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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용 IOC위원의 30년 스포츠 交遊錄

“사마란치와 앤공주 두 앙숙이 모두 내친구”

  • 김운용 IOC집행위원· 대한 체육회장 ·새천년 민주당 상임고문· 16대 국회의원

“사마란치와 앤공주 두 앙숙이 모두 내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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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서울에 올 때마다 나는 그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때마다 한 번도 빠짐없이 확인하는 것이 있다. 공식 스케줄 외에 그의 사적인 활동은 저녁을 먹는 것이 고작이라는 점이다. 그는 술과 담배를 일절 하지 않는다. 식사시간에도 와인 한두 잔이 고작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밤 아홉 시 전에 끝내고 열 시에는 반드시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는 한 시간 이상 운동을 한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세계 어느 곳에 있든 꼭 미사에 참석한다. 수십 년간 몸에 밴 습관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그는 절제를 아는 사람이다.

1982년 박종규씨가 사마란치를 서울의 한 요정으로 초청한 적이 있었다. 사마란치는 향응이 제공될 기미가 보이자 30분 정도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일이 있어 먼저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밖에 모른다.

나는 그에게서 깊은 감화를 받았다. 이상을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삶을 되찾는 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곤 한다.

그는 나를 좋아한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김 부위원장 없으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지금도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전보를 치고, 확인 전화를 걸어 나의 안전을 묻는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1990년 내가 망막박리 현상으로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누워 있을 때 자주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가 하면 수술 후의 경과를 스위스 병원에서 체크할 수 있게 주선해 주기도 했다.

한때 아마추어 정신을 옹호하는 올림픽이 상업주의에 심하게 오염되고 있다는 비난 여론이 일었다. 이에 대해 사마란치는 평소의 소신을 피력하기도 했다.

“스포츠는 혼자서 설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꾸준한 경제적인 후원이 있어야 합니다. 돈이 없으면 스포츠가 발전하지 못합니다. 돈이 스포츠나 선수를 지배하면 안 되지만 스포츠를 위해 돈이 쓰이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나는 상업주의 경향은 오히려 올림픽 정신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이루어져야 가장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마지막 순간이 오기까지 자만하거나 좌절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희망과 목표를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라는 것, 1차 목표를 2차 목표로 수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는 차선책도 멀리 보면 최선책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적인 따스함은 언어와 피부와 민족의 장벽을 얼마든지 넘을 수 있다는 것 등이다.

1987년 12월 13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다음해 2월 새 정부가 들어선 뒤 사마란치 위원장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씨 등 야당 지도자를 초대했다.

민정당 윤길중 대표를 포함, 신라 호텔에서 조찬 형식으로 만난 자리에 나는 IOC 위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3김씨는 남북 체육교류에 쏟는 IOC의 노력과 북한이 주장하는 올림픽 공동 개최의 비현실성에 대해 공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북한의 올림픽 참가를 위해 한국 국민과 IOC가 다시 한번 노력해야 하며 서울 올림픽 성공을 위해 민족 차원에서 협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날 만남은 올림픽운동과 민족 통합을 위해 아주 효과적이고 알찬 자리가 되었다.

영국의 자존심, 앤 공주

사마란치 위원장은 김대중 총재의 요청으로 재야 대표들과 만나 IOC의 입장과 노력에 대해 설명했다. 물론 나도 한국의 IOC위원 자격으로 자리를 같이했다.

그 만남이 있은 후로 재야 지도자들이나 학생들의 올림픽 공동개최 요구는 잠잠해졌다. 사람들은 사마란치 위원장이 스포츠 지도자로서 왜 정치인들을 만나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나중에야 정부도 그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98년 2월25일 사마란치 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했다.

본래 영국 왕실은 격식과 까다로움으로 이미 세계에 명성을 떨치고 있다. 그들은 여자들끼리 나란히 앉는 법도 없으며 사진을 찍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중에도 앤 공주의 성격은 매우 까다롭고 유별나기로 국제사회에서 정평이 나 있다. 그녀는 직접 사인도 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경우에만 시녀가 대신 할 정도다. 또한 영국은 말할 것도 없고 국제 스포츠계에서도 저명인사로 통하는 앤 공주는 너무나 꼿꼿한 성격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많은 오해를 사기도 한다.

88서울올림픽 전에 그녀가 국제승마연맹 회장으로서 서울에 왔을 때다. 만찬이 있었는데 옆에 앉았던 체육계의 모간부가 메뉴에 서명을 부탁한 적이 있다. 물론 그녀는 아무런 응대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본체만체했다. 앤 공주의 이런 모습은 자주 볼 수 있다.

나는 앤 공주와 잘 지내는 편이다. 그 이유는 서로에 대한 신뢰라고 생각한다. 나는 늘 신의를 갖고 그녀를 대했으며, 그녀도 자연히 나를 신뢰하게 되었다.

앤 공주가 사마란치와 불화를 겪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녀는 사마란치 위원장이 추진해온 올림픽의 상업주의와 프로화, IOC위원의 임기 연장(80세)에 대해 반대의견을 표명했다. 특히 부다페스트총회에서는 IOC전체를 ‘노인당’으로 구성, 웃음거리로 만들 것이냐면서 반대의사를 노골적으로 나타내기도 했다.

이는 아직도 과거에 집착하는 앵글로색슨족과 스페인 마피아라 불리는 집단의 대립이라 볼 수 있다.

