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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화제

길상사를 찾는 사람들은 왜 행복할까

  • 윤청광 방송작가

길상사를 찾는 사람들은 왜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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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찰 문을 연 지 겨우 2년6개월. 그러나 그간에 명상을 하러 길상사 ‘침묵의 방’을 이용한 일반인들만 600여 명에 이르고, 참선수행을 하는 ‘시민선방’에는 1500여 명의 시민이 찾았다. 가톨릭 수녀들도 즐겨 찾아 명상하는 길상사는 대체 어떤 절일까.》
21세기니 새천년이니 하더니 이제야 그 말뜻을 알 것 같다. 세상은 온통 사이버 시대요, 초고속 정보통신의 시대요, 벤처의 시대요, 인터넷 시대요, 나스닥과 코스닥에 춤추는 시대다. 사람들은 저마다 귀신에 홀린 듯, 귀신에 쫓기듯 “더 많이! 더 빨리! 더 크게! 더 편하게!”를 외치며 질주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을 속도계로 측정한다면, 아마도 경부고속도로의 제한속도인 시속 100km를 훨씬 초과하여 시속 200km의 질주쯤 되지 않을까?

쫓기듯 헉헉대며 무작정 달리다가 지쳐 길섶에 주저앉아 문득 생각해보니 어디를 향해 달려왔는지, 무엇을 위해 달려왔는지, 왜 달려야만 했는지, 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왜 사느냐고/ 누가 나에게 물으면/ 나는 그냥/ 빙그레 웃지요.’

옛 시인은 이렇게 읊었지만, 나에게는 불행하게도 시인처럼 그렇게 빙그레 웃을 여유가 없다.



이럴 때, 나는 길상사(吉祥寺)를 찾는다. 서울 한복판 성북동의 유명한 저택촌에 자리잡고 있는 길상사는 절(寺)로 모습을 바꿔 문을 연 지 이제 겨우 2년6개월밖에 안 된 색다른 사찰이다.

이곳은 원래 우리나라 삼대(三代) 요정인 대원각, 삼청각, 청운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던 대원각이었다.

주지육림의 바다였던 대원각, 밀실정치의 총본산이었던 대원각, 온갖 부정과 협잡과 야합의 상징이었던 요정 대원각은 7000평에 이르는 드넓은 땅과 숲 속에 40동의 건물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대원각의 주인은 김영한(金英韓) 할머니. 1987년 당시 미국에 머물고 있던 김영한 할머니는 ‘무소유’로 널리 알려진 법정(法頂)스님이 설법차 LA에 오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평소 가깝게 지내던 김대도행보살을 통해 LA 고려사에서 스님을 처음 뵙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김영한 할머니는 대원각 건물과 대지와 임야를 모두 법정스님께 아무 조건 없이 시주할 테니 절(寺)로 만들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무소유’를 화두삼아 살아오신 법정스님은 즉석에서 정중히 사양했다. 이로부터 장장 10년에 걸쳐 기이한 승강이가 계속되었다.

“제발 제 시주를 받아주십시오, 스님.”

“나는 그 시주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시가 1000억원대에 이른다는 엄청난 재산을 아무 조건 없이 시주하겠다는 김할머니의 간청과 ‘받을 수 없다’는 법정스님의 끈질긴 승강이가 10년간 되풀이되었으니, 아마도 이런 기이한 승강이는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아닐까?

결국 김할머니가 10년 만에 손을 들었다. 대원각의 전재산을 법정스님이 아닌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등록, 등기를 이전한 것이 1996년 5월20일. 이제 대원각의 모든 재산은 영원히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의 공유재산일 뿐, 법정스님은 여전히 ‘무소유’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셈이었다.

여기에 법정스님을 흠모하고 따르는 재가불자들의 지극한 정성과 신심이 모아졌다. 그리하여 기존 건물을 개보수, 새로운 사찰 길상사가 태어나게 되었다.

1997년 12월14일 길상사 개원식에는 한국 가톨릭의 수장인 김수환 추기경이 이례적으로 참석, 길상사의 개원을 축하해 주었다. 이날 길상사의 회주(會主) 법정스님은 개원 인사말을 통해 이렇게 다짐했다.

