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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한국경제 간판 CEO 열전

한손엔 성경, 또 한손엔 구조조정

‘올해의 관리인상’ 수상한 쌍방울 법정관리인 백갑종 사장

  • 장인석 < CEO 전문리포터 >

한손엔 성경, 또 한손엔 구조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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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해가던 기업의 법정관리인을 맡아 불과 1년 5개월 만에 확고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인물. 쌍방울의 백갑종 사장은 2000년 영업이익 1500%(전년 대비)를 달성, 서울지방법원이 주는 ‘올해의 관리인상’을 받았다.
CEO가 하는 일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물줄기를 바꿀 수 있다는 점 아닐까 한다. 이 막강한 힘은 때론 죽어가는 논밭을 살릴 수도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옥토를 황무지로, 잘 가꾸어진 과수원을 물난리판으로 망칠 수도 있다.

한 사람의 CEO가 이토록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은 일반인들에게는 잘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 최근의 사례가 있다. ‘트라이’라는 속옷으로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법정관리대상으로 지정돼 암울한 미래에 허덕이던 쌍방울이 바로 그 예다.

성경책 한 권만 들고

99년 9월6일 오전, 서울 강남구 논현동 쌍방울 본사의 분위기는 얼어붙어 있었다. 여느 때보다 일찍 출근한 임직원들은 이날 첫 출근하기로 돼 있는 백갑종 법정관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에서야 법원으로부터 관리인의 이름 석 자를 통보받은 임직원들의 최대 관심사는 그가 어떤 규모의 구조조정을 단행할 것인가와 그가 데리고 올 수하직원이 어느 정도 될 것인가였다.

“최소한 비서진과 경영기획 간부, 마케팅 요원 몇 명은 데리고 올 것으로 예상했지요.”



히딩크 감독도 한국 축구의 장래를 위해 몇 사람의 보좌진을 대동하는 판에 1년 매출액이 3000억원이 넘는 대기업을 회생시킬 임무를 띠고 오는 CEO 아닌가. 하지만 그가 쌍방울에 갖고 온 것은 성경책 한 권뿐이었다. 그날 아침 조회석상에서 그는 “절대로 내 사람을 데려오지 않겠다”고 믿기 힘든 약속을 했다. 그리고는 그날 저녁 퇴근길에 “회사차는 회사 업무 외에는 절대 쓰지 않는다”면서 아침에 몰고 온 자신의 승용차를 타고 퇴근했다.

“깐깐한 사람이 왔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전직원에게 퍼졌다. 앞으로 회사생활이 결코 순탄하지 않겠다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하지만 불평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언가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이 깐깐한 법정관리인이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쌍방울의 물줄기를 바꾸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 후 1년 5개월이 지난 지금 직원들의 막연한 기대는 이제 확신으로 변했다. 쌍방울은 회생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쌍방울의 98년 매출액은 1795억원에 276억원이 적자였다. 99년 8월 법정관리 인가를 확정시킨 쌍방울은 백갑종 사장(정식명칭은 관리인이지만 회사에서는 사장으로 부른다)이 부임하면서 그 해에 흑자로 돌아서 매출액 2161억원에 12억원의 영업이익을 남겼다. 지난해에는 전년보다 17% 증가한 2528억원의 매출액에 영업이익은 전년보다 무려 1500%가 증가해 200억원을 기록했다. 백갑종 사장은 이 공로로 지난해 12월 신설된 ‘올해의 관리인상’을 서울지방법원 파산부로부터 받았다. 법원이 지정한 62명의 법정관리인 중 최고라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임원들 사표 받고 관리부서 제출

─직원은 그대로인데, CEO 한 사람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렇게 부실했던 기업이 되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 좀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만큼 CEO의 비중이 막중하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CEO 한 사람의 역량에 따라 회사의 운명이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은 직원들이 하는 것이고 CEO는 최종결정자로서 방향을 결정하고 선택하는 일을 할 뿐입니다. 따라서 무슨 일을 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히 결정하고 정도(正道)에 따라 사심 없이 경영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직원들은 열심히 도와주게 됩니다. CEO가 각광받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쌍방울이 다시 일어선 공을 저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직원들이 열심히 해주지 않았다면 오늘과 같은 성과는 없었을 겁니다.”

사장 접견실에 불쑥 들어온 백갑종 사장은 텔레비전 광고에서 보던 멋쟁이 스타일과는 너무도 달라 보였다. 법원이 임명한 법정관리인이니 ‘까탈스럽고 차가울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 잘못일까. 점퍼 차림에 약간 쑥스러운 미소를 띠며 들어온 백갑종 사장은 본인의 말마따나 ‘전라도 촌놈’이었다. 하지만 인터뷰 내내 보여주는 소탈함 이면에선 품위 있는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그렇다 해도 똑같은 직원들인데 사장 한 사람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분위기로 반전한다는 것이….

“쌍방울이 부실해진 것은 직원들 잘못이 아닙니다. 트라이 등으로 상당한 흑자를 기록했지만 프로야구단과 무주리조트 개발 등 무모한 확장과 방만한 운영으로 자금난을 겪게 된 거죠. 그것은 그 이전 CEO들의 문제였습니다.

과거에는 30대 기업에 들어가야 기업인이 제 구실을 다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사회적 분위기였으므로 무모한 확장과 몸집 불리기에 급급했습니다. 그 와중에 권력이나 은행과 밀착할 필요도 있었겠지요. 만일 이전의 CEO가 작지만 강한 기업이 되겠다고 선택했다면 지금처럼 고생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CEO의 선택이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바로 그런 선택은 좀 더 신중하게 사회가 원하는 쪽으로 맞춘 것뿐입니다. 쌍방울의 영업이익이 호전된 것은 역량이 우수한 직원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강력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의욕상실과 패배의식, 무기력, 피로 등에 젖어 있는 환경을 분석하고 핵심 역량을 추출한 뒤, 인적·물적 자원의 메커니즘을 재구축하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그는 먼저 임원들을 다 내보내고 관리부서를 대폭 줄였다.

“사람을 내보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제 경우에는 기존 임원들과 일한 경험이 없으므로 정도 들지 않았고, 제가 오기 전 법원이 임원의 사표를 모두 받아놓은 상태여서 수리만 했을 뿐이므로 그래도 좀 나은 경우였죠.”

그는 1530명에 달하던 쌍방울 임직원을 1300명으로 줄였다. 예상보다는 적은 수였는데 임원 외에 관리부서를 대폭 줄인 것이 특징이었다. 그의 지론은 관리부서가 영업에 발을 걸면 안 된다는 것. 기존 관리부서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이 문제라고 판단한 백사장은 관리직원들에게 “어깨에 힘빼고 각 부서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관리란 것이 ‘매니지먼트’가 아니라 ‘서비스’라는 점을 주지시킨 것이다. 총무 등의 간접부서는 웬만하면 외부에 맡겼다. 총무나 회계 분야는 이제 IT가 발달돼 있으므로 2∼3명이면 거뜬히 처리할 수 있다고 백사장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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