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호

혁명 기상 충만한 强骨 집안

  •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입력2005-04-14 14: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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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색 원숭이의 정기가 뭉쳐 있다’는 뜻의 금원산(金猿山)을 배경으로 한 동계(桐溪) 정온 종택은 그 강강(剛剛)한 기세가 무림 고수가 살기에 적당한 집이라는 이미지를 준다. 바로 이 집에서 조선 후기 최대의 반란사건 주도자 정희량을 배출한 것을 우연한 일로만 돌릴 수 있을까?
    혁명 기상 충만한 强骨 집안
    서울에서 볼 때 낙동강을 기준으로 하여 강 왼쪽을 경상좌도라 하고 강 오른쪽을 경상우도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오늘날 경상남도 지역은 옛날에 경상우도로 불렸다. 경상우도에서 손꼽을 수 있는 명가 중 하나가 선조, 광해, 인조의 세 왕대에 걸쳐 활동한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년) 집안이다.

    경상좌도의 집안들이 대체적으로 퇴계 이황의 학풍을 계승하였다면 우도의 집안들은 남명 조식의 학풍을 계승하였는데, 동계 정온은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남명의 학풍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동계 정온 종택이 자리잡은 경남 거창은 ‘울고 들어가서 웃고 나오는 곳’이라는 말이 전해진다. 산꾼들의 귀띔에 따르면 거창 지역은 산세가 높고 험해서 들어갈 때는 심란하게 보이지만, 지내다 보면 인심도 좋고 먹을 것도 많아서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이다.

    동계 고택은 거창 버스터미널에서 이름난 명승지인 수승대(搜勝臺) 쪽으로 방향을 잡아 택시로 15분 정도 더 들어가야 한다. 수승대 바로 못 미쳐서 좌측길로 접어들면 강동(薑洞)마을이 나타나고 마을 정면 중앙에 동계 고택이 있다.

    동계 고택으로 접근하는 순간 그 주위 산세와 고택에서 풍기는 인상이 범상치 않다. 무협지에 등장하는 무림(武林) 고수가 살기에 적당한 집이라는 이미지를 풍긴다.



    사람마다 각기 풍기는 첫인상이 있듯 집들도 풍기는 인상이 제각기 다르다. 온화한 느낌을 주는 집이 있는가 하면, 장중한 느낌을 주는 집이 있고, 왠지 모르게 풍족하고 여유 있는 느낌을 주는 집이 있는가 하면, 산만하고 칙칙한 느낌을 주는 집도 있다. 나는 답사를 다니면서 집마다 지닌 각기 다른 개성을 비교해 보는 데서 남모르는 재미를 느껴본다.

    강강한 바위산인 금원산

    그런데 동계 고택에서 ‘무림 고수가 살 만한 집’이라는 인상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금원산(金猿山) 때문이다. ‘금색 원숭이 정기가 뭉쳐 있다’는 뜻을 지닌 금원산은 백두대간이 덕유산으로부터 지리산으로 뻗어 내려가다가 중간에 뭉친 산이다. 금원산은 해발 1360m의 비교적 높은 산으로 암벽이 노출된 강강(剛剛)한 바위산이다. 오행(五行)으로 보면 화기(火氣)와 금기(金氣)가 4 대 6으로 섞인 화금체(火金體) 산이라 할 것이다.

    동계 고택을 마주 바라보았을 때 무엇보다 고택의 좌측 뒤로 4∼5개의 봉우리가 우뚝하게 솟은 금원산이 쳐다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엄숙함 내지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마치 문경의 봉암사가 자리한 대머리산인 희양산이 주는 인상과 비슷하다. 양쪽 다 터 뒤쪽으로 높은 바위산이 뒤에 받치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아무튼 동계 고택의 태조산(太祖山)에 해당하는 금원산은 함부로 말 붙이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엄숙함과 함께 과묵한 무림 고수의 품격을 풍긴다. 한마디로 강기(剛氣)다.

