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EO로서 제가 신경써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엔지니어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한 가지 실수에 대해서 벌을 주기보다는 잘한 일을 찾아 칭찬해주는 게 훨씬 나은 결과를 가져오더라는 거지요.”
그러다가 누군가 “상암동 월드컵 축구경기장을 짓고 있는 회사가 삼성 엔지니어링”이라고 말해줬다. 덧붙여서 그는 “2002년 월드컵 경기에 가장 큰 ‘연고권’을 가진 건 현대그룹이었는데 정작 월드컵 경기장 건설 수주는 삼성이 맡게 돼 화제가 됐던 걸 벌써 잊었느냐”고 기자의 무식을 힐난하는 조로 설명했다.
아, 그러면 건설회사인가 보구나. 그러면 그냥 건설회사와는 무엇이 다르기에 ‘엔지니어링’이라는 단어를 붙였을까? 이렇게 해서 삼성 엔지니어링 양인모 사장(梁仁模·60) 인터뷰는 ‘원초적인’ 질문에서부터 시작됐다.
“엔지니어링은 일종의 수주(受注) 산업이고, 시스템 서비스업에 속합니다. 건설업이 단순 시공을 전문으로 한다면, 엔지니어링은 프로젝트나 플랜트 공사의 사업기획에서부터 설계, 기자재 구매, 시공까지 하고, 시운전과 감리까지 해주는 일종의 토털 서비스업이라는 겁니다. 고객이 금융조달을 요청하면 거기에도 응합니다.
이런 모든 과정을 도맡아서 사업주에게 턴키(Turn Key) 방식으로 제공하는 것을 종합 엔지니어링업이라고 하지요. 일반 건설회사들은 그중에서 시공만 맡는 것이고. 그래서 엔지니어링이 두뇌라면 건설업은 손발에 비유할 수 있어요.”
엔지니어링업과 건설업
―그러니까 기존 건설업에서 한 걸음 나아가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것이군요? 달리 말하면 과거 건설업에다 첨단적인 요소를 덧붙이는 형태로….
“성격상 종합 엔지니어링업은 건설·시공회사를 선도해야 합니다. 요즘에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프로젝트를 발주할 때에 엔지니어링 회사들에만 입찰 자격을 주는 게 일반화되고 있어요. 왜냐하면 그게 훨씬 경제적이고, 관리 측면에서도 일관성이 있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우리 나라에서는 IMF 전까지만 해도 ‘설계 따로, 구매 따로, 시공 따로’ 식으로 나누어서 발주를 했어요. 이런 식으로 하면 비용은 올라가고 경쟁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사업주는 여럿을 상대해야 하니까 훨씬 피곤하지요. 이제 우리 나라에서도 세계적인 추세에 맞춰 가스공사나 석유공사, 담배인삼공사처럼 대규모 정부산하 기업들이 과감하게 턴키 방식으로 공사를 발주하는 추세로 바뀌고 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옛날식 입찰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사실 그게 바로 부정·비리에 원인이 됐던 것 아닙니까?”
양사장은 현재 종합 엔지니어링사로는 삼성 엔지니어링이 국내에서 유일하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몇몇 회사가 있었지만, IMF 위기를 겪으면서 모조리 퇴출돼 버렸다는 것. 그래서 그는 종종 미국이나 일본의 유수한 협력회사들로부터 곤혹스런 질문을 받는다고 했다. “아무리 구조조정이 중요하고 모그룹의 형편이 어렵다고 해도 엔지니어링 분야를 없애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에 역행하는 게 아니냐”는 반응을 보인다는 것.
“반면에 삼성 엔지니어링은 오히려 일본의 지요다, 도요, JEC 같은 빅3 전업 엔지니어링사에서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일본 회사들도 최근 몇 년간 한국 기업들처럼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거든요. 그러니 IMF 이후에도 해외에서 대형 프로젝트를 여러 건 수주하는가 하면, 투자가 극도로 위축돼 공사 발주가 거의 없는 한국 내에서 환경 프로젝트를 다수 수주하고 있는 삼성 엔지니어링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적극 전략으로 위기 돌파
삼성 엔지니어링의 역사는 한국의 경제개발사와 맞닿아 있다. 1970년 울산석유화학단지를 건설할 때 효율적이고 종합적인 플랜트 건설을 위해서 세운 ‘코리아 엔지니어링’(초대 사장 이종찬 전 육군참모총장)이 1978년 삼성그룹으로 넘어가 91년 지금의 상호로 변경됐다.
