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참사랑아파트 관리사무실로 나갔다. 돈 때문에 나가는 거니까 봉급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다. IMF 전에는 80만원쯤 되었는데 요즘은 내려서 보너스 없이 월 60만원에서 70만원 사이가 될 거라는, 주선해준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1995년 명예퇴직으로 그만둔 회사에서의 연봉이 4000만원 선이었던 것과 비교해보니 만감이 엉켰다. 마른명태라는 별명을 달아주면 좋을 듯한 관리소장이 임명장과 경비원 관리수칙과 자판기에서 손수 빼온 커피를 내 앞에다 놓고 말했다.
“전임자가 왜 나갔는지는 이미 들어서 잘 알 줄 압니다. 경비원 임무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도난방지입니다. 그런데 그 위에 또 하나가 있습니다. 입주민의 사생활 보호가 그겁니다. 입이 무거워야 한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 근무하는 경비원들의 평균 연령이 예순둘입니다. 쉰일곱에서 예순여섯 된 분까지 있는데 우리 강춘달씨는, 말씀 드리기가 뭣합니다만 어쨌거나 젊다고 봐야겠지요. 그렇더라도 가정에서는 모두 어른 대접을 받을 분들 아닙니까. 여기에 근무하다보면 어른 대접 못 받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안 할 말로 주민들 가운데는 몸종 부리듯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참는 데까지는 참고 견뎌야지요. 불만을 가져봐야 절이 미우면 중이 나가야지 절간을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거든요. 주민들 주머니에서 우리 월급이 나오는 거니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런저런 할 얘기가 많습니다만 여기서 다 할 수는 없는 거고 근무해가면서 터득해 나가도록 하고 이만 끝내겠습니다. 한 번 더 말씀드리지만 우리하고 같이 근무하게 된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말을 마친 관리소장은 또 한 번 손을 내밀었다. 나는 관리소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강 훑어본 관리수칙을 다시 읽어보았다. 눈은 관리수칙에 박혀 있으나 머리는 어제 통보를 해준 사람이 들려준, 전임자가 그만두게 된 경위를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불륜 현장 급습
어떤 중년남자가 부인 몰래 여자를 두어 이곳에다 아파트를 얻어주고 은밀히 드나들었다. 경비원이 그 사정을 모를 턱이 없다. 남자가 그곳을 찾을 때는 가끔 경비원한테 담뱃값을 쥐어주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하루는 부인이 경비실을 찾아왔다. 부인은 또 부인대로 경비원한테 봉투를 하나 건네주며 자기 남편이 이곳에 나타나면 연락해 달라고는 연락처까지 적어주고 갔다. 불륜의 현장을 급습해서 일을 처리하겠다는 부인 쪽의 전략이었다.
며칠 뒤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그 사실을 전했고, 이내 부인이 자기 패거리를 데리고 등장했다. 아파트 광장에서는 돈을 주고도 구경하기 힘든 큰 굿판이 벌어지고 말았다. 경비원은 그것으로 모두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다음날 그에게 날아온 건 직권면직이었다.
그 양반이 나가면서 남겼다는 말이 들을 만했다.
“그럼, 한 가정이 박살이 나고 있는데도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옳다 그 말이로구먼. 나가라니까 나가긴 한다마는 나는 내가 잘못해서 나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들만 아시우.”
아마 이 말이 아파트 경비원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유명인사한테서 나온 말이라면 명언록에 오를지도 모르리라. 명색 입사절차를 마치고 나오는 내 어깨 위에다 소장이 짐 한 덩이를 더 얹었다.
“그리고, 바로 집으로 가지 마시고 강씨가 근무하게 될 103동 1문으로 가 보세요. 같이 짝꿍이 될 양반이 구씨인데 지금 그분이 근무하고 있으니까 같이 수인사도 나누면서 이것저것 물어보십쇼. 그러면 일 하기가 훨씬 수월할 겁니다.”
나는 신고 겸 한나절을 구씨와 같이 보냈다. 당장 내일부터 24시간 맞교대로 근무에 들어가야 하니까 아는 데까지 알아두어야 근무하는 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구씨는 들은 말도 있지만, 얼굴에도 사람 좋다는 말이 쓰여있을 정도로 편안한 인상을 주는 형님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먼저 아파트단지의 구조와 종사자들의 체계부터 설명했다.
참사랑아파트는 모두 5동 840세대로 26평에서 56평까지 다양하게 있다. 부속 청사로는 노인정과 유아원이 같이 들어있는 관리사무실이 있고, 3층짜리 상가가 별동으로 있는데 1, 2층은 상가이고 3층엔 독서실과 탁구장이 들어있다. 차량보급이 적을 때 지은 건물이라 주차공간이 넉넉지 않았다. 보유차량의 반밖에 수용하지 못하는데, 이 아파트가 안고 있는 문제 가운데 가장 큰 것이 그것이라고 했다.
관리실 소속 인원은 모두 62명으로 사무실에 일근으로 상주하는 관리소장과 여자 사무원이 하나 있고, 나머지는 모두 경비원인데 갑, 을 반으로 나눠 24시간 근무하고 있으며, 관리소장은 아파트 운영위원회가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서 뽑는다고 했다.
경비원 가운데 각 반 한 사람씩 반장이 있고, 반장은 정문 경비를 봄과 동시에 소속 반원들이 탈없이 정상으로 근무하고 있는가를 수시로 순찰, 점검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각 반별로 전기기술자와 청소담당 아주머니가 한 사람씩 들어있는데 이들도 같은 경비원 직렬로 대우하고 있다고 한다.
관리소장 위로는 운영위원장이 있다. 골목(이곳에서는 계단을 골목이라 부른다. 같은 계단을 쓰는 19층의 양쪽 38세대가 한 골목 사람들이다) 단위로 구성된 반상회에서 골목대표를 뽑고, 그 대표들이 호선해서 운영위원장을 선출하는데, 임기는 골목대표와 같이 2년씩이고, 위원장 한 사람한테만 약간의 판공비가 나갈 뿐 나머지는 모두 무보수 명예직이라 한다.
근무요령에 대해서는 상황에 따라 옆문 사람한테 물어서 대처하면 된다고 했으며, 자기는 딱 두 가지만 말하겠다며 각 호실 사람들을 빨리 아는 것과 어른들보다는 아이들한테 배로 신경을 써달라고 당부했다.
이야기 끝에 구씨는 이런 말을 하나 더 보탰다.
“여기에 근무하는 분들이 모두 자기가 경비원으로 있다는 걸 주변에서 알까봐 쉬쉬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그게 극복하기가 힘드나 봅니다. 요즘 근무 교대시간이 오전 6시인데, 이게 여름이면 괜찮지만 겨울철엔 캄캄할 때란 말예요, 그래서 내가 너무 이르지 않냐며 좀 늦추자고 한번 제의했더니 모두 펄쩍 뛰는 겁니다. 자가용을 타고 다녀도 뭣할 판에 경비복 입고 다니는 꼬락서니를 남한테 보여주어 좋을 게 뭐가 있냐는 게 그 이유더구만요. 참고하세요.”
첫날부터 구씨의 이야기는 내게 많은 것을 일깨워주었다. 새로 인생공부를 하는 기분이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5시가 되는 것을 보고 집을 나왔다. 날이 좀 길어졌다고는 하지만 6시라면 여전히 이른 시각이다. 시내버스로 일곱 정거장을 지나 내려 10분을 더 걸어 왔는데도 어둠이 다 빠지지 않았다.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는 구씨는 옷을 갈아입고 퇴근준비를 하고 있었다.
“강주사요.”
재탕으로 나오는 연속극을 볼륨을 죽여놓은 채 그림만 보고있는데 골목대표 박사장이 노크도 없이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반사적으로 나는 벌떡 일어났다. 나를 감시·감독하는 사람들에 대한, 어느 틈에 몸에 밴 예의의 표현이 그렇게 나타난 것이다. 몇 개월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 박사장이 무슨 사장인지 잘 모른다. 남이 사장이라고 부르니까 그렇게 알고 있을 뿐이다.
“경비 무서워 살겠나”
우리가 주민을 부르는 호칭은 나이와 관계없이 남자는 ‘사장님’ 아니면 ‘선생님’이고, 여자는 대개 ‘사모님’이다.
눈으로 무슨 일이냔 듯 물으며 뒷말을 기다렸다. 박사장은 휴대전화 든 손으로 나를 밖으로 불러냈다. 그리고는 앞의 주차장을 가리켰다. 다른 말이 없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 거기 벌어져 있었다.
“차선위반도 주차위반입니다. 저렇게 차를 차선 한가운데다 박아놓으면 두 대 댈 걸 한 대밖에 못 대잖아요.”
“예.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나는 옹색한 웃음을 보이며 굽실거렸다. 박사장은 종종 그렇게, 조용할 때는 한번쯤 그냥 덮어두어도 괜찮을 일을 찍어서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었는데, 내가 보기엔 기강을 확립하겠다기보다 자기 존재를 확인시키려는 듯한 인상을 많이 주었다.
조금 전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이미 나는 그것을 보았었다. 502호의 교수부인 소행이다. 빨간색 스포츠카는 이 단지 안에서 그 집 하나뿐이다. 남편은 지방의 어느 전문대학에 나가고 있다는데 일주일에 한번쯤 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운전솜씨가 서툴러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교수부인은 그런 짓을 잊을 만하면 한번씩 하곤 했다. 며칠 전에도 부인은 내가 앞에서 딱 보고 있는데도 차선 한가운데 차를 세우려 해서, 차에서 내리려는 사람을 막고는 주차선 따라 바로 주차해주면 좋겠다고, 좋은 말로 주의를 환기시킨 일이 있다. 그만 여자가 발끈했는데 뜻밖의 반응이었다.
“아저씨도 참 이상하시네. 차가 꽉 차서 복잡할 때 말이지 텅텅 비어있는데 아무렇게 좀 세워놓으면 어때서 그래요.”
당연하다는 듯 적반하장으로 몰아붙이는 게 아닌가.
“다 바로 세워놓았는데 아주머님 차 한 대만 저래 세워놓으면 보기가 싫지 않습니까.”
“나 원 참. 또 별소리를 다 듣겠다. 남한테 불편 안 주면 되는 거지 보기 좋은 거 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요.”
전혀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차를 그대로 두고는 몹시 불쾌하다는 듯 획 바람까지 일으키며 들어가 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되불러 호되게 면박을 주고 싶었지만 제반 여건상 그럴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쯤 해두었으면 다음부터는 시정하겠지 싶었는데 오늘 또 그 모양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교수부인이라면 충분히 내 말귀를 알아들을 만도 한데 왜 저렇지. 나는 한 번 더 참아볼까, 어쩔까 망설이다가 인터폰으로 여자를 찾았다. 박사장한테 한 번 더 당하는 것보다 그쪽이 더 수월할 것 같아서다.
“아주머니, 차를 또 중간에 세워놨네요. 좀 바로 세워줘야 하겠습니다.”
사모님을 일부러 아주머니로 바꿔 불렀다.
“아저씨, 정말 이상하시다. 나한테 무슨 감정 있어요? 왜 자꾸 그런 일로 트집을 잡으세요.”
예상한 대로의 반응이 왔다.
“트집잡는 게 아닙니다. 내가 무슨 권리로 아주머니한테 트집을 잡겠습니까. 저래 세워놓으면 우리가 야단을 맞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야단치는 사람이 누굽니까? 내가 바로 그 사람들한테 말할게요. 제 집 앞에 제 차 대는데 누가 시비예요? 이치가 그렇잖아요.”