    유명 고택을 답사하는 가운데 금원산과 같은 화금체의 바위산이 조산으로 뒤에 받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도를 닦는 절터라면 모를까, 보통 사람이 사는 집터로는 이런 곳을 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산의 정기를 흡수하기 벅찬 일반인에게는 금원산과 같은 강기(剛氣)는 단순히 강한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을 ‘때리는’ 살기(殺氣)로 변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지기(地氣)가 지나치게 강한 곳에 집을 짓고 살면 밤에 꿈자리가 사납거나, 때때로 가위에 눌릴 때도 있고, 성격이 포악해지거나, 시름시름 아파서 결국에는 병이 드는 경우가 많다. 1∼2년은 그럭저럭 버틸 수 있다 하더라도 3년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버티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런 장소는 절터나 수도원이 들어서야 제격이고, 그도 아니면 아주 기가 강한 사람만이 그 터의 기운를 누르면서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강한 금원산을 조산으로 하여 동계 고택이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양중음(陽中陰)의 이치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주역의 팔괘(八卦) 중에 이괘(離卦; )가 양중음을 상징하는데, 단단한 양의 한가운데 부드러운 음이 내재한다는 뜻이다. 단단한 껍데기 속에 부드러운 속살이 있는 빵과 같은 이미지다.

    그런데 이 부드러운 속살에서 묘용(妙用)이 많이 나온다. 동계 고택은 이 속살에 해당하는 자리라고 보면 틀림없다.

    금원산에서 시작된 기운은 한참 내려오는 과정에 마침내 그 성난 노기(怒氣)를 풀고 야트막한 흙동산으로 결국(結局)을 이루는데, 바로 그곳에 동계 고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강함에서 우러나는 부드러움, 이곳이 양중음의 전형적인 자리이며 명당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호남의 3대 수도터 중의 하나로 꼽히는 전북 변산의 월명암(月明庵)도 이런 양중음 자리다.

    예리한 필력 상징하는 문필봉

    동계 고택의 전체 국세(局勢)에서 또 하나 주목을 끄는 산은 기백산(箕白山). 해발 1320m에 달하는 고산인데, 고택에서 보자면 정면에서 약간 우측 전방에 보이는 산이다. 산이 전체적으로 삼각형이면서 그 끝이 깃발처럼 뾰족하다. 대단히 우람한 문필봉(文筆峰) 모양을 갖춘 산이다. 한국의 오래된 명문가를 보면 집터 아니면 묘터 앞에 거의 문필봉 하나쯤은 발견된다. 답사를 해보면 60∼70%가 그렇다.

    기백산은 봉우리 끝이 붓의 그것처럼 뾰족하고 예리해서 그 정기를 받은 사람의 필력(筆力)도 예리하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붓을 받치고 있는 하부구조가 두텁고 웅장해서 뚝심과 자존심도 갖춘 문필이다. 끝만 날카롭고 하부구조가 약하면 외부의 압력에 오래 버티지 못하지만, 기백산처럼 두텁고 웅장한 문필봉이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초지일관해서 지조를 굽히지 않는 저력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동계 고택은 조산인 금원산의 무인적 기질과 안산인 기백산의 문사적 기질이 모두 어우러져 있는 집터가 된다. 문무겸전의 터는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금원산과 기백산을 바라보니 400년 전의 동계라는 인물의 성품이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고, 이 집안 사람들의 기질도 대강 유추해볼 수 있다.

    이번에는 돈을 보자. 문무겸전을 하였다 하더라도 사람이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쓸 만큼 돈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돈이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물을 살펴보아야 한다. 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 할 때 임수의 상태를 본다는 말이다.

    동계 고택 앞에는 내당수(內堂水)가 흐르고 있다. 내당수는 집터를 기준으로 청룡 백호의 범위 내에서 흐르는 물을 가리킨다. 청룡 백호를 벗어나 그 바깥에서 흐르는 물은 외당수(外堂水)라고 부른다.

    내당수는 밖에서부터 집터를 향해 흘러 들어오는 물을 으뜸으로 치고 그 다음으로는 둥그렇게 활처럼 휘어지면서 집을 감아도는 물을 좋게 본다. 동계 고택 앞의 내당수는 활처럼 돌아나가는 물이다. 그런데 특이한 부분은 내당수 바깥 쪽에 외당수가 하나 더 있다는 것이다. 집 대문 바로 앞으로 흐르는 물(내당수)이 있고, 여기서 20m쯤 밖에 외당수가 흐른다. 한마디로 내·외당수를 겸전하고 있다. 물은 일단 재물로 보기 때문에 하나가 아닌 두 개의 내·외당수가 겹으로 집 앞을 흐르고 있다는 것은 그에 비례해 돈이 많다는 점을 의미한다.

    안쪽의 내당수는 이름이 없지만, 바깥쪽의 외당수는 강천(薑川)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강천이 어느 쪽에서 흘러오는지를 보기 위해서 물길을 따라가 보았다.

