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7월호

길상사를 찾는 사람들은 왜 행복할까

  • 윤청광 방송작가

    입력2006-10-04 10: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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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찰 문을 연 지 겨우 2년6개월. 그러나 그간에 명상을 하러 길상사 ‘침묵의 방’을 이용한 일반인들만 600여 명에 이르고, 참선수행을 하는 ‘시민선방’에는 1500여 명의 시민이 찾았다. 가톨릭 수녀들도 즐겨 찾아 명상하는 길상사는 대체 어떤 절일까.》
    21세기니 새천년이니 하더니 이제야 그 말뜻을 알 것 같다. 세상은 온통 사이버 시대요, 초고속 정보통신의 시대요, 벤처의 시대요, 인터넷 시대요, 나스닥과 코스닥에 춤추는 시대다. 사람들은 저마다 귀신에 홀린 듯, 귀신에 쫓기듯 “더 많이! 더 빨리! 더 크게! 더 편하게!”를 외치며 질주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을 속도계로 측정한다면, 아마도 경부고속도로의 제한속도인 시속 100km를 훨씬 초과하여 시속 200km의 질주쯤 되지 않을까?

    쫓기듯 헉헉대며 무작정 달리다가 지쳐 길섶에 주저앉아 문득 생각해보니 어디를 향해 달려왔는지, 무엇을 위해 달려왔는지, 왜 달려야만 했는지, 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왜 사느냐고/ 누가 나에게 물으면/ 나는 그냥/ 빙그레 웃지요.’

    옛 시인은 이렇게 읊었지만, 나에게는 불행하게도 시인처럼 그렇게 빙그레 웃을 여유가 없다.



    이럴 때, 나는 길상사(吉祥寺)를 찾는다. 서울 한복판 성북동의 유명한 저택촌에 자리잡고 있는 길상사는 절(寺)로 모습을 바꿔 문을 연 지 이제 겨우 2년6개월밖에 안 된 색다른 사찰이다.

    이곳은 원래 우리나라 삼대(三代) 요정인 대원각, 삼청각, 청운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던 대원각이었다.

    주지육림의 바다였던 대원각, 밀실정치의 총본산이었던 대원각, 온갖 부정과 협잡과 야합의 상징이었던 요정 대원각은 7000평에 이르는 드넓은 땅과 숲 속에 40동의 건물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대원각의 주인은 김영한(金英韓) 할머니. 1987년 당시 미국에 머물고 있던 김영한 할머니는 ‘무소유’로 널리 알려진 법정(法頂)스님이 설법차 LA에 오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평소 가깝게 지내던 김대도행보살을 통해 LA 고려사에서 스님을 처음 뵙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김영한 할머니는 대원각 건물과 대지와 임야를 모두 법정스님께 아무 조건 없이 시주할 테니 절(寺)로 만들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무소유’를 화두삼아 살아오신 법정스님은 즉석에서 정중히 사양했다. 이로부터 장장 10년에 걸쳐 기이한 승강이가 계속되었다.

    “제발 제 시주를 받아주십시오, 스님.”

    “나는 그 시주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시가 1000억원대에 이른다는 엄청난 재산을 아무 조건 없이 시주하겠다는 김할머니의 간청과 ‘받을 수 없다’는 법정스님의 끈질긴 승강이가 10년간 되풀이되었으니, 아마도 이런 기이한 승강이는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아닐까?

    결국 김할머니가 10년 만에 손을 들었다. 대원각의 전재산을 법정스님이 아닌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등록, 등기를 이전한 것이 1996년 5월20일. 이제 대원각의 모든 재산은 영원히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의 공유재산일 뿐, 법정스님은 여전히 ‘무소유’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셈이었다.

    여기에 법정스님을 흠모하고 따르는 재가불자들의 지극한 정성과 신심이 모아졌다. 그리하여 기존 건물을 개보수, 새로운 사찰 길상사가 태어나게 되었다.

    1997년 12월14일 길상사 개원식에는 한국 가톨릭의 수장인 김수환 추기경이 이례적으로 참석, 길상사의 개원을 축하해 주었다. 이날 길상사의 회주(會主) 법정스님은 개원 인사말을 통해 이렇게 다짐했다.