벌써 시작하는 가락이 심상찮다. 그렇더라도 골목대표를 끌어다 댈 수는 없는 일이다. 말이 잘못되면 일이 엉뚱한 방향으로 튈지 모르기에 말이다.
“아, 그래, 그 사람이 누구냐니까요. 모두 먹고 할 일이 그렇게 없어요, 그런 일 갖고 참견을 하게.”
“…”
“나도 꽉 막힌 사람 아닙니다. 대학 나왔어요.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너무들 하는구만. 내가 곧 다시 나갈거라 서둘러 대다보니까 그렇게 된 건데, 그걸 그렇게 씹어대 가지고 이거 어디 경비 무서워 주민들이 맘 놓고 살겠나요.”
불똥이 다른 곳으로 튈 조짐마저 보였다. 완전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놓은 꼴이다.
“아주머니, 그럼 됐습니다.”
도리가 없었다. 내가 거기서 얼른 수습책을 내놓았다.
“되기는 뭐가 됐어요. 멀쩡한 사람 바보 다 만들어놓고는.”
“잘 좀 부탁합니다. 그만 끊겠습니다.”
나는 엉거주춤 수화기를 놓았다. 서둘러 진화에 나선 것이다. 나이 든 사람이 참자. 세월이 그런 세월이다. 내 위치가 그런 위치다. 이겨서 지는 것보다 져서 이기자. 맞고 자면 다리를 펴고 잘 수 있다. 휴우.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열을 길게, 바닥까지 긁어 밖으로 품어냈다. 그 열이 쌓여 병이 되지 않도록.
걸핏하면 인터폰 눌러 항의
깜박 졸음에 빠졌던 모양이다. TV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정 전에는 안 졸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지만 그게 잘 안된다. 쉰일곱의 나이에 체력의 한계가 온 것일까, 몸이 마음을 못 따를 때가 많다.
시계를 보았다. 밤 12시10분. 반장이 점검 다녀가고, 어느 방송인지는 모르지만 마지막 뉴스를 들은 기억도 나는데, 그 뒤 일은 기억에 없다. 20여 분 이상 졸았음이 분명했다. 반장이 다녀갔다는 안도감이 잠시나마 정신적 해이를 불러들인 건 아닌지 모르겠다.
지난 번 단지 내 부녀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을 나는 이미 회람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아직 가결된 것은 아니지만 경비실에 TV를 없애자는 이야기가 나왔던 모양이다.
TV를 켜놓은 채 입을 헤 벌리고 자고 있는 모습이 주민들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앞으로 TV를 보고 못보는 건 경비원 여러분의 처신 여하에 달려있다는 경고였다.
나는 얼른 TV부터 껐다. 경비실 밖으로 나왔다. 계단 밑에 내려와서는 으악, 소리까지 내어 크게 기지개를 켜고는 온몸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졸음을 떨어낸다. 관절 곳곳에서 뼈마디 꺾이는 소리가 났다.
경칩 절후가 지났다지만 아직 밤 공기는 찼다. 잠을 쫓으려 한참 나와 있었더니 이내 온몸이 오스스 떨렸다. 사방으로 19층의 콘크리트 성벽이 시야를 꽉 막고 있다. 시야만 막고 있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 답답하게 막고 있다.
나는 뭐 좀 꿈적거릴 일이 없나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계단 모퉁이에 박혀 있는 동백화분을 찾아냈다. 작년 가을에 누가 버리려고 들고 나온 것을 아까워 경비실 안에 가져다가 길러오다가, 며칠 전부터 날이 풀리는 것을 보고 밖에 내놓았다. 곳곳에 도톰한 꽃봉오리가 제법이다.
화분을 들고 3문 모퉁이에 있는 수도에 가서 물을 주어 제자리에 갖다놓는데 3문의 이씨가 내다보곤 빈정거렸다.
“게으른 이가 정월 초하룻날 지게 지고 나무하러 간다더니 이 밤중에 웬 일이여.”
“게을러도 불은 지펴야 될 거 아냐.”
말장난임을 알고 건성 받았다. 또 뭐 좀 할 일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아직 불 켜놓은 집이 몇 집이나 있나 해서 우리 동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완전히 꺾어야 끝이 보일 만큼 높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대부분 창은 불이 꺼져있고 두세 집에만 불빛이 붙어있다. 하나는 얼마 전에 전세로 들어와 사는 집인데 뇌성마비로 인한 지체부자유 아이가 있는 집이다. 특수학교에 보내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어머니가 아이를 업어서는 통근차에 승하차시키곤 하는데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찡했다. 그들이 이쪽으로 집을 옮겨 사는 것도 특수학교가 가까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701호를 생각하면 그 아래층인 601호에 사는 노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노인은 걸핏하면 인터폰으로 사람을 불러 못 견디게 했다.
“야, 이 사람들아. 우리 위층에 한번 올라가 봐라. 돼지새끼를 키우는 건지 왜 이렇게 천장이 우당탕거리노 말이다. 응이.”
처음엔 노인의 뜻을 그대로 위층에 전했다. 아파트 생활에서 그런 일은 흔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이제 곧 괜찮을 겁니다.”
그런데 5분도 안돼 또 연락이 왔다.
“지금 시간이 몇 시구. 나도 잠 좀 자자. 사람 새끼들이라면 왜 그렇게 말을 안 듣는다냐. 응.”
말까지 반말 쪼다. 나이야 저쪽이 좀 많다고 하나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듣기가 거북했다. 그러나 나는 좋게 받아들였다.
“떠들지 않기로 했는데요.”
“안 떠들기는 뭐가 안 떠들어. 지금도 연방 쾅쾅 하는데. 그 집에 무슨 야간공장 차린 거 아녀. 이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큰일이구만. 신경을 건드려서 사람이 말라 죽겠다니까.”
도리 없이 내가 한번 올라가 보았다. 아이들 일이라면 타일러줄 셈에서다.그런데 막상 올라가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장애아이가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목발로 홀로서기 걸음마를 배우고 있었다. 목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쿵하고 아래층을 울린 것이다. 그냥 돌아서야 했다.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래층에다 양해를 구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 다시 할아버지를 찾아 위층의 처지를 설명하고는 참는 김에 조금만 더 참아달라고 사정을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막무가내로 나중에는 원색적인 욕설까지 퍼부었다.
두 집 사이의 문제는 현안으로 아직 그냥 남아있다. 또 언제 어떤 모습으로 발작할지 모른다. 가운데서 죄 없는 경비원들이 죽을 노릇이다. 목덜미 쪽과 소매 끝에 휘감기는 공기가 묵은 날이 가고 새 날이 들어섰음을 알려준다.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먹고, 냄비를 씻어 들어오는데 1001호 아주머니가 경비실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 인사성이 유별했는데 오늘은 웬일로 심드렁해 보였다.
“아저씨. 아저씨는 우리 아이한테 왜 야단을 쳤어요.”
그제서야 와 닿는 게 있었다. 그 집 아이가 조금 전 학교 마치고 들어가면서 승강기의 층별 단추를 있는 대로 다 눌러놓고 내렸다. 벌써 여러 번째다. 화가 난 주민들이 나한테 와서 역정을 냈다. 할 수 없이 내가 그 아이를 불러 주의를 좀 주었는데 그게 아주머니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별로 야단친 것도 아닌데.”
“경비 아저씨가 작대기로 다리를 꺾어 놓을지도 모른다면서 벌벌 떨고 있던데요. 지금 아저씨 무서워 학원에도 못 간다고며 들어앉아 있어요.”
“허허. 그놈 언구럭도 여간 아니구먼.”
내가 웃었다. 이미 상대편 행동을 보니까 이런저런 설명으로 무마할 단계는 넘어선 것 같아서다.
“언구럭이 아녜요. 걔는 언구럭 부릴 줄도 몰라요.”
“그눔 웬 장난이 그렇게 심한지. 툭 하면 보당(버튼)을 있는 대로 다 눌러 가지고는….”
마음 같아서는 다른 말도 좀 보탰으면 싶었지만 나는 가급적이면 좋은 쪽으로 몰고 갔다.
“세상에 장난 안치고 노는 아이들이 어디 있나요. 욕도 하셨다면서요?”
“또 별소릴 다 듣겠네. 안했습니다.”
“우리 애가 장난이 좀 심한 건 나도 압니다. 그렇더라도 타일러야지 야단은 왜 치는 겁니까. 여기에 어른들만 살 수는 없는 거 아녜요?”
“그게 아닙니다. 내가 댁의 아드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욕을 하겠습니까. 그냥 타이른 거 뿐인데, 잘못이 있다면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이윽고 내가 숙이고 들어갔다. 어차피 사과를 받으러 온 거고, 사과를 하지 않으면 할 때까지 죽치고 따질 테니 말이다. 그리고 어차피 사과는 이쪽에서 해야 한다는 것도 이미 내놓은 답이 아닌가.
“아저씨. 아이들은 아이들로 보세요. 아이들은 어른들과 달라요. 아이들을 어른들의 눈에다 맞춰놓고 잘했느니 못했느니 해서야 되겠어요.”
평소에는 예사로 보아 넘겼는데 오늘 보니 여자의 눈매가 의외로 매섭다. 눈매만큼이나 말도 매섭다. 의미도 없는 것이지만 여자와 나와의 나이 차이를 생각해본다. 못해도 스무살은 더 되지 싶다.
“뭔가 아주머니께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만 올라가십쇼. 올라가시거든 바로 아이를 내려보내세요. 나 무서워 아직 학원엘 못 갔다니까 내가 안 무섭도록 해서 타일러 보내겠습니다.”
그때서야 여자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던지, 그러나 마지못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올라갔다. 여기 있어보면 가장 대하기 힘든 상대가 아이들이라던, 내가 처음 들어오던 날 일러준 구씨의 말이 새삼스럽다.
밤 12시20분. 오늘 하루도 또 이렇게 끝나는구나, 무사히 끝나주어 다행이다 하고 이 시간대마다 곧잘 내뱉는 자탄과 안도가 섞인 한숨을 가볍게 몰아쉬며 하루를 마감하는 신변정리를 하고 있는데, 제복차림의 한 남자가 경비실 밖에서 기웃거렸다.
사람을 찾고있는 듯한 행색이어서 창을 열고 내다보았다. 모범택시운전사 복장을 한 사람이 거기 있었다.
“저, 말씀 좀 묻겠습니다. 한 20분은 됐지 싶은데, 이쪽으로 올라간 사람 좀 찾을 수가 없겠습니까?”
“누구신데요?”
20분쯤 전에 누가 올라갔지, 생각해보았다.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이시간대에는 드나드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있더라도 예사로 보아 넘기기 때문이다. 내가 감시하는 것은 현상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확인하는 일이다. 우리 골목에 사는 사람만 확인되면 그가 누구건, 무엇을 가지고 드나들건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차를 세워놓고는 요금 가지러 올라간 사람이 함흥차사가 됐으니 하는 얘깁니다.”
“기다리는 김에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죠.”
“글쎄, 20분도 더 기다렸다니까요. 기어 오르내려도 열 번은 더 했을 겁니다. 술이 잔뜩 취한 사람인데, 그래도 기억 안납니까?”
말투에 신경질난 사람 특유의 성깔이 묻어 나왔다. 술이란 말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1202호 박사다. 호주에 유학 가서 학위를 따온 사람인데 곧 대학 교수가 된다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몸을 잔뜩 웅크리고 뒤뚱거리며 들어간 것 같았다.
“많이 취했던가요?”
“취하고 말고요. 곤드레만드레가 된 사람입니다. 토해 놓아서 시트를 다 버려 차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지체한 시간요금에 세탁비까지 다 받아내야 하는데. 내가 바로 올라가 볼게요.”
