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호 신동아는 ‘햇볕정책의 그늘, 무너지는 대북공작’이라는 기사를 통해, 1998년 국가정보원(국정원)의 한 공작팀이 오정은(吳靜恩)·장석중(張錫重)·한성기(韓成基)씨 등이 연루된 총풍(銃風) 사건을 입증하기 위해 북한인을 불법으로 납치해 왔다고 보도했다. 서울로 납치돼 온 북한인은 국정원 안가에서 폭행과 고문이 곁들여진 조사를 받다가 탈출해, △△일보를 찾아가 한국으로 불법 납치돼온 것과 고문받은 사실을 털어놓았다고 밝혔다.
이러한 보도가 나가자 많은 독자들이 “사실이냐?”고 물어왔다. 일부 독자들은 “△△일보가 어디냐? 납치돼 온 북한인의 인적 사항을 공개할 수 없는가?”라고 묻기도 했다. 많은 것을 생각하는 독자들은 “국정원에서 항의가 없었냐?”고 물었다. 기자가 “국정원으로부터 항의는 없었다”고 대답하자, 그들은 “사실이구먼”하며 자답(自答)하기도 했다. 일부 독자들은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에서, 그것도 정보기관의 불법 납치와 고문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국가정보 기관원이 북한인을 불법으로 납치해 왔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하며 분개했다.
그러나 의문을 표시하는 독자도 적지 않았다. 어떤 독자는 신동아가 북한인의 신원과 △△일보를 공개하지 않은 것을 들어, “허위 보도가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일부 독자들은 “국정원이 총풍사건을 만들기 위해 북한인을 납치해온 증거가 있냐?”고 따지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기자로 하여금 2차 취재에 나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예상보다 많은 방해자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2차 취재는 보다 은밀히 추진해야만 했다. 기자는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방해자들과 밀고 당기는 상당한 신경전을 펼쳤다.
2차 취재를 통해 기자는 국정원이 북한인을 납치한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2차 취재에서는 지난 8월호에서 공개하지 못한 북한인의 신원이 정확히 밝혀졌다. 국정원이 불법으로 납치해온 북한인은 중국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에 머물고 있던 최인수(崔仁洙·1998년 당시 43세)다. 최인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그는 외국기업의 북한 투자를 유치하는 북한 대외경제위원회 소속 요원이었다. 최인수를 국정원의 한 공작팀이 불법 납치해온 과정에 대해서는 이 기사 중간 부분에서 밝히기로 한다.
둘째, 북한인 최인수가 국정원 안가를 탈출한 것은 1998년 7월15일 밤이거나 7월16일 새벽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최인수가 7월16일 새벽에 △△일보를 찾아온 데서 유추된다.
셋째,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일보는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A일보’다. A일보로 뛰어든 최인수를 상대로 그가 불법 납치돼온 과정과 고문받은 이야기, 그리고 안가를 탈출하게 된 계기 등을 상세히 취재한 사람은 이 신문 정치부 통일외교팀의 북한문제 전문기자인 이모 기자다. 이기자는 1998년 7월16일 오전 최인수를 세 시간여 동안 취재했고, 최인수의 사진도 찍어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A일보는 이른바 빅3 신문사 중 한 곳이다).
2차 취재를 통해 기자는 최인수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이들의 기억에 따르면 최인수는 북한의 김형직사범대학 출신으로 영어를 매우 잘하고, 북한인 치고는 매우 드문 6척 장신이다.
김형직사범대 출신
북한 대외경제위원회에 적을 둔 최인수는 인민학교(한국의 초등학교에 해당) 교사인 부인과 두 아들을 북한에 둔 채, 중국 선양(瀋陽)과 옌지(延吉)에 주로 머물며 외국기업의 북한 투자를 유치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선양과 옌지에 머물기 전에는 마카오와 러시아에도 머문 것으로 확인되었다. 최인수는 대외경제위윈회 일과는 별도로 북한에서 밀반출한 골동품을 한국의 고미술상들에게 밀수출하는 장사를 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본업을 이용해 부업을 한 것이다.