70년대 초 석유화학·비료분야 플랜트 건설이 중심이었던 이 회사의 사업영역은 80년대에 들어와 전자·반도체·섬유·식품 등 산업설비와 정유·가스·환경 분야 등으로 확대됐고, 90년대에 들어와서는 동남아, 중국 등 해외에서 턴키 방식의 플랜트 수주에 주력해오고 있다.
매출액은 1996년 업계 최초로 수주액 1조원 시대를 열었다가 경제위기로 98년 9516억원, 99년 7383억원으로 감소한 뒤 올해 다시 1조원대를 넘어섰다. 1998년 미국의 건설전문지인 ‘ENR’가 발표한 세계 유수의 엔지니어링·건설업체 중 설계분야에서 해외매출 36위, 산업설비 분야에서 해외매출 6위로 선정되기도.
올해는 목표 매출액을 1조2000억원에 당기순이익을 작년(153억원)보다 43% 가량 높여 잡은 250억원으로 예상하고 있는데, 양사장은 목표 달성에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에 따라 지난해 170%로 낮아진 부채비율(98년의 경우 331%)도 더욱 떨어질 전망이다.
―지난 몇 년간 경제위기로 수많은 국내 기업이 어려움을 겪었고, 그 와중에 도산한 회사도 많았습니다. 특히 건설부문은 지금도 위기감이 팽배한 상황인데, 삼성 엔지니어링의 경우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무난히 위기를 극복한 것으로 보이는군요. 나름의 생존전략이 있었다면….
“앞서도 말했듯이 엔지니어링업은 수주산업입니다. 수주가 없으면 생존도 없는 겁니다. 1997년 동남아 통화위기가 왔을 때 우리는 재빨리 대체시장을 발굴했고, 여기서 나름대로 성공한 게 해외수주에서 성과를 올리는 큰 계기가 됐어요.”
―IMF 때 구조조정을 세게 하셨나요?
“우리는 단순 제조회사나 건설회사가 아니라 내부적으로 복합적인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프로젝트 규모에 상관없이 플랜트 하나 짓는 데에 들어가는 단위나 공정은 똑같거든요. 이런 복합적인 요소들이 잘 조화를 이뤄서 일관된 시스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인력을 함부로 줄일 수도 없어요. 일반 건설회사라면 토목·건축이 전문이니까 인력을 줄이거나 하청을 줄 수 있겠지만….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IMF 이후에 오히려 적극적인 전략을 쓴 겁니다. 업종 특성상 내부적으로 어느 것 하나 없앨 수는 없다, 대신 해외든 국내든 최대한 수주를 따냄으로써 위기를 극복하자는 것이었어요.”
―수주를 따낸다는 게 말은 쉬워도 나름의 노하우나 영업력 등 남과 비교해 뭔가 나은 게 있었을텐데….
“그래요. 결국은 경쟁력이 관건이지요. 영업력, 가격 경쟁력, 기술력, 우리 회사에 대한 신인도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모여서 성과를 내는 겁니다. 무엇보다 엔지니어링 회사는 우수 엔지니어를 확보하는 게 핵심인데, 우리 회사의 인력수준이 아주 높습니다. 삼성그룹 내에서도 삼성기술연구원을 제외하면 우리 회사 인력이 가장 고학력이거든요. 박사가 30여명, 석사학위 소지자는 200명 가까이 됩니다.”
―회사 소개자료에 보니까 2005년에는 매출액 20조원, 2010년에는 매출액 40조원을 목표로 했더군요. 실현 가능성이 있는 얘깁니까?
“그건 지난 4월 회사창립 30주년 기념일에 발표한 21세기 경영비전입니다. 한 마디로 세계적인 종합 엔지니어링 회사로 발전해가자는 건데….”
―그 꿈이 실현되려면 지금과는 또 다른 차원의 노력이 있어야겠네요?