나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본다. 사마란치는 현실주의자고, 앤 공주는 전통주의자다. 사상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에 이에 따르는 불협화음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내가 그녀에게서 받은 여러 가지 느낌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적극적인 사회활동이다. 그녀는 지금 국제연합아동기금(UNICEF) 자선사업에 매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저에게 점심을 사고 싶으시다면 대신 그 돈을 아동기금에 내주세요.”

자신을 점심식사에 초대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다닐 정도다.

나는 1950년 6월1일 연희대 (연세대학교 전신) 1학년을 마치고 제 2회 행정고시, 행정 3부(현 외무고시)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에는 1학년만 마치면 본고사를 치를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에 입학 때부터 치밀한 계획을 세워 준비를 해나갔다. 6월에 한 학기가 시작되던 때라 5월말 2학년에 진급할 자격을 얻고, 8월에 시험을 치른다는 계획이었다. 그해 6월20일, 종로 세무서에 가서 2000원 짜리 인지를 산 후 옛날 중앙청 한 모퉁이에 있던 고시위원회에 원서를 제출했다. 8월3일에 고사장에 집합하여 4일부터 12일까지 시험을 치르기로 일정이 잡혀있었다.

그러나 그 긴장은 5일 후에 산산이 깨져버렸다. 6월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이 남쪽을 향해 포탄을 쏘아댄 것이다. 시험은커녕 국가의 존위마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9월28일 서울이 수복되자 곧바로 입대했다. 조국이 젊은이들을 부르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당시에는 입대해서 싸우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고, 인생에 아무런 가치도 느낄 수 없었다. 이미 외교관이 되겠다는 꿈은 사라졌고 군인이 되겠다는 것말고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외교관의 꿈 접고 입대하다

입대 후 나는 연락장교로 일했다. UN연락장교단이 있었는데 짧은 기간 교육을 마치면 곧바로 장교에 임관될 수 있었다. 나는 영어를 잘 한 덕분에 미군과 연락하고 통역하는 것을 주임무로 했다. 그러나 적과 대치하면서 피 흘리고 목숨까지 바치는 젊은이들이 즐비한데 후방에서 통역이나 하는 내 모습이 양심상 허락되지 않았다.

1951년 7월 부산 동래에 있던 보병학교에 들어가 보병장교로 다시 임관되었다. 1953년 7월27일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나의 군생활은 계속되었다. 19세에 중위, 21세에 대위, 23세에 소령이 되었고, 29세에 중령으로 예편(1961년 6월)했다.

군인 신분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55년 미국 텍사스에 있는 웨스턴 대학교에서 1년 반 동안 정치학을 전공했다. 미국 유학중 ‘피스톨 박’으로 널리 알려진 박종규 전 청와대 경호실장과 군사영어에 능통한 조상호 전 체육부 장관 등과도 함께 공부했다. 조 전 장관은, 58년 내가 아내 박동숙(朴東淑)을 만나 당시 체신부 장관이었던 이응준(李應俊) 장군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릴 때 사회를 볼 만큼 우리는 막역한 사이였다.

귀국 후 군인 신분으로 58년 연희대 정치외교학과에 학사 편입하여 60년 비로소 학부 공부를 마쳤다.

그 동안 육군 제1군 사령관으로 있던 송요찬(宋堯讚) 장군과의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의전 통역 관계 일을 담당했다.

송사령관(중장)이 59년 2월 백선엽(白善燁) 대장의 뒤를 이어 제 11대 육군 참모총장으로 영전되자 나도 함께 강원도 원주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 나는 소령계급으로 수석 부관이었다.

송총장의 재임중 4·19가 터졌다.

4·19 민주 혁명은 3·15 부정 선거에 대한 항거로 시작되었다. 경남 마산(馬山)에 이어 서울에도 이 소식이 전해져 드디어 고려대 등의 데모가 시작되었다. 이에 대한 정부의 대처는 너무나 폭압적이었으며 비민주적인 발상이었다.

정부는 관변 깡패들을 이용해 고대생의 데모행렬을 습격(4월18일)하였고, 이에 격분한 전국의 각 대학교와 일부 고등학생 등이 이에 정면으로 항거했으며 시민들 또한 학생들을 옹호하고 나섰다.

학생들과 시민들의 행렬이 경무대에 이르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경찰이 발포함으로써 수백 명의 학생·시민들이 꽃다운 한 생애를 비참하게 마쳐야 했고, 항거 수위는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4월19일 오전 11시경 효자동(孝子洞)거리에서 경찰의 발포가 있었고, 오후 3시쯤 송장군이 경무대로 불려가더니 얼마 있지 않아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미 내각이 총 사퇴하고, 명령계통은 국군 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에서 송요찬 계엄사령관으로 바로 이어질 때였다. 그런데 이기붕(李起鵬) 부통령 당선자가 당초 사퇴할 것이라는 소식이 사퇴고려 쪽으로 번복되자 국민들의 불만이 극에 다다랐다. 드디어 사태는 이미 정부에 대한 불신감에서 배신감, 마침내 국가에 대한 증오감으로까지 번지기 시작했다. 4월25일 교수단 데모와 전국적인 시위는 이승만 박사의 하야(4월 26일)로 이어졌다. 이는 세계 어느 나라 역사에도 없는 학생 혁명이었다.

당시 수석 부관실에는 나를 팀장으로 육사 11기 수석 졸업생인 김성진(金聖鎭) 대위(전 체신부·과학기술처 장관)와 12기 수석 졸업생인 이병간(李丙幹) 대위(작고·예비역 소장)가 각각 내근과 수행부관으로 함께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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