    “저는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절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안으로 수행하고 밖으로 교화하는 청정한 도량입니다. 진정한 수행과 교화는 호사스러움과 흥청거림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어떤 종교 단체를 막론하고 시대와 후세에 모범이 된 신앙인들은 하나같이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신앙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주어진 가난은 우리가 이겨내야 할 과제지만 선택된 맑은 가난, 즉 청빈은 삶의 미덕입니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병들기 쉽지만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이루게 하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합니다. 오늘과 같은 경제난국은 물질적인 풍요에만 눈멀었던 우리에게 우리 분수를 헤아리게 하고 맑은 가난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이 길상사는 가난한 절이면서도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날 법정스님은 대원각을 시주하여 길상사를 만들게 해준 김영한 할머니에 대한 보답으로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法名)을 내리고 108염주 한 벌을 손수 할머니 목에 걸어주었다.

    한평생 일군 1000억원대의 재산을 아낌없이 부처님께 시주한 보답으로 목에 걸린 108염주 한 벌. 법정스님이 목에 걸어준 염주를 만지고 또 만지며 “내가 평생 일군 터에 부처님을 모셔 한없이 기쁩니다” 하고 소녀처럼 좋아하던 김영한 할머니는 1년 후인 1999년 11월13일 오후 길상사 경내를 마지막으로 거닐면서 “나 죽으면 화장해서 길상사에 눈이 많이 내리는 날 뿌려주세요” 하는 유언을 남기고, 다음날인 11월14일 108염주 한 벌을 목에 건 채 83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한달 후인 12월14일 오전, 김영한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부탁했던 대로 길상사에 눈이 많이 내리자 스님들이 독경하며 재를 뿌려주었다.

    ‘맑고 향기롭게’

    성북동 길상사에는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이라는 색다른 수식어가 붙어 있다. 주차장에 들어서면 주차돼 있는 거의 모든 자동차 유리창에 어김없이 ‘맑고 향기롭게’라는 연꽃 스티커가 붙어 있다. 길상사 종무소에도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의 현판이 붙어 있다. 길상사가 바로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이기 때문이다.

    한 송이의 연꽃 밑에 ‘맑고 향기롭게’라는 여섯 글자가 보여주는 그대로 연꽃처럼 맑고 향기롭게 살자는 뜻이다. 연꽃이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지만 맑고 향기롭듯이, 우리도 비록 오탁악세에서 살고 있지만 연꽃처럼 맑고 깨끗하고 향기롭게 살자는 뜻이다.

    필자가 짐작하건대 ‘맑고 향기롭게’가 없었다면 아마도 오늘의 길상사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1993년 가을 어느 날, 화전민이 살다 떠난 산속 오두막을 빌려 혼자 수행하고 계시던 법정스님이 불쑥 서울 사간동 법련사(法蓮寺)에 오셨다는 전갈이 왔다. 평소 법정스님을 흠모하고 따르던 사람들이 법련사로 스님을 찾아뵈었다. 이 자리에서 스님은 참으로 뜻밖의 말씀을 꺼내 놓으셨다.

    맑고 향기롭게.

    “중이 밥값은 하고 가야겠기에 이 일 한 가지만은 꼭 하고 싶다.”

    스님은 그렇게 덧붙이셨다. 말하자면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을 펼치고 싶다는 말씀이었다.

    평소 번거로운 일은 싫다고 어느 절 주지자리도 맡지 않던 스님, 강연도 설법도 사양하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고 불일암도 버리고 산속으로 숨어버린 스님이셨다. 그런데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이 한 가지 일만은 하고 싶으시다니. 처음에는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스님이 우리 앞에 내놓으신 ‘맑고 향기롭게’라는 여섯 글자는 무슨 구호나 슬로건이 아니라 스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화두라는 것을 우리는 이내 알 수 있었다.

    방송인 이계진씨, 동화작가 정채봉씨, 출판인 김형균씨, 공직자 이성용씨, 부산의 기업인 박수관씨, 광주 조선대의 고현교수, 방송작가 김자경씨, 청학스님, 필자, 그 외의 몇몇 이가 스님이 내려주신 ‘맑고 향기롭게’라는 화두를 구체화하기 시작했고 실천 지침이 마련되었다.

