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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의 ‘수지킴’ 피살사건 7년 추적기

女難에 빠진 윤씨, 수지킴 家의 죽음, 안기부의 인격살인

  • 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女難에 빠진 윤씨, 수지킴 家의 죽음, 안기부의 인격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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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윤씨가 서울에 도착한 날로부터 17일째 되는 1월26일, 김옥분씨가 윤대직씨와 함께 살았던 홍콩 침사추이 감파리도(道) 러푸아파트(樂福大廈) 9층 13-A호의 안방 침대 밑에서 목 졸려 숨진 시체로 발견되었다. 김여인은 얼굴에 베개 커버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목 부분이 여행용 가방을 묶는데 쓰는 끈으로 졸려 있었다. 홍콩 경찰은 사망 원인을 교살(絞殺, 목을 졸라 질식사시키는 것)로 판단했다. 김여인은 옷을 입은 채였고, 집안에는 침입한 흔적은 없었다. 1월27일자 국내 언론은 ‘납북 미수사건 윤대직씨 처 김옥분 여인 홍콩서 피살체로 발견’ ‘홍콩의 아파트 침대 밑에서’ ‘홍콩 경찰 2주 이전에 타살된 것으로 추정’ 등의 제목을 붙이고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덮혀

윤씨의 진술대로라면 김여인은 홍콩을 떠났어야 하는데 그녀는 자신의 여권과 함께 윤씨와 살던 아파트에서 피살체로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북한 공작조직(혹은 조총련 조직)은 윤씨가 김여인을 찾아 싱가포르로 출발한 후에 김여인을 죽여 아파트로 옮겨놓은 것일까? 북한 공작조직이 김여인을 죽인 것이 사실이라면, 이들이 김여인을 죽여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윤씨 납북 미수사건을 크게 보도한 언론들은 김여인 피살사건에 대해 갖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김여인이 피살된 이상 윤씨를 데려온 안기부는 한국 및 홍콩 경찰과 협조해 김여인 피살 부분에 대해 수사했어야 한다. 그러나 윤씨에 대한 제대로 된 수사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던 언론이라도 추적에 나섰어야 하는데, 언론마저도 후속 보도를 하지 않았다. 이로써 윤씨 납북 미수 및 김씨 피살사건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까맣게 잊혀지게 되었다. 이 사건이 잊혀지게 된 것은 당시의 시대상황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김여인이 피살체로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있기 11일 전인 1월16일 동아일보는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받다 사망했다는 것을 특종보도했다. 이 보도를 계기로 민주화세력과 권위주의정권은 치열한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그해 4월13일 5공 정부는 “13대 대통령 선거는 현행 헌법에 의해 간접선거로 하겠다”는 내용의 ‘4·13호헌(護憲)조치’를 발표했다. 이에 대해 민주화세력은 직선제로의 개헌(改憲)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에 들어갔다. 이 시위 도중 연세대생 이한열(李韓烈)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돼, 그 유명한 6월 시민투쟁이 전개되었다. 친(親)정부적인 언론을 제외한 절대 다수의 언론은 지면을 통해 민주화세력을 지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윤씨 납북 미수 사건과 김여인 피살사건은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쉽게 잊혀졌을 가능성이 높다.

사건이 발생한 시점으로부터 만 8년 4개월이 지난 1995년 5월 초 한 선배 언론인으로부터 요동치는 한국 현대사 속에 묻혀버린 이 사건을 취재해 보라는 귀띔을 받았다. 1987년 1월, 기자는 4학년 진급을 앞둔 대학 복학생이었다. 따라서 웬만한 사건은 기억할 수 있는데,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이 사건은 기억나지 않았다. 1987년 당시 이 기사를 썼던 홍콩 특파원들도 “그런 기사를 쓴 것 같은데,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이 사건은 까맣게 잊혀져 있었다.

미국대사관에서 “데려가라” 연락

기자는 1987년의 신문을 뒤져 납북 미수사건으로 시작됐다가 살인사건으로 변질된 후 갑자기 사라져버린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 확인했다. 구미가 당긴 기자는 취재를 결심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기자는 외무부를 찾아가 1987년 싱가포르 대사관에 근무했던 외교관부터 찾았다. 기자는 두 명의 외교관을 만났는데 그들은 이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말이다.