    금원산 쪽에서 흘러오는 조그만 실개천이 또 하나 있고, 이 실개천이 흘러오다가 강천에 합쳐지고 있다. 물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고택의 좌측 뒤에서 돌아 흐르는 동계(桐溪)라고 불리는 가느다란 냇물 줄기가 하나 더 있는데, 이 물도 내·외당수와 함께 강천에서 합류되고 있다. 강천은 다시 수승대 쪽에서 흘러오는 위천(渭川)과 합쳐지면서 거창 쪽으로 흘러간다.

    그러니까 무려 5개의 물줄기가 고택 주위에서 합수(合水)되는 형국이다. 물은 집앞에서 합쳐질수록 좋다고 본다. 물줄기가 많이 모일수록 재물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인심도 한 군데로 합쳐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를 일러 만득일파(萬得一破)라고 하는데, 들어오는 쪽의 물은 만 갈래로 나누어져 오더라도 이 물이 나갈 때는 한 군데로 나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주 상서롭게 본다.

    서출동류의 명당수

    물이 흐르는 방향은 어떤가? 패철을 놓고 재보니 고택의 좌향은 임좌(壬坐)다. 임좌는 정남향에서 15도 정도 서쪽으로 기운 방향을 가리키는데, 사실은 거의 정남향에 가까운 방향이다.

    물은 집의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왼쪽으로 흘러가므로 소위 말하는 ‘서출동류(西出東流)’에 해당한다. 서쪽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흘러가는 물을 가리키는 서출동류에 대해, 어느 사찰의 노스님은 “서출동류라면 똥물도 약이 된다”고 말할 정도다. 그만큼 선호하는 물의 흐름이다.

    왜 서출동류가 좋단 말인가? 흥미롭게도 이 물의 흐름이 좋은 이유를 서양의 어느 생태학자가 나름의 논리로 밝혀놓았다. 그는 서쪽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흘러가는 물이 생태계에 가장 좋다고 주장했는데, 일조량을 가장 오랫동안 받을 수 있는 방향이라는 게 그 근거다. 해는 동쪽에서 뜨고 물은 서쪽에서 시작하면 물이 흘러가는 동안 반대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보는 시간이 길어지고, 빛을 많이 받을수록 그 물은 산소 함유량이 풍부해져서 생태계에 이롭다는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국세(局勢)를 살펴보기로 하자. 경상도 지세는 산이 많고 들판이 적기 때문에 경상도 고택들은 뼈대가 있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국세가 좁은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동계 고택은 예외다. 툭 터진 느낌을 줄 만큼 국세 또한 넓다.

    울울한 산중에 사는 사람보다는 넓은 들판에 사는 사람의 마음이 넓기 마련이다. 불교의 사찰 터도 이와 마찬가지다. 앞이 시원하게 넓게 터진 암자 터는 오도(悟道) 후의 보임(保任) 터가 많다. 보임이란 분별을 떨치고 만상을 모두 수용하는 마무리 공부이기 때문에 넓게 터진 터에서 공부한다.

    공부하는 데도 그에 맞는 터가 있다. 시원하게 터진 터는 고단자가 공부하는 곳이라면, 초보자는 약간 답답하다 할 정도로 주변이 꽉 짜인 터가 맞다. 그래야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 초보자가 너무 호방한 터에 있으면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마음이 밖으로 동하는 일이 발생한다. 나는 집터도 같은 문법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동계 고택을 보면서 ‘맹자’ 진심장에 나오는 ‘궁즉독선기신(窮則獨善其身)이요 통즉겸선천하(通則兼善天下)’라는 글귀가 떠오른다. 궁색할 때는 홀로 수양하는 데에 주력하고, 일이 잘 풀릴 때는 천하에 나가서 좋은 일을 한다는 뜻이다.

    나는 평소에 패가 잘 안 풀릴 때를 대비해 조용히 숨어서 독선기신을 할 만한 장소를 물색하곤 했는데, 동계 고택을 보면서는 다른 생각이 올라온다. 남아로 태어나서 겸선천하를 한번 해보아야겠다는 의욕을 샘솟게 한다. 이런 정도의 집 같으면 겸선천하의 포부를 가질 만한 집터임에 틀림없다.

    충절의 선비 동계 정온

    지리(地理)를 이 정도 보았으니 인사(人事)를 살펴볼 차례다. 이 집안의 초계 정씨들은 일찍부터 과거급제를 한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 과거 합격자 101명의 명단이 실려 있는 ‘정사방목(丁巳榜目)’이 고택에서 소장하던 고문서에서 발견된 것이다. 고려말 우왕 3년(1377)에 치른 국자감시에서 장원급제한 정전(鄭悛)에게 당시 예부(禮部)에서 수여한 이 원본은 합격 동기생 101명의 이름을 전원 수록하고 있어 국보급 자료로 평가받는다.