    이 아홉 가지 실천 지침을 마련한 뒤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은 1994년 3월26일 서울 양재동 구룡사에서 첫 출발 실천 큰모임을 갖고 ‘맑고 향기롭게’ 연꽃 스티커를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이 모임을 이끄는 회주(會主)도 법정스님이었다. ‘맑고 향기롭게’의 상징이 연꽃이어서 불교운동으로 오해하는 분도 더러 있었지만 순수한 시민운동으로 이어가자는 스님의 뜻에 따라 천주교를 신봉하는 분도, 개신교를 믿는 분도, 원불교를 믿는 분도 종교를 초월하여 기꺼이 이 운동에 참여해주었고, 회비를 내주었다.

    그리고 이 모임은 곧 부산, 대구, 마산, 창원, 전주, 광주, 대전, 춘천, 제주까지 번져나갔다. 그리고 소년소녀 가장 장학금 지급, 양로원 돕기, 환경보호, 걸식아동 돕기, 노숙자 급식, 생태기행, 꽃밭 만들기 등 마음과 세상과 자연을 맑고 향기롭게 가꾸는 일을 소문내지 않고 실천해 왔다.

    서울 운니동의 콧구멍만한 오피스텔 방 한 칸을 빌려 쓰고 있던 ‘맑고 향기롭게’는 회원들이 모일 만한 장소가 없어 늘 남의 신세를 져야 했고, 사무실 임대료며 관리비도 큰 부담이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김영한 할머니는 여전히 “대원각을 법정스님께 시주하겠으니 제발 받아달라”고 거듭거듭 간청하고 있었고, 법정스님은 여전히 “시주를 받을 수 없다”고 한사코 시양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녀님도 수사님도 찾는 길상사

    ‘맑고 향기롭게’를 사랑하는 회원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눈물겨운 동참이 줄을 잇고 있는데 ‘맑고 향기롭게’를 위해서라도 근본도량이 필요하니 할머니의 소원을 받아주십사 하는 간청이 거듭되었다. 이에 법정스님도 어쩌지 못하고 “이것도 시절 인연이니 할 수 없구먼” 하며 재산등록은 송광사로 하고 자신은 회주만 맡는 것을 전제로 김영한 할머니의 시주를 받아들여 길상사를 세우게 되었다.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가 된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그래서 법정스님이 길상사 개원식에서 다짐한 대로 길상사는 결코 불교신자들만을 위한 사찰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는’ 작은 공원이자, 사색의 오솔길이며, 마음의 쉼터요, 기도처가 되었다.

    요정 대원각 시절에는 대문 노릇을 했던 낡은 솟을대문이 지금은 길상사 일주문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러나 건물이 너무 낡아 서까래가 썩고 기왓장이 깨져 지붕에 천막을 덮어 놓았을 만큼 허름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길상사에는 사천왕문도 해탈문도 없다. 일주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설법전 앞에 가녀린 모습의 새로 만든 보살상이 서 있는데, 이 보살상이 바로 가톨릭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씨가 만든 작품이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길상사의 뜻과 만든 이의 예술혼이 시절 인연을 만나 이 도량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모습을 보는 이마다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의 원력으로 이 세상 온갖 고통과 재난에서 벗어나지이다.”

    불교와 가톨릭의 만남이 빚어낸 이 섬세하고 오묘한 관세음보살상은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어 길상사의 첫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나 할까.

    울긋불긋 현란한 단청도 없고, 엄숙을 강요하는 듯한 사천왕상도 없는 길상사는 언제 들어와도 마음이 편안하다.

    그래서 그런지 길상사 경내에서는 수녀님들도 만날 수 있다. 수백년 된 느티나무 고목 아래 종각 옆에는 차를 마실 수 있는 다원(茶苑)이 마련돼 있는데, 수녀님들이 가끔씩 찾아와서 차를 마신다. 길상사 총무 덕조스님의 배려로 수녀님들이나 수사님들이 와서 차를 마실 경우 차값은 받지 않는다.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같은 수행자요 구도자이므로.

    지난 부활절에는 근처에 있는 ‘작은형제 수도회’의 가톨릭 수사님들이 부활절 달걀을 선물로 들고 길상사를 찾아오기도 했을 만큼 길상사는 포근한 곳이다.