“특정 분야를 더욱 전문화해야지요. 그중 하나로 우리는 지금 환경부문에 노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환경부문은 매우 큰 시장이 될 겁니다. 벌써부터 지방자치단체별로 쓰레기 처리라든지 배기가스, 하수·폐수처리 등 수요가 많아졌어요. 단순히 환경플랜트 수주 뿐만 아니라 O·M(Operation · Maintenance)이라고 해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환경시설을 우리가 위탁받아 운영하는 방안도 모색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환경분야에 일찍부터 투자를 해왔어요. 우리 회사의 기술연구소는 차별화된 환경 기술을 많이 연구하고 있는데, 미생물을 이용한 환경복원 및 생물환경 감지기술 같은 게 그런 예지요.
또, 그룹 차원에서 운영되는 지구환경연구소에서도 상당한 기술을 축적했습니다. 앞으로는 세계은행 같은 곳에서 대출을 해줄 때 환경지수까지 보겠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거든요. 환경보호 능력을 기업대출 심사요건으로 삼겠다는 건데, 그런 용역까지 우리가 맡아서 하고 있어요. 환경부에서 발주하는 정책 용역은 물론이고….
산업설비 분야에도 전문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과거 코리아 엔지니어링 시절에는 대부분 회사들이 화공분야를 주종으로 해왔는데, 우리는 몇 년 전부터 산업설비가 일종의 틈새시장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해서 공략했습니다. 예컨대 서울·부산 고속철도 차량기지, 소주·맥주 플랜트, 남양유업 건국유업 등 낙농 플랜트 같은 것들이지요. 이런 분야는 기존 화공 플랜트보다 마진이 높아요….”
한번 회사 얘기를 시작하니까 도무지 끝날 줄을 모른다. 국내 건설경기 동향과 외국 업체들의 현황, 무슨무슨 기술개발 사례…. 결론은 으레 삼성 엔지니어링을 자랑하는 것이지만, 그게 그다지 ‘얄밉게’ 보이지는 않았다. 대기업의 최고 경영자라면 아마 누구라도 그럴 테니까.
월드컵 경기장 수주 얘기가 나오자 그는 고군분투했던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유쾌하게 웃었다. 대지 4만7000여평에 6만4000명의 관람객을 수용할 수 있는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은 2001년 12월 완공 예정으로 올해 말까지 70% 진도율을 계획하고 있다.
중동 시절 이래로 새벽 4시30분 기상 습관화
다시 고백하지만, 기자는 양인모 사장을 만나러 오며 일종의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엔지니어링 회사라고 해봐야 건설회사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형태겠거니 하는 게 첫번째 선입견이었고, 속된 표현으로 ‘노가다판’이라고 불리는 건설부문의 최고경영자는 다른 업종에 비해서 더 터프하고 직선적인 스타일이리라는 게 두 번째 선입견이었다. 그러나 그런 선입견과는 정반대로 그의 말씨는 매우 차근차근했고, 몸가짐은 조용조용했다. 전체적으로는 아주 젠틀(gentle)한 인상.
“원래는 중앙일보 공채로 입사해서 1년 반 정도 기자생활을 하다가 삼성그룹 비서실에서 영입 제안을 받았어요. 심사숙고 끝에 코페르니쿠스적인 변신을 했어요. 그 때가 66년 11월이었는데, 언론 현실에 대해서 실망감도 있었어요. 당시는 정보정치가 심할 때였거든…. 4년 반 동안 비서실에서 근무하고, 삼성물산으로 돌아가 뉴욕지사, 독일지사 등 해외영업을 주로 담당해왔습니다.”
양사장이 건설무문에 몸담게 된 것은 1978년. 당시 삼성그룹이 종합건설업에 진출하면서 해외영업통을 영입하는 과정에 그가 발탁된 것. 그 후부터 지금까지 건설업, 그중에서도 주로 해외영업 분야를 맴돌아왔다.
―어느 자료에 보니까 양사장님에 대해서 매너좋은 국제신사다, 과거 중동에서 다른 기업들은 미수금 때문에 쩔쩔매고 있는데 사장님만 돈을 받아냈다, 그런 얘기가 나와 있더군요.
“삼성건설 이라크 사업본부장으로 있을 때 마침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졌어요. 한참 전쟁중인 상황에 제 임무가 미수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지요.
그 다음, 리비아 사업본부장으로 있을 때에는 우리 회사가 받아야 할 미수금이 2억달러 정도였습니다. 당시 국내 모 그룹에선 회장이 직접 트리폴리까지 날아와 미수금 해결을 위해서 동분서주했는데, 삼성에선 저 혼자 뛰었어요. 결국 배로 12척분의 석유를 받아서 미수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발주기관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다른 회사 회장도 잘 만나주려고 하지 않는데 당시 일개 상무였던 저 혼자서 뛰었으니 힘든 일도 많았어요.”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었나요?
