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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한국 먹여살리는 조선산업의 경쟁력

  • 이형삼 hans@donga.com

불황한국 먹여살리는 조선산업의 경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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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에서는 10여 년전부터 90년대 말경 조선산업이 침체기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 설비와 인력의 감축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에 따라 일본 유수의 중공업회사들은 조선업 비중을 지속적으로 축소해 설비의 노후화, 인력의 노령화를 초래했다. 그 결과 일본은 요즘처럼 물량이 급증하자 이를 소화할 역량이 모자라 한국에 선두를 내주고 말았다. 또한 우리나라에선 9개 대학에 설치된 조선공학과에서 매년 약 1000명의 인력을 배출하고 있으나, 조선업이 사양산업으로 인식되는 일본에서는 조선공학과가 설치된 대학이 3개에서 2개로 줄었다.

조선업계는 거듭된 환율상승 덕도 톡톡히 봤다. 조선업은 환율에 극히 민감하다. 조선사가 소재와 부품을 구매할 때는 65% 정도를 원화로, 나머지 25%를 달러화로 결제하지만, 매출로 잡히는 배값은 선주로부터 달러화로 받기 때문이다. 원화를 쓰고 달러화를 벌어들이니 환율이 오르면, 다시 말해 원화가치가 떨어지면 지출은 줄고 수입은 늘게 된다. 현대중공업의 경우 환율이 1달러 당 50원만 올라도 한 해 경상이익이 무려 1200억여 원이나 증가한다. 외환위기 이후 원화가치가 큰 폭으로 떨어지자 조선업체들은 떼돈을 챙겼다.

선주는 배를 주문한 후 수주시점부터 인도시점까지 4∼5단계에 걸쳐 배값을 분할 지불한다. 단계별 분할조건은 계약하기에 따라 달라진다. 조선사가 수주단계에서 선수금을 많이 받기로 계약하면 금융비용을 고려해 배값이 싸지고, 인도단계에 가까울수록 돈을 많이 받으면 배값이 비싸진다. 배를 주문받은 때부터 인도할 때까지 걸리는 기간은 2년6개월 정도이므로 금리를 연 8%로 잡으면 어느 단계에서 돈을 많이 받느냐에 따라 선가가 20%까지 차이가 난다.

이렇다 보니 조선업은 금융장사 성격이 강하다. 자금이 달리거나 설비 증설이 시급한 조선사는 선수금을 많이 받는 대신 배값을 깎아준다. 배는 2년6개월 뒤에 넘기지만 많게는 배값의 40% 정도를 계약후 1년 안에 받아내 회전시킬 수 있다. 그래서 일부 조선사는 선수금의 유혹 때문에 덤핑 수주를 감수하기도 한다. 이 경우 나중에 환율이 올라 달러가치가 올라가면 손해를 보게 된다. ‘싼 달러’를 많이 받아뒀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업에선 환율예측이 경기예측 못지 않게 중요하다.

다행히 국내 조선사들은 대개 인도시점에 가까울수록 돈을 많이 받는 조건(꼬리 쪽이 무거운 계약이라고 해서 ‘heavy tail’이라 한다)으로 계약을 했다. 2∼3년전까지만 해도 설비 가동률을 높이기 위해 선수금을 적게 받고라도 물량 확보에 급급했기 때문. 이미 설비 확충을 끝냈기 때문에 자금수요가 크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에 환율이 오르자 조선사들은 가만히 앉아서 ‘비싼 달러’를 챙겼다. 대우조선 관계자는 “워크아웃 초기에는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못됐다. 일단 수주실적을 올려놓고 보느라 울며 겨자 먹기로 ‘헤비 테일’ 계약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그 계약서들이 효자노릇을 하고 있다”고 했다.



자재 공급망 탄탄

선박은 쇠로 만든 뼈대(프레임)에 철판을 잘라 붙여 껍데기(船殼)를 만들고 그 안에 엔진을 집어넣은 뒤 그 추진력으로 프로펠러를 돌려 움직이는 장치다. 웬만한 배 한 대를 만드는 데는 수만 장의 철판이 필요하다. 그래서 선박 자재비 가운데 강재(鋼材) 값이 30%를 차지한다. 때문에 철강업계가 위축돼 강재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거나 값이 뛰면 배값을 미리 정해놓고 배를 만드는 조선사들은 자재비 상승으로 타격을 받게 된다.

한국 조선업계는 이 대목에서도 커다란 메리트를 갖고 있다. 포항제철이라는 세계 유수의 철강회사로부터 저렴한 가격에 품질좋은 선박용 강재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포항에서 생산된 강재를 ‘엎어지면 코 닿을’ 울산과 거제로 가져오므로 물류비용도 절감된다.

선박 자재비의 20%를 차지하는 엔진 부문에서도 여건이 좋다. 세계 1, 2위의 생산능력을 가진 엔진 메이커가 조선사들을 받쳐주고 있어 적기 공급이 가능한 것. 현대중공업 엔진기계사업본부는 연 620만 마력의 엔진을 생산할 수 있는 선박 메인엔진 세계시장 점유율(35%) 1위 업체. 이 회사가 지난해 여름 제작한 세계 최대의 9만3120마력 선박용 엔진은 무게가 2095t에 이르고 높이가 15m, 길이가 26m로 4층짜리 건물과 맞먹는 크기다. 이 엔진에 장착되는 프로펠러도 무게 100t, 직경 9m로 세계 최대 기록을 경신했다.

