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이 저점 아니다
- 거시지표에 현혹되지 말라
- ‘미시적 펀더멘털’은 위험수준
- 적자생존 원칙이 무시되고 있다
- 2002년 세계경제 전망 어둡다
- 일본형 장기침체 우려
- 외환보유고, 만병통치약 아니다
- 경기부양책은 이제 그만
2001년 3/4분기에 경제성장률이 잠정치로 1.8%의 성장세를 보인 데 대해서도 고무된 분위기인데, 이것도 다시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1960년대 이후의 경제성장률을 보면 1972년에 낮았고, 1980년과 1998년에 마이너스였던 것을 빼놓고는 어느 해나 5% 이상 성장했어요. 따라서 2001년 3/4분기에 전년 동기 대비 1.8% 성장했다는 것은 1960년대 이래 네번째로 낮은 성장률인데, 그걸 두고 ‘예상했던 것보다 좋았다’ ‘앞으로도 더 좋아질 것이다’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희박한 얘깁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지난 1년반 동안 줄곧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면서 ‘1/4분기까지만 기다려라’ ‘2/4분기까지만 기다려라’ 하는 식으로 불확실성을 키웠습니다. 이번에 1.8% 성장률을 기록한 것이 ‘저점’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다음 분기에 성장률이 좋게 나오지 않으면 그때 가서 또 ‘지금이 저점이니 앞으로는 잘될 것’이라고 할 건가요?
김종인 : 1.8%가 ‘예상했던 것보다 좋은 성장률’이라고 하는데, 나는 누가 그보다 더 나쁘게 예상을 했다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정부는 2000년 말부터 계속 좋아질 것이라고만 해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성장률만 놓고 보면 2001년 1/4분기보다 2/4분기가 더 나빴고, 2/4분기보다 3/4분기가 더 나빴어요. 3/4분기의 1.8% 성장률이 2001년 들어 가장 낮은 것이라서 그게 저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무의미한 성장률
우리 경제상황을 경기변동론에서 얘기하는 경기 주기에 따라 설명하는 건지, 그렇지 않으면 정치인들의 희망사항에 따라 좋아진다, 좋아진다고 했다가 좋아지지 않고 더 나빠져서 아주 낮은 성장률을 보이니까 이걸 저점이라고 하면서 막연한 기대를 갖게 된 것인지 면밀히 따져봐야 합니다.
지금 우리 경제는 경기주기로 설명하기도 어렵고, 경기이론으로 경기대책을 세우기도 어려운 여건이라고 봐요. 최근 들어 경기를 진작하겠다는 얘기가 자꾸 나오는데, 경기진작이라고 하는 것은 통화팽창정책, 즉 금리를 내리거나 통화량을 늘리거나 또는 재정팽창정책, 즉 정부지출을 늘리거나 세금을 깎아 가처분소득을 늘림으로써 소비와 투자를 촉진하는 것 등의 방법을 쓰는 것이죠.
그런데 봅시다. 우리는 IMF사태 이후 1998년에 -6.7%의 성장률을 기록했고, 1999년 10.7% 성장에 이어 2000년 상반기까지 10% 이상의 성장률을 보이다가 2000년 하반기부터 성장세가 꺾여 2000년 4/4분기에 아주 낮은 성장률을 기록했으며, 그런 흐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을 경기순환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2000 4/4분기처럼 그 이전까지 10%를 넘던 성장률이 갑자기 반토막이 나서 한자리수로 내려간다는 것은 경기순환이론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돼요. 왜 그런 현상이 생겨났느냐? 그건 금융의 경색에서 비롯된 겁니다. 우리 경제의 구조적 모순에서 발생한 거죠.