    지난해 12월 중순, 길상사에서는 색다른 플래카드를 길 앞에 내걸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종교간에 이렇게 미소와 미소를 나누는데, 여기에 무슨 다툼이 있으랴. 그래서 그런지 길상사를 찾는 가톨릭 수녀님들은 경내를 그저 산책만 하다 가는 게 아니라, 길상사가 마련해놓은 ‘침묵의 방’도 가끔 애용한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누구나 들어가서 명상음악과 함께 명상에 잠길 수 있는 ‘침묵의 방’에서 수녀님들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꼈을까? ‘사랑의 씨튼 수녀회’의 한 수녀님은 그 소감을 이렇게 남겼다.

    “님의 빛으로 빛을 봅니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군요. 정말 편히 잘 쉬다 갑니다. 모두 감사해요.”

    ‘성바오로 딸 수도회’의 한 수녀님은 또 이런 글을 남겼다.

    “열린 공간 안에서 종교간의 일치와 열림에 대해 명상… 감사드려요.”

    그동안 언론에서 ‘1000억원짜리 대원각’이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한 탓에 길상사는 그야말로 돈 많은 사찰로 잘못 각인되었다. 요정 대원각이 자리잡고 있던 대지와 임야 7000평, 건물 값을 시가로 따진다면 약 1000억원대의 재산이 될 것이라는 말은 세간의 추측일 뿐, 정확한 산출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요정 대원각을 시주받아 사찰로 바꾸는 개보수 작업에만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갔다. 그래서 사실 길상사는 아직도 개보수 작업 비용을 빚으로 짊어지고 있는 가난한 절이다.

    대웅전도 없고, 관음전도 없고, 사천왕문도 없고, 해탈문도 없고, 석탑 하나도 없다. 일주문은 쓰러질 지경이고, 극락전 지붕마저 성치 않아 천막으로 덮어놓은 상태요, 식당은 비좁아 50명이 앉으면 꽉 차버린다.

    그런데도 문을 연 지 2년6개월밖에 안된 길상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일요일에 열리는 가족법회에 500여명, 30대 이상의 남자들만으로 구성된 거사림회에 200여명, 여자들만으로 구성된 보현회에 100여명, 그 밖에도 청년회, 중고등회, 어린이회, 합창단이 따로 있다. 그리고 주말과 휴가철을 이용해 수련원을 열고 2박3일이나 3박4일의 단기수련회를 갖는데, 희망자를 다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쇄도하고 있다. 지금까지 직장인 수련회에 참가했던 사람만 2200여명에 이른다.

    매일 새벽 6시부터 밤 8시까지 참선수행할 수 있는 ‘시민선방’에는 그동안 1500여명이 입방하여 참선수행을 통해 마음 닦는 공부를 했고, 매월 평균 50명이 새로 ‘시민선방’에 들어와 수행을 이어가고 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침묵의 방’에도 그동안 600여명이 들어가 명상에 잠겼다.

    그리고 법정스님의 법문이 있는 짝수 달 셋째 일요일의 가족법회에는 1000명에서 2000명에 이르는 인파가 몰려들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특히 사월 초파일 밤, 환상적인 연등 불빛 아래 열리는 자선음악회에는 50여명의 외국인과 함께 2000여명의 인파가 모여 장관을 이루기도 했다.

    우람한 건물도 없고, 고색창연한 탑 하나 없는 신생 사찰 길상사에 어떤 사람들이, 왜 모여들며,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느끼며, 무엇을 안고 돌아가는 것일까?

    길상사의 회주 법정스님은 ‘맑고 향기롭게’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다짐했다.

    “깨달음에 이르려면 두 가지 일을 스스로 실행해야 합니다. 하나는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는 일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관리, 감시하여 행여라도 욕심냄이 없도록, 삿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콩 반쪽이라도 나눠 갖는 실천행이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는 것은 간단치가 않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과연 무엇인가, 나는 왜 사는가, 먹고 자고 말하고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 화두를 붙들고 50분 좌선, 10분 방선을 되풀이하며 끝없이 자신을 탐구하는 사람들이 시민선방에 가득 앉아 있다.