“저는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절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안으로 수행하고 밖으로 교화하는 청정한 도량입니다. 진정한 수행과 교화는 호사스러움과 흥청거림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어떤 종교 단체를 막론하고 시대와 후세에 모범이 된 신앙인들은 하나같이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신앙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주어진 가난은 우리가 이겨내야 할 과제지만 선택된 맑은 가난, 즉 청빈은 삶의 미덕입니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병들기 쉽지만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이루게 하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합니다. 오늘과 같은 경제난국은 물질적인 풍요에만 눈멀었던 우리에게 우리 분수를 헤아리게 하고 맑은 가난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이 길상사는 가난한 절이면서도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날 법정스님은 대원각을 시주하여 길상사를 만들게 해준 김영한 할머니에 대한 보답으로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法名)을 내리고 108염주 한 벌을 손수 할머니 목에 걸어주었다.

한평생 일군 1000억원대의 재산을 아낌없이 부처님께 시주한 보답으로 목에 걸린 108염주 한 벌. 법정스님이 목에 걸어준 염주를 만지고 또 만지며 “내가 평생 일군 터에 부처님을 모셔 한없이 기쁩니다” 하고 소녀처럼 좋아하던 김영한 할머니는 1년 후인 1999년 11월13일 오후 길상사 경내를 마지막으로 거닐면서 “나 죽으면 화장해서 길상사에 눈이 많이 내리는 날 뿌려주세요” 하는 유언을 남기고, 다음날인 11월14일 108염주 한 벌을 목에 건 채 83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한달 후인 12월14일 오전, 김영한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부탁했던 대로 길상사에 눈이 많이 내리자 스님들이 독경하며 재를 뿌려주었다.

‘맑고 향기롭게’

성북동 길상사에는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이라는 색다른 수식어가 붙어 있다. 주차장에 들어서면 주차돼 있는 거의 모든 자동차 유리창에 어김없이 ‘맑고 향기롭게’라는 연꽃 스티커가 붙어 있다. 길상사 종무소에도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의 현판이 붙어 있다. 길상사가 바로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이기 때문이다.

한 송이의 연꽃 밑에 ‘맑고 향기롭게’라는 여섯 글자가 보여주는 그대로 연꽃처럼 맑고 향기롭게 살자는 뜻이다. 연꽃이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지만 맑고 향기롭듯이, 우리도 비록 오탁악세에서 살고 있지만 연꽃처럼 맑고 깨끗하고 향기롭게 살자는 뜻이다.

필자가 짐작하건대 ‘맑고 향기롭게’가 없었다면 아마도 오늘의 길상사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1993년 가을 어느 날, 화전민이 살다 떠난 산속 오두막을 빌려 혼자 수행하고 계시던 법정스님이 불쑥 서울 사간동 법련사(法蓮寺)에 오셨다는 전갈이 왔다. 평소 법정스님을 흠모하고 따르던 사람들이 법련사로 스님을 찾아뵈었다. 이 자리에서 스님은 참으로 뜻밖의 말씀을 꺼내 놓으셨다.

맑고 향기롭게.

“중이 밥값은 하고 가야겠기에 이 일 한 가지만은 꼭 하고 싶다.”

스님은 그렇게 덧붙이셨다. 말하자면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을 펼치고 싶다는 말씀이었다.

평소 번거로운 일은 싫다고 어느 절 주지자리도 맡지 않던 스님, 강연도 설법도 사양하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고 불일암도 버리고 산속으로 숨어버린 스님이셨다. 그런데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이 한 가지 일만은 하고 싶으시다니. 처음에는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스님이 우리 앞에 내놓으신 ‘맑고 향기롭게’라는 여섯 글자는 무슨 구호나 슬로건이 아니라 스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화두라는 것을 우리는 이내 알 수 있었다.

방송인 이계진씨, 동화작가 정채봉씨, 출판인 김형균씨, 공직자 이성용씨, 부산의 기업인 박수관씨, 광주 조선대의 고현교수, 방송작가 김자경씨, 청학스님, 필자, 그 외의 몇몇 이가 스님이 내려주신 ‘맑고 향기롭게’라는 화두를 구체화하기 시작했고 실천 지침이 마련되었다.

이 아홉 가지 실천 지침을 마련한 뒤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은 1994년 3월26일 서울 양재동 구룡사에서 첫 출발 실천 큰모임을 갖고 ‘맑고 향기롭게’ 연꽃 스티커를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이 모임을 이끄는 회주(會主)도 법정스님이었다. ‘맑고 향기롭게’의 상징이 연꽃이어서 불교운동으로 오해하는 분도 더러 있었지만 순수한 시민운동으로 이어가자는 스님의 뜻에 따라 천주교를 신봉하는 분도, 개신교를 믿는 분도, 원불교를 믿는 분도 종교를 초월하여 기꺼이 이 운동에 참여해주었고, 회비를 내주었다.