금융경색을 해소하기 위해 투입한 돈이 정부 발표대로라면 2001년에만도 50조원에 가깝지 않습니까. 50조원을 쏟아부은 결과가 성장률에 반영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두 차례에 걸쳐 추경예산을 편성했고 심지어는 특별소비세까지 인하해서 소비를 진작하겠다고 했는데, 그런 식으로 경제를 운영한 결과가 성장률 1.8%로 나타난 겁니다. 이런 극단적인 부양책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마이너스로 곤두박질쳤을 성장률을 가지고 ‘예상보다 좋았다’거나 ‘저점이다’ 할 수 있는 건가요? 만약 4/4분기에 지난 1년간 쓰지 않은 예산을 한꺼번에 집행하는 등 정부 지출을 총동원한 덕분에 성장률이 1.8%보다 높아지면 ‘역시 3/4분기가 최저점이었다’고 할지도 모르죠.
정운찬 : 저점이란, 그 시점을 지난 후 적어도 몇분기에 걸쳐 상당한 성장이 계속될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때를 의미합니다. 그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저점이다’ ‘바닥이다’고 한다면 또 다시 정부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고 봐요. 김박사께서 최근의 우리 경제상황은 구조적인 문제로 이해해야지, 경기순환적으로 이해하면 안된다고 하셨습니다만, 경기순환적인 관점에서 본다고 해도 ‘예상보다 높아 저점이다’고 할 때의 ‘예상보다’라는 말은 극히 주의해서 써야 합니다. 경제에 대한 예측은 ‘틀리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믿을 만한 것이 못 되거든요.
어떤 시점을 저점이라고 하려면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가령 과거 30, 40년간의 경험을 통해 볼 때 생산이나 고용, 출하 같은 지표들이 몇몇 분기 동안 이러저러하게 나쁜 상황에 처해 있으면 그 후로는 좋아지더라 하는 통계가 있어서 그것에 입각해 저점이라고 한다면 문제될 게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지금은 그런 기준도 없이 즉흥적으로, 좋게 말하자면 국민에게 ‘실망하지 말고 앞으로 잘해보자’고 하는 의도에서 ‘지금이 저점이니 앞으로는 잘될 것이다’고 하는 것 같아요. 경제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로선 해서는 안 될 말이죠.
방향 못잡는 경제정책
김종인 : 정부가 성장률, 고용률, 국제수지, 물가상승률 같은 거시지표에 너무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요. 거시지표가 경제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으려면 그 나라의 경제구조가 안정적이라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경제의 전반적 구조가 굉장히 불건전해서 언제 흔들릴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정책을 어떻게 움직이냐에 따라 일시적으로는 거시지표를 아주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죠.
1997년 IMF사태 직전 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했을 때 우리 정책당국과 경제연구기관, 내로라하는 ‘경제 대가’들이 다들 뭐라고 했습니까? IMF 사태 1∼2주 전까지만 해도 ‘한국경제는 펀더멘털이 튼튼해서 절대로 외환위기를 겪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때 얘기한 ‘펀더멘털’이라는 게 뭡니까. 거시지표 갖고 얘기한 거예요. 성장률과 물가상승률이 적정하고, 고용이 정상적이고, 국제수지에 큰 문제가 없으니까 거시지표, 다시 말해 펀더멘털에 이상이 없다고 했습니다.
가령 기업들이 계속해서 투자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하면 거시지표로 본 펀더멘털은 좋아져요. 기업인들이야 늘 투자의욕이 왕성하고 남보다 앞서가야겠다고 생각하니까 수익과 관계없이 투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1980년대에 그런 현상이 눈에 띄게 나타났죠. 기업들은 수익이 있냐 없냐를 따지지 않고 단지 세(勢)를 불리는 식으로 시설투자를 늘려갔고, 금융기관은 계속 돈을 공급해줬습니다. 그렇게 투자를 계속하니까 지표상으로는 성장률도 높아지고 고용률도 높아졌던 겁니다. 수출도 마찬가지예요. 수익을 생각하지 않고 밀어내기 식으로 수출하면 수출고야 당장 좋아지죠. 그렇지만 수익이 나지 않으면 결국 그 차액은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 메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악순환이 거듭된 끝에 IMF사태를 맞게 된 것 아닙니까.
