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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한국 대표적 지식인의 사상적 원류 ③ 보수주의자

한국 주류사회의 파수꾼을 자임하는 사람들

  •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 kimhoki@yonsei.ac.kr

한국 주류사회의 파수꾼을 자임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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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우 교수는 개인적으로는 전혀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받은 인상은 대단히 ‘젠틀(gentle)’한 교수라는 점이다. 송복 교수와 함께 대표적인 보수주의 논객인 이상우 교수에게서는 송교수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송교수가 전통적인 선비를 지향하고 있다면, 이교수는 마치 서구적인 지식인의 전형 같았다.

이교수는 1938년 아버지의 근무지였던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으나 본래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1946년 월남했다. 1957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으며, 졸업후 대학원에 진학해 국제법을 전공했다. 이교수의 독특한 이력 가운데 하나가 대학 4학년 때 일어난 4·19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인데, 당시 국회의사당 앞에서 서울대생들이 집회를 할 때 사회를 보았다고 한다. 이교수는 4·19와 5·16에 대한 세간의 역사적 평가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흔히 4·19로 싹튼 민주주의가 5·16으로 잘렸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는 견해인데, 자유당정권의 부패와 부정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난 4·19의 진정한 동기는 가난으로 좌절감이 컸던 당시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4·19와 5·16은 동일한 원인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그의 견해다.

1961년 이교수는 공군장교로 입대했는데, 당시 가장 역할을 해야 했던 그에게 아르바이트가 가능한 곳이 군장교였다. 이 아르바이트는 그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인연을 선사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조선일보’와의 인연이다. 대학 4학년 때 ‘한국일보’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이교수는 ‘조선일보’에서 야근만 하기로 하고 편집기자로 4년간 근무했다. 그때 같이 일하던 사람들로는 최병렬(한나라당 국회의원), 김학준(동아일보 사장), 김대중(조선일보 주필) 등이 있었다고 한다.

1965년 전역한 이교수는 미국무성 유학시험을 통과, 1967년 하와이대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하와이대에는 법대가 없어서 국제법과 관련하여 국제정치를 전공했는데, 1971년 럼멜 교수의 지도를 받아 중국의 대외정책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취득한 후에는 1973년까지 하와이대 국가차원연구소 부소장을 지냈다. 그런데 1973년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이교수는 갑자기 귀국해야 했다. 돌아온 그는 언론계로 돌아가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할 예정이었지만, 당시 이런저런 사정으로 일단 경희대에 자리를 잡았다가 1976년에 서강대 정치외교학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교수는 농담으로 자신을 ‘조선일보’ 최장기 휴직기자라 언급할 만큼 ‘조선일보’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보수주의 지식인을 다루면서 발견하게 된 것의 하나는 함재봉 교수를 제외하면 모두 신문기자 출신이라는 점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 하기 어려운 것 같다. 필자도 기자들을 만날 때 느끼는 바지만, 기자들은 우리 대학 선생들보다 사회문제를 보는 눈이 현실적이다. 보수주의와 현실주의가 반드시 등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수주의가 진보주의보다 현실의 조건을 중시하고 실현가능한 해결방안을 선호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 점에서 이상우 교수는 물론 송복 교수나 이동복 교수 또한 기자로서의 체험이 그들의 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국제정치학과 동북아시아 연구

이교수는 5·16과 1960년대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1970년대 유신체제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비판한다. 즉 1960년대까지의 박정희는 정당화될 수 있고 필요한 사람이었으나, 유신체제는 민주주의를 유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시대 전반에 대한 그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역사적 과제가 경제건설과 민주화였다면, 박정희정권이 정치적 억압이라는 무리수를 두었다 하더라도 경제발전의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최근 박정희정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진행된 논쟁을 지켜볼 때 이교수의 평가는 보수주의적 견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칼럼니스트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교수의 주전공은 국제정치학이다. 스스로 자신의 이론을 현실주의 패러다임으로 분류하는 이교수는 특히 동북아시아 국제정치에 대한 전문가다. 이교수가 동북아에 관심을 두는 것은 이 지역이 우리의 생존환경이라는 데 기인한다. 동북아가 냉전이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중국의 공산주의를 연구했고, 통일을 내다보고 북한의 공산주의를 연구했다. 일본에는 게이오대학 교환교수로 두 차례나 갈 만큼 관심을 두어 왔다. 지난 30여 년 동안 발표한 ‘한국의 안보환경 1’(1977), ‘한국의 안보환경 2’(1986), ‘국제관계이론’(1988), ‘함께 사는 통일’(1995), ‘북한의 현황과 남북한 관계’(1997) 등이 이교수의 대표적인 연구로 꼽힌다.