    아무튼 수석 합격자인 정전은 동계 정온의 6대조가 된다. 초계 정씨가 거창의 용산, 안음, 서마리 등지에서 살다가 현재 사는 동네인 강동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시기는 동계의 조부인 승지공(諱 淑; 1501∼1563년) 때부터니까, 어림잡아 500년 가까운 입향(入鄕)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 동네 정씨들이 조선시대에 명문가로 부상한 것은 동계 정온이 임금에게 목숨을 걸고 직언한 상소문(甲寅封事)에서 비롯된다.

    동계가 46세 되던 해에 임금 광해군은 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귀향 보냈다가 강화부사 정항을 시켜 죽이고, 부왕인 선조의 계비이며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마저 폐출하려 하였다. 바로 이때 동계는 상소문에서 임금이 지금 패륜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고 직언한 것이다.

    이미 광해군은 친형인 임해군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외조부인 연흥부원군 김제남을 역적이라고 하여 죽였으며, 선왕의 공신, 현신들도 자기 귀에 거슬리는 상소를 했다고 해서 죽이거나 귀양을 보낸 바 있었다. 그러니 자기에게 패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직언한 동계를 그냥 놔둘 리 없는 것은 자명한 일.

    동계가 올린 상소문은 광해군이 막 식사를 하려고 수라상을 받았을 때 입직 승지가 그 내용을 읽어주었다고 한다. “그런 짓을 하시고 죽어서 무슨 낯으로 종묘에 들어가서 역대 선왕들을 만나시겠소?” 하는 대목에 이르자, 노기가 충천한 광해군이 수라상을 발길로 걷어차니 반찬 그릇과 장 종지가 어찌나 세게 튀었던지 옆에 있던 시녀와 승지의 머리가 터져 버릴 지경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처럼 흉측한 상소를 전달한 승정원 승지들도 책임이 있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파직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기록에 따르면 전국의 유생은 물론이고 부녀자들까지도 동계의 상소문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읽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하며, 동계가 구금된 감옥의 역졸들도 선생의 인품에 감복되고 또 여론에 압도되어 지성으로 동계를 보살폈다고 전해진다.

    동계를 옹호하는 전국 선비들의 여론 때문에 동계는 죽지 않고 그 대신 제주도 대정현에 10년 동안 귀양을 가서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형을 받는다. 위리안치는 유배지의 담장 주위를 마치 새장처럼 가시덤불로 에워싸서 하늘만 빼꼼하게 보이도록 조치한 집에서 살게 하는 형벌이다. 말하자면 지독한 가택 연금생활이다.

    후일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를 가서 생활한 곳이 동계가 위리안치 생활을 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추사는 대정현 사람들로부터 동계의 유배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소상하게 전해들을 수 있었고, 그가 행한 선비다운 처신에 감동받았던 것 같다. 추사는 제주 귀양이 풀린 후 일부러 거창의 동계 고택을 방문하여 당시 동계 후손인 정기필(鄭夔弼; 1800∼1860년)에게 동계 선생에 대한 제주도민의 칭송을 전해주면서 ‘충신당(忠信堂)’이라는 현판을 써주고 간 일이 있다.

    동계가 충절의 선비로서 존경받았던 또 하나의 사건은 병자호란 때였다. 임진왜란과 함께 병자호란은 조선조의 2대 난리로 꼽힌다. 임진왜란이 많은 인명피해와 함께 물질적인 피해가 컸다고 한다면 병자호란은 물질적인 피해는 적었지만 정신적인 피해는 오히려 임란보다 심각했다고 볼 수 있다. 병자호란은 그때까지 우습게 알던 오랑캐에게 임금인 인조가 맨발로 엎드려 절을 해야 했던 치욕스러운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명분과 자존심을 생명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조선조 선비들에게는 남한산성에서 무릎꿇은 임금의 치욕 행위가 선비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대사건이었다. 1636년 동계는 남한산성에서 오랑캐와의 화의를 적극 반대했으나 결국 화의가 성립됨에 따라 칼로 배를 긋는 할복 자살을 기도하였다. 주욕신사(主辱臣死: 임금이 욕보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의 정신이었다.