기본적인 구조가 건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소위 돈의 흐름에 의해 나타나는 성장률이나 고용률 같은 것은 까딱 잘못하면 경제를 또 한번 어려운 국면으로 끌고갈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어요. IMF사태를 유발한 근본적인 요인을 제거하는 작업이 과연 완료됐을까요? 구조상으로 나타난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하고 건전한 바탕 위에서 경제를 성장시키고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어느 정도 고통을 감내할 각오를 하고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너무 부드러운 해결책만 강구하다 보면 미래의 코스트가 커집니다.
IMF사태 이후의 경제정책을 보면 그 기본 방향이 너무 단기간에 변했어요. IMF사태 직후에는 ‘구조조정만이 살 길이다’고 하더니 불과 6∼7개월 후에는 ‘구조조정을 완료했다’고 했어요. ‘구조조정을 마쳤으니 경기부양으로 가면 모든 게 끝난다’고. 그러다 경기가 좀 좋아 보이니까 ‘이젠 경기의 연착륙만 하면 된다’고 했어요. 그러다 또 문제가 생기니까 제2차 구조조정을 하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더니 2차 구조조정이 ‘4대 개혁’으로 둔갑해서 2001년 2월 말까지 4대 개혁을 완료하고 그 후로는 경제가 정상화된다고 했습니다.
2월 말에 와서 4대 개혁이 완료됐냐고 물으니 ‘완료는 안됐지만 4대 개혁의 기본틀은 잡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 이후에도 4대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했는데, 과연 2001년 3월부터 지금까지 4대 개혁이 얼마나 제대로 추진됐을까요? 한국경제의 장래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한다면 경기가 저점이냐 아니냐, 성장률이 1% 더 높으냐 낮으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무엇이 ‘펀더멘털’인가?
정운찬 : 경제를 평가할 때는 원론적으로 거시적 시각과 미시적 시각이 있습니다. 거시적 시각은 경제라는 큰 숲을 멀리서 망원경으로 바라보는 것이고, 미시적 시각은 그 숲을 구성하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 간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거시적 시각은 거시경제지표, 즉 경제성장률, 물가상승률, 국제수지 같은 것들을 보는 것이고, 미시적 시각은 경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기업의 수익률이나 부채비율, 국제경쟁력, 기업활동의 투명도 등을 보는 것입니다.
과거 40년 동안 한국의 거시경제지표는 그리 나쁘지 않았어요. 해마다 성장률이 거의 10%에 가까웠고, 물가상승률도 1960∼70년대에는 20∼30%씩 됐지만 1980년대 이후에는 비교적 괜찮았습니다. 국제수지는 상당 기간 적자였지만, 1980년대 후반 몇 년, 그리고 최근 몇 년 동안은 흑자를 기록하지 않았습니까. 거시경제지표만 보면 한국경제는 모범생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미시경제적으로 보면 기업의 수익률, 예를 들어 총자산수익률(ROA) 같은 게 외국에 비해 아주 낮고 반면에 부채비율은 높아요. 기업활동의 투명도도 낮은 수준입니다. 이렇게 미시적으로 보면 형편없는데 어떻게 거시경제지표는 그렇게 좋을 수 있냐고 의문을 갖는 이들이 많아요. 그래서 ‘한국경제의 수수께끼(Korean Economic Puzzle)’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런 상황, 즉 미시적으로는 체질이 허약한데 거시적으로 좋은 상황은 오래 지속되기 힘들기 때문에 미시적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오래 전부터 했어야 합니다. 그걸 못해서 결국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지경에까지 도달한 겁니다.
시장기구가 상당 수준 정착되고 자본주의가 성숙한 나라에서는 거시경제지표만 보고도 잘된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에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이런 나라에서도 거시경제지표가 단기적으로는 중요하지만, 중장기적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하려면 미시적인 부문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미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펀더멘털은 우리에게는 펀더멘털이라고 할 수 없어요. 시장제도가 확립되지 않은 나라에서는 미시적인 것이 펀더멘털이기 때문이죠. 구미 경제학자들이 쓰는 말을 그냥 빌려와서 ‘펀더멘털이 좋으니 문제가 없다’고 하는 것은 경제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밖에요.