이교수는 보수주의에 대해 무엇인가 지키자는 태도, 즉 기질적인 것으로 ‘옛것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이해한다. 단지 ‘지금것’이 좋으니까 이걸 지키자는 게 보수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볼셰비키 혁명 때는 공산주의가 진보지만 페레스트로이카 때는 오히려 공산주의가 보수라 할 수 있다는 거다. 정치사상적으로는 시대를 초월하여 지킬 가치가 있다는 태도가 보수며, 버크가 주장하는 의미에서의 보수라면 이교수는 스스로 보수주의자로 볼 수 있다고 자평한다. 왜냐하면 이교수 자신은 기질적으로 옛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과거의 것에 지킬 게 없다고 보는 주장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교수의 보수주의 사상을 잘 엿볼 수 있는 것의 하나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갈림길이라 할 수 있는 자유와 평등에 대해서 이교수는 비교적 분명한 의견을 표명하는데, 자유와 평등 가운데 어느 것에 비중을 둘 것인가에서 굳이 편을 들자면 그는 자유쪽에 중점을 두고 싶다고 한다. 평등이 물론 중요한 가치지만 그것을 극대화하면 열심히 노력하고 능력이 우수한 사람들의 권리가 제한된다는 점에서 자유가 침해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두 가지 점에서 진보주의를 비판한다. 먼저 그는 우리나라에서 진보주의가 더 집단주의적 성향을 보여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교수는 전형적 집단주의 체제라 할 수 있는 북한에 대해 진보주의의 일각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데 대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다음으로 그는 진보주의가 갖는 역사에 대한 고정관념을 지적한다. 진보는 역사가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가정하는데, 이교수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저항과 자연의 추세와의 균형점이 현존 질서며, 때로는 인간의 의지가 자연추세에 밀릴 수도 있는 것이 역사의 본질이다.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보수주의 논객으로 비춰지고 있음에도 이교수는 조직 및 일상생활에서는 매우 자유주의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속한 서강대 정치학과는 국내에서 교수들의 이념적 지향이 가장 다채로운 학과로 꼽힌다. 이런 현상은 이상우 교수가 선배로서 학문적 다원주의와 능력주의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이교수는 ‘개방적 보수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개방적 보수주의에도 불구하고 이교수나 송복 교수의 보수주의에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명시적으로 또는 묵시적으로 많은 지식인들이 보수주의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사적 영역이 아니라 공공영역에서 과연 고전적 보수주의든 자유적 보수주의든 진정한 의미에서의 보수주의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결론에서 이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 함재봉·연세대 교수 (정치학) : ‘아버지 함병춘과 유교 민주주의

내가 함재봉 교수를 처음 본 것은 1992년 연세대 교정에서다. 우리는 함께 1992년에 임용된 이른바 ‘입사동기’다. 나는 그때부터 함교수를 지켜봐 왔는데, 매우 이례적인 학자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먼저 함교수가 고등학교부터 미국에서 교육받았음에도 매우 ‘한국적인’ 풍모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포스트모더니즘 정치사상을 전공한 함교수가 그 정반대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는 보수주의 정치사상가로 서서히 변모해 왔다는 점이다.

‘전통과 현대’를 만들다

함교수는 1958년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함교수는 부친 고(故) 함병춘 선생의 유학과 외교관 생활로 어린 나이부터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성장해 왔는데, 함병춘 선생이 1974년 주미대사를 지내면서 미국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공식 약력으로 보면 함교수는 1976년 카알튼대에 진학했고, 1982년부터는 펜실베이니아대 경제학과 대학원을 다녔다. 1983년 ‘아웅산 사건’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한국에 잠시 돌아왔다가 1984년부터 존스 홉킨스대 정치학과로 옮겨 공부를 계속했다. 보통 유학하면 10년을 넘지 않는 게 일반적이지만 함교수는 한두 해를 제외하고 20년 가까이 미국에서 공부했다. 그의 이런 특별한 사적 체험은 함교수의 보수주의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1992년 취득한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존재론, 인식론, 그리고 정치’로, 이 논문을 지도한 프라이스만 교수는 함교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푸코와 아렌트도 함교수의 정치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는데, 푸코에게 상대주의 인식론을, 아렌트에게는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배웠다고 회고한다.

함교수가 우리 지식사회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그의 첫 저서 ‘탈현대와 유교’(1998)와 1997년 여름에 창간한 계간 ‘전통과 현대’를 통해서다. 매우 이질적인 담론인 포스트 모던 정치사상과 전통적인 유교사상에 대한 그의 지적 편력이 ‘탈현대와 유교’에 집약되어 있다면, ‘전통과 현대’는 1990년대 중반 당시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 여전히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계간지 담론 시장에서 전통을 화두로 적지 않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함교수는 편집 주간으로 이 ‘전통과 현대’를 주도했는데, 이 잡지에는 함교수 이외에도 유석춘교수(연세대), 김병국 교수(고려대), 이승환교수(고려대) 등이 대거 참여했다.