    그러나 모진 목숨이 마음대로 끊어지지 않자 국은에 보답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덕유산 자락의 모리(某里)라는 곳에 은거하면서 백이숙제처럼 죽을 때까지 미나리와 고사리를 먹고 살았다. 고사리를 캐며 살았다고 해서 그 은거지는 고사리 미(薇)자를 넣어서 ‘채미헌(採薇軒)’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진다. 요즘도 후손들이 동계 제사를 지낼 때는 제사상에 반드시 고사리와 미나리를 올려놓는다고 한다. 이 집에서 고사리와 미나리는 채소가 아니라 의리와 절개의 상징인 것이다.

    일치일란(一治一亂), 한번 치세가 있으면 다음번에는 난세가 오는 법. 이는 비단 국가뿐만 아니라 한 집안사에도 적용되는 것인가. 정씨 집안에서 동계라는 인물이 집안을 명문가로 올려놓은 것이 치세였다고 한다면, 동계의 현손인 정희량(鄭希亮: ?∼1728년)의 출현은 정씨 집안을 존폐의 기로에 몰아넣은 일대 난세였다.

    정희량은 영조 4년에 발생한 무신란(戊申亂,1728년)의 주동자였다. 무신란은 조선 후기 반란사건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고, 거기에 가담하였던 충청, 영남, 호남의 내로라하는 명문집안들은 거의 멸문되거나 쑥대밭이 된 사건이었다. 상층 엘리트들이 대거 가담하였다는 측면에서 무신란은 일반 민란과는 약간 성격이 다른 정변적(政變的)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보인다.

    기록과 정황을 종합하면 무신란의 발생 원인은 네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는 경종의 독살설. 경종이 게장(蟹醬)을 특별히 좋아하였는데 독이 든 게장을 먹은 직후 갑자기 죽었다는 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경종이 죽을 때 입에서 붉은 피를 토하고 죽은 점, 임종 직후 경종의 시체에 반점이 퍼진 사실이 독살설을 뒷받침한다.

    둘째는 경종의 뒤를 이은 영조가 숙종의 친자가 아니라는 점이 제기되었다. 그 증거로 역대 이씨 왕실의 남자들이 수염이 별로 없는 데 반해 영조는 이상하게 수염이 많아, 이는 결국 영조 어머니인 무수리의 미천한 신분과 관련되면서 영조가 이씨 왕통이 아니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셋째는 경종의 뒤를 이은 영조의 등장과 함께 노론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고, 노론에게 밀려난 남인들과 소론(준소)들은 정권에서 완전히 소외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난을 일으켰다는 설이다.

    넷째는 당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극심한 흉년이 계속돼 사람을 잡아먹는 상황에 이를 정도로 민심이 흉흉했다는 점이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민란의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을 만큼 수많은 민란이 발생하고 있었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아무튼 여러 배경으로 인해 일어난 무신란은 이인좌(李麟佐)의 난이라고도 하고 정희량(鄭希亮)의 난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 각종 반란사건의 수사기록인 ‘추안급국안(推案及鞠案)’에서 무신란 관련 기록을 들춰보면 문건 타이틀에 이인좌, 정희량의 이름이 보인다. 동계의 현손인 정희량이 무신란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충신의 후손에서 일순간에 역적 집안으로 전락한 강동의 정씨들은 30명 정도가 사건에 연루되어 죽어야 하였고, 약 20년 동안 동네를 떠나 이곳 저곳에 뿔뿔이 흩어져 숨어 살아야 하였다. 한마디로 집안이 결딴난 것이다. 조선시대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이 쿠데타에 실패한 역적이었으니까, 이후로 정희량에 관한 사실은 초계 정씨 족보에서부터 문집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록에서 철저하게 삭제되었음은 물론이다.

    소설가 이병주가 그랬던가! 승자의 기록은 햇빛을 받아 역사로 남지만, 패자의 기록은 달빛을 받아 신화나 전설이 된다고. 정희량에 관한 내용도 마찬가지다. 강동 마을에서 구전으로만 희미하게 전해지는 정희량에 관한 이야기를 후손인 정양원씨(鄭亮元, 62세)가 99년에 ‘강동(薑洞)이야기’라는 책으로 펴냈다.

    정양원씨는 현재 사업체(成現商運)를 운영하는 사장이지만 십수년간 시간 나는 대로 자료를 찾고 현지를 답사하면서 정희량에 관한 자료와 정보를 꼼꼼하게 섭렵한 향토사학자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역적이었지만 이제 시대가 바뀌었으니 새로운 시각에서 정희량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에서 책을 펴냈다는 것. 이 책에는 정희량에 관한 몇 가지 일화가 나온다. 정희량은 어릴 때부터 인물이 대단히 준수하였고 두뇌가 비상하였으며 생각하는 것이 엉뚱하다 할 정도로 호방하였다고 한다.