“윤대직은 종합상사에서 파견된 상사원(S통상 홍콩본부장)인 것처럼 보도됐는데, 그것은 엉터리다. 그는 무역회사 상사원이 아니다. 당시 우리는 한국대사관으로 온 윤대직을 여러 각도로 조사했는데, 그는 횡설수설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공무상 취득한 일이라 다 말할 수 없지만, 또 지금은 증명할 증거도 없는 상태지만, 아무튼 당시 우리는 윤씨가 김여인 피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로 인해 외무부는 싱가포르에서 윤씨 기자회견을 열라는 안기부와 크게 마찰을 빚었다. 김여인이 피살체로 발견된 후 윤씨에 대한 수사가 이뤄지지 않은 것은 안기부의 입김 때문이다.”

윤씨가 김여인 피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안기부는 왜 윤씨를 경찰에 넘겨 수사하게 하지 않았나. 질문은 이어졌지만, 이 외교관은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며 입을 닫았다. 기자는 싱가포르 대사관에 근무했던 또 다른 외교관을 만났다. 그의 말이다.

“윤씨는 싱가포르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바로 한국대사관으로 도망쳐 왔다고 주장했고 언론 또한 그렇게 보도했는데,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윤씨는 북한대사관이 아니라 미국대사관에서 왔다. 당시 우리는 미국대사관으로부터 ‘부인을 찾기 위해 북한대사관에 갔는데, 북한이 자기를 납치하려고 해 미국대사관으로 도망쳐왔다고 하는 한국인 남자가 있으니 데려가라’는 연락을 받고 미국대사관에 가서 윤씨를 데리고 왔다. 나는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윤씨를 미국대사관에서 데려온 것만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윤씨는 횡설수설 일관성 없는 진술을 했는데, 특이한 것은 그가 갖고 있던 한국 여권에 홍콩 출국 도장이 두 개 찍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윤씨는 1월4일 싱가포르에 도착했으니 그가 홍콩을 떠난 것은 1월4일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의 여권에는 1월3일 홍콩을 출국했다가 그날 입국하고, 다시 1월4일 홍콩을 출국한 도장이 찍혀 있었다. 우리는 윤씨에게 ‘1월3일 홍콩을 출국했다 다시 입국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윤씨는 ‘원래는 1월3일 싱가포르로 오기 위해 홍콩공항에서 출국수속을 밟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런데 비행기가 고장이 나 출발이 하루 늦춰졌다. 그래서 입국 도장을 찍고 다시 홍콩 시내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날 나는 항공사에서 잡아준 호텔에서 자고 다음날인 1월4일 싱가포르에 왔다’고 해명했다(그러나 서울지검 외사부는 이 호텔이 두 사람이 살던 집에서 불과 2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밝혔다).

여기서 우리들은 ‘비행기 출발이 하루 늦춰졌으면 집에 가서 자지, 왜 호텔에서 잤느냐?’라고 물었다. 윤씨는 ‘아내를 데려간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올지 몰라 호텔에서 잤다’고 대답했다. 우리가 ‘아니, 연락이 오면 집으로 오지, 아내를 데려간 사람들이 항공사에서 잡아준 호텔을 어찌 아느냐’라고 묻자, 윤씨는 ‘연락은 호텔로 오게 돼 있었다’고 우겼다. 윤씨의 진술은 이런 식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윤씨의 주장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외무부 직원들은 윤씨의 진술을 신뢰하지 않았으나, 안기부는 윤씨의 진술을 믿으려고 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윤씨의 진술을 믿으려 한 것은 남모씨를 비롯한 싱가포르에 있는 안기부 직원이 아니라, 서울에 있는 안기부 간부들이었다. 이들은 싱가포르 주재 안기부 직원들에게 윤씨의 진술이 사실일 수도 있으니 좀더 알아보라고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본부로부터 압력을 받은 안기부 직원들은 윤씨 기자회견을 준비했다. 그러자 이장춘 대사가 강력하게 제동을 걸고 나섰다.