    길상사를 찾는 유명인사들

    참선수행을 위해 길상사 시민선방에 들어앉은 사람들 가운데 여자가 3분의 1을 넘는다. 그동안 시민선방을 거쳐간 사람은 1500여명. 교육개혁위원장을 지낸 원로 김종서 박사는 매일 시민선방에 들러 참선했다. 그분에게 이제 참선은 일과가 되었다.

    길상사에 가면 유명인사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된다.

    방송인 이계진씨는 늘 부인과 함께 길상사를 찾는다. 국회의원 총선거 전 이계진씨는 모 정당으로부터 입당 권유를 받았다. 정치판에 뛰어들 것인가, 거절할 것인가가 큰 고민이었다. 법정스님께 어찌해야 좋을지 여쭈었더니 스님은 “법당에 가서 열심히 기도한 뒤, 마음이 결정하는 대로 하라”고 대답했다. 기도를 마친 후 그는 명쾌한 단안을 내릴 수 있었다. 정계에는 들어가지 않기로.

    언론인 공종원씨 부부도 길상사에서 만났다. 삼성출판사 김종규 회장 부부도 환상적일 만큼 아름다운 초파일 연등 밑에서 만났다. 시인 류시화씨, 작곡가 노영심씨, 동화작가 정채봉씨, 출판인 김형균씨, 부산의 박수관 사장, 세무사 이성용씨 부부, 서세욱 화백, 송영방 화백, 음악가 장경의, 장형원 자매도 빼놓을 수 없는 길상사 가족들이다. 그리고 요즘에는 외국인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길상사에는 더더욱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 비좁은 공양간에서 매일 적게는 200명에서 많을 때는 1000명, 2000명분의 식사를 준비하는 보현회의 자원봉사자들. 요일별로 당번을 정해 자원봉사하는 보현회 회원들은 기업체 사장 부인, 중학교 여교장, 공직자 부인에서 교사, 포장마차 주인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여성들이 다 모여 즐거운 마음으로 밥짓고, 반찬 만들고 국을 끓여내고 있다.

    “맑고 향기로운 길상사에서 기도하는 마음과 정성으로 반찬을 만들고 밥을 지으니 몸은 고단해도 마음은 즐겁습니다.”

    보현회 회장 장수영(58·방배동) 보살은 활짝 웃는다. 34년간 교직에 근무하고 은퇴한 이상원(63·마포) 보살은 “하루에 한 번 길상사에 왔다 가야 마음이 편하다”면서 “길상사 시민선방에 들어가 한달간 수행한 뒤 보현회에 들어와 봉사를 시작했어요. 길상사가 있어서 너무너무 행복해요”라고 말한다.

    길상사에 법회가 열리는 날에는 길목 어귀에서부터 나이 지긋한 남자들이 교통정리, 주차관리, 사찰 안내를 도맡아 하고 있다. 이들은 거사림회 회원들인데 기업체 사장, 공직자, 의사, 교사, 전문직 종사자 등 각계각층에서 모였다.

    공무원인 이재격씨(54)는 주말이면 길상사에 와서 자원봉사를 한다.

    “법정스님의 책을 읽고 길상사에 오게 되었지요. 길상사는 부담이 없고 생활불교를 지도해서 정말 좋습니다.”

    그는 길상사에서 배운 대로 이타행(利他行)의 실천을 위해 이미 17회의 헌혈을 했고, 장기와 각막은 물론 사후에는 시신까지 기증하기로 등록을 마친 분이라고 옆사람이 귀띔해준다.

    중소기업체 회사원인 정태호씨(46)는, 길상사에서 자원봉사를 마치고 나면 지체부자유자를 위해 ‘부름의 전화’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데 “절에서 배운 대로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하고 새삼 다짐한다.

    의정부에서 소아과의원을 개업하고 있는 의사 홍기돈씨(45)는 신문에서 길상사 개원소식을 보고 개원식날 참석한 인연으로 길상사 거사림회 회원이 되었다. 그는 “길상사는 세속적이지 않고 누구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아 좋다”고 말하면서 일요일이면 가족과 함께 길상사를 찾는다고 했다. 그는 또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훌륭한 의사보다는 어진 의사가 되라”는 유언을 남기셨는데 그 유언과 불교의 가르침이 같으므로 그 말씀대로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고 말한다.