    정희량이 네댓 살쯤 된 어느 봄날 조부인 제천공이 어린 손자인 정희량을 안고 집 앞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때 마침 우측으로 바라보이는 금원산에 산불이 나서 대단한 기세로 타고 있었다고 한다.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가리고 그 연기 사이로 불꽃이 널름거리는 광경을 보고 있었는데, 할아버지 품에 안겨 있던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 저 둥그런 하늘이 솥(鼎)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허허 고놈이! 하늘이 어떻게 솥이 될 수가 있겠느냐. 그래 하늘이 솥이라면 무엇을 할 것이냐?”

    “만약 하늘이 솥이라면 저 불로 죽을 끓여서 굶는 백성들을 모두 먹이면 온 나라 안에 배고픈 사람이 없을 것 아닙니까?”

    어린 손자에게 이 말을 들은 제천공은 손자의 생각이 기특하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그 그릇이 너무 크고 생각이 지나치게 거창하여 걱정스러운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정감록’과 풍수도참 사상

    필자의 주목을 끄는 또 하나의 전설이 있다. 무신년 봄에 정희량이 거사를 하려고 하자 누나가 주역을 펴놓고 골똘히 괘를 풀어보았다. 정씨집 여자들은 주역을 공부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뛰어난 예지력을 갖춘 여성들이 많았다고 한다. 아무튼 그 누나는 주역을 풀어본 뒤 동생 정희량의 손을 붙들고 이렇게 말했다.

    “네가 정히 큰 일을 할 명운을 타고났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니 조금 더 기다렸다가 금년 가을 나락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할 때가 천시(天時)에 맞다. 그때 하거라.”

    그러나 상황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형편이라고 정희량이 대답하니, 누나는 “이것도 역시 우리집 가운이고 너의 명운이라 어쩔 수가 없구나. 지금 거사를 하면 너는 뒷날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무덤 없는 혼백이 될 것이다”라고 한탄하였다 한다.

    이러한 전설들은 알고 보면 풍수도참(風水圖讖)에 관한 내용들이고, 한걸음 더 유추하여 보면 정희량 자신도 풍수도참적인 맥락에서 특별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 후기 각종 반란사건의 이념적 기반 중의 하나가 다름아닌 풍수도참이고, 대표적으로 ‘정감록’이 조선시대의 그러한 풍수도참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실제로 ‘정감록’이라는 이름이 공식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가 바로 무신란 때부터다. 혹시 무신란 주도멤버 중 누군가가 ‘정감록’을 비롯한 풍수도참설을 유포하여 민심을 움직이려 한 것은 아닐까? 정씨인 정희량은 혹시 자신을 정도령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조선시대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지배했던 풍수도참적인 시각에서 보면 동계 종택의 풍수와 정희량이라는 인물의 출생은 몇 가지 점에서 부합되는 부분이 발견된다.

    다소 어렵긴 하지만 이를 풀어보기로 한다. 태조산인 금원산의 정기를 받은 인물이 강동마을 정씨 집안에서 언젠가 한 명 태어나기 마련이다. 그 사람은 열두 띠 가운데 일단 원숭이해에 출생한 신년생(申年生)으로 범위를 좁혀볼 수 있다. 바로 금원산이 원숭이(申)의 정기가 뭉쳐 있는 산이기 때문. 그 다음에는 원숭이띠 중에도 천간(天干)에 임(壬)자가 들어간 임신년(壬申年)생 인물이 금원산의 정기를 받아먹을 것이다. 바로 동계 종택의 좌향이 임좌(壬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즉 풍수의 이기법(理氣法)을 동원하면 종택 좌향의 임(壬)과 태조산인 금원산의 신(申)이 결합하면 임신(壬申)이 되는 이치다.

    그런데 정희량은 역적이라고 해서 모든 기록에서 지워졌으므로 그 출생연도를 확인해볼 수 없다. 추리해 보면 정희량과 함께 난을 꾸민 이인좌의 나이가 무신란 당시 36세였고, 두 사람이 흉금을 터놓고 같이 어울렸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비슷한 연배였을 것이다. 또 기록에 따르면 무신년에 정희량이 큰며느리를 보았다고 돼 있는데, 당시 혼인 적령기가 17∼18세였음을 감안하면 정희량은 무신란 당시 37∼38세쯤이 아니었을까. 무신년을 기점으로 육십갑자를 소급해 올라가면 37세 나이는 임신년(壬申年) 생이다.

