고, “왜 뒤늦게 난리야”라며 ‘뒷북 행정’을 질타한다.
실제로 일부 지원책은 시장생리에 맞지 않는 비현실적 지원책에 머무르고 있다. 또한 각종 지원기관의 생색내기식 정책이 상충하거나 중복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심한 경우 어떤 상인들은 “관은 나서지 않는 것이 도와주는 길”이라며 관의 생색내기식 행정에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5월9일 동대문 시장의 한 일식집에서는 재래시장의 위기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서울시 산하 서울산업진흥재단은 이날 오전 11시 동대문 시장 각 상가 대표들을 대상으로 ‘서울패션디자인센터’에 대한 설명회를 가졌다.
먼저 서울시측의 비전 설명. 서울산업진흥재단의 정귀래(鄭貴來·57) 대표이사가 서울패션디자인센터의 설립 배경과 주요기능 및 사업을 설명했다. 패션산업의 새로운 중심지로 우뚝 선 동대문 시장이 규모가 영세하고 전문인력이 부족하며 디자인 개발 및 효율적인 마케팅 전략부재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패션종합정보를 제공하고 ▲디자인·브랜드 개발을 지원하는 한편 ▲해외진출 등을 도와 국제경쟁력을 갖춘 상권으로 육성, 발전시키겠다는 취지. 7월1일까지 중구 을지로 5가에 새로 선뵌 ‘엠폴리스’ 지하에 218평 규모로 센터를 설립하겠다는 것이 서울시측의 목표다. 정씨는 “센터 설립까지는 서울시가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지만 이 센터를 실질적으로 운영할 센터장은 동대문 시장 상인들이 직접 추천해 그중 최적임자를 선발하는 것이 좋겠다”며 이날 회의소집 이유를 설명했다.
외견상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모임이었다. 재래시장의 중흥을 위해 서울시가 발벗고 나섰고 동대문 시장 상인들이 모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으는 자리로 보였다. 하지만 상인들의 발언이 시작되자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서울시측은 서울패션디자인센터 설립을 기정사실로 하고 다만 이 센터를 대표할 사람을 상인중에 뽑는 것을 논의하려 했지만 상인들은 패션디자인센터의 필요성 자체에 대해서도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상인들은 “디자인센터가 생긴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는데 밑도끝도없이 무슨 센터장을 뽑으라는 말이냐”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동대문 시장에서 두 블록 정도 떨어진 훈련원공원 지하에 설치한다는 디자인센터의 위치에 대한 불만도 터져나왔다. 한 상가의 대표는 “동대문 시장 상인들은 엠폴리스가 생겼는지지조차 모르고 있는데 그곳에 디자인센터를 설치한다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며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했다. 다른 상가 대표도 “괜한 예산 낭비 하지 말라”는 말로 거침없이 서울시측을 몰아붙였다.
상인보다 상가가 많다?
서울시측은 장소물색의 어려움을 역설하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동대문 시장의 발전을 위해서는 패션디자인센터의 발족이 시급하다고 역설했지만 상인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는 못했다. 결국 이 모임은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2시간여의 격론 끝에 끝을 맺었다. 모임이 끝난 직후 서울시 관계자는 “시장 상인들을 위한 야심찬 기획인데 정작 시장 상인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결국 무조건 7월1일 오픈을 강행하겠다는 서울시 산업진흥재단측과 “오픈하려면 해라. 우리는 관심없다”는 상인들 사이에 시민들의 혈세만 낭비될 개연성이 큰 실정이다.
디자인센터 개관을 보름여 앞둔 6월15일까지도 센터를 대표할 센터장은 인선되지 않고 있다. 상인협의회측이 2명, 상가관리자협의회측이 1명을 추천, 3명의 센터장 후보가 경합을 벌이고 있지만 서울시측이 선뜻 적임자를 선발하지 못하고 있는 것. 상인들의 반대로 센터장을 비상근 명예직으로 했지만 이해가 다른 상인을 대표할 만한 적임자를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이렇게 센터장 선정에서부터 난항을 겪고 있지만 서울시측은 패션디자인센터를 7월1일부터 운영하겠다는 방침을 굽히지 않고 있다. 패션정보 제공업체는 삼성물산이, 패션기획은 인터패션플래닝과 명지대의 컨소시엄이 각각 맡기로 했고 팀장과 직원들 공채가 마무리됐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 동대문 시장의 한 관계자는 “상인들 동의도 얻지 못한 상태에서 건물만 덜렁 지어놓고 진정 상인들의 필요에 부응할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관련사업의 취약성도 동대문 시장의 장래를 어둡게 하는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동대문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거나 포화상태를 지난 것으로 판단되고 있지만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고 있는 탓에 아직도 새로운 상가가 계속 들어서고 있다. 동대문을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한 도매상가의 경우 최근 문을 연 누존이나 apM, TTLL2000, 엠폴리스 같은 곳에는 상인들이 입주하지 않아 빈 상점이 곳곳에 보인다. 동대문 시장에서는 “이제는 상인보다 상가가 많다”는 자조적인 농담도 나돌고 있다.