“비결이라기보다는 얼마나 노력하느냐가 문제겠지요. 상대방의 취미나 가정생활, 평소 인생관 같은 걸 파악해서 동질감을 찾으려고 애쓰는 겁니다. 상식적인 얘기예요.
제가 영업요원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지만, 영업요원은 우선 박식해야 합니다. 상대가 어떤 화제를 들고 나와도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서 아무리 바빠도 항상 공부해야 하고, 자기계발에 노력해야 합니다.”
―양사장님 경우는 어떤가요? 예컨대 잠은 하루에 몇 시간 주무십니까?
“아무리 늦게 잠자리에 들어도 새벽 4시 반에는 일어납니다. 그건 중동생활에서 밴 습관인데, 현장에 나가는 사람들을 생각해서 일찍 일어나곤 했어요. 사실 그렇게 하다보면 피곤한 게 사실입니다. 특히 사업상 단기 외국출장이 잦은 나로서는 시차 때문에 괴로울 때가 많아요.”
―그렇게 일찍 일어나서 무엇을 하세요?
“명상도 하고, 운동도 하지요. 바쁜 와중에 잠시라도 여유가 있으면 마음의 평정을 가지려고 애도 쓰고…. 아이구, 뭐 그런 것까지 묻습니까?(웃음)”
창의력 개발이 관건
―양사장께서 경영에서 특히 고려하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우리 회사 엔지니어들은 나름대로 프라이드가 강합니다. 한 마디로 단순 시공만 하는 건설회사와는 다르다는 인식을 갖고 있어요. 그런 엔지니어들의 사기를 북돋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 가지 실수에 대해서 벌을 주기보다는 잘한 일을 찾아 칭찬해주는 게 훨씬 나은 결과를 가져오더라는 거지요.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회사 사정이 아무리 어려워도 엔지니어들을 선진국에 내보내 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그런 게 지금 큰 자산이 되고 있는 겁니다.”
―우리 나라의 엔지니어링산업 분야가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앞으로 보완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이 될까요?
“지금 시급한 건 우리 기업의 대외 신인도, 나아가서는 국가 신인도가 하루 빨리 개선되는 것이라고 봐요. 우리가 해외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 수출입은행이나 산업은행의 보증을 받아서 제시하는데, 우리가 아무리 설득해도 보수적인 외국 사업주들은 이런 은행의 단순 보증만으로 만족하지 않거든요. 국제적으로 신인도가 높은 일본 은행의 복보증을 받아오라고 요구하는 사업주도 있고…. 이런 게 모두 국가 차원에서 극복해야 할 과제지요.”
―다른 한편, 국내 건설업계는 담합 비리라든가, 공정한 룰이 적용되지 않는 관행이 횡행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건 개선되고 있습니까?
“사실 지금은 건설시장 자체가 죽어 있으니까 담합이고 뭐고 없어요. 또, 이번 정부가 들어오면서 담합에 대해서 강력하게 대응했잖아요? 심지어 5대 건설회사 영업담당 임원들이 줄줄이 감옥에 가기도 했잖았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건 대체로 해소됐고, 건설회사 입장에서도 과거처럼 무리하게 입찰해서는 버티기가 어렵습니다. 조달청 등 정부가 시행하는 입찰과정이나 법규도 상당 부분 현실화됐고…. 다만 안타까운 건 일감 자체가 없다는 겁니다.”
시종 자신감에 차 있던 그는 한국경제 전반에 대한 얘기로 화제가 돌아가자 다소 의기소침해졌다. 올 겨울 국내 건설업계에 닥쳐올 태풍을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해보였다.
―앞으로 기업경영 환경도 더욱 빠르게 바뀌겠지요? 이에 따라 CEO에게 요구되는 덕목도 달라지겠지요. 앞으로 CEO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조언 한 마디 해주시지요.
“무엇보다 민감해야 할 부분은 자기 자신이나 부하 직원들의 창의력 개발이라고 생각해요. 정보혁명이나 IT시대라는 것도 결국 창의적인 아이디어의 바탕이 달라지고, 수단도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겠어요? 최고경영자가 변화의 흐름을 파악한다는 것은 결국 그때 그때 변화하는 창의력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