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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 명택 9|경남 거창 정온(鄭蘊 )종택

혁명 기상 충만한 强骨 집안

  •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혁명 기상 충만한 强骨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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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돈을 보자. 문무겸전을 하였다 하더라도 사람이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쓸 만큼 돈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돈이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물을 살펴보아야 한다. 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 할 때 임수의 상태를 본다는 말이다.

동계 고택 앞에는 내당수(內堂水)가 흐르고 있다. 내당수는 집터를 기준으로 청룡 백호의 범위 내에서 흐르는 물을 가리킨다. 청룡 백호를 벗어나 그 바깥에서 흐르는 물은 외당수(外堂水)라고 부른다.

내당수는 밖에서부터 집터를 향해 흘러 들어오는 물을 으뜸으로 치고 그 다음으로는 둥그렇게 활처럼 휘어지면서 집을 감아도는 물을 좋게 본다. 동계 고택 앞의 내당수는 활처럼 돌아나가는 물이다. 그런데 특이한 부분은 내당수 바깥 쪽에 외당수가 하나 더 있다는 것이다. 집 대문 바로 앞으로 흐르는 물(내당수)이 있고, 여기서 20m쯤 밖에 외당수가 흐른다. 한마디로 내·외당수를 겸전하고 있다. 물은 일단 재물로 보기 때문에 하나가 아닌 두 개의 내·외당수가 겹으로 집 앞을 흐르고 있다는 것은 그에 비례해 돈이 많다는 점을 의미한다.

안쪽의 내당수는 이름이 없지만, 바깥쪽의 외당수는 강천(薑川)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강천이 어느 쪽에서 흘러오는지를 보기 위해서 물길을 따라가 보았다.

금원산 쪽에서 흘러오는 조그만 실개천이 또 하나 있고, 이 실개천이 흘러오다가 강천에 합쳐지고 있다. 물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고택의 좌측 뒤에서 돌아 흐르는 동계(桐溪)라고 불리는 가느다란 냇물 줄기가 하나 더 있는데, 이 물도 내·외당수와 함께 강천에서 합류되고 있다. 강천은 다시 수승대 쪽에서 흘러오는 위천(渭川)과 합쳐지면서 거창 쪽으로 흘러간다.



그러니까 무려 5개의 물줄기가 고택 주위에서 합수(合水)되는 형국이다. 물은 집앞에서 합쳐질수록 좋다고 본다. 물줄기가 많이 모일수록 재물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인심도 한 군데로 합쳐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를 일러 만득일파(萬得一破)라고 하는데, 들어오는 쪽의 물은 만 갈래로 나누어져 오더라도 이 물이 나갈 때는 한 군데로 나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주 상서롭게 본다.

서출동류의 명당수

물이 흐르는 방향은 어떤가? 패철을 놓고 재보니 고택의 좌향은 임좌(壬坐)다. 임좌는 정남향에서 15도 정도 서쪽으로 기운 방향을 가리키는데, 사실은 거의 정남향에 가까운 방향이다.

물은 집의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왼쪽으로 흘러가므로 소위 말하는 ‘서출동류(西出東流)’에 해당한다. 서쪽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흘러가는 물을 가리키는 서출동류에 대해, 어느 사찰의 노스님은 “서출동류라면 똥물도 약이 된다”고 말할 정도다. 그만큼 선호하는 물의 흐름이다.

왜 서출동류가 좋단 말인가? 흥미롭게도 이 물의 흐름이 좋은 이유를 서양의 어느 생태학자가 나름의 논리로 밝혀놓았다. 그는 서쪽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흘러가는 물이 생태계에 가장 좋다고 주장했는데, 일조량을 가장 오랫동안 받을 수 있는 방향이라는 게 그 근거다. 해는 동쪽에서 뜨고 물은 서쪽에서 시작하면 물이 흘러가는 동안 반대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보는 시간이 길어지고, 빛을 많이 받을수록 그 물은 산소 함유량이 풍부해져서 생태계에 이롭다는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국세(局勢)를 살펴보기로 하자. 경상도 지세는 산이 많고 들판이 적기 때문에 경상도 고택들은 뼈대가 있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국세가 좁은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동계 고택은 예외다. 툭 터진 느낌을 줄 만큼 국세 또한 넓다.

울울한 산중에 사는 사람보다는 넓은 들판에 사는 사람의 마음이 넓기 마련이다. 불교의 사찰 터도 이와 마찬가지다. 앞이 시원하게 넓게 터진 암자 터는 오도(悟道) 후의 보임(保任) 터가 많다. 보임이란 분별을 떨치고 만상을 모두 수용하는 마무리 공부이기 때문에 넓게 터진 터에서 공부한다.

공부하는 데도 그에 맞는 터가 있다. 시원하게 터진 터는 고단자가 공부하는 곳이라면, 초보자는 약간 답답하다 할 정도로 주변이 꽉 짜인 터가 맞다. 그래야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 초보자가 너무 호방한 터에 있으면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마음이 밖으로 동하는 일이 발생한다. 나는 집터도 같은 문법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동계 고택을 보면서 ‘맹자’ 진심장에 나오는 ‘궁즉독선기신(窮則獨善其身)이요 통즉겸선천하(通則兼善天下)’라는 글귀가 떠오른다. 궁색할 때는 홀로 수양하는 데에 주력하고, 일이 잘 풀릴 때는 천하에 나가서 좋은 일을 한다는 뜻이다.