김여인의 가족 추적

이에 대해 안기부는 이대사 앞으로 장세동(張世東) 안기부장 명의로 된 공문을 보내 기자회견을 열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대사는 총무처에 ‘안기부장이 외무부 직원(이대사)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지 유권해석을 해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면서까지 맞섰다. 때문에 윤씨의 기자회견은 싱가포르가 아닌 방콕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외무부 직원들의 기억이다(이대사는 2000년 2월10일 문화일보에 외교통상부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게재하는 글을 쓰고 사퇴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대사는 매우 꼬장꼬장한 사람이다).

기자가 이 사건을 취재할 때인 1995년 5월 이대사는 필리핀 주재 대사를 맡고 있었다. 기자가 이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찾아가겠다”고 하자, 그는 “오지 마라. 그 사건의 주역은 우리가 아니라 안기부다. 나는 그 사건의 주인공도 아닌데 무슨 할 말이 있는가” 하며 끊었다. 당시 안기부장은 장세동씨고, 해외와 북한을 담당하는 2차장은 이학봉(李鶴捧)씨였다. 기자는 이들에게도 전화를 걸었으나 이들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답을 전해왔다.

외무부 취재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기자는 취재 범위를 확대했다. 1987년에 나온 기사 중에는 윤씨의 주민등록 주소와 김여인의 본적지 주소가 실린 것이 있었다. 기자는 먼저 김여인의 가족을 찾아보기로 했다. 김여인의 본적지가 있는 군청의 호적계로 전화를 걸어 본적지 주소를 불러주고 “호주 이름을 알려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직원은 “그 본적지는 지금은 충주시로 바뀌었다”며 “호주(김여인의 부친)는 1974년에 사망했고, 호주의 아들이 한 명 있다. 아들 이름은 김만식이다”라고 알려주었다(당시만 해도 이 정도는 협조해 주었다).

‘김만식이라는 이름은 알았는데 이 사람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기자는 무작정 충주시 전화국으로 114를 돌려, 김만식이라는 이름을 대고 그 이름으로 등록된 전화번호를 전부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전화국 직원은 12명의 전화번호를 불러주었다. 이 번호를 들고 하나씩 다이얼을 눌러 “김옥분씨의 오빠 되는 분의 집입니까?” 하고 물어갔는데, 다섯번째로 다이얼을 돌렸을 때 “왜 김옥분에 대해 물어요” 하는 날카로운 외침을 들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김만식씨의 부인(李明水)이었다. 이 부인은 쌓인 한을 쏟아냈다.

김만식씨의 抱恨

“우리 시누이를 간첩으로 몰 때 충주시 경찰서에서 얼마나 우리를 못살게 굴었는가. 우리 애들은 ‘간첩의 가족’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 학교에도 가지 못했다. 남편은 매일 술만 마시고 다녔다. 그러다 시누이가 시체로 발견되었다니까 못살게 굴던 사람들이 나타나 손을 싹싹 빌고 돌아갔다. 그후로는 단 한번도 얼씬하지 않더라. 우린 너무 억울하다. 그런데 뭐 더 조사할 게 있다고 기자가 전화를 거느냐. 우린 정말 억울하다!”

기자는 부인을 달래 집주소를 알아내고, 1995년 5월24일 충주시로 내려갔다. 충주시는 작은 도시인지라, 택시기사는 주소만 갖고도 김여인의 오빠 집을 찾아주었다. 구멍가게를 겸한 집이었는데, 한눈에 궁색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집에는 부인만 있었다. 부인은 “남편은 택시 운전을 하는데 곧 올 것”이라고 했다. 삶의 고단함에 지친 부인은 기자를 경계하면서도 넋두리를 쏟아냈다.