기사는 아랫입술을 있는 힘을 다해 깨물더니만, 잇자국을 달고 안으로 쑥 들어갔다. 말리고 어쩌고 할 틈도 없었다. 일 돌아가는 걸 보니 말려서 될 일도 아니었다. 나는 얼른 인터폰을 통해 그 사실을 1202호에다 전했다.
사전 연락을 취하고 저쪽 허락을 얻어낸 뒤에 찾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외래객 내방순서다. 더군다나 지금 같은 밤에는 말할 필요도 없다. 경비로서 가장 어려운 일이 바로 이럴 때의 행동반경이다. 참견 범위가 어디까지며, 어떤 방법으로 참견하냐도 미지수다.
무조건 정의의 편에 서는 것도 정답은 아니다. 그렇다고 주민들만 옹호하는 것도 모양이 좋지 않다. 하지만 주민들이 내는 관리비에서 봉급을 받고 있는 이상, 팔이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래도 욕, 저래도 욕을 얻어먹게 돼 있다.
오늘밤도 조용히 보내기는 다 틀렸구나,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기사가 헐레벌떡 숨을 몰아쉬며 내려왔다.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보다가, 보다가 또 희한한 놈 새끼 다 보겠네. 세상에 그런 똥배짱 가진 놈이 어디 있나 말여.”
수가 되게 틀어진 모양이다.
“그 집이 맞던가요?”
“그새 한밤중이잖아요. 곧 내려올 테니 미터기도 꺾지 말고 기다리라 해놓고, 식구들한테는 말 한마디 없이 자빠져 자고 있으니, 그 자식이 어디 사람 새끼여.”
기사는 양 볼이 퉁퉁 부어 올랐다. 곧 영감이 내려왔다. 청년의 아버지다. 내복 위에 점퍼를 걸친 차림이 자다가 벼락을 맞고 허겁지겁 나온 것임이 분명했다.
“기사양반. 차 어디 있수?”
“시트도 엉망입니다. 냄새가 등천(승천)을 하구….”
“다른 얘기는 하지 말아요. 모든 배상은 해달라는 대로 내가 다 해준다고 했잖수. 가 봅시다.”
영감의 융숭한 말에 그만 기사의 기고만장이 거짓말같이 꼬리를 내린다. 영감은 기사를 따라 택시가 있다는 쪽으로 허둥지둥 가더니만 이내 돌아왔다. 일이 너무 심드렁하게 끝났다.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한 모양이다. 분명히 영감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어쨌든 나로선 그런 다행이 없다.
“용이 개천에 쉬고 있으니까 지나가던 거렁뱅이가 오줌을 갈기고 간다더니만 턱도 없는 놈이 와서 떠들고 지랄이야. 젊은이가 술 한잔 먹었기로서니 그게 무슨 큰 허물이라구. 고얀 놈들.”
영감은 경비실 앞에 와서 나 들으라고 한마디 던져놓고는 바로 올라가버렸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표는 내지 않았지만 가슴을 바작바작 태우고 있었다. 이 밤중에 왜 미친놈을 올려보내 사람을 성가시게 하냐고 한번쯤 다그칠 줄 알았다. 그럴 경우 나로선 꼼짝없이 당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휴우.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날씨가 너무 좋다. 경비실에 박혀 있기가 답답해서, 그렇다고 자리를 비우고 멀리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이나 달래볼 양으로 입구 계단 밑에 내려와 서성이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관리사무소장이 찾아왔다.
“혹 105동으로 자리를 옮겨볼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만 가슴이 철렁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봐, 대개의 경우 자기 골목 주민과 불협화음이 있거나 그럴 조짐이 보일 때는 자리를 바꾼다. 혹 나에 대한 무슨 좋지 못한 신고가 들어간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왜 그러는 데요?”
“그쪽에서 옮길 사람이 한 분 있어서 그럽니다.”
그때서야 감이 잡혔다. 그리고 소장이 나를 남다르게 생각해서 찾아왔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105동은 평수가 큰 동이다. 평수가 큰 동에 사는 사람들이 작은 동에 사는 사람들보다 부유층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경비원이라면 누구나 보이게, 안 보이게 그쪽 근무를 원하고 있다. 명절 끝으로 양말 한 켤레라도 더 얻어 신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뺨을 한 대 맞더라도 금반지 낀 손에 맞으라는 논리인 셈이다.
“소장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냥 여기 있으면 싶습니다.”
나는 완곡하게 사양했다. 언제 그만둘지 모르는데 그곳에 가서 사람들을 새로 알아야 한다는 게 솔직히 귀찮았다. 기어코 백씨가 나가는 모양이었다. 105동에 결원이 생겼다면 보나마나 뻔한 일이다.
지난 달 105동 3문에 근무하는 백씨한테 이런 일이 있었다. 자기가 근무하는 골목의 한 아이가 우리 외삼촌이라면서 청년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갔다. 백씨로선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그 집 아이가 그렇다니까 믿고 들여보낸 것이다.
그런데 그 청년은 도둑이었다. 청년은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한 아이를 눈여겨 봐두었다가 그 아이의 신상명세를 아이들끼리 주고받은 이야기 속에서 캐내어서는 외삼촌이라며 접근한 것이다.
그렇게 그 집에 들어온 청년은 아이한테 점심때가 되었으니 점심이나 같이 먹자면서 돈을 주어 중국집 만두를 사오게 내보낸 뒤, 그 틈을 이용해서 장롱을 털어 달아났다는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청년은 아이한테 절까지 점잖게 받아먹었다는 것이다.
“돈이 남아돌아 당신네 월급 주냐”
경비원도 아이도 꼼짝없이 당한 것이다. 온 단지가 발칵 뒤집혔다. 당사자는 경비원에게 책임을 물었다. 도대체 눈 뻔히 뜨고 앉아 뭘 하냐는 것이었다. 우리가 돈이 남아돌아 당신네들을 앉혀놓고 월급 주냐는 말도 나왔다. 그들로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경비원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다시 그런 입장에 놓이더라도 그럴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바로 책임론이 뒤를 따랐다. 보상을 하라는 말도 나왔다. 절차를 밟아 경찰에 신고는 했지만 범인을 잡을 수도 없을 뿐더러 그것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백씨가 나가는 모양이죠?”
“어제 날짜로 나갔습니다.”
이곳 경비원의 정년은 65세인데 백씨는 올 봄에 주민들의 동의를 받아 1년 더 연장근무에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집이 그만큼 어려운 처지였던가 보다.
밤 12시가 다 되었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4문으로 집합.”
4문의 조씨 목소리다. 어느 집에서 제사를 지내고 음복(飮福) 음식이 내려온 모양이었다. 이 시간에 모이라면 뻔한 일이다. 나는 속이 출출하던 차에 마침 잘됐다 생각하며 갔다. 제사음식이 틀림없었다.
서둘러 갔는데도 2문의 오씨, 3문의 이씨는 벌써 와서 먹고 있었다.
경비실에는 전부터 내려오는 불문율이 몇 가지 있는데 제사음식 나눠먹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음식이 많건 적건 같은 동 근무자들을 불러 같이 먹도록 돼 있다.
“앗다, 모두들 동작 한번 빠르구랴.”
“원래 양반은 글 덕이고, 상놈은 발 덕이라고 하잖아. 동작이라도 빨라야 먹구 살 거 아닌개벼.”
오씨의 말이다. 경비실에 보낸 음복치고는 제법 융숭했다. 떡 한 접시에 전 한 접시가 보통인데 여기에는 과일도 한 접시가 따로 담겨왔고, 게다가 접시도 모두 컸다. 술도 제사에 쓴 술이 아니라 따로 준비해서 보낸 것이 분명하다.
아마 보낸 쪽에서도 여러 사람이 나눠먹는다는 것을 알고있는 모양이다.
“야, 이 집 예의범절은 알아줘야 하겠는데.”
“우리 조선생, 머슴 한번 잘 살았구먼.”
그것도 얻어먹는 것이라고 공치사나마 한마디씩 거든다.
“야, 이 사람들아.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 못 들어봤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인간적인 유대가 두터웠기 때문이야.”
조씨가 은근히 으스댄다.
“오냐. 늬 잘 났다.”
그만 오씨가 면박이다.
“그나저나 이것도 따지고 보면 조씨한테 얻어먹는 건데, 우리가 신세를 너무 많이 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내가 술잔을 기울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된다. 그 형편은 된다니까.”
“참 그러고보니 먼젓주에도 얻어먹었잖아. 영 미안한데.”
“그리구 조심들하라구. 잘못하다간 또 병원 가는 수가 있어.”
“이 사람 말하는 거 좀 봐. 병원 실려가면 어지간히두 좋겠다.”
지난 여름 101동에서 경비원 한 사람이 제사음복을 잘못 먹고 토사곽란(吐瀉亂)으로 혼쭐이 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을 빗대어 한 말이다.
“자, 그만 일어나자. 반장 순찰 돌 때 다 됐다.”
이씨의 말에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벽시계로 갔다.
12시40분. 오씨가 먼저 일어나고 내가 뒤를 따라나왔다.
나는 경비실에 들어서자마자 달력을 젖혀 음력으로 다음달 열아흐렛날을 찾아본다. 아버지 제삿날이 그 날이다. 비번인가, 아닌가 손가락을 꼽아본다. 아니다. 그런 다행이 없다.
아까부터 관리소장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것 같더니만 우리 문으로 들어와 경비실 옆에 있는 벽보판 앞으로 가더니 무엇인가를 한 장 뜯어서는 들고 들어왔다.
“강씨요, 앞으로 이런 거 여기 못 붙이게 하세요. 게시판엔 관리실에서 허가해준 것만 붙이도록 해요.”
말투가 무거운 것으로 봐 떼어낸 벽보에 무슨 문제가 있는 듯 보였다.
“알았습니다.”
꼬치꼬치 묻는 걸 원하지 않는 눈치 같아, 자꾸 소장이 든 벽보에 눈이 가는 걸 얼른 거두었다. 대놓고 밝히기가 뭣한 문제가 있음이 분명했다.
소장이 나간 뒤 나는 게시판을 훑어보았다. ‘소화기 점검안내’ ‘소독약 살포일시 공고’ ‘등산 안내’ 등 자기가 붙인 쪽지는 다 붙어 있었다. 이상하다, 방금 떼간 것이 무엇일까.
2문의 오씨를 찾았다. 사람이 궁금해서 살 수가 없다. 오씨는 내가 자기한테 와서 기웃거리는 걸 용케 알고는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책상 고무판 밑에서 접어놓았던 쪽지 하나를 꺼냈다.
“여기서 보지 말고 가지고 가서 읽어보라구. 다 읽고는 찢어버려, 알았지.”
거기엔 워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참사랑아파트 주민에게 알려드립니다. 우리 아파트에서는 작년 1월1일부터 세대당 자동차 한 대를 기준으로 해서, 초과 차량에 대해서는 주차공간 확보기금마련 명목으로 대당 월 5000원씩 돈을 거두고 있습니다. 이번 달까지 모인 기금은 900만원쯤 됩니다. 그런데 이 돈은 처음 목적과는 달리 관리소장의 판공비, 경비원들의 특근비, 야식비 등의 이름으로 봉급 외에 이중으로 지급되어(서류상으로만 지급되었을 뿐 실제로 받은 사람은 없음) 지금은 바닥이 난 상태입니다. 우리 관리실에 이런 비리가 있다는 사실을 주민 여러분들은 알고 계시는 지요.”
아파트 관리비의 부당함을 고발한 내용이었다. 고발한 사람도, 그 대상도 구체적으로 밝혀놓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이고, 그 내용이 모두 사실일 경우 파장이 따를 만도 했다.