나는 평소에 패가 잘 안 풀릴 때를 대비해 조용히 숨어서 독선기신을 할 만한 장소를 물색하곤 했는데, 동계 고택을 보면서는 다른 생각이 올라온다. 남아로 태어나서 겸선천하를 한번 해보아야겠다는 의욕을 샘솟게 한다. 이런 정도의 집 같으면 겸선천하의 포부를 가질 만한 집터임에 틀림없다.

충절의 선비 동계 정온

지리(地理)를 이 정도 보았으니 인사(人事)를 살펴볼 차례다. 이 집안의 초계 정씨들은 일찍부터 과거급제를 한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 과거 합격자 101명의 명단이 실려 있는 ‘정사방목(丁巳榜目)’이 고택에서 소장하던 고문서에서 발견된 것이다. 고려말 우왕 3년(1377)에 치른 국자감시에서 장원급제한 정전(鄭悛)에게 당시 예부(禮部)에서 수여한 이 원본은 합격 동기생 101명의 이름을 전원 수록하고 있어 국보급 자료로 평가받는다.

아무튼 수석 합격자인 정전은 동계 정온의 6대조가 된다. 초계 정씨가 거창의 용산, 안음, 서마리 등지에서 살다가 현재 사는 동네인 강동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시기는 동계의 조부인 승지공(諱 淑; 1501∼1563년) 때부터니까, 어림잡아 500년 가까운 입향(入鄕)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 동네 정씨들이 조선시대에 명문가로 부상한 것은 동계 정온이 임금에게 목숨을 걸고 직언한 상소문(甲寅封事)에서 비롯된다.

동계가 46세 되던 해에 임금 광해군은 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귀향 보냈다가 강화부사 정항을 시켜 죽이고, 부왕인 선조의 계비이며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마저 폐출하려 하였다. 바로 이때 동계는 상소문에서 임금이 지금 패륜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고 직언한 것이다.

이미 광해군은 친형인 임해군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외조부인 연흥부원군 김제남을 역적이라고 하여 죽였으며, 선왕의 공신, 현신들도 자기 귀에 거슬리는 상소를 했다고 해서 죽이거나 귀양을 보낸 바 있었다. 그러니 자기에게 패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직언한 동계를 그냥 놔둘 리 없는 것은 자명한 일.

동계가 올린 상소문은 광해군이 막 식사를 하려고 수라상을 받았을 때 입직 승지가 그 내용을 읽어주었다고 한다. “그런 짓을 하시고 죽어서 무슨 낯으로 종묘에 들어가서 역대 선왕들을 만나시겠소?” 하는 대목에 이르자, 노기가 충천한 광해군이 수라상을 발길로 걷어차니 반찬 그릇과 장 종지가 어찌나 세게 튀었던지 옆에 있던 시녀와 승지의 머리가 터져 버릴 지경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처럼 흉측한 상소를 전달한 승정원 승지들도 책임이 있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파직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기록에 따르면 전국의 유생은 물론이고 부녀자들까지도 동계의 상소문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읽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하며, 동계가 구금된 감옥의 역졸들도 선생의 인품에 감복되고 또 여론에 압도되어 지성으로 동계를 보살폈다고 전해진다.

동계를 옹호하는 전국 선비들의 여론 때문에 동계는 죽지 않고 그 대신 제주도 대정현에 10년 동안 귀양을 가서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형을 받는다. 위리안치는 유배지의 담장 주위를 마치 새장처럼 가시덤불로 에워싸서 하늘만 빼꼼하게 보이도록 조치한 집에서 살게 하는 형벌이다. 말하자면 지독한 가택 연금생활이다.

후일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를 가서 생활한 곳이 동계가 위리안치 생활을 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추사는 대정현 사람들로부터 동계의 유배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소상하게 전해들을 수 있었고, 그가 행한 선비다운 처신에 감동받았던 것 같다. 추사는 제주 귀양이 풀린 후 일부러 거창의 동계 고택을 방문하여 당시 동계 후손인 정기필(鄭夔弼; 1800∼1860년)에게 동계 선생에 대한 제주도민의 칭송을 전해주면서 ‘충신당(忠信堂)’이라는 현판을 써주고 간 일이 있다.

동계가 충절의 선비로서 존경받았던 또 하나의 사건은 병자호란 때였다. 임진왜란과 함께 병자호란은 조선조의 2대 난리로 꼽힌다. 임진왜란이 많은 인명피해와 함께 물질적인 피해가 컸다고 한다면 병자호란은 물질적인 피해는 적었지만 정신적인 피해는 오히려 임란보다 심각했다고 볼 수 있다. 병자호란은 그때까지 우습게 알던 오랑캐에게 임금인 인조가 맨발로 엎드려 절을 해야 했던 치욕스러운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명분과 자존심을 생명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조선조 선비들에게는 남한산성에서 무릎꿇은 임금의 치욕 행위가 선비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대사건이었다. 1636년 동계는 남한산성에서 오랑캐와의 화의를 적극 반대했으나 결국 화의가 성립됨에 따라 칼로 배를 긋는 할복 자살을 기도하였다. 주욕신사(主辱臣死: 임금이 욕보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의 정신이었다.

그러나 모진 목숨이 마음대로 끊어지지 않자 국은에 보답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덕유산 자락의 모리(某里)라는 곳에 은거하면서 백이숙제처럼 죽을 때까지 미나리와 고사리를 먹고 살았다. 고사리를 캐며 살았다고 해서 그 은거지는 고사리 미(薇)자를 넣어서 ‘채미헌(採薇軒)’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진다. 요즘도 후손들이 동계 제사를 지낼 때는 제사상에 반드시 고사리와 미나리를 올려놓는다고 한다. 이 집에서 고사리와 미나리는 채소가 아니라 의리와 절개의 상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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