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월호

정동영 “세대교체, 확실하게 건너뛰자”

  •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입력2004-11-01 17:3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2001년 12월12일 저녁 서울 여의도 63빌딩 2층 국제회의장에서는 민주당 정동영 상임고문의 후원회가 열렸다. 행사장 벽면에 걸려 있는 현수막에서 정고문의 향후 정치행보를 짐작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동영과 함께 정치혁명을. 정치가 젊어져야 나라가 젊어진다. 정치쇄신 국가쇄신만이 살 길입니다. 꽉 막혀 있는 정치의 물꼬를 터야 합니다. 40대 정치의 힘으로 확 바꾸겠습니다. 비전이 가슴을 때려야 국가의 내일이 열립니다.”

    이날 정고문은 경선출마를 공식 선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고문의 연설 내용은 사실상 대선레이스 참여를 예고하고 있었다. 정고문은 “아래로부터의 정치혁명으로 나라의 미래를 열어가겠다”고 말한 뒤 “정치일정이 공개되면 가슴에 품고 있는 꿈을 펼쳐보이겠다”고 밝혔다. 정고문은 결국 ‘선 쇄신, 후 거취’라는 소신을 강조하되, 출마선언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시기를 조율하고 있는 셈이다.

    후원회에서 한가지 눈길을 끈 대목은 노무현 상임고문의 축사였다. 노고문과 정고문은 개혁정치와 세대교체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한배를 타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말하는 세대교체의 의미는 다소 차이가 있다. 노고문은 이날 “지금이 김근태·노무현의 시대인 줄 알았는데 까딱하면 정동영의 시대로 넘어갈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노고문이 우려한 것처럼 정고문은 ‘확실한’ 세대교체를 주장한다. 차기 대선은 3김정치가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리더십이 탄생하는 무대라는 게 정고문의 생각이다. 정고문은 “김대중 대통령이 퇴임해도 3김정치는 연장될 가능성이 높다. 3김정치를 흉내내는 낡은 정치인에게 나라의 앞날을 맡길 수는 없다. 진정한 정치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확실하게 건너뛰는’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깨끗하고 유능한 정치

    역사학을 전공한 정고문은 한국현대사를 변증법적 발전과정으로 파악한다. “근대화 세력은 압축성장에 성공했지만 권위주의라는 약점을 남겼고, 민주화 세력은 집권에 성공했지만 1인 보스정치와 지역기반 정치라는 폐해를 낳았다. 그것은 결국 측근정치와 인치(人治)로 이어져 현실정치에서 부패를 양산하고 있다”는 게 정고문의 진단이다. 정고문은 바로 이 지점에서 “국민들은 깨끗하고 유능한 인물과 정부와 시대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구시대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한국사회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고문은 차기 대통령이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 ‘지적 유연성’과 ‘현장 리더십’ ‘진정한 애국심’ 등을 꼽았다. 시대의 변화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지적 유연성, 국가의 에너지를 결집시키는 현장 리더십, 국민의 기본적 의무에 당당할 수 있는 진정한 애국심을 갖춘 사람이 21세기 한국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정고문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리더십을 ‘영감님 리더십’으로 규정한 뒤 “1997년 대선 때의 이회창 병역파문은 애국심에 기초한 국민들의 심판이었다”고 주장했다.

    정고문은 민주당 특대위가 논의하고 있는 정치개혁 플랜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좀더 적극적인 대안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상향식 공천과 국민경선제는 한국정치를 뿌리부터 바꿀 수 있는 혁명적 발상이지만, 제한된 범위에서 경선을 치를 경우 한나라당과 확실하게 차별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고문은 “선거법을 고쳐서라도 전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예비선거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개헌론에 대해서도 정고문은 적극적이다. 정치인은 당위론적 관점에서 미래를 걱정해야 한다는 것. 2006년부터 3년간 계속해서 선거를 치르는 것은 국력낭비라는 게 정고문의 견해다. 또한 정고문은 5년단임으로 돼 있는 대통령 임기도 국가의 장기적 청사진을 만드는 데 부적절하다고 본다. 그래서 정고문은 “여야 중진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개헌 캠페인을 벌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집권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정고문은 ‘자신감 회복’ ‘정치 선진화’ ‘품위 있는 공동체’ 등을 거론했다.

    “한국은 30년 전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20세기 5대 첨단산업 중 4개 부문(자동차·철강·조선·반도체)에서 세계 10위권에 오른 국가인데도 우리 국민은 비관적이고 냉소적이에요. 그것을 바꾸는 첫걸음은 정치가 젊어지는 거라고 봐요. 구(舊)질서, 구가치관, 아날로그 개념의 껍질을 깨야만 우리 국민이 가지고 있는 무서운 잠재력이 폭발할 수 있습니다.”