    삼보통상 대표인 이부열씨(48)는 ‘맑고 향기롭게’ 회원이 돼 길상사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대원각을 시주한 김영한 보살의 거룩한 뜻과 회주스님의 가르침에 감동, “내 뼈와 혼을 길상사에 묻겠다”는 각오로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저는 저 자신이나 제 가정을 위해 기도해본 일이 없습니다. 회주스님의 가르침대로 모든 이웃과 세상이 다 편안케 하소서 하고 기도드립니다.”

    그는 앞으로도 ‘맑고 향기롭게’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들은 무엇을 느끼는가

    길상사를 찾은 사람들은 과연 길상사에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마음에 안고 돌아갔을까.

    수많은 수련회 참가자들은 “수련회의 발우공양을 통해 음식의 소중함을 새삼 깊이 깨달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특히 수련생들은 끼니때 음식을 먹기 전에 오관게(五觀偈)를 독송하게 되는데, 오관게를 외울 적마다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을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음식을 먹을 적마다 이 게송을 외우면서 뼈저리게 자신을 되돌아보았다는 고백도 눈에 띄게 많았다.

    “마음 다스리는 법 하나 배우고 갑니다. 그리고 묵언과 하심(下心), 꼭 실천하고 싶습니다.”─이경주(41·회사 경리)

    “내 자신의 아집, 집착이 굉장했었구나라는 반성과 그로 인해 상대를 받아들이는 데 몹시 배타적이었던 나의 행동과 사상을 느끼면서 여유로운 자세로 생활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임옥수(38·교사)

    “두 아이의 엄마로, 한 남자의 여인으로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살다가 잠깐의 출가를 경험하게 되어 참으로 고맙습니다. 그동안 너무도 게으르고 아집에 눈이 가려 내 가족, 내 집, 우리 식구에게만 머물러 있다가 ‘나’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생각을 잠깐이나마 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유선자(36·주부)

    길상사의 법회에 참석했거나, 문화강좌를 수강했거나, 2박3일 혹은 3박4일의 수련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길상사 찾아가기를 잘했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기에 열심히 최선을 다하자고 나 자신과 약속을 했습니다. 그 결과,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그 사람에게 삼배(三拜)를 올리라고 하신 스님의 말씀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부처님이 된 듯한 기분을 느껴봅니다.”─강예자(주부)

    “아이들 공부, 남편의 늦은 귀가, 나의 일에 대한 절대적인 강박관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울력하는 마음, 나를 낮추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나에게는 공부가 되고, 가족들에게는 평화로움이 될 것이다.”─박정완(주부)

    “세상을 살아오면서 요번 수련기간처럼 말을 아꼈더라면 성내는 마음, 탐내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불씨가 되는 말을 한번쯤은 이겨낼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말을 사랑하고 아끼며 살고 싶습니다.”─이난숙(주부)

    길상사에는 오늘도 끊임없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권력을 탐하지 않고 분에 넘치는 부(富)를 넘보지도 않으며 허황한 영예를 쫓지도 않는 평범한 사람들, 착한 사람들. 누가 오라고 부르지도 않고, 누가 가라고 떠밀지도 않건만, 그들은 하나둘 길상사를 찾는다.

    그리고 맑고 향기로운 경내를 거닐다가 그들은 저 나름의 행복을 한아름씩 안고 돌아간다. 거창하지도 않고 요란스럽지도 않은 아주 작은 행복을 나름대로 마음에 안고 돌아간다.

    그래서 길상사는 행복의 샘터가 되어 가고 있다. 길상사는 열려 있다. 산책을 즐길 수도 있고 명상에 잠길 수도 있다. 길상사가 활짝 열려 있는 한 우리는 권력을 부러워할 것도 없고, 엄청난 부를 시샘할 까닭도 없고, 허망한 명예를 탐할 일도 없다.

    행복은 밖에서 찾을 일이 아니다. 맑고 향기롭게 살면서 길상사 ‘침묵의 방’에 앉으면 우리는 알 수 있다. 길상사 ‘시민선방’에 앉으면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찾는 행복은 내 안에 있음을….(문의:02-3672-5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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