전부터 그 모금에 대해서는 말이 좀 있었다. 아파트 주변의 지가가 평당 천만 원이 넘는데 그 돈으로 어느 천년에 땅을 사들여 주차공간을 만드냐, 아니면 재건축을 해야 하는데 아직 지은 지 10년밖에 안된 건물을 주차공간 좁다고 새로 짓는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그런 돈은 거둘 수가 없다는 게 그 요지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 다음달부터 고지서에 주차관리비가 들어앉았다. 좀 미심쩍은 데가 있긴 했으나, 운영위원회에서 정한 일이거니 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내왔는데 그게 말썽인 모양 같았다. 내용을 보니 충분한 해명이 없는 한, 앞으로 일이 좀 시끄러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시한폭탄 같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
좀 있자 오씨가 왔다.
“쪽지 어떻게 했나?”
“찢어 버리라구 했잖어. 그래서 버렸는데.”
“태워버릴 것이지.”
“안심하라구. 갈기갈기 찢었으니까.”
“어때? 내용이.”
“좀 시끄럽겠던데. 그런데 거기 경비원들 특근비, 야식비로 나갔다는 건 무슨 말이야?”
“묵은 놈이 있길래 그런 말이 나온 거겠지.”
“그럼, 우리 말고 경비원이 또 있단 말야.”
“그걸 누가 아나. 어디 숨겨놨는지.”
“우리 소장 얼굴이 똥 밟은 상판이던데.”
“그 친구, 이번에 혼 좀 나야 한다구. 지가 소장이면 소장이지 왜 그렇게 건방져. 꼭 지 주머니 털어 봉급 주는 거같이 말야.”
이윽고 오씨가 소장을 씹기 시작했다. 오씨의 입에서 그 말이 한번쯤 나올 줄 알았다. 이미 쪽지를 숨겨놨다가 보여줄 때부터 좀 다르다고 생각했다. 오씨와 소장의 관계가 껄끄럽다는 건 모두 다 알고 있는 일이다.
올 음력 설 때다. 경비원이 모두 관리사무실을 찾았다. 꼭 세배를 하러 갔다기보다는 직무상 관리자가 있는 곳이라 찾아가서 들여다보고 왔던 것이다. 그런데 오씨만은 그 자리에 빠졌다. 고의로 빠진 게 아니라 차례를 지내고 오느라고 좀 늦게 출근을 했고, 나중에 혼자 일부러 가기가 뭣해 어영부영하다가 그만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이날 오후 소장이 오씨를 순찰 겸 찾아갔던 모양이다. 말하자면 위계질서의 순서가 바뀐 셈이다.
“우리 오선생님, 설은 잘 쇠셨습니까.”
“아, 예.”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그만 다음 말이 문제가 되었다.
“오씨한테는 제가 먼저 찾아왔습니다.”
말에 씨가 들어있다고 본 것이다. 소장은 한번 웃으려고 그런 말을 했다지만 오씨의 귀에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수가 되게 틀어졌다. 먼저 찾은 것이 뭐 큰 대수라고 그걸 씹냐는 것이 오씨의 주장이었다.
“지가 먼저 왔으면 왔지, 그게 그렇게 원통해. 일찍 뒀음 그만한 자식을 둬두 뒀어. 그런데 그 자식이 소장이면 소장이지 그따위 싸가지 없는 소리를, 그것두 면전에다 대구 하고 앉았어. 아주 쌍놈의 새끼 아냐.”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물론 듣는 자리에서 한 소리는 아니다. 그런데 그 말이 어떻게 들어갔는지 소장의 귀에 들어갔고, 그 소리를 들은 소장은 소장대로 “그 양반 사람 다시 봐야겠구먼” 하는 반응이, 어떻게 들어갔는지 또 오씨 귀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날부터 두 사람 사이엔 외형상 표는 나지 않았지만 험악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며칠 뒤 또 이런 일이 포개졌다. 하루는 관리소장이 오씨를 불렀다.
“103동 2문 앞에는 무적차량이 왜 그렇게 많지요. 첨부터 스티커를 안 붙인 겁니까, 아니면 외부 차량입니까? 오늘 오전에 보니까 또 한 대가 있던데 신경 좀 써주세요. 내 위에도 동대표가 있고 위원장이 있는데 그분들이 알면 골치 아픕니다. 좀 도와주십쇼.”
다분히 보복성이 들어가 있는 말이었다. 오씨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던 게다. 아파트 주민 소유 차량에는 관리실에서 발급하는 스티커가 다 붙어있는데 그것이 없는 차량을 여기에서는 무적차량이라고 한다. 가끔 부근의 얌체 주민들이 몰래 단지 내에다 세워놓는 일이 있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스티커 유무를 너무 엄하게 단속하는 데에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친척이라든가 업무상으로 들르는 차가 잦기 때문이다. 그런 걸 그때마다 하나하나 붙들고 사유를 따지자면 말썽의 소지가 있다.
그래서 경중을 따져 눈치껏, 탄력적으로 처리하고 있는 형편인데 그걸 물고 트집을 잡은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오씨가 그만 대들고 말았다. 불만이 터진 것이다.
“말 다 했냐. 정말 당신 싸가지 없다. 보자보자 하니 너무 하는구먼. 지금 가봐라, 우리 앞에만 무적차량이 있는 게 아니다. 한두 대도 아냐. 그런데 왜 나만 들볶냐. 응?”
“오씨요. 그게 아니라니까요. 왜 자꾸 옆길로만 나갑니까.”
주변에서 말리고, 타이르고 해서 그날 일은 더 발전하지 않고 그 선에서 종결됐지만, 그리고 서로 잘 해보자고 사과까지 했지만, 뿌리가 뽑힌 것은 아니다. 불씨는 그냥 묻혀 있는 셈이다.
지금 하는 말만 들어도 알 수가 있다. 그 뿌리에서 싹이 돋은 것이다. 먹은 마음이 없다면야 아직 뭐 하나 확인된 것도 없는데 왜 기다렸다는 듯 소장을 씹는가 말이다. 쪽지까지 감춰놓았다가 보여줄 때는 뒷말은 물어볼 필요도 없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라구.”
오씨는 계속 엉뚱한 쪽으로 몰고 나간다.
“우리 소장 골치깨나 아프겠는데.”
“아플 게 뭐가 있나. 자기한테 그런 일이 없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계속 말투가 식은 밥 얻어먹은 소리다.
“이제 그만 참으시지.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계속 듣기가 딱해 내가 한마디 해보았다. 내 생각으로는 두 사람이 똑같다. 경비원이 관리소장한테 맞서 가지고 이익 볼 게 뭐가 있는가. 서로가 손해라곤 하지만 피해는 항상 약자한테 더 크게 돌아가게 되어있다. 그게 세상의 법칙이다.
지금 오씨가 저렇게 씹어대는 건 믿는 구석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아들 하나가 지방 신문사에 근무하고 있다는데 그걸 큰 배경으로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일종의 명분 싸움이었다. 이런 일들이 대개 그렇듯 벽보사건도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아직 아침도 이른 시각인데 갑자기 101동 앞이 파장 직전의 시장바닥처럼 왁자지껄했다. 이 시간에 이렇게 소란스러운 건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다. 나는 무슨 일인가 해서, 그러나 별일이 아니겠지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밖으로 나가보았다.
예상 밖으로 큰 싸움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육두문자와 고래 고함이 조용한 아침하늘을 찢어놓았다. 둘러싼 사방 벽의 반사로 인해 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피투성이가 된 한 사람이 말리는 듯한 사람들에게 붙잡혀 헐떡거리고 있었다. 표정이며 행동이 분을 못 삭여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얀 와이셔츠에 피가 묻어있어 더 했다.
맞은편에는 건장한 사내가 자다가 튀어나왔는지 잠옷 윗도리를 걸친 채 여차하면 팍 물어뜯을 듯 성난 사냥개의 자세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분위기가 조금 전에 험악한 일전이 있었음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이 쌍노무 새끼가 싸래기만 처먹었나, 엇다대구 반말 지거리야.”
건장한 사내가 떠벌렸다.
“야, 임마. 너는 온말 했냐? 늬가 반말을 하니까 내가 반말 한 거 아냐.”
와이셔츠 피투성이가 대들었다.
“저 자식 말하는 거 좀 봐. 아주 죽을라구 환장을 했구만.”
“그래 임마. 죽을라구 환장했다. 자신 있거든 죽여봐라.”
“저 자식 저거, 주둥아리 그냥 둬서 안되겠구만. 손 좀 더 봐야하겠는데.”
그 소리와 함께 건장한 사내의 발길이 번개같이 날아가 피투성이를 걷어찬다.
“에이 씨팔눔. 너는 이제 나한테 죽었다. 오늘이 늬 제삿날인 줄 알아라.”
와이셔츠는 말리는 사람들 손에서 벗어나 주변 화단둘레에 박아놓았던 벽돌을 뽑아 들었다. 서로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양쪽 태도로 봐 그냥 두면 누가 죽어도 하나가 죽어야 해결이 날 것만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도대체 그들 행동으로만 봐서 무엇 때문에 왜 싸우는지 알 수가 없다. 아침부터 술자리가 벌어진 것도 아닐 테고, 빚 받으러 온 것도 아닐 텐데 왜 저런 피투성이로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아웅다웅 하는 것일까.
두 사람 다 면은 있는 사람들이다. 같은 동 사람들이라 어찌 보면 서로가 잘 아는 사이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주위에서 열심히 말리고는 있으나 싸움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먼저 나와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보았다.
“글쎄요. 그게 싸울 일도 아니지 싶은데 저렇게 물고, 뜯고 싸우네요.”
사연인즉 이러했다. 와이셔츠가 출근하기 위해 주차장에 내려가 본즉, 자기 차 꽁무니를 다른 차량들이 막고 있었다. 자기 차를 빼내자면 최소한 두 대는 움직여야만 가능했으므로 두 대의 차량 번호를 적어와 해당 경비실에다 연락해 차주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내 바로 뒤의 차 주인이 내려왔다. 그러나 그 차 또한 자기 뒤에 있는 차가 움직여주지 않으면 꼼짝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20분이 넘게 기다려도 뒤차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그때까지 기다리던 사람은 뒤차 주인이 나타나면 연락해달라는 말을 남기고는 신경질까지 내며 들어가버렸다. 그때서야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났다. 이번엔 맨 나중에 나타난 사람이 곤히 자는 사람을 불러놓고는 이게 뭐냐며 역정을 냈다.
이러기를 두어 번, 그만 바로 뒤의 차량 임자가 성깔을 보였다. 이렇게 해서 사건이 터졌다는 것이다. 시작은 주차문제로 승강이가 벌어져 어느 틈에 원색의 감정싸움으로 비화해서 육박전이 벌어진 것이라고 했다.
그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은 여러 번 있었고,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간신히 모면한 일도 있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해결책이 뚜렷이 없다는 데 있다.
단지 내 주차공간은 세대 당 한 대를 기준으로 해서 만들었다. 아파트를 기공할 당시만 해도 차량이 이렇게 불어날 줄은 몰랐다. 불어나더라도 세대 당 한 대 꼴이면, 차 없는 세대도 있을 터이니 충분하리라 예상했던 것이다. 그런데 10년도 안 지나 세대 당 많은 집은 3대, 4대가 되니 그 계획이 얼마나 무지몽매했는가 말이다.
이제는 아파트를 재건축하지 않는 한 주차공간 해결방안은 없다고 봐야 한다. 해결방법의 하나로 대당 월 5000원씩 거두고는 있지만 이는 해결방안이라기보다는 증가 억제책의 하나일 뿐 실효성은 거의 없다.