북한 골동품을 밀반출하는 과정에서 그는 국정원 요원들과도 접촉했다. 국정원의 한 공작팀은 정기적으로 최인수를 관리하며, 골동품 거래를 미끼로 최인수에게서 북한 정보를 뽑아내온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최인수는 국정원에 협조하는 ‘망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인수는 꾀가 많아 국정원 직원들을 골탕 먹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최인수를 손보고 싶어하는 국정원 직원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최인수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1998년 6월말 혹은 7월초인 것으로 보인다. 최인수는 북한에서 밀반출한 골동품 중 일부를 외상으로 한국 고미술상에게 공급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 평소 최인수와 거래해오던 국가정보원의 관계자가 “외상으로 깔아놓은 골동품 값을 받게 해줄 테니 잠깐 서울에 들어가자”고 제의했고, 최인수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정보기관 요원은 크게 외교관으로 위장해서 나가는 ‘화이트(white)’와, 상사원 등으로 위장해서 나가는 ‘블랙(black)’이 있다. 화이트는 공식적으로는 외교관이기 때문에 면책 특권이 있다. 그러나 외교관이니만큼 이들의 신분은 주재국에 정확히 통보된다. 신분이 노출되기 때문에 이들은 주재국 정보기관에 정보기관 출신이라는 것을 알린다.
주재국 정보기관은 이렇게 자진 신고한 정보요원에 대해서는 정기 혹은 부정기적으로 만나주며, 서로 필요로 하는 정보를 주고받는다. 화이트는 양국 정보기관간의 교류를 이어주는 공식 창구인 것이다.
외상값 받아준다며 유인
블랙은 주재국 국가정보기관에 통보되지 않은 첩보원이다. 이들은 주재국이 공개하기 싫어하는 첩보를 수집하는 데 주로 투입된다. 때문에 주재국의 정보기관은 다른 나라에서 파견한 블랙을 추적하는 데 많은 신경을 쓴다. 블랙은 비밀공작을 하는데 유리하다. 하지만 이들은 면책 특권을 가진 외교관 신분이 아니기 때문에, 주재국 국가정보기관에 걸려들면 간첩죄 등으로 기소된다는 부담이 있다.
선양은 조선족이 많이 살고 탈북자들도 많은 중국 동북3성의 중심지다. 때문에 한국은 중국 정부에 대해 이곳에 한국영사관의 설치를 허가해 달라고 요구했다. 북한은 선양에 영사관이 있다. 북한은 중국 외교부에 “선양에 한국영사관을 허가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다.
선양과 완전 반대되는 경우가 홍콩이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것은 1997년 7월1일인데, 홍콩이 반환되자 북한은 “홍콩에 북한영사관 설치를 허가해 달라”고 요구했다. 홍콩에는 오래 전부터 한국의 총영사관이 있다. 한국은 중국 정부에 대해 홍콩 주재 북한영사관의 설치를 허가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이러한 와중이었기 때문에 1998년 선양에는 한국영사관이 없었다. 하지만 1994년 12월부터 중국 선양에 정기편을 취항해온 대한항공은 선양에 지점을 두고 있었다. 국정원은 대한항공 선양지점을 동북 3성에 투입한 블랙 지휘 거점으로 활용했다(한국이 선양에 영사관이 아닌 영사사무소를 설치한 것은 1999년이다).
이러한 블랙 중 한 팀이 최인수와 접촉해왔고 이 팀이 최인수에게 “깔아놓은 골동품 외상값을 받으러 서울에 가자”고 제의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인인 최인수가 한국행 비행기를 탄다면 선양공항 출입국관리국 직원들이 수상히 여길 수밖에 없다.
항공사 직원은 출입국관리국 등을 거치지 않고 전용루트로 출국장에 들어갈 수 있다. 국정원 공작팀은 이 루트를 통해 요원과 최인수를 선양공항 출국장에 보냈다. 그리고 별도의 자동차를 이용해 계류장에 대기중인 대한항공기로 옮겨가 탑승했다(반면 다른 일반 승객들은 출입국관리국 등을 거쳐 출국장에 나온 후 버스를 타고 대한항공기에 탑승했다).
최인수를 태운 이 비행기는 아무일 없이 이륙해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김포공항에는 국정원이나외교통상부 요원들이 입국절차 없이 들어오는 별도의 입국 루트가 있다(자국의 첩보원과 외교관이 비밀리에 드나드는 루트는 세계 어느 나라 공항에나 다 있다).
때문에 국정원 요원들과 최인수는 선양공항과 김포공항에 각각 출국과 입국 기록을 남기지 않고 서울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최인수는 말로만 듣던 서울을 구경하고 외상값을 받아 선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꿈은 국정원 공작팀이 그를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정원 청사 부근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안가로 데려가면서부터 산산이 부서졌다(최인수를 조사한 안가가 청사 부근에 있었던 것은 여러 취재원으로부터 확인되었다). 이 안가는 2층 건물이었는데, 2층에 있는 방으로 안내된 최인수는 밤에 덮고 잘 담요 한 장과 사발면 한 그릇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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