    그 다음에 생각해볼 요소가 거사년인 무신년(戊申年)이다. 이 역시 원숭이해다. 원숭이띠가 원숭이해에 거사를 한 셈. 이러한 중복은 상서롭게 본다. 그런데 여기에 원숭이가 한 마리 더 첨가되어 세 마리 원숭이가 삼중으로 중복되어야만 제대로 힘을 쓴다고 본다. 전설에 따르면 주역을 잘한 정희량의 누나는 “나락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할 때 거사를 하라”고 정희량에게 충고했다고 하는데, 바로 그때가 음력 7월로 신월(申月)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희량은 그 말을 듣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초계 정씨들이 반란의 주모자를 배출하고서도 멸문을 당하지 않고 다시 집안을 복구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가장 큰 이유는 동계와 같은 충신의 제사가 끊어지게 놔두면 안 된다는 사대부층의 여론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영조 당대에 동계 제사가 허가된다. 이는 정희량에 대한 미움보다도 선조인 동계에 대한 존경의 염이 더 컸음을 나타낸다. 중시조인 동계의 명망이 없었더라면 이 집안은 무신란 때 끝났다고 보아야 한다. 그만큼 한국 명문가는 중시조의 명망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당 정면에 정조대왕이 동계를 위해 직접 지은 어제시 현판이 그 복구를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무신란의 여파로 20년 동안 숨어 지내야 했던 정씨 집안을 다시 일으킨 인물은 영양현감을 지낸 야옹 정기필(1800∼1860년)이다. 그는 피폐한 강동 마을을 거의 복구시켰으며, 현재 강동마을 정씨들 또한 대부분 정기필의 후손일 정도다. 그만큼 동계 다음으로 비중 있는 인물이다. 야옹 이후로도 계속해서 인물이 배출되면서 정씨들은 과거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사회 각계에서 활동하는 이 집안 후손들을 항렬별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종철(鄭鍾哲, 작고, 경남지사·서울시장 역임) 정종구(鄭鍾九, 작고, 동국대 농대학장 역임, 주정계의 권위자) 정종선(鄭鍾先, 유타대 박사, 미국 코닥사 선임연구원) 정종화(鄭鍾和, 고려대 교수) 정종진(鄭鍾珍, KBS 보도본부장) 정종욱(鄭鍾旭, 아주대 교수, 중국대사 역임), 정종흔(鄭鍾欣, 안양시 부시장 역임) 정도순(鄭度淳, 스위스대사) 정창순(鄭昌淳, 한일은행 전무) 정연순(鄭年淳, 무역진흥공사 본부장) 정용수(鄭龍秀, 검사) 정천수(鄭天秀, 연세대 교수, 벤처기업 사장) 정진수(鄭眞秀, 대웅제약 이사) 정준수(鄭俊秀, 한국통신 공보기획부장) 등이다.

    현재 동계 종택의 15대 종손은 정완수씨(鄭完秀, 60세)이고, 종부인 류성규씨(柳星奎, 55세)는 안동의 저명한 가문인 전주 류씨 류치명(柳致明) 선생의 직계 후손이다. 안동의 전주 류씨들은 독립운동을 많이 한 집안으로 유명하다.

    종손은 직장이 경북 영주에 있어서 거창 종택에서 거주하지는 못한다. 종손으로서 종가를 지키지 못한다는 부담감을 항상 가지고 있어 몇 년 안에 일이 정리되는 대로 종가로 돌아오려고 한단다.

    그러나 종가로 돌아와서 사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우선 고택의 관리가 쉽지 않다. 1500평의 대지에 70칸 건물이 있는 저택을 쓸고 닦는 일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봉제사 접빈객은 더 큰 문제다. 저명한 고택이기 때문에 지나는 방문객을 비롯하여, 이곳 저곳에서 많은 손님이 항상 찾아온다. 알고 찾아오는 손님들은 모모한 분들이기에 소홀하게 대접할 수도 없다. 종손에게는 손님접대가 가장 큰 일이다.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든다.

    고택을 유지하려면 한 달 생활비가 어느 정도 드느냐고 종손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500만원 정도는 있어야 기본 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더구나 종손은 접빈객을 하면서 고택을 관리해야 하니 직장을 갖기가 불가능하다. 보통 사람이 직장도 없이 매달 500만원의 비용을 충당하기는 쉽지 않다. 이 집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명한 종손들이 직면한 공통적인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재산이 아주 많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종손들이 집을 지키면서 살기가 어렵다는 결론이 나온다.