거시경제지표는 나빠야 좋은 것이니 나쁘게 만들자는 게 아닙니다. 거시경제지표와 구조조정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면, 거시경제지표가 좀 나빠진다 해도 구조조정이 잘만 이뤄진다면 그게 더 바람직하고 장기적인 성장을 기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둘 다 좋으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미시적 구조조정을 택해야 된다는 겁니다. 펀더멘털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이슈화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종인 : 일본과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방세계에서 경제를 가장 잘 운영했다는 나라들입니다. 그런데 최근 아시아에선 일본경제가, 유럽에서는 독일경제가 진통을 겪고 있어요. 두 나라의 경제여건이 악화한 것은 구조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금융에서부터 일반 제조업 분야, 노동 분야 등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모든 분야가 다 구조적으로 문제가 됐어요. 우리 상식처럼 거시지표만 보면 그들도 고민할 이유가 없죠.
왜 일본이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10년 동안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까. 그들도 초기에는 ‘이건 일시적인 현상이고, 경기대책만 세우면 금방 해결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1991년부터 경기대책을 내놓은 게 10차례가 넘어요. 정부의 재정적자를 통해 공공사업을 일으켜 경기를 회복시키려 했죠. 그랬는데도 수렁에서 못 빠져나왔어요. 10년 동안 기껏 성장률 1%를 좀 상회하며 근근히 현상유지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1991년에 GDP대비 61%쯤 되던 재정적자가 지금은 130%에 가까워요. 그렇게 재정적자를 감수해서 부양한 경기가 일본 경제의 효율을 향상시키지도 못했습니다. 아직도 구조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고요.
우리도 어설프게 구조조정을 하고 나서 그걸로 끝났다고 하면 일본처럼 될 수밖에 없어요. IMF체제 이후 4년 동안 금융권에서도 부실채권이 어느 정도 축소됐고, 기업들도 상당수 퇴출됐고, 기업 재무구조도 좀 개선된 게 사실입니다. 구조조정을 전혀 안했다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정상화하려면 아직도 많은 시일이 필요합니다. 이 상황에서 단기적으로, 부드러운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정책을 쓴다면 우리도 일본같이 안 되라는 법이 없어요.
또 한 가지 꼭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가 근대 경제를 도입해 운영해온 과정에서 재정적자가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을 한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IMF사태 이후 금융과 기업부문의 부실이 재정으로 옮겨갔습니다. 공적자금이다, 정부 본예산의 적자다 해서 엄청난 자금이 정부의 부담, 다시 말해 국민의 부담이 된 겁니다. 이른바 ‘부채전환(debt-debt swap)’이죠. 지금 구조적인 문제를 시급하게 해결하지 않으면 공공부문의 부담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어요. 정부의 돈은 내 돈이 아니니까 나중에 다음 세대가 세금을 내서 갚으면 된다는 겁니까?
1년에 50조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정부라면 적자재정을 통해 경기를 부양할 생각은 않는 게 정상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쏟아부은 공적자금이 성장률을 이나마 유지하는 데 기여한 겁니다. 내수를 진작하는 게 상책이라며 특소세도 내렸지만 그건 일시적으로, 3/4분기, 4/4분기의 소비수요를 증대시키는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 재정에 부메랑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해요.
한국경제는 해외 의존도가 높다고 하지 않습니까. GDP 성장에 대한 수출의 기여도가 50%쯤 된다고 해요. 그런데 미국 일본 유럽이 다 경기가 나쁘니 우리 상품에 대한 수입수요가 떨어질 것 아닙니까. 우리가 국제경제에 상당한 정도로 통합되어 있어서 국제경기상황이 우리 경제성장률의 50%를 좌우한다면 우리도 국제적인 흐름을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무턱대고 경기부양책을 펼 게 아니라 앞으로 국제시장에서 경쟁력 우위에 서려면 경제의 기초를 어떻게 개선해나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서 구조문제에 더 큰 비중을 둬야 한다고 강조하는 겁니다.
