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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의 우리 문화 바로보기 30 · 마지막회

王建의 후삼국통일 배후, 禪僧세력

  • 최완수 <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

王建의 후삼국통일 배후, 禪僧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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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建의 후삼국통일 배후, 禪僧세력

도판 5

王建의 후삼국통일 배후, 禪僧세력

도판 6

이때 왕건은 지금 서울 부근에 있는 은강(銀江)선원에 머물고 있던 징효(澄曉)대사 절중(折中, 826∼900년)을 찾아 뵙고 사제의 인연을 맺은 듯하다. 징효대사는 사자산문(獅子山門)의 초조(初祖)이자 쌍봉산문(雙峯山門)의 제2대 조사로서, 능주 쌍봉사 철감(澈鑒)선사 도윤(道允, 798∼868년)의 제자다.

그는 헌강왕 8년(882)에 영월 사자산에 흥녕(興寧)선원을 개설하여 사자산문을 설립하였다. 그런데 진성여왕 5년(891)에 궁예가 죽주(竹州; 죽산)의 도적 기훤(箕萱)의 부하가 되어 원주와 강릉 일대를 장악해 나가면서 각처를 분탕질치니 흥녕선원도 병란을 만나 불타 없어진다.

징효대사는 병란을 피해 상주로 내려갔으나 그곳 역시 반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으므로 스승의 부도가 있는 무주 쌍봉사로 다시 피란해 내려간다. 이미 66세의 고령이 된 징효대사는 이곳에 이르러 일생을 마감하려고 무주 관내의 분령군(芬嶺郡; 지금의 樂安) 동림사(桐林寺)를 무주의 관리인 김사윤(金思尹)으로부터 기증받아 종언지소(終焉之所; 생을 끝마칠 장소)로 삼고 머무른다.

그러나 견훤이 전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이곳 무주를 공략해 오니 다시 무주 일대가 전쟁터로 변한다. 이에 할 수 없이 고향인 한산주(漢山州) 휴암(岩; 황해도 봉산) 근처로 북상하기 위해 진성여왕 9년(895)에 배를 얻어 타고 다시 피란길에 오른다. 그런데 그 배가 풍랑을 만나 중국에까지 떠밀렸다가 돌아오는 고초를 겪으며 겨우 당은포(唐恩浦; 지금의 경기도 남양)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징효대사는 물길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가다 은강선원에 머무른다.

진성여왕이 이 소식을 듣고 황양현(荒壤縣; 지금의 풍양) 부수(副守)인 장연열(張連說)을 통해 차와 편지를 보내면서 국사(國師)로 초빙한다. 아마 은강선원은 풍양현 관내인 지금의 서울 부근 한강변에 있었던 모양이다. 징효대사는 길이 막혔다는 핑계로 진성여왕의 초빙을 거절하고 세상이 너무 혼탁하여 구제할 방도가 없음을 한탄하였다 한다.



그즈음(898년)에 왕건이 정기대감이 되어 강화와 김포, 공암 등을 격파하며 한강을 거슬러 올라 양주와 견주를 정벌하고 있었으니, 징효대사의 영향력이 왕건의 한강 진출을 신속하게 하였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미 징효대사는 견훤의 난을 피해 무주로부터 한산주로 피난해 오던 때(895년)부터 왕건 선단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고 보아야 하니, 이때 13세 된 왕건이 징효대사가 타고 있던 선단을 지휘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중국으로 표류하는 고난을 함께 했다면 그 시기에 이미 징효대사와 왕건이 사제관계를 맺었을 수 있다. 왕건이 직접 지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왕건 집안의 선단이었다면 왕건은 선단 지휘자를 통해 징효대사의 법력과 선종 내에서의 위상을 전해 듣고 은강선원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사제관계를 맺었을 수도 있다.

좀더 적극적인 추리를 해본다면 은강선원에 머물게 하는 것이 왕건 집안의 후원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징효대사는 한강수계를 장악하고 있는 호족세력을 왕건에게 귀부하도록 설득하는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이곳 은강선원으로 이주해 와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남한강 상류인 사자산에 흥녕선원을 건설하여 사자산문을 개창함으로써 한강수계의 민심을 장악해온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징효대사는 왕건이 한강수계를 완전 장악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효공왕 4년(900) 3월9일에 피란처인 은강선원에서 75세로 열반에 든다. 화장을 하니 사리가 1000알이나 나왔다고 하는데, 황양현 제치사(制置使) 김견환(金堅奐)이 보니 그날 밤 화장한 석단 위로 하늘에서 자주색(紫朱色) 기운이 뻗쳐 내리면서 천중(天衆; 하늘 사람들)이 내려와 그 사리를 주어 가지고 간다.

김견환은 그들이 가기를 기다렸다가 선원에 와서 대중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함께 다비한 곳에 가서 남은 사리 100여 개를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피란처이고 흥녕선원은 병화로 불타 없어져서 사리탑을 세울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에 열반처(終焉之所)로 기증받은 낙안 동림사로 사리를 옮겨가서 그곳에 사리탑을 세울 계획을 세운다.

청해진 세력과의 합작품, 나주 정벌

王建의 후삼국통일 배후, 禪僧세력

도판 7

王建의 후삼국통일 배후, 禪僧세력

도판 8

그래서 왕건은 이해(900년) 10월에 서둘러 국원(國原; 충주), 청주(淸州), 괴양(槐壤; 괴산) 등 남한강수계를 평정한 다음 낙안 일대를 손에 넣기 위해 효공왕 7년(903) 3월에는 나주(羅州) 정벌을 단행하는 듯하다. 효공왕 4년(900)에 견훤이 완산주(完山州; 전주)를 도읍으로 하여 후백제 건국을 선포하고 다음해인 효공왕 5년(901) 8월에 금성(錦城; 나주) 남쪽 연변(沿邊)지역을 약탈해 청해진 세력에 도전하였기 때문이다.