    요리솜씨로 유명한 14대 종부

    동계 종택은 종손인 정완수씨 부부보다 종손의 어머니이자 14대 종부인 최희씨(崔熙, 75세)가 유명하다. 14대 종손으로 거창 교육장을 지낸 정우순씨(鄭禹淳)가 5년 전 타계한 후 혼자 이 넓은 집을 지키고 있다. 안채 뜰 앞에 보랏빛으로 피어 있는 꽃잔디도 할머니가 정성스레 가꾼 것이다.

    최희 할머니는 요리솜씨로 유명해서, 요리잡지나 여성잡지에서 할머니 요리법을 자주 취재해 간다. 한국 상류층의 전통 요리법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친정은 한국 최고의 부잣집이자 12대 만석꾼을 지낸 경주 최부잣집이었으니 그 안목과 솜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최희씨는 최부잣집의 현재 종손인 최염씨의 누나이기도 한데, 필자는 동계 종택을 방문하기 전 최염씨를 통해 미리 연락을 해놓은 터라 할머니가 손수 준비한 저녁식사를 안채에서 맛보는 기회를 가졌다.

    음식 맛은 전체적으로 담백했다. 명가의 음식을 맛보기 위해 동행한 농심라면의 최경부 소스개발 전문연구원은 이 집의 간장맛에 찬사를 보낸다. 간장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거의 없으면서도 맛은 고소하고 담백하다는 평가다.

    할머니에게 그 비결을 물어보니 고택 전체의 구조가 일조량을 많이 받는 위치에 있고, 거기에다 금원산에서 내려오는 물맛이 합쳐져서 그런 것 같다는 설명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집의 물은 서출동류의 격조 있는 물이다.

    반찬 중에 수란과 육포도 빼놓을 수 없다. 수란은 종가의 주안상에 꼭 오르는 음식이라고 한다. 달걀을 끓는 물에 데친 다음 고소한 잣국물에 띄운다. 보기에도 깔끔하면서 영양가가 많을 것으로 여겨진다. 전통예절 전문가인 이연자씨가 쓴 ‘종가이야기’에도 이 집의 수란이 소개되어 있는데, 보통 먹는 계란찜이나 계란 프라이하고는 차원이 다른 음식 같았다.

    육포 또한 별미. 나는 산에 갈 때마다 비상 식량으로 육포를 챙기기 때문에 평소 이 분야에 관심이 많다. 할머니에게 들은 비법은 이렇다. 쇠고기를 물에 담가 놓아 피를 뺀 뒤 햇볕에 말린다. 이때 모기장을 쳐 파리가 붙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포를 뜰 때는 손으로 직접 떠야 맛이 있다. 물엿, 설탕, 진간장, 후추, 조미료 약간을 넣는데, 단 마늘은 넣지 않는다고 한다.

    잠은 사랑채에서 잤다. 사랑채에는 ‘모와(某窩)’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1909년 의친왕 이강(李堈;1877∼1962년) 공이 이 집 사랑채에서 약 40일간 머문 적이 있다. 이강공은 구한말 승지를 지낸 이 집 종손 정태균(鄭泰均)과 한양에서 친하게 지낸 사이였기 때문에 이 집을 찾아왔으며, 그때 남긴 친필이 ‘모리의 집’이라는 뜻의 ‘모와’다.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의친왕이 사랑채에 머물고 있을 때 거창 인근은 물론이고 남원, 무주, 진안, 장수에서까지 사람들이 와서 임금님을 보겠다고 뜰 앞과 문 밖에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몇 년 전에는 이강 공의 아들인 가수 이석씨가 종택을 방문하였다. 아버지가 머물렀던 사랑채에서 자보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온 것이다. 사랑채에 들어온 이석씨는 감회어린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아버지가 요를 깔고 자던 방바닥에 대고 몇 번이나 절을 하더란다.

    종택 사랑채의 하룻밤은 상쾌한 숙면이었다. 7층 아파트의 잠자리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걸 실감하겠다. 자고 나니 몸이 부드럽지 않은가! 아침을 먹기 전에 근처에 있는 수승대까지 산보를 나갔다. 거리는 1km. 뒷동산의 산길을 넘어가는 데 20분 정도 소요되는 적당한 거리다.

    솔잎 냄새와 새소리를 들으면서 당도한 수승대도 절경이다. 계곡 한가운데 소나무 사이로 거북 모양을 한 커다란 바위(岩龜臺)가 신비롭게 놓여 있고, 그 꼭대기에는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돌로 된 좌석이 마련되어 있다. 신선은 바로 이런 곳에서 세월을 보내는구나. 집에서 불과 20분만 걸으면 산수화 속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으니 더 이상 무얼 바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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