단기·장기 구조조정 모두 미진
정운찬 : 구조조정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단기적이고 미시적인 구조조정은 성과가 좋지 않은 기업을 재편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재편’이란 아주 넓은 의미를 갖는데, 기업을 없애버리든지 기업의 특정 사업부문을 없애거나 파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장기적, 거시적인 구조조정은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국가 경제 운영방식을 뜯어고치는 것입니다.
한국경제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근본적 원인은 중복과잉 투자로 인한 중복과잉 시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금 흐름(cash flow)을 나쁘게 합니다. 거대한 시설을 움직이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그 시설을 돌려 만든 물건을 팔아서 버는 돈보다 많으니까요. 폐쇄경제라면 그렇게 돼도 자기들끼리 다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개방경제에선 현금 흐름이 나쁘다는 것은 경상수지 적자를 의미하고,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되면 과다 외채로 허덕이게 됩니다. 그래서 또 외국에서 빚을 얻어오는 악순환이 계속되죠.
따라서 단기적으로는 과잉시설을 가지치기해야 하고, 장기적으로는 과잉시설이 발생하지 않도록 근원적인 치료를 해야 합니다. IMF체제 이후 과잉시설에 대해 가지치는 작업을 충분히 했냐를 따져볼 때 여러가지 기준이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이자보상배율입니다. 경기상황에 따라 다소 달라지겠지만 현재 이자보상배율이 1 미만인 기업이 25∼35%, 1 미만인 상황이 3년 이상 계속된 기업도 5∼10%나 됩니다.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내는 상황이 3년 이상 계속된 기업이 버젓이 살아 있다는 겁니다. 이건 단기적, 미시적 구조조정이 제대로 안됐다는 얘기죠.
장기적으로는, 과잉투자와 그로 인한 과잉시설이 나타나지 말아야 할 터인데, 그걸 제어하는 게 금융입니다. 금융이 자원배분의 핵심적 역할을 하거든요. 실물부문에서 기업의 현금 흐름이 나빠 원금은커녕 이자도 못 갚는 지경이다보니 덩달아 은행까지 부실해집니다. 그런데 부실한 은행은 기업이 융자신청을 했을 때 자기 의지대로 ‘예스’나 ‘노’를 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공적자금을 투입해서라도 금융기관의 부실을 해소하려고 했던 것인데, 어쨌든 부실채권의 비중이 좀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요. 거기엔 여러가지 이유가 있어요.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입해 부실채권을 사주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예금금리와 대출금리의 차가 커져서 번 돈으로 대손상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대출금을 상환의무가 없는 자본금으로 바꿔주는 출자전환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부실이 다소 개선되긴 했지만, 공식적인 수치는 실제 수치보다 낮게 잡힌 것일 텐데도 아직 부실채권 수치가 상당히 높아요. 은행권만 보면 부실채권 비중이 약 6%, 금융권 전체로는 아직도 10%에 육박하거든요. 금융기관들이 기업들의 투자계획에 입각한 융자신청에 대해 ‘노’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 단기적으로 가지도 아직 덜 쳐냈고, 장기적으로 금융이 건실해 실물부문의 새로운 부실요인을 막아줄 힘이 있는 것도 아니므로 현재로선 구조조정이 안됐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구조조정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한편으로는 실업을 초래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그런 고통을 견뎌내면서 구조조정을 할 것이냐, 아니면 그게 고통스러우니 구조조정도 하지 않을 것이냐를 분명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지난 4년 동안은 그 고통이 두려워 구조조정을 게을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외환유동성 위기는 넘겼지만…
김종인 : 요즘 IMF사태를 유발하는 데 큰 책임이 있는 대그룹집단들에 대해 출자총액제한을 풀어줘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성장률이 너무 내려가는 것 같으니 그들에게라도 기대서 어떻게 한번 성장률을 높여볼까 하는 심정에서 그러는 것 같아요.