밀리오레나 두타식 대형 쇼핑몰의 증가는 서울 동대문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올해 들어 문을 연 곳과 추가로 오픈 예정인 대형쇼핑몰(300개 이상의 점포)과 중소형 쇼핑몰의 수가 전국적으로 40여곳에 이르러 현재 운영중인 70개 패션 쇼핑몰의 절반이 넘는 숫자가 올 한 해동안 새로 생겨나게 된 셈이다. 동대문 따라하기식 쇼핑몰의 급격한 증가는 지방 재래시장과 이대앞, 성신여대앞, 건대앞 옷가게와 같은 ‘로드숍’의 붕괴로 이어질 전망이다. 재래시장의 위기와 로드숍의 붕괴는 동대문 시장의 물건을 소화해내는 인프라의 붕괴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동대문 시장으로서는 심각한 문제다.
한편 급격한 상가의 증가에 비해 숙련공의 노령화, 신규인력의 충원 부족, 노동력 부족 등으로 인해 가까운 장래에 수급 불균형이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동대문 시장 경쟁력의 핵심 중의 하나인 봉제공의 경우도 어려운 봉제일을 배우려는 젊은이가 없어 길게 잡아야 3년 후면 봉제인력난이 현실로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동대문 시장에서는 무자료 거래로 인한 공공연한 탈세가 이루어지고 있다. 전체 거래량의 90% 정도가 무자료 거래로 이뤄지고 있어 동대문 시장 전체가 거대한 탈세시장이 되고 있다. 또한 일부 소매시장에서 신용카드 매매가 이뤄지고 있으나 명목일 뿐 대부분 현금이 아니면 구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동대문 시장은 물류기반이 영세하고 취약하다는 것. 주차시설 부족으로 고질적인 주차난을 보이고 있고, 이는 주변지역의 정체로 파급돼 결국 서울시내에서 가장 교통난이 심각한 지역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게다가 밀리오레·두산타워 등의 경우 거의 24시간 쉬지 않고 영업하는 바람에 밤낮 할 것 없이 교통지옥을 이룬다.
동대문 시장을 지나려면 인내심을 가져라
실제로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청계천5가∼청계천7가 구간의 경우 낮 12시∼오후 1시 사이에 도심 방향은 3.7㎞, 오후 6시∼오후 7시 외곽 방향으로는 3.3㎞의 속도를 내는 데 그쳐 문자 그대로 기어가는 수준의 교통상태를 보였다. 또한 동대문∼을지로6가 구간인 흥인문로의 경우 오후 6시∼오후 7시 도심과 외곽 방향 차량의 통행속도가 각각 7.2㎞와 9.9㎞에 그쳤다. 시정개발연구원의 연구는 결국 밀리오레나 두산타워 등 대형 쇼핑몰이 위치한 블록이 동대문 운동장 주변의 정체를 일으키는 핵심요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서울시는 조사를 토대로 4월27일 동대문 시장 주변을 교통특별관리구역으로 지정하기 위한 공청회를 가졌다. 이날 공청회에서는 시정개발연구원 황기연 도시교통연구부장의 주제발표에 이어 건설교통부·서울시 등 관리들과 서울시의회 의원, 시민단체 등 50여명이 격론을 벌였으나 결론을 도출해내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건교부와 서울시는 동대문 시장 주변을 ‘교통혼잡특별관리지역’으로 지정하고 내년부터 ▲주차가산금 2000원 ▲승용차 10부제 ▲이면도로 불법주차 단속과 처벌강화 등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이 안에 대해 상인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상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동대문 시장을 찾는 소비자들의 평균 구매액이 2만∼3만원에 불과한데 구매액의 10%에 이르는 요금을 주차 가산금으로 내면서까지 동대문 시장을 찾을 사람이 있겠느냐고 지적한다.
주차난과 교통혼잡을 해결하겠다며 이 계획을 추진하는 서울시가 기존의 주차장을 허물고 새로운 상가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추진하는 것도 상인들을 허탈하게 한다. 서울시는 최근 동부건설이 동대문주차장 부지에 상가건물을 신축할 수 있도록 도시사업계획 변경을 인가했다. 동부건설이 교통영향평가 심의를 통과하면 조만간 연면적 4500평, 지상 5층 규모의 상가용 건물을 신축할 계획.
5월7일 오후 3시 일본 도요나카(豊中)시의 아시다 히데키(芦田英機·57) 정책추진부장과 연세대 사회학과 김찬호 교수, 서울여대 원예학과 이은희 교수, 대한주택공사 유상오 도시개발기획단 연구부장 등이 동대문 시장에서 모임을 가졌다. 아시다 히데키는 1990년 오사카(大阪)부 도요나카시에서 주민들이 참여하는 ‘도시 만들기 작업(마치 츠쿠리)’을 기획한 도시정책 전문가. 이날 동대문 시장을 둘러본 히데키는 “동대문 시장의 상인들은 활력이 넘치는 역동적인 사람들”이라고 평가한 뒤 “하지만 현재의 동대문 시장 공간구조는 다중이 이용하기에는 불편하게 구성돼 있다”고 평가했다.
히데키는 이곳을 이용하면서 불편을 느끼는 시민들과 이곳 시장의 주인인 상인들이 나서 가장 이상적인 공간구조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히데키는 “관(官)은 이렇게 시민들과 상인들이 만들어낸 공간구조를 실현시켜주는 소극적인 역할에 그쳐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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