이곳은 청해진 세력이 아직 그 기반을 탄탄하게 유지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왕건은 청해진 세력과 밀착되어 있는 쌍봉산문(사자산문)과 가지산문 등 선종세력의 절대적인 선무공작(宣撫工作; 선전하여 점령지나 지방 민심을 돌려놓는 활동)과 청해진 세력의 내응에 힘입어 무난히 수군을 거느리고 내려가 금성군(錦城郡) 등 10여 군을 차지하고 금성을 나주로 고쳐 청해진 세력의 새로운 근거지로 삼는다.

이에 징효대사의 제자들은 효공왕 9년(906), 즉 천우(天祐) 3년에 왕건이 장악하고 있는 분령군(芬嶺郡; 낙안) 동림사(桐林寺)로 스승의 사리를 모시고 가서 사리탑을 높게 세워 봉안하고 전법 제자인 여종(如宗), 홍가(弘可), 이정(理靖), 지공(智空) 등 1000여 명의 제자 명의로 탑비를 세워주도록 신라 조정에 표문(表文)을 올려 청원한다.

그러자 효공왕은 징효대사(澄曉大師)라는 시호와 보인지탑(寶印之塔)이라는 탑 이름을 내려주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전수예부시랑(前守禮部侍郞) 박인범(朴仁範)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한다. 그러나 박인범은 이 명령을 받들지 못하고 죽는다. 그래서 징효대사탑비는 동림사에 세워지지 못하는데 이후 후삼국의 쟁패가 치열하여 다시 비문을 지을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러다가 경애왕 원년(924)에 일시 소강상태를 맞이해 후삼국 전체에서 선사들의 사리탑과 탑비를 세우는 일이 일시에 전개되자, 징효대사의 탑비문도 당시 신라 조정에서 문한(文翰)을 담당하고 있던 최인연(崔仁, 878∼944년)에게 다시 짓도록 왕명을 내린다. 그래서 경애왕 원년(924) 갑신 4월15일에 비문이 완성되었으나 곧 전황이 악화되어 비석은 세우지 못하고 만다.

그러나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징효대사의 공덕을 잊지 않고 사자산 흥녕선원을 다시 세운 다음 최인연이 지어놓고 아직 비석에 새기지 못한 비문을 그곳에 세우게 한다. 물론 그곳에 징효대사의 사리탑도 함께 세우게 하였다.

그래서 고려 혜종 원년(944) 6월1일에 징효대사의 사리탑과 사리탑비가 세워지게 되니 (도판 2)와 보물 제612호인 (도판 3)가 그것이다.

는 기본 결구가 (제27회 도판 8)을 계승한 것으로, 기단의 상대와 하대가 모두 연꽃으로 표현되어 있고, 중대석은 8각기둥 형태다. 다른 점은 의 지대석에 안상 표현이 있고, 하대 복련판(覆蓮瓣; 뒤집어 놓은 연꽃잎) 끝에 고사리 머리같은 귀꽃 장식이 첨가되었다는 것 정도다.

8각 중대석에서 안상 표현 대신 우주(隅柱; 모서리 기둥)의 표현이 있다거나 상대 앙련판(仰蓮瓣; 위로 핀 연꽃잎)이 2중으로 표현된 것도 변화한 모습인데 기본 결구에서는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탑신석에 이르면 8각 구름무늬 받침석이 사라지고 8각 당탑을 상징하는 8모 기둥 형태가 북통 모양으로 다듬어져서 8각당(八角堂)의 본래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건축적인 의미가 소멸하면서 공예화한 것이다.

그래도 앞·뒷면에 문비(門扉)의 흔적은 남겨놓고 있다. 8각지붕을 상징하는 옥개석의 8각지붕 마루 끝에 귀꽃이 솟아있는 것과 기왓골 표현이나 연목(椽木) 표현이 생략된 옥개석 양식은 서로 동일하다. 다만 상륜부에 가서는 보개(寶蓋)를 받치는 찰주(刹柱)형 기둥이 높이 솟아나서 의 구름무늬 보개받침과 크게 달라져 있다.

8각 당집을 상징하는 8각기둥 형태의 탑신석이 북통형으로 변화된 것은 부도양식 진전과정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태조 23년(940)에 건립되는 (도판 4)에서 운룡문(雲龍文) 중대석의 북통 모양과 8각 당집을 상징하는 8각 탑신석을 서로 자리바꿈하는 것으로부터 발달된 의장(意匠)의 변화일 듯하다.

어떻든 이로부터 고려의 부도양식은 건축적인 결구로부터 공예적인 결구로 변화하는 획기적인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역시 기본형태는 (제27회 도판 10)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귀부에서 뿔 없는 용머리 형태의 거북머리를 한 것이나 이수(首)에서 보주(寶珠)를 정상(頂上)에 높이 올려놓은 것이 서로 같다. 다만 에서는 용 두 마리가 전액판 좌우에서 기세 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에서는 전액판 위에서 기세 다툼을 벌여 정상의 보주를 놓고 다투는 듯한 모습이다. 그러자니 자연 조각기법이 입체성을 띄게 되어 훨씬 역동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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