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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연구|일본 우익의 선봉 산케이신문

산케이 한국보도 親韓인가 反韓인가

일본 우익의 선봉 산케이신문

  • 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산케이 한국보도 親韓인가 反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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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특성을 거론할 때마다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란 일본어가 자주 거론된다. 혼네는 ‘본마음”이고, 다테마에는 본심을 감춘 ‘체면치레’ 정도가 된다. 일본인들은 여간해선 혼네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이 “아리가토-(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공손히 인사하는 것은 다테마에지, 혼네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일본 언론에도 반영된다. 일본의 주류 언론은 과거 일본이 침략했던 나라의 과거사를 다룰 때는 ‘다테마에’적으로 표현해 왔다. 예외가 산케이다. 산케이는 예민한 주제에 대해서도 과감히 혼네를 드러내 왔는데, 산케이는 이를 ‘무리를 짓지 않는 신문’ ‘도망가지 않는 신문’ ‘할 말을 하는 신문’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산케이는 여러 가지를 말하고 싶어하는데, 그중 하나가 ‘반공(反共)’이다. 산케이 소개 팸플릿에는 기요하라 다케히고(淸原武彦) 사장이 쓴 ‘21세기를 담당할 당신에게’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었는데, 일부를 요약하면 이렇다.

‘20세기는 전쟁의 세기, 혁명의 세기였다고도 한다.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할 때까지 국내(일본) 좌익 저널리즘은 폭을 넓혀 왔다. 그러나 산케이는 소련과 문화대혁명의 와중에 있는 중국에 대해서도 굴하지 않고 사실을 보도했다.’

기요하라 사장이 ‘산케이는 소련과 문화대혁명의 와중에 있는 중국에 대해서 굴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은 결코 허풍이 아니다. 1991년 고르바초프가 이끄는 소련은 ‘공산주의 포기’를 선언했는데, 이것을 세계 최초로 알린 매체가 산케이였다. ‘반공 신문’이 공산주의의 심장부에서 공산주의 붕괴를 가장 먼저 알렸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당시 산케이의 모스크바 특파원은 사이토(齊藤)씨였다. 산케이의 스미다 나가요시(住田良能) 주필은 이렇게 설명했다.



“물론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시각과 공산주의 붕괴를 최초로 보도하는 것은 상관 관계가 없다. 하지만 반공이든 친공이든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려고 하다보면 특종이 나올 수도 있다. 사이토 특파원은 부친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소련군에 의해 시베리아에 억류됐다가 일본으로 돌아왔는데, 그 직후 사망했다고 한다. 이로인해 사이토는 공산주의의 가혹함에 대해 투쟁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관심을 갖고 공산주의 심장부를 파고들었는데, 그것이 역사적인 대특종으로 이어졌다.”

어느 언론사든 그 언론의 명성과 색깔을 끌고 나가는 것은 몇몇 ‘스타기자’ 혹은 ‘근성 있는 기자’다. 독자들은 사실을 빨리 보도하는 것이 유능한 기자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스타기자는 속보보다는 논란이 일어나는 문제작을 던지는 기자다. ‘산케이의 색깔’ ‘산케이의 맛’을 만드는 기자들도 아주 까다로운 주제를 골라 문제작을 던지는 특성이 있는 것 같다.

모택동의 중국과 대립

일본은 중국을 침략한 적이 있어서인지 중국 문제를 다룰 때는 조심하는 버릇이 있다(요즘은 많이 약화됐지만, 한국에 대해서도 비슷한 자세를 취한다). 이러한 조심성은 다테마에를 내세우며 공손히 처신하는 일본인의 습성과 결부돼 중국 정부에 대한 일본의 저자세로 표출되기도 한다.

특히 중국에 파견되는 일본 외교관과 특파원은 베이징 정부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신경을 많이 쓰는데, 이러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일본 내 은어가 ‘차이나 스쿨(china school)’이다. 차이나 스쿨 멤버들은 대부분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한다.

1960년대 일본 언론계에는 막연히 진보주의를 추수(追隨)하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묵시적으로 동조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이런 와중에 중국이 문화대혁명에 들어가자 주류 언론들은 ‘인간 개조 실험이다’ ‘균등한 사회를 만들고 숭고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움직임이다’는 식으로 문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산케이의 시바다 미노루(柴田穗) 베이징특파원만은 ‘문혁은 문화파괴이며 인류에 대한 죄악이다. 문혁은 모택동의 권력투쟁에 지나지 않는다’고 썼다. 때문에 그는 추방당하고, 산케이 지국도 폐쇄되었다. 이후 중국 정부는 다른 일본 언론사 지국도 차례로 폐쇄했다.

‘새로운 소식을 판매하는 기업’인 언론사가 세계 중심무대 중의 하나인 베이징에 기자를 두지 못한다는 것은 허점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일본과 중국이 국교를 맺는 1972년을 전후해 일본 언론은 베이징지국 재개를 모색하는데, 이때 중국은 ‘대만에 설치한 지국을 폐쇄한 언론사만 베이징에 지국을 개설할 수 있다’고 치고 나왔다.

대부분의 일본 언론은 이 조건을 수락하고 차이나 스쿨 멤버를 특파원으로 보냈다. 그러나 산케이만은 “그런 조건을 내걸지 말고 무조건적으로 베이징지국 개설을 허가해 달라”고 맞섰다.

이렇게 맞선 것이 무려 30여 년. 1998년 마침내 산케이는 대만지국을 유지한 채로 베이징지국을 개설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냈다. 산케이의 승리 덕분에 거꾸로 다른 언론사들이 대만에 지국을 개설할 수 있게 되었다.

허가를 받은 즉시 산케이는 워싱턴 특파원 고모리 요시히사(古森義久)씨를 베이징 특파원에 임명했다. 고모리 특파원은 부인이 미국인일 정도로 유명한 미국통이다. 산케이는 마이니치 출신인 그를 정년없이 일할 수 ‘특별기자’(한국식으로 말하면 정년이 없는 ‘전문기자’가 되겠다)로 영입했다. 중국과는 이렇다 할 인연이 없는 사람을 베이징 특파원에 임명했으니 본인조차도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모리씨는 “나는 중국어도 모른다. 그런 나를 베이징에 보내도 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산케이 경영진은 “괜찮다. 당신이 보고 들은 사실을 그대로 써라”고 주문했다.

기자를 해본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외국 취재를 하는 데 있어 외국어를 능숙하게 하느냐는 것은 그리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는다. 요체는 어떻게 보느냐 하는 ‘시각’이다.

미국의 합리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고모리 특파원의 눈에는, ‘인치(人治)’가 성행하는 중국이 모순덩어리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산케이 경영진이 기대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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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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