요즈음은 다소 관심이 줄어들었으나 ‘전통과 현대’가 1990년대 후반 우리 사회에 준 충격은 결코 적지 않다. 계간지가 대개 진보주의나 자유주의를 표방하고 현대와 탈현대에 관심을 두는 것이 통례인데, ‘전통과 현대’는 이를 뒤집어 전통을 전면에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념적으로 보면 ‘전통과 현대’는 전통주의 내지 보수주의와 일맥상통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 타깃의 하나를 서구 중심주의에 맞춤으로써 소박한 국수주의와도 거리를 두었다. 바로 이 점이 ‘전통과 현대’가 정치적 이념을 뛰어넘어 서구이론의 무분별한 수입에 회의하던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모은 원천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함교수를 포함한 ‘전통과 현대’의 편집진이 대개 유학을 통해 서양의 학문과 서양사회를 풍부하게 접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얼핏 보면 아이러니인 것 같지만, 찬찬히 생각하면 그런 유학 체험이 ‘우리’와 ‘그들’ 간의 가깝지만은 않은 거리를 자각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필자는 가끔 사회과학 분야에서 우리 전통사상에 커다란 관심을 둔 사람들의 상당수가 유학 경험이 있다는 점을 흥미롭게 발견하곤 하는데, 이는 서구사회에서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학문’을 할 수밖에 없던 비서구사회 지식인의 자의식 내지 내적 코드에 그 비밀이 있다고 생각한다.

함교수가 서양적인 것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두고 한국적인 것을 탐구한 데는 부친의 영향도 컸다. 함병춘 선생으로부터 그는 ‘우리의 것’에 대한 자부심을 배웠으며 이는 자신의 학문에 적지 않은 그늘을 드리웠다고 회고한다. 아버지와 함께 학문적 토론을 해본 적은 없지만 아버지의 삶 자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목사이셨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아버지가 보여준 삶이 자상하면서도 조용한 권위였다는 것이다. 기독교도였으면서도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이고 유교적인 것을 옹호했으며, 미국을 누구보다 잘 알고 지인(知人)들이 많았음에도 미국에 비판적이었던 아버지야말로 함교수의 진정한 스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함교수는 젊은 사회과학자들 중에서는 드물게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라고 규정한다. 그의 보수주의 사상의 출발점은 ‘철학적 보수주의’다. 후기 비트겐슈타인, 가다머, 오크셧으로 대표되는 철학적 보수주의는 인간의 불안정성에 주목하여, 문제를 전통에 의거한 대화로 풀려는 입장이다. 전통을 중시한다는 것을 괄호로 묶는다면 이런 사상은 푸코와 데리다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더니즘 정치사상의 상대주의 인식론과 곧바로 접목되며, 이 두 흐름은 함교수 정치사상의 풍부한 원천이라 할 수 있다.

함교수 정치사상의 특징은 이런 철학적 보수주의와 유교 사상을 곧바로 연결시킨다. 그에 따르면, 가족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공동체주의, 우주의 질서와 연결된 도덕의 강조, 뿌리깊은 전통주의, 배움을 바탕으로 정치를 하는 엘리트들을 강조하는 유교사상은 서구 보수주의와 공유하는 요소들이다.

철학적 보수주의와 유교사상

유교적 덕목을 강조한다고 해서 물론 함교수가 전통적인 사회로 돌아가고자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현대사회의 문제해결에 유교사상의 긍정적인 요소들을 적극 끌어들여보자는 데 있다. 이와 연관해 그가 발표한 ‘유교, 자본주의, 민주주의’(2000)는 유교사상을 자본주의 및 민주주의와의 관련 속에서 재해석하려는 야심찬 책이다. 그의 목적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유교화하는 동시에 유교를 보편화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걸맞은 유교 자본주의와 유교 민주주의 모델을 만드는 데 있다. 이는 서구적 기술과 아시아적 가치를 새롭게 접목시키려는 21세기식 ‘동도서기(東道西器)론’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함교수의 이런 주장은 적어도 학계 안에서는 어느 정도의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보주의와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볼 때 함교수의 주장은 그것의 현대화를 적극 강조했음에도 유교사상이 갖는 전근대주의적 성격을 여전히 과소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본다면 유교사상은 가부장주의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이며,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남녀불평등의 주요 원인은 다름 아닌 이 유교적 가부장주의에서 연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과연 동도서기와 서도서기(西道西器) 가운데 어떤 것이 우리 사회에 더 바람직한 모델이 될 수 있는가. 서구의 기술과 동양의 정신은 진정 양립불가능한 것인가. 19세기말 서세동점(西勢東漸)이 본격화한 후 이 문제에 대해 속시원한 대답을 제시한 사회과학자는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문제는 최근 ‘아시아적 가치’를 둘러싼 논쟁으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숙명과도 같은 이 문제를 새롭게 환기시키고 있다는 점만으로 함교수의 정치사상은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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