주차공간은 한정되어 있는 데다가, 직장 가진 사람들은 저녁에 먼저 귀가해서 아침에 일찍 나가야 하고, 자영업 하는 사람들은 그 반대이다보니 차의 들고 나감이 꼬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운영위원회에서 해결방법의 하나로 이런 일까지 해본 일이 있었다. 밤 12시 직전에 차 가진 사람이 모두 나와 다음날 아침 나가는 순서의 역순으로 다시 주차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루 이틀 말이지 매일 한다는 건 고역이었다.
그들의 싸움은 그러고도 얼마나 더 지속되다가, 관리소장이 나와서 이는 전적으로 자기한테 책임이 있다며 잘못했다고 빌어 올리고 해서야 겨우 수그러들었는데, 그렇더라도 그건 누가 봐도 끝난 싸움이 아니었다. 불씨는 그냥 묻혀 있었다.
오늘 회식이 있다. 참석 범위는 103동 각 문에 근무하는 네 사람과 반장이다. 반장은 넣어도 그만, 안 넣어도 그만이지만 조직의 인화를 생각해서 참석시킨 것이다.
비번 날 이런 행사라도 하나 있으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늘 부족한 잠이지만 그렇더라도 종일 집구석에 박혀 잠으로 소일하는 것과는 애당초 비교가 안된다. 예순이 다 된 나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노릇이지만 처지와 형편이 그렇게 만드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모두 그렇게 갈 곳이 없었던가, 서둘러 간다고 갔는데도 이미 올 사람은 다 와 있었다. 이내 술상이 들어왔다.
“이런 거 가지고 말썽은 나지 않겠지.”
오씨가 술을 따르면서 말했다.
“걱정도 팔자다. 어디 우리가 말썽 날 짓을 했는강.”
오늘 이 자리가 주민들이 버린 폐휴지를 분리해서 판 돈으로 마련되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만히 두면 그대로 청소차에 실려나갈 폐품이기에 따지고 보면 누구한테도 이해관계는 없다. 그런데 이것이 돈이 되어 경비원들의 술값으로 둔갑했다는 것을 알면 분명히 말이 있을 것 같아서 하는 걱정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이를 걱정하는 데는 까닭이 또 하나 있다. 우리가 분리작업을 한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고, 그냥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인 데다가, 누구 입에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주위에서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 같아, 그것으로 불우이웃을 돕는다는 말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단지 내 분위기로 봐서 그런 걸 물을 사람은 없다지만,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당사자들로서는 신경을 전혀 안 쓸 수는 없다.
“남의 주머니 털어서 먹는 건 아니니까, 그만 한 페이지 넘기자.”
먼저 꺼내지 않았다 뿐이지 뒤가 찜찜한 것은 참석한 사람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만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듯 4문의 조씨가 화제를 돌렸다.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할게, 들어봐라. 우리 문에 골목대표 있잖어, 그 사람 의처증이 있는 건지, 실제로 여편네가 바람을 피우는 건지 그건 알 수 없지만, 이 남자는 출근할 때마다 자기 집사람이 언제 나가고 언제 들어오는 걸 기록했다가 퇴근시 자기한테 알려달라는 거야.”
“그럼, 그렇게 해주지 뭐.”
오씨가 받았다.
“그런데 또 부인은 뭐라는 줄 알어. 출입할 때마다 남편이 묻거든 모른다고 대답해 달라는 거야.”
“완전히 콩가루 집안이구만.”
“불원간에 전쟁 한번 일어나지 싶은데,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건 아닌지 몰라.”
골목대표 박사장의 불만
그때 반장이 나섰다.
“자, 우리 그런 해골 어지러운 얘기는 그만 하자. 여기까지 와서 경비원 표 낼 필요는 없는 거 아냐. 자, 자기 앞에 있는 잔은 다 들어라. 우리도 위하여, 한번 하자구.”
술잔이 두어 순배 돌자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런 잡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들한테 술은 언제나 구세주였다. 괴로움과 불안에서 구해주는 건 술 뿐이었다. 속에 술만 들어갔다 하면 절로 웃음이 나오고 마음이 느긋해지며 딴 사람들이 된다. 세상은 어느 틈에 살 만한 세상이 되고, 우리들은 그 세상의 주인공으로서 당당하게 행세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술은 항상 우리한테 그런 힘을 주었다. 우리가 술을 멀리 못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나중에사 삼수갑산을 갈지언정 다 잊어버리자. 그것처럼 편한 게 없다.”
그만 이야기의 방향이 달라진다.
“자네, 마누라한테는 한 달에 몇 번씩 가나?”
2문의 오씨 입에서 나왔다. 그 소리가 왜 아직 안 나오는가 싶었다. 속에 술만 들어갔다 하면 나오는 주제는 딱 정해져 있다. 관리소장 씹는 것 하고 그놈의 이야기뿐이다. 이제 들을 만큼 들어 서로의 형편을 빤히 알고 있는데도 그놈의 이야기는 늘 새로운 탈을 쓰고 나타났다.
하긴 또 그런 이야기 말고는 할 이야기도 없다.
“왜 묻나? 못 가면 대신 가줄 거여.”
조씨가 받았다.
“그럼, 내가 걱정이 돼서 하는 소리 아냐.”
“아무리 못 가도 자네만큼은 간다.”
“얼씨구. 내가 몇 번 가는데?”
“몇 번을 가든, 자네만큼은 간다 그 말야.”
“이 사람, 말하는 거 좀 봐. 양기는 모두 입으로 다 올라가지구선.”
“일주일에 두 번은 가야 한다, 그건 자랑이 아니라 의무야. 의무방어전이란 말 못 들어봤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오씨는 걸핏하면 그 이야기를 앞세웠다. 말투로 봐서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지 싶은데, 그러나 내 귀에는 천만부당한 객기로만 들린다.
“저 양반 말, 믿어도 되나요?”
조씨의 말에 빙그레 웃고 있는 옆자리 반장을 보며 내가 물었다.
“자신 있기에 하는 얘기 아니겠어.”
반장의 태도도 긍정 쪽으로 기울었다.
“우리보다는 상이지만 우리 반장님만은 내가 믿을 수 있지. 저 풍채, 저 웃음, 저 금이빨 한번 보라구. 저런 양반은 아마 일흔이 넘어도 꺼떡도 안 할 거야. 내가 아는 수가 있다구.”
오씨가 반장을 추켜준다. 반장이 한잔 기울이곤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몹시 기분이 흡족한 모양이다.
“칠십에 생남(生男)이란 말 못 들어봤어? 나는 성생활을 이렇게 생각해요. 그것도 하나의 연장으로 본다, 그 말이외다. 칼로 봐도 좋고 괭이로 봐도 좋고, 뭐로 봐도 다 좋아요. 그리고 연장을 연장답게 관리하는 방법은 그 첫째가 쓸 때는 써줘야 한다 이거예요. 안 쓰고 두면 곰팡이가 슬고, 녹이 슨다는 이치로 봐야겠죠. 자주 쓰면 날은 자연히 서게 돼 있어요. 광이 난다, 이거야. 바로 그것이 연장의 생리라고 보면 틀림없어요.”
말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청산유수로 떠벌인다. 몇 번 같이 자리를 해봤지만 반장은 저놈의 이야기만 나오면 항상 힘이 펄펄 났다.
“하여튼 우리 반장님은 대단합니다. 다시 봐야겠어요.”
오씨가 또 한번 추켜준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이씨가 한마디 거든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내가 딱 하나만 얘기할게. 우리 단지 내의 일이긴 하나 103동은 아니니까 안 듯, 모른 듯 들어주게나. 그 양반이 아마 일흔쯤 될 거야. 지금 52평에 혼자 살고 있는 사람인데, 이 집에 고정적으로 드나드는 파출부가 한 사람 있더라구. 나이는 한 마흔쯤 되구. 이건 내가 누구한테 들은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내가 짐작으로 판단한 건데, 그 영감하고 파출부하고 모종의 관계가 있는 건 아닌지 몰라.”
반장이 정색을 하며 이씨의 말을 끊는다.
“이 양반이, 정말 큰일 날 소리 하구 있네. 그런 얘기는 하는 게 아니라구 했잖어.”
“그 영감 우리 노인회 부회장 아닌가요?”
오씨가 나선다. 짐작 가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제발 그만. 그 얘긴 더 이상 하지 말아요.”
“내 이야기는 그 사람 험을 잡으려는 게 아니라, 그렇게 성생활을 해결하는 사람도 있더라는 걸 말하려고 꺼낸 거니까, 그렇게만 알고 그만 넘어갑시다.”
이씨가 엉거주춤 수습을 한다.
“사람 사는 세상인데 무슨 일인들 없겠나. 앞으로 그런 얘기는 보고두 못 본 척, 듣고두 못 들은 척 그렇게 넘어가라구. 그래야 조상이 편하다.”
역시 반장은 반장이었다. 반장은 계속 다독거렸다.
한나절쯤 됐는데 골목대표 박사장이 보였다. 아무리 자영업을 한다지만 출퇴근 시간은 따로 있을 텐데 아무려면 저렇게 자유로울 수가 있나, 저래도 좋은 차 굴리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걸 보면 젊은 사람이 용하기는 용하다,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경비실 안으로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강씨요. 승강기 한번 봤습니까? 거기 중국집 하고 이삿짐센터 스티커가 붙어 있던데 그걸 왜 그대로 방치하나요. 계단에도 그냥 붙어 있구.”
듣기가 불편했다. 말에 힘이 들어가 있음이 분명했다. 갑자기 당한 추궁이라 어떻게 대답을 할까 우물거리고 있는데 뒷말이 이어진다.
“그거 모른 척 그냥 둬서는 안됩니다. 아줌마 한 사람이 한 동 청소를 다 해야 하는데 서로가 도와줘야 하잖아요. 스티커라는 게 쉽게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미관상에도 좋지 않으니까 앞으로는 못붙이게 하세요.”
영 듣기가 거북했다. 음식 배달 와서는 쥐도 새도 모르게 붙여놓고는 가버리는데 방치했다니, 아무리 하고 버리는 말이라지만 그런 말은 어불성설이다.끝까지 굳은 표정을 지닌 채, 사람의 신경을 긁어놓고는 휙 나가버린다. 내가 박사장의 뒤꼭지에 대고 말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따라 박사장이 더 작달막하게 보인다. 휴우, 박사장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 한숨이 뒤를 따른다. 여기 와서 새로 생긴 버릇 가운데 하나가 그것이다.
며칠 전 일이 떠올랐다. 그것과 오늘 박사장 행동이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불쑥 든다. 박사장댁 아이가 롤러스케이트를 타다가 붙은 속도를 제어할 힘을 잃어, 옆에 세워놓은 승용차에 의지해 겨우 넘어지는 것을 모면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충격으로 인해 그만 승용차의 바른쪽 문짝에 붙은 백밀러가 떨어져 나가버렸다. 나는 그걸 바람 쐬러 밖에 나왔다가 다 보았다.
얼른 달려가 보니 아이는 다친 데가 없이 무사했지만 차는 정비사의 도움 없이 제모습을 찾기엔 어려운 지경이었다. 차는 1202호 박사의 아버지가 타고 다니는 승용차다. 아직 새 차다. 내가 아는 박사의 아버지는 좋을 때는 더 없이 좋은 사람이지만, 한번 성깔이 틀어지면 물불을 못 가리는 사람이다.