또한 지난해 한국중공업과 삼성중공업의 엔진사업부문을 통합하고 대우중공업의 지분 참여로 설립된 (주)HSD엔진은 연 생산능력 410만 마력의 세계 2위 업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일반 상선의 기자재 국산화율은 90%에 가깝다고 한다. 강재 엔진 프로펠러 샤프트 배관 전선 도료 등 대부분의 주요 기자재가 국산화됐으며, 다만 24시간 구동되는 펌프, 레이더 장치같은 내구성 장비는 선주들이 신뢰도가 높은 특정 외국회사 제품을 선호하기 때문에 수입해 쓰고 있다는 것. 이런 내구성 장비는 국내 기계·소재산업의 기반이 약해 국산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대중공업 조선사업본부 한대윤 전무는 “한국에서 조선업만큼 기술자립도가 높은 업종은 없다. 설계, 시험, 생산 등 전 과정이 자체적으로 이뤄지므로 실질적인 국산화율은 100%로 봐야 한다. 일부 수입 기자재는 못 만들어서가 아니라 가격경쟁력 때문에 일부러 국산화하지 않는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현대중공업 정재헌 문화부장은 “기자재 국산화가 조기에 완료되지 않았다면 환율상승으로 기자재값이 2.5배나 폭등했던 외환위기 때 한국 조선산업은 막을 내렸을 것”이라며 “이는 그간 조선사들이 기자재 협력업체들에 대한 기술지도와 품질관리에 공을 들여온 결과”라고 설명했다. 현대는 한때 수입 기자재보다 30%나 비싼 값에 국내 협력업체 제품을 사다 쓰면서 기술개발을 독려했다고 한다.

기성복 값에 맞춤복을

기성복 가격에 테일러 메이드 양복을 사 입을 수 있다면 귀가 솔깃할 것이다. 우리 업계의 선박설계 능력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국 조선사들은 선주의 요구를 세심하게 반영하는 유연한 설계능력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것은 ‘헝그리 정신’에서 비롯됐다.

일본은 40년 넘게 세계 조선시장을 장악하다 보니 우월적 지위에 자만한 측면이 있다. 그들은 대량의 선박을 효율적으로 만들어 팔기 위해 선종별로 선박을 표준화한 다음 정형화된 설계도면에 따라 일관라인에서 자동차를 생산해내듯 배를 만들었다. 고객인 선주들로서는 이런저런 옵션을 설계에 반영하고 싶었겠지만, 아쉬울 게 없는 일본 조선사들은 ‘FM대로’만 고집했다. 그 결과 일본은 일반 상선의 설계능력과 설계인력의 질이 제자리걸음을 하며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고, 요즘은 아직 경쟁력이 있는 몇몇 선종을 전문화하는 방향으로 활로를 찾으려 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초기엔 설계능력이 모자라 일본의 표준선형 설계를 따랐지만, 점차 경험이 쌓이면서 선주들의 다양한 요구를 설계에 탄력적으로 반영했다. 일본으로 갈 물량을 하나라도 더 가져오려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대우조선 선박해양기술연구소 한용섭 소장은 “가령 VLCC(대형 유조선)가 표준설계로는 15노트의 속력을 내도록 돼 있는데 선주가 ‘○○해역에서는 15.5노트가 나오도록 해달라’든가 ‘배의 의장을 이러저러하게 바꿔달라’고 요구하면 선가를 많이 올리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가능케 하는 설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머리를 짜내야 했다”고 말한다.

이런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설계전문 인력을 확보하는 게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80년대 후반부터 업체들은 설계인력을 집중적으로 육성했고, 이들은 선주들이 원하는 사양을 충족시키고 불편함을 해결해주면서 다양한 현장경험을 축적해 탄탄한 설계역량을 갖게 됐다.

현재 현대중공업은 1200여 명, 대우조선은 900여 명, 삼성중공업은 700여 명의 설계인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들이 지금껏 만들어낸 수천 종의 설계도면은 회사마다 데이터베이스로 구축돼 있어 새 선박을 설계할 때는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설계 변형을 시도한 뒤 최적의 성능이 산출되면 최종 설계에 들어간다.

삼성중공업 이형용 설계운영부장은 “일본이 이처럼 유연한 설계를 하지 못하는 것은 기술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수주단계에서부터 영업팀과 설계팀이 긴밀하게 협의한다. 설계를 모르는 영업, 영업을 모르는 설계로는 ‘기본’과 ‘변형’을 고루 취하는 설계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영업인력과 설계인력, 기술인력이 한 팀에서 설계단계까지 함께 가므로 서로의 특성과 고충을 이해하면서 선주의 요구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설계인력을 포함, 국내 조선소 현장인력의 평균연령이 일본보다 10년 가까이 낮다는 것도 강점이다. 80년대 후반, 그리고 조선산업 합리화조치가 해제되던 93년 이후에 인력을 대폭 확충했기 때문에 그 무렵 고교와 대학을 졸업한 35∼40세 안팎의 근로자들이 지금 현장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젊지만 8∼15년의 경험을 쌓아 기술적으로 한창 성숙기에 다다라 있다. 하지만 ‘젊은 피’를 제때 수혈하지 못한 일본 근로자들은 대개 45∼50세로, 경험은 많지만 능률은 우리 인력보다 낮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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