그리고 이 모임은 곧 부산, 대구, 마산, 창원, 전주, 광주, 대전, 춘천, 제주까지 번져나갔다. 그리고 소년소녀 가장 장학금 지급, 양로원 돕기, 환경보호, 걸식아동 돕기, 노숙자 급식, 생태기행, 꽃밭 만들기 등 마음과 세상과 자연을 맑고 향기롭게 가꾸는 일을 소문내지 않고 실천해 왔다.

서울 운니동의 콧구멍만한 오피스텔 방 한 칸을 빌려 쓰고 있던 ‘맑고 향기롭게’는 회원들이 모일 만한 장소가 없어 늘 남의 신세를 져야 했고, 사무실 임대료며 관리비도 큰 부담이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김영한 할머니는 여전히 “대원각을 법정스님께 시주하겠으니 제발 받아달라”고 거듭거듭 간청하고 있었고, 법정스님은 여전히 “시주를 받을 수 없다”고 한사코 시양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녀님도 수사님도 찾는 길상사

‘맑고 향기롭게’를 사랑하는 회원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눈물겨운 동참이 줄을 잇고 있는데 ‘맑고 향기롭게’를 위해서라도 근본도량이 필요하니 할머니의 소원을 받아주십사 하는 간청이 거듭되었다. 이에 법정스님도 어쩌지 못하고 “이것도 시절 인연이니 할 수 없구먼” 하며 재산등록은 송광사로 하고 자신은 회주만 맡는 것을 전제로 김영한 할머니의 시주를 받아들여 길상사를 세우게 되었다.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가 된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그래서 법정스님이 길상사 개원식에서 다짐한 대로 길상사는 결코 불교신자들만을 위한 사찰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는’ 작은 공원이자, 사색의 오솔길이며, 마음의 쉼터요, 기도처가 되었다.

요정 대원각 시절에는 대문 노릇을 했던 낡은 솟을대문이 지금은 길상사 일주문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러나 건물이 너무 낡아 서까래가 썩고 기왓장이 깨져 지붕에 천막을 덮어 놓았을 만큼 허름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길상사에는 사천왕문도 해탈문도 없다. 일주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설법전 앞에 가녀린 모습의 새로 만든 보살상이 서 있는데, 이 보살상이 바로 가톨릭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씨가 만든 작품이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길상사의 뜻과 만든 이의 예술혼이 시절 인연을 만나 이 도량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모습을 보는 이마다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의 원력으로 이 세상 온갖 고통과 재난에서 벗어나지이다.”

불교와 가톨릭의 만남이 빚어낸 이 섬세하고 오묘한 관세음보살상은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어 길상사의 첫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나 할까.

울긋불긋 현란한 단청도 없고, 엄숙을 강요하는 듯한 사천왕상도 없는 길상사는 언제 들어와도 마음이 편안하다.

그래서 그런지 길상사 경내에서는 수녀님들도 만날 수 있다. 수백년 된 느티나무 고목 아래 종각 옆에는 차를 마실 수 있는 다원(茶苑)이 마련돼 있는데, 수녀님들이 가끔씩 찾아와서 차를 마신다. 길상사 총무 덕조스님의 배려로 수녀님들이나 수사님들이 와서 차를 마실 경우 차값은 받지 않는다.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같은 수행자요 구도자이므로.

지난 부활절에는 근처에 있는 ‘작은형제 수도회’의 가톨릭 수사님들이 부활절 달걀을 선물로 들고 길상사를 찾아오기도 했을 만큼 길상사는 포근한 곳이다.

지난해 12월 중순, 길상사에서는 색다른 플래카드를 길 앞에 내걸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종교간에 이렇게 미소와 미소를 나누는데, 여기에 무슨 다툼이 있으랴. 그래서 그런지 길상사를 찾는 가톨릭 수녀님들은 경내를 그저 산책만 하다 가는 게 아니라, 길상사가 마련해놓은 ‘침묵의 방’도 가끔 애용한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누구나 들어가서 명상음악과 함께 명상에 잠길 수 있는 ‘침묵의 방’에서 수녀님들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꼈을까? ‘사랑의 씨튼 수녀회’의 한 수녀님은 그 소감을 이렇게 남겼다.

“님의 빛으로 빛을 봅니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군요. 정말 편히 잘 쉬다 갑니다. 모두 감사해요.”

‘성바오로 딸 수도회’의 한 수녀님은 또 이런 글을 남겼다.

“열린 공간 안에서 종교간의 일치와 열림에 대해 명상…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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