여가시간에 할 일이라곤 차 닦는 일밖에 없다는 사람으로, 하루는 우스갯 소리로 영감님은 차를 타서 닳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닦아서 다 닳겠다고 했더니, 허허 웃더니만 우리가 차를 처음 탈 때만 해도 마누라를 빌려주면 줬지 차는 절대로 빌려주지 않았다며, 자기 차에 대한 애착을 나타낸 일이 있었다. 바로 그런 사람의 차였다.
나는 아이를 따로 불렀다. 차 주인을 가르쳐주며 사과를 드리고, 부모님한테도 말씀 드리라고 일러주고는 그 약속까지 받아냈다. 그리고는 뒤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 약속이 안 먹혀 들어갔다. 결국은 차주 영감이 먼저 알게 되었고, 경비실로 찾아와서는 범인을 찾아내라기에 나는 도리없이 자초지종을 설명했으며, 그는 곧 박사장댁으로 올라갔던 것이다.
뒤가 조용한 것으로 봐서 일도 조용히 끝나는 것으로 알았다. 하긴 얼마든지 조용히 끝날 수도 있는 일이다. 어디까지나 고의성 없는 일이니까, 시인할 건 시인하고, 사과할 것도 사과하고, 비용을 치를 게 있다면 치르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말이 났으니 이야기지만 경비원으로 가장 골치 아픈 일이 있다면 바로 이런 일이다. 다른 일 같으면 안 봤으니까 모른다고 밀어붙이면 그만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모른다는 것도 하나의 직무유기다. 왜 안 봤냐, 그것도 안보고 뭐 했냐고 따지고 들면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일러주자니 그것 또한 고자질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사람 할 짓이 아닌 것이다.
비록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지금 박사장이 스티커에다 트집을 잡는 이면에는 기필코 그런 묵은 감정이 들어있다고 봐야 한다. 내가 보기엔 얼굴에 그렇게 쓰여있다.
박사장이 사라진 뒤 나는 승강기 안을 들여다보았다. 스티커는 지난번에 떼어낸 그 자리에 또 붙어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배달을 다니니까 어느 틈에 붙였는지 나로서도 알 수가 없다. 슬그머니 부아가 났다. 몇 번인가 주의를 환기시켰는데도 자꾸 붙여대니 옆에 붙어 지키고 있지 않은 이상 말리기도 힘든 노릇이다. 나는 수화기를 들어 스티커에 있는 전화번호를 눌렀다. 주인이 나오기만 하면 쌍욕을 해주리라.
“안녕하세요, 북경반점입니다.”
자주 보는 종업원 목소리다. 음식 주문하는 전화로 생각한 모양이다. 종업원의 목소리를 감지하는 순간, 내게는 언뜻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언젠가 녀석이 볶음밥 하나를 들고 와서 내 책상 위에다 떡 놓고는 말했다.
“아저씨, 점심시간이구 한데 이거 드세요.”
계란 프라이에다 갓 볶은 짜장이 발려있어 냄새도 요란스럽고 먹음직스러웠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더 했다.
“아니, 난 시킨 일이 없는데.”
“시켜서 가져온 게 아녜요. 그냥 드시라구요. 서비스예요.”
“뭐라구?”
종업원의 이야긴 즉 이 골목에 주문이 들어와서 가지고 왔더니 시킨 사람이 없다면서, 확인전화를 해보니까 잘못된 것 같으니 이왕 가지고 간 것 경비원 아저씨 드시도록 하라는 주인님의 하명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가 보다 하고 먹었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자기네들 홍보전략의 일환으로 가끔 한번씩 그런 식으로 경비원을 대접해서, 종업원과의 마찰을 없애고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스티커 단속에 다소 소홀한 이면에는 그 영향도 아주 없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해본다. 소금 먹은 놈이 물 켠다고 하지 않는가 말이다.
“여기 참사랑아파트 103동 경비실인데, 자네들 스티커 있잖어. 담부터는 그걸 아무 데나 붙이지 말고 날 달라구. 그러면 내가 알아서 적당한 데 붙여 줄 테니까, 알았지. 내 입장도 좀 알아줘야 될 거 아냐.”
시작은, 박사장한테 들은 소리도 있고 해서 싫은 소리를 좀 하려고 전화를 걸었으나, 적당히 타이르고 말았다.
“알았습니다. 지금 바쁜데 전화 끊습니다.”
전화는 저쪽에서 먼저 끊어버렸다. 벌써 이쪽 힘을 다 알고 하는 짓임이 분명했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이번엔 이삿짐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두번째 신호가 들어가기도 전에 나는 얼른 수화기를 놓아버리고 말았다.
얼마전 야쿠르트 아주머니 때문에 일어났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아주머니였다. 눈인사만 힐끔 건네고는 말 한마디 없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내가 붙들어 세웠다.
“아주머니. 들어가면 안됩니다. 잡상인 출입금지예요.”
나는 아주머니를 돌려보냈다. 아주머니가 올라가면 하는 일이란 뻔하다. 집집마다 초인종을 눌러 사람을 불러내서는 한 병만 받아달라고 사정을 할 것이고, 또 지나치게 매달리다 보면 마찰도 있을 것이다. 그 영향이 바로 경비원한테 돌아온다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그것도 경비원 임무 가운데 하나며 근무수칙에 나와 있다. 그런데 30분도 채 안 지났는데 관리소장한테서 연락이 왔다.
“강씨요. 왜 그렇게 사람이 눈치가 없습니까. 노란모자 쓴 그 아주머니 좀 들여보내 주세요.”
“아니, 눈치라니요. 잡상인들 못 들여보내게 돼 있잖아요. 그런데….”
“강씨 말씀이 틀렸다는 게 아닙니다. 좀 눈치껏 해달라는 겁니다.”
“허허, 참.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구만. 들여보내면 보낸다고 야단이지, 안 들여보내면 안 들여보낸다고 성화지, 이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할지 모르겠구랴.”
부녀회에서 추천한 야쿠르트 아주머니
소장이 사람을 잘못 본 것일까, 나도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다. 이날까지 평생을 눈치로 살아왔고 지금도 눈치로 살고 있잖은가 말이다. 그런 사람한테 눈치가 없다니. 말이 바로 되자면 눈치가 너무 넘쳐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 아주머니, 부녀회에서 추천한 사람인데 다음부터는 모른 척하세요. 세상이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닙니까.”
세상을 살아도 내가 더 살았고, 눈칫밥을 먹어도 내가 더 먹었다. 그냥 눈치 없는 사람인 척 해보는 거뿐이다.
“예, 잘 알았습니다.”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는 것도 예상한 바다. 세상이 다 그런데 여기라고 예외일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경비원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확인시켜줘야 할 것이다.
지금 곳곳에 스티커를 붙여놓은 것도 그렇다. 심하게 단속을 하면 어느 정도 성과는 거둘 수 있다. 그러나 또 그렇게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아아, 그것이 현실인 것이다. 박사장의 차가운 인상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리지만 나는 크게 기지개를 켜서 털어버린다.
밤 12시 40분. 12시 전후만 되면 보통 귀가할 사람들은 다 들어왔기 때문에, 이제 눈을 좀 붙여볼까 하고는 의자에 앉아 엉덩이를 빼고, 어깨를 등받이에다 묻고, 다리를 뻗어 책상 밑에 깊숙이 밀어놓고, 앉은 자세로는 가장 편하게 자리를 잡아 눈을 감으려는데, 어디선가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지 가운데 있는 쉼터 쪽에서 나는 것 같았다. 날씨가 더워지고, 등나무 덩굴이 우거져 차양을 만들어놓자 오후만 되면 아주머니들이 마치 시골동네 우물가처럼 모여서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로 시간을 때우는 곳이다.
이상했다. 이 시간대에는 아무도 나올 사람이 없는데 웬 사람들일까. 궁금해서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다시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와서 보니 거기 모인 사람들은 쉼터 가까운 경비실에서 나온 경비원들이었다. 6, 7명은 되었다.
같은 103동의 오씨, 이씨의 얼굴도 있었다. 아마 잠 쫓으려 하나, 둘 나왔다가 그런 자리를 만든 듯 보였다. 만나니 이야기가 없을 수 없고, 동병상련의 신세타령 같은 이야기를 털어놓다보니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거기에다가 출입하는 사람들도 뜸한 한가한 시간이라, 그런 모임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 같았다.
그러나 두셋까지는 가끔 있는 일이나 이렇게 많이 모인 일은 드물었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거는 우리한테 70만 대군이 뭐 때문에 필요하냐고 묻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다. 6·25 이후 아직 한번도 전쟁을 치른 일이 없잖어. 그동안 내버린 국방비가 얼마야.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런 낭비가 없는 거지. 만약을 위해 준비해두고 있는 것이 우리의 군대 아냐. 언제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만약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했을 때 그 한번의 전쟁만 막는다면 지금까지 50년이 넘도록 쏟아 부은 국방비는 다 건지고도 남는 거 아냐. 우리 경비들도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구. 당장 도둑이 없다고, 당장 내 주머닛돈 나간다는 것만 계산해 경비를 없애자는 사고방식은 잘못된 거라구. 올해 전쟁 안 일어난다고 국군을 없애자는 논리와 똑같은 이치 아냐. 도둑도, 전쟁도 영원히 없을 수도 있지만, 당장 내일에 안 일어난다는 보장도 없잖어. 모르겠다, 모두 우리보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라서 우리가 그 밑에 있겠지만, 내 생각은 주민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본다.”
무슨 주제를 놓고 하는 이야긴지는 모르지만 하는 이도, 듣는 이도 자못 심각하다. 이야기의 흐름으로 봐, 무슨 문제가 생겨 그걸 두고 갑론을박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언뜻 듣기에 경비원들의 신상문제에 관한 것 같았다.
나는 오씨를 집적거려 물어보았다. 어제 저녁에 참사랑아파트 주민대표자 회의가 열렸다. 부녀자대표도 참석한 확대회의였는데, 그 자리에서 그들은 단지 내 경비원 숫자의 감축 등, 운영과 관리 전반에 걸쳐 현안문제를 까발려놓고 장시간 토의를 했다면서, 불원간에 경비원 반 이상이 보따리를 싸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 것 같다며 지금 한창 서로 이야기중에 있으니까 들어보자고 했다.
용역업체로 넘어갈 운명
101동 3문에 있는 사람이 반론을 들고 나왔다.
“그 얘기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생각이지 주민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거 아냐.”
“그럼, 고양이가 쥐 생각할 줄 알았나.”
“우리 한 달 봉급이 이거저거 합해 70쯤 되잖어. 개인 한 사람, 한 사람한테는 별 거 아닌데 이걸 60명이 넘는 사람들한테 준다고 생각해봐. 6, 7이 42, 한 달에 4000만원이 넘잖아. 1년이면 5억이 넘구. 그런 거금이 자기네들 주머니에서 나가야 하는데 그들로서는 충분히 그런 이야기도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그렇다면 대안은 있는강?”
“대안이라니, 무슨 대안?”
“우리한테 다른 일자리를 구해달라는 게 아니라, 우리를 내보내더라도 경비는 세워야 할 거 아냐.”
102동 사람이 끼어 들었다.
“아까 누군가가 얘기 했잖어. 나도 잠깐 들었는데 같은 내용이더라구. 지금 있는 경비실에 사람 없애는 건 기정사실로 정해놓고, 정문에다 잠금장치를 해서 전 주민이 키를 가지고 다니는 방법이 하나 있고, 다른 하나는 은행창구처럼 카메라를 설치해두고 출입하는 사람들을 감시하는 방법, 그리고 또 하나가 있던데… 아 참, 경비원 한 사람이 문 두 개를 동시에 감시하도록 하는 방법, 이런 안건들이 나왔다는구만.”
“그럼 경비실을 새로 지어야 할 거 아냐.”