“시누이를 만나기 전에 윤대직에게는 다른 여자한테서 낳은 딸이 있었다. 사건이 나기 전 시누이와 윤대직은 윤대직의 딸을 데리고 우리 집에 왔었다. 그때 시누이도 전 남편인 중국인 우민밍(吳敏明)과의 사이에서 낳은 ‘쏘냐’라는 딸이 있었다. 시누이는 홍콩에서 윤대직과 동거에 들어가며 쏘냐를 우리집에 맡겼다. 그런데 시누이가 죽은 사실이 알려진 후 우민밍이 이곳에 와 쏘냐를 데려갔다. 윤대직의 딸도 우리집에 잠깐 있었는데 사건이 있은 후 윤대직의 모친이 데려갔다. 우리는 시누이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시체를 거두지 못했다. 홍콩에서는 관계기관을 통해 ‘시누이 시신을 어떻게 하겠냐’고 물어왔으나, 우리는 홍콩에 갈 엄두도 낼 수 없는 처지라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다. 시누이가 쓰던 물건도 돌려받지 못했다.”

김만식씨는 저녁 무렵 집으로 들어왔다. 김씨는 깊게 한숨을 쉬더니 “그때 일은 악몽이었다. 모욕과 구타를 당한 것은 좋다. 어머니는…, 설사 어머니가 간첩이라고 하더라도 대한민국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한쪽 방에서 조사받을 때 들어보니 옆방에서 어머니를 조사하는 수사관들이 ‘이년 저년’하고 있었다. 그들도 어머니가 있을 텐데…, 간첩을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머니는 상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수사관들로부터 어머니가 욕을 듣는 것은, 내가 맞는 것보다 더한 치욕이었다. 그러다 동생이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있자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싹싹 빌고 사라졌다. 그때 우리 어머니는 대한민국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일본 손님을 맞는 호스티스

이어 김씨는 “나는 내 동생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진실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없다.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내 동생 사건의 진실과 우리 가족의 회한이 제대로 알려지기 바란다”며 동생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김옥분은 아주 고단한 삶을 살아온 여인이었다(1987년 윤씨 사건 당시 언론은 중간중간에 김여인의 당시 행적으로 짐작되는 사실을 게재했다. 2000년 2월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 팀도 이 사건을 취재했다. 여기서는 김만식씨의 이야기와 당시 신문 기사 그리고 SBS가 취재한 자료를 혼합해 김여인의 행적으로 정리한다).

김옥분은 1남5녀 집안의 둘째딸인데, 위로 언니와 오빠인 김만식씨가 있다. 1952년생인 김옥분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놀다 1972년 자신의 입이라도 덜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시내버스의 안내양이 되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술집 종업원으로 변신했다. 호스티스가 된 것이다. 얼굴이 예쁘장한 김여인은 일본인의 현지처가 되었고 서울 장충동에 살림을 차렸다. 이때부터 김여인은 가끔 고향에 내려오면 어머니 앞에 당시로서는 매우 큰돈인 10만원 혹은 20만원을 내놓고 갔다. 가족들은 김여인이 하는 일을 알았으나 돈이 고마워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일절 내색하지 않았다. 일본인의 현지처 노릇을 하며 김여인은 기초적인 일본어를 익혔다.

현지처 생활을 통해 간접적으로 외국 생활을 익힌 김옥분은 1970년대 중반 외국 진출을 모색하게 되었다. 홍콩 남자와 위장결혼하여 홍콩으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1976년 9월30일 김옥분은 홍콩인 량칭화(梁靑華)와 위장결혼하는 형식으로 홍콩 여권을 발급받아, 홍콩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량칭화와 곧 이혼하고 한국 술집인 ‘코리아가든’ ‘리무진’ ‘가림’ 등에서 호스티스 생활을 했다. 이때 김여인이 사용한 이름이 ‘수지킴’이다. 김옥분은 일본어 회화가 가능했기 때문에 한국 손님과 함께 일본 손님도 자주 맞았다고 한다.

1981년부터 김옥분은 이따금 일본에 다녀왔다. 때문에 그녀가 조총련과 접촉했다면 그 시기는 이때부터일 것이다. 그러나 김옥분과 가까이 지냈던 홍콩의 동료들은 “홍콩 국적을 갖지 못한 사람은 체류 기간을 늘이기 위해 홍콩 밖으로 나갔다 올 필요가 있었다. 술집생활에서 쌓인 스트레스도 풀 겸 주로 일본에 가서 놀다 오곤 했다”고 말하고 있다. 김여인은 홍콩 국적을 가졌으므로 체류문제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었으나 친구들과 어울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일본 여행을 자주 했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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