    차기 대선고지의 최대 걸림돌은 무엇인가. 현실정치의 역학관계에서 보면 ‘비주류’의 길을 걷고 있다는 점이 그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정고문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장애물을 먼저 생각하고 싶지 않다. 1년 동안 쇄신을 요구하면서 나름대로 ‘정치혁명’에 기여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정고문은 문화방송 기자 시절 북한부에 근무한 적이 있다. 때문에 북한을 바라보는 눈이 정확하고 날카롭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고문은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의 북한과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

    “김위원장도 나름의 고민이 있겠지만 좀더 부드럽게 나와야죠. 기회는 언제나 오는 게 아니거든요. 개인적으로 북한이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시장을 개방해서 주민들이 굶지 않고 군사적으로도 위협이 사라지길 바라고 있어요. 김위원장이 올해 초 ‘신사고’를 얘기했을 때 기대를 걸었던 게 사실이지만 실제 행동은 구시대 방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리더의 자질 때문인지, 체제 자체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어요.

    누구든 변하지 않으면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없습니다. 북한이 변한다면 국제사회는 당근을 줄 용의를 갖고 있습니다. 만일 북한이 당근이 아니라 채찍을 받는다면 그것은 엄청난 불행이죠. 햇볕정책은 북한의 급격한 붕괴를 막는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경제문제는 차기 대선의 최대 이슈로 꼽힌다. 정고문에게 성장론과 분배론의 관점에서 한국경제가 나아갈 방향을 물었다.

    “대립적으로 볼 문제는 아닙니다. 효율이 있어야 형평이 가능하고, 형평이 있어야 효율이 생기죠. 지금까지는 생산한 파이를 누가 더 많이 가져가냐를 논의했지만, 이제 논점을 옮겨야 합니다. 저는 노사관계를 잘 정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안정적인 노사문화의 틀을 다지는 것이 21세기의 최대 과제입니다. 원칙적으로 노사문제는 양자의 합의에 맡기고, 국가는 그 결과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겠죠.

    일본에서는 노사가 싸워도 기업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한계선을 둔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회사가 망할 때까지 싸우잖아요. 저는 이것도 구질서의 틀이라고 생각해요. 일본식 ‘기업자본주의’라고 할까, 사원지주제 같은 것도 적극적으로 도입해서 노사가 상생하는 ‘선(善)순환 사이클’을 정착시켜야죠.”

    정고문은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을 어떻게 진단하고 있을까.

    “학벌이 신분을 결정하는 사회풍조를 바꾸는 게 핵심이에요. 국가발전을 위해 우수인재를 교육하는 시스템은 필요하지만, 재산이 없다는 이유로 질좋은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국민적 반발을 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 사회는 평등주의를 지향하는 의식이 아주 강하거든요. 결국 한편으로 우수학생을 길러내고, 다른 한편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지원해야겠죠. 두 가지가 이상적으로 결합돼야 한다고 봅니다.

    학부모들도 교육정책을 세우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동안 교육당국은 교사나 학교를 파트너로 해서 정책을 만들었는데, 이젠 교육소비자인 학부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봐요. 그리고 중국이 내건 ‘과교흥국(科敎興國, 과학과 교육으로 나라를 부흥시킨다)’ 정신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고문은 자신의 장점을 ‘청년정신’이라고 말했다.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던 날 태어난 정고문은 1970년대를 운동권 학생으로, 1980년대를 방송기자로, 1990년대를 개혁정치인으로 보냈다. 정고문은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50이 되지만, 마음은 아직도 30대 청춘이라고 말한다. 반면 정치인으로서 자신은 다소 낭만적이라고 말했다. “60이 되기 전에 내 의지로 정치를 그만두고 싶다”는 말이나, “뒷모습이 아름다운 정치인을 꿈꾼다”는 그의 소망에서도 정치를 다소 감상적으로 대하는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정고문은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줄 때 ‘꼭 꿈을 이루십시오’라고 쓴다. 그만큼 그는 꿈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12월12일 후원회에서도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하늘을 날고 싶다는 욕망이 비행기를 만들었습니다. 달에 가고 싶다는 꿈이 인간을 달에 착륙시켰습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서 꿈을 하나씩 새깁시다. 가슴 깊이 묻어둔 꿈이 언젠가는 현실로 나타날 것입니다.”

    정고문이 존경하는 인물은 정조대왕과 케네디 대통령이다. 두 사람은 모두 혼란스런 시대상황에서 냉철한 판단력과 지적 유연성을 발휘한 사람들이다. 인상 깊게 읽은 책은 법정 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이며, 즐겨 부르는 노래는 조영남의 ‘그대 그리고 나’와 양희은의 ‘아침이슬’이다. 또한 기억에 남는 영화는 ‘D-13’과 ‘박하사탕’이며, 좋아하는 배우는 ‘김혜수’다. 종교는 가톨릭, 취미는 등산과 골프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