“그런 거까지는 우리 소관사항이 아니니까 이야기 할 것도 없고.”
누군가 또 다른 사람이 나섰다.
“나도 다 들었다. 경비원 한 사람이 문 두 개를 지키게 한다고 해도 관리실에서 직영하는 게 아니고 용역업체에다 의뢰해서 한대. 그러니까 경비원들 신분에 대한 책임은 주민들이 일절 안 지겠다는 거지.”
“뭐 용역업체에다가 맡겨?”
“계획을 그렇게 세워놓았다는 구만.”
“용역업체 사정은 내가 잘 아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봉급의 3분의 2밖에 못 받는다. 그 사람들이 중간에서 또 잘라먹어야 할 거 아닌가.”
“갈수록 큰 길이 나와야 하는데 이건 첩첩산중으로만 들어가고 있으니, 원.”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말이 나왔나. 지금까지는 조용했잖아.”
“조용한 게 아니고 속에 들어앉아 있었다고 봐야지.”
“우리 경비원들한테 불만이 있는강?”
“불만 있을 게 뭐 있어. 내가 알기론 아무 것도 없지 싶다.”
“그야 알 수가 있나. 우리 문제인지, 자기네들 문제인지.”
“자기네들 문제라면?”
“형편이 곤란하다는 거겠지. 세상에 제 주머니 털어내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돈이란 건 언제나 가진 사람들이 더 쿠린 법인데.”
“그렇기도 하겠지.”
“이런 일은 서로 상의해서 하는 일도 아니잖아. 나가라면 나가야지.”
“그야 물론이지. 서로가 일방적이잖아. 어디 우리는 나갈 때 주민들하고 협의해서 나가나, 뭐. 낼이라도 안 나오면 그걸로 끝나는 건데.”
“그나저나 이 나이에 나가서 또 뭘 해먹지.”
“기똥차는 소리만 들리는 구랴.”
“춘삼월 호시절은 이제 다 지나갔다는 건가.”
“좋도록 하라구 그래. 절간이 미우면 중이 나가야지 별 수 있어.”
“텔레비 보지 마라, 신문 보지 마라 할 때 감이 잡히더라구.”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 했는데 밥 한 숟가락 얻어먹기가 왜 이렇게 힘드는지 모르겠구랴.”
어느 틈에 쉼터는 경비원들 신세타령의 광장이 되었다. 입 달린 사람들은 한마디씩 다 던졌다. 어떤 말들은 찾아갈 주인을 잃어 허공에 떠다니다가 사라지기도 했다.
“IMF 때문이긴 하겠지만 모두 어렵긴 어려운가 보더라. 우리 골목엔 관리비 연체된 사람들이 여럿 있더라구. 서너 달씩 못 내는 이도 있구.”
“그건 그래. 우리 골목에도 전기 끊긴 사람들이 있다. 50평 아파트에 살아도 겉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텅 빈 사람들이 많은가봐.”
“원래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이라구 했어.”
“사람 사는 거, 다른 데 없니라. 미국에 가면 허리 아파 돈 못 주울 줄 알지만 그것도 아냐. 콩나물 시루 속에서도 누워 크는 놈이 있구. 모두 그래그래, 살아가는 거라고 보면 돼.”
“그나저나 환갑, 진갑 다 지냈는데 이제 어디 가 구걸하지.”
“이젠 내 입 하나뿐인데 설마 그거야 건사 못 하려구.”
“설마가 사람 잡는다구 했어.”
“모두 살 만큼 살았잖아. 자식 새끼도 다 만들었고. 오늘 간다고 해도 크게 서운할 건 없지 뭐. 안 그래?”
“그래도 이 좋은 세상, 평균 수명은 살고 가야 덜 원통할 거 아냐.”
누가 사인을 제대로 하지 않고 가지고 갔는지, 남은 관리비 고지서 숫자와 수불 명세서의 여백이 맞지 않아 혼자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반장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고 물었다..
“1501호 사람 뭐 하는 사람이야?”
“왜 그러는데요?”
“글쎄, 뭐 하는 사람이냐니까? 이름이 김동수 같던데”
“선생님인데요.”
“젠장헐, 교육자도 그런 짓을 하나.”
입이 돌아가도록 빈정거렸다.
“이게 증거야. 그 사람한테 얘기 좀 하라구. 쓰레기는 쓰레기봉투에 넣어서 자기 동 앞에 있는 지정 수거함에다 버리라구 말야. 그 사람 쓰레기를 어디다 버리는 지 알아? 이게 그 양반이 버린 봉투 속에서 나온 거라구.”
반장이 내민 것은 인쇄된 주소가 박힌, 구겨진 각봉투였다. 김동수란 이름이 거기 박혀 있다. 아파트단지 정문 경비실 옆에는 두 개의 공중전화 부스가 있다. 그 옆에는 못쓰는 전화카드라든지 통화를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버리기 쉬운 담배꽁초, 휴지조각 따위를 버릴 수 있도록 조그만 휴지통을 하나 놓아두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똑같은 까만 비닐봉지가 매일 하나씩 나왔다. 쓰레기로 가득 차서 배가 볼록한 봉지였다. 때론 음식쓰레기도 담겨 나왔다.
이는 분명히 규격 쓰레기봉투를 아끼기 위한, 다시 말해 비용을 부담하지 않고 쓰레기를 버리겠다는 얌체족의 행위가 분명했다. 반장이 범인을 잡기 위해 잠복근무에 들어갔다. 오늘 오후 문제의 휴지봉투 버리는 사람을 현장에서 목격, 그 내용물에서 그 각봉투가 나왔다는 것이다.
“아끼는 거는 좋다 이거야. 그렇다면 남한테 피해는 주지 말아야지. 술 한잔만 덜 먹으면 1년 치 봉투도 더 살 텐데 왜 이런 짓을 하냐 말야.”
반장의 인상이 모르고 똥을 밟았을 때의 표정이다.
“이상하다. 그런 짓 할 사람은 아닌데.”
“그 양반 선생이 맞기는 맞어?”
“맞아요. 곧 명예퇴직자들 추려내고 나면 교감이 된다고 하던데.”
“그 학교 교감선생 하나 훌륭한 사람 두겠구랴.”
반장이 계속 빈정거렸다. 그게 사실이라면 빈정거릴 만도 하다.
“어쨌건 내일부터는 그런 일이 안 일어나도록, 당신이 알아서 해요.”
반장은 나머지 일을 나한테 떠넘기고 후딱 나가버렸다. 나는 확인이라도 하듯 봉투를 다시 들고 훑어보았다. 1501호 김동수, 이 봉투가 거기서 나왔다면 김선생이 틀림없다. 그러고보니 아침마다 가방 외에 따로 봉투 하나씩을 들고 나가는 것을 본 듯도 하다.
문제는 이제 어떻게 통보를 하는가인데 기분이 영 내키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 같다며, 서로 웃고 넘어가면 그런 다행이 없는데, 만에 하나, 딱 잡아떼어 적반하장으로 몰아붙인다면 문제는 크게 달라질 수도 있는 일이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경비원으로 들어왔으면 경비업무에만 종사할 수는 없을까 생각해본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나오면서 보니 어린이놀이터에서 누군가가 그네를 타고 있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이 시간에 누가 그네를 타고 있을까. 어림잡아도 새벽 3시는 되었지 싶다. 이상한 일이다.
걸음을 그쪽으로 옮겼다. 그네를 타고 있는 사람은 아이가 아닌 어른이었다. 그네를 탄다기보다 그네에 얹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104동 사람이었다. 확실한 신분은 모르지만 면식이 있는 사람이다. 바로 머리 위에 있는 경비등 불빛이 환하게 비춰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거기서 혼자 뭐 하십니까? 밤이 한참이나 됐는데.”
인사 삼아 한마디 건넸다.
“잠이 안 와서 바람 쐬러 좀 나왔습니다.”
조용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직업의식의 발로일까, 상대방의 말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부정적인, 어떤 음모를 꾸미려고 저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이 세상에는 상상을 초월해서 일어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지금 이 시간대에 잠 안 온다고 어린이놀이터에 나와서 그네를 타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정상적인 사람의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저녁 공기가 이제 좀 차지요.”
“그래서 옷을 일부러 두텁게 입고 나왔습니다.”
이상한 일이다. 이 밤중에 잠 안 온다고 새로 옷까지 챙겨 입고 나온다는 건 더 이해가 안된다.
“오늘 나와보니까 아직 달이 있네요.”
갑자기 남자가 화제를 바꾸었다. 그 소리를 듣고 하늘을 보니 조각달이 아파트 굴뚝에 걸려 있었다.
“아마 그믐께가 다 돼 갈걸요.”
그 말 한마디를 던져놓고 막 돌아서려는데 남자가 말했다.
“실은 어제 저녁이 우리 아이가 죽은 날입니다. 작년에 이 놀이터에서.”
순간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작년 이맘때 일이다. 그날 저녁, 미끄럼틀의 상단부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의 너트가 풀어져 그 밑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을 덮어버렸다. 한 아이가 바로 깔려 죽었고, 두 아이는 크게 다쳤다. 그때 단지 내에서는 난리가 났었다.
“그 아이가 집의 따님이구만요.”
“예. 집에 있으니까 잠이 와야죠. 어른 같으면 제삿날 저녁이 되는데, 그래서 실없는 짓이지만 한번 나와봤습니다.”
나는 새삼스레 자세를 고쳐서는 남자 옆으로 다가섰다. 이야기를 듣고보니 가슴이 뭉클했다.
“그렇지요. 잠이 쉽게 올 턱이 있겠습니까. 자식을 가슴에 묻은 기일인데.”
“마음은 그렇습니다. 영혼이란 게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혹 있다면 이곳에 한번 나타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고, 그래서 나와보긴 했습니다만.”
어린이놀이터에서 죽은 딸 그리는 아버지
남자의 음성이 착 가라앉아 있었다.
“없앤 아이가 첫아이입니까?”
“예. 딸만 둘 뒀는데, 큰아이입니다.”
“사람이 살다가보면 무슨 일인들 없겠습니까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힘든 일이 그런 일이지요.”
“그 아이 듣는데 저놈이 그만 머슴애였으면 참 좋겠다는 얘기를 몇 번 했었지요. 나는 예사로 했는데 걔는 그렇게 안 들었던가 봐요. 그게 자꾸 맘에 걸리네요.”
“그런 얘기 얼마든지 할 수도 있지요. 딸만 두었다면.”
“그런데 하루는 제 방을 들여다봤더니, 아 이놈이 기도를 드리고 있잖아요. 그 내용이 자기를 사내아이로 만들어달라는 겁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했더니 아마 그걸 믿었던가 봐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말을 했던 것이 괜히 후회가 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남자는 죽은 자식으로 인해 만감이 엉키는 모양이다. 아직 마흔도 못돼 보이는데 저 나이에 멀쩡한 자식을 없앴다면 누구든 그럴 것이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 아닙니까.”
“그놈이 얼마나 부담을 가졌으면 그런 걸 기도로 풀려고 했겠습니까. 괜히 부모 노릇도 제대로 못하면서 욕심만 내가지고 철도 안든 놈한테 짐을 지웠지 뭡니까.”
“못할 일이 죽은 자식 나이 세기라고는 하지만, 정말이지 먼저 보내고 나니까 안 생각나는 게 없구만요.”
남자의 이야기가 새벽녘 찬 공기로 해서 더욱 젖어 있었다.
“그야 당연하지요. 그게 부모 마음 아닙니까.”
“먼저 들어가십시오. 경비실이 비어있을 텐데. 난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렵니다.”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돌아섰다. 이럴 때는 괜한 말벗이 되어주는 것보다 혼자 있게 두는 것이 돕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좀 있다가 들어오시죠.”
자기 말마따나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영혼이 있다고 봤을 때 아이의 영혼이, 밤잠을 못 이루고 혼자 그때 자기가 놀던 놀이터에 나와 자기를 찾고 있는 아버지를 본다면 그 영혼이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그만 눈물이 울컥 솟았다.
아파트 모퉁이를 돌아서다가 다시 한번 놀이터 쪽을 돌아다보았다. 그네에 얹혀 흔들리던 남자는 그림자를 달고 미끄럼틀 뒤로 돌아가고 있었다. 직업의식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잠시나마 그 남자를 엉뚱하게 몰아붙인 생각이 조금 송구스러웠다.
저녁 10시가 되는 걸 보고, 경비실 앞 통로입구 공동우편함 밑에 버려지다시피 놓여 있는 버섯봉지를 들고 들어와 냉장고에 넣었다. 그 봉지는 점심시간 직전에 관리소장이 두고 간 것이다.
“강씨, 여기 세 개 두고 갑니다. 너무 부담은 갖지 마시구요.”
소장이 버섯봉투와 함께 던져놓고 간 말이다. 골목 사람들한테 한 봉지라도 팔아야 할 판인데 부담이 안될 수가 없다. 오히려 부담을 갖지 말아달라는 그 말이 사람을 더 부담스럽게 만든다.
우리 아파트 운영위원장 농장에서 나온 것이다. 판로가 신통찮은지 요즘은 한 달에도 두세 번씩 이렇게 갖다놓는다. 골목 사람들은 이제 저 버섯이 어떤 버섯이라는 걸 다 알고 있다. 처음 얼마동안은 묻는 사람도 더러 있더니만 요즘은 그것도 없다. 한동안 게시판에 요란스럽게 붙어있던 버섯 효능에 대한 광고도 요즘은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한 봉지도 팔지 못했다. 그렇다고 더운 날씨에 무작정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이다. 버섯이란 민감한 식품이어서 밖에 하루만 두어도 못 먹는다. 우선 보관은 해둔다지만 한 봉지도 해결하지 못한 것이 나로서는 부담이 안될 수가 없다. 주민들의 무관심이 내 노력 부족으로 비칠까봐 마음이 무겁다.
아파트 옥상에 뜨는 별
묘한 건, 이제 그런 걱정은 내가 할 걱정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소장과 우리와의 관계가 그렇듯, 아마 운영위원장과 소장의 관계도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경비실에 모기향을 피워놓고 밖으로 나왔다. 처서(處暑)에 추석 넘긴 지가 한참이나 되었지 싶은데도 아직 모기가 날아다닌다.
경비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경비실 밖에서 1문 골목 아이들 서넛이 노크를 해놓고 내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시계에 눈이 갔다. 새벽 3시 반쯤 되었다. 이상하다, 한밤중인 이 시각에 아이들이 무슨 일로 무더기로 와서 사람을 깨우는 것일까. 모두 아는 아이들이었다.
“아저씨, 옥상 문 좀 열어주세요.”
“아니, 옥상은 왜?”
“별 좀 보려고 그럽니다.”
“뭐라구, 별을 본다구 했냐?”
“예. 하늘에 별 말입니다.”
“이 밤중에 별은 왜? 여기 밑에서 봐도 되잖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나는 다시 시계를 바라보았다. 얼른 이해가 안 간다. 옥상이란 말에 섬뜩한 생각마저 든다. 평소에도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잠궈두는데 이는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자살이나 실족사 같은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아저씨는 신문도 안 보시나 봐요. 오늘 새벽에 혜성이 우리나라 상공을 지나가잖아요.”
그때서야 생각이 났다. ‘금세기 마지막 우주쇼’라는 제목으로 혜성이 우리 나라 상공을 지나가게 된다는 기사를 어디에선가 본 듯싶다. 날이 맑으면 육안으로도 관찰할 수 있을 만큼 큰 혜성이며, 그 꼬리가 마당비를 연상할 정도로 장관을 이룰 것이라는 내용 하며, 북두칠성 방향에 나타나는데 잘하면 3일간 계속해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매스컴에서 떠드는 것 같았다. 그때는 나도 잊지 않고 한번 봐야지 생각했던 것도 기억났다.
“아, 그래. 그 혜성이 오늘 지나간단 말이지.”
“예. 오늘 새벽부터 보이기 시작한대요.”
어떤 아이의 손에는 쌍안경도 들려있었다. 나는 열쇠꾸러미를 들고 앞장 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직업이 직업인 만큼 만약의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이들은 저마다 고개를 잔뜩 뽑아서는 하늘을 열심히 쳐다보며 무엇인가를 찾았다. 나도 그들을 따라 하늘에다 눈을 박았다.
별이 총총 빛나는 것으로 보아 하늘은 맑았다. 새벽녘 하늘이라 한기도 돌았지만 상큼한 맛도 났다. 참으로 오랜만에 마음먹고 보는 하늘이다. 경비원 생활한 지 2년이 넘지만 옥상에 올라와서 하늘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인 성 싶다. 그만큼 그런 일들과는 무관하게 지내온 생활이었다.
하늘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며 빛났다. 저건 북두칠성, 저건 카시오페아,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가장 반짝이는 저건 북극성, 또 저건 견우와 직녀, 십자성, 삼태성….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며 이것저것 아는 별을 찾고 있노라니 문득 별들과 같이 보냈던 옛날 일들이 떠오른다. 사람이 하나씩 태어날 때마다 하늘의 별도 하나씩 불어나고, 사람이 죽으면 그 별도 같이 떨어진다는, 그래서 별똥별이 떨어질 때마다 누군가가 또 죽었겠구나 생각하며, 내가 내 별이라고 찍었던 별은 언제쯤 떨어질 것인가 마음 졸이던 일과, 아이들한테 쫓긴 반딧불이가 하늘로 날아가 별이 되었다는 동화속의 이야기가 어제 일처럼 새삼스레 아련하다.
은하수가 하늘 가운데로 들어오면 벼가 익는다는 거며, 어느 핸가 처마끝에 달린 멍에다물(삼태성)을 보고 이제 기러기 날아올 때가 되었다며 겨우살이 걱정을 하던 어머니 얼굴도 아른거린다.
어렸을 때의 별은 항상 우리들 곁에 있는 친구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던가. 내게서 별이 멀어지자 어느 틈에 별들과 함께 어울렸던 그 정다운 얼굴들이 모두 별처럼 멀리 떠나버린 것이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놀던 때가 문득 그립다.
그런데 이상했다. 혜성이 나타날 시각이 지났는데도 나타나질 않았다. 처음엔 모두가 혜성을 먼저 찾겠다고 고개를 쳐든 채 하늘을 헤매더니만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자 그만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이날 밤 혜성은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매스컴이 거짓말을 했던지, 아이들이 잘못 알았던지 둘 중에 하나일 것인데 아리송하기만 하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폐휴지가 제대로 분리수거되었는지 확인하러 나가려는데 9층 902호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아저씨 여기 도장 하나 찍어주세요.”
마치 맡겨두었던 물건을 달라는 듯이 말했다. 아주머니가 내민 것은 중학교 다니는 자기 아들의 근로봉사실천 확인서였다. 사회활동의 하나로 학생들이 근로봉사를 하도록 되어 있는데 가끔 우리한테 와서 일(단지 주변의 청소)을 도와주고 확인을 받아가는 일이 있다.
“이거, 학생을 보내지 아주머니가 왜 들고 오십니까?”
“아저씨가 도장을 잘 안 찍어준다고 해서 내가 안 왔습니까. 아저씨는 꼭 일을 시키고 나서 도장을 찍어준다면서요.”
나는 아주머니를 보고 웃기만 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봉사활동도 하지 않고 한 양으로 확인을 해달라니, 그것도 당연한 듯이 말하고 있으니, 아마 적반하장도 이런 건 없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막중한(?) 권한이 우리 경비원들한테 주어졌는지 그것 또한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지난번 방학 때 일이다. 각 학교에서 방학숙제의 하나로, 어디에 가서 하든지 학생 1인당 5시간씩 근로봉사를 하고 확인을 받아오라는 것이 있었다. 개학 하루를 앞두고 902호 학생이 찾아와서는 무조건 도장을 찍어달라고 했다. 내가 그런 게 어디 있냐며 아파트 주변의 쓰레기를 줍게 하고는 도장을 찍어준 일이 있었다.
5시간 해야 할 일을 30분으로 때웠던 것이다. 그만하면 배려할 만큼 배려한 것인데 지금 이 아주머니는 그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는 그냥 좀 찍어주세요.”
아주머니 말은, 당신네들 봉급은 우리가 주고 있으니 모든 걸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달라는 주문이었다.
“그거 집에서 아무 도장이나 찍어줘도 됩니다. 누가 확인하러 오는 것도 아니니까요.”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런 주문에는 이런 대답밖에 할 말이 없다.
“배우는 아이들한테 그런 거짓말을 어떻게 시키나요.”
누가 누구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찍어두 거짓말 하는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때서야 아주머니는 내 말에 뼈가 들어 있다는 걸 눈치 챈 모양이다.
“정말 아저씨, 되게 쫀쫀하시다.”
“모르겠습니다 그런 게 쫀쫀한 건지. 도장은 여기 있습니다. 찍으시죠.”
나는 서랍을 열어 도장과 도장밥(인주)을 내놓았다. 최소한 내 손으로 찍는 것만이라도 피해서 상대방에게 경각심을 주자는 셈에서다. 처음부터, 안한 일을 어떻게 한 것처럼 꾸미냐고 대든다면 반발이 있을 건 뻔한 일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온다는 것도 명약관화한 일이다.
아주머니가 손을 내밀어 도장을 받으려다가 멈칫했다.
“정말 우리 아저씨 보기보다 무섭네요. 차라리 일 다 하고 찍는 게 낫겠습니다.”
잠시 나와 아주머니 사이에 묘한 감정이 흘렀다.
“아주머니, 일루 주세요. 찍어드리죠.”
도리가 없었다. 결국은 웃는 낯으로 찍어주고 말았다. 좋은 게 좋다는 그 동안의 타성이 나를 타이른 것이다.
“아저씨 고마워요.”
조금이나마 내가 버틴 까닭을 알았을까, 그때서야 아주머니는 샌들을 탈탈 끌며 돌아갔다. 아주머니 등에다 대고 빙그레 웃다가 장갑을 찾아 끼고는 밖으로 나왔다.
에필로그 한마디.
‘하룻길을 가도 소도 보고, 중도 본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 사노라면 산전수전 다 겪게 된다는 말로 해석된다. 말은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 분명히 직업의 귀천이 있다.
어느 대기업의 부사장으로 있던 분이 호텔의 종업원으로 근무한다고 해서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보는 사람은 그런 사람도 있는가보다 하고 대수롭잖게 여길지 모르지만 당사자로서는 쉬운 결정이 아니다. 나는 유명인사도 아니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지만 경비원 일을 결정하는 데 고민이 참 많았다. 아무도 그렇게 봐주지 않는 데도 내가 나를 그렇게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을 치지 않고, 비짓국을 먹고도 용트림을 한다’는 체면 위주의 우리네 사고방식이 그동안 나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아파트 경비원이라면 대부분 60세 전후로서, 잘 지냈거나 못 지냈거나 지난날 한 시대의 중심에서, 일선에서 활동하다가 그 끝이 잘 풀리지 않아 새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경비원생활을 하는 2년여 동안, 이 나이에 배운다는 것이 남한테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지만, 나는 적잖은 인생공부를 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