하지만 세계경제의 전반적 추세가 좋지 않아 수익이 기대되지 않는데 아무리 큰 기업들이라고 선뜻 투자에 나설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러나 이들은 차제에 자기네들에게 장애물로 작용할지도 모르는 그런 규제를 없애고 싶어하죠. 정부가 이렇게 대기업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그런 발상을 하는 것을 보면 정책의 일관성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상황에 따라, 정치적인 편의에 따라 말을 마구 바꾸고 경제상황에 대한 판단도 중심을 못 잡고 흔들려요.
S&P나 무디스 같은 데서 한국경제의 신인도를 높여주겠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평가 자체가 한국경제의 본질을 해결해주리라는 기대는 금물입니다. 세계경제는 사실상 2000년 하반기부터 꺾였습니다. 미국이 9·11테러 이후부터 경제가 갑자기 추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2000년 하반기부터 IT산업분야에서 과잉투자로 인해 수익률이 떨어지는 등 하강 추세로 접어들었다가 9·11사태로 하강 속도가 다소 빨라졌을 뿐이에요. 엊그제 보도를 보니 ‘국제경기가 빨리 회복될 것 같으니 우리도 성장률을 높여 잡을 수 있고 경기 호전 시기도 앞당겨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더군요.
정운찬 : 외국에도 낙관론자가 있는가 하면 비관론자도 있겠지요. 미국의 폴 오닐 재무장관 같은 사람은 정부의 입장 때문인지 계속 낙관론을 펴고 있고, 프린스턴대 폴 크루그만 교수 같은 사람은 내년까지도 미국경제가 회복되기 힘들거라고 하고 있어요.
낙관과 비관이 공존할 수는 있겠지만, 경제사를 보면 기술개발이라는 새로운 물결에 힘입어 조성된 호황은 길어야 10년 정도 유지됐어요. 그런 경험으로 본다면 9·11테러가 있었든 없었든 IT산업을 중심으로 한 ‘신경제’ 거품이 꺼지면서 미국경제는 어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데, 테러 때문에 단기간은 더 악화될 수 있다고 봅니다. 테러 때문에 미국에서도 정부가 과거보다 훨씬 더 깊이 개입하는 등 케인스적 사고가 확산되고 있는 듯해요.
상당기간 미국경제와 세계경제는 어둡습니다. 한국이 이런 상황에서 할 일은 내실을 튼튼히 하면서,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세계경제가 다시 좋아질 때 그 물결을 탈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미래의 성장률이 얼마이고 인플레이션이 얼마냐는 것은 예측하기 힘든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자꾸 관심을 가질 게 아니라 내실을 기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외환위기를 맞은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우리 형편이 좀 나은 게 아니냐고도 하던데, 이것도 다시 볼 필요가 있어요. 그런 나라들의 경제는 러시아 정도를 빼면 보잘 것 없어요. 우리 경제는 규모가 크고 생존능력이 있기 때문에 겨우 버텨나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바로 이때 장기적으로 내실있는 경제를 만들려는 노력이 모자라 안타까워요.
무디스나 S&P가 신인도를 올려준다고 해도 IMF사태를 전후해 신인도가 아주 낮아진 데서 조금 올라간 것에 지나지 않아요. 신용평가기관들이 가장 높이 평가한 것은 우리의 외환보유고입니다. 외환을 보유하는 것은 적지 않은 비용을 수반하지만, 외환보유고가 늘어났으니 이제 한국에 투자하면 최악의 경우라도 본전은 뽑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높이 평가해준 것이죠. 사람들이 저더러 정부나 경제정책에 대해 너무 비판적이라고 하는데, 외환보유고와 관련된 측면은 저도 높게 평가합니다.
비록 비용이 수반되긴 하지만 그나마 1000억달러가 넘는 외환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외국 투자자들의 신뢰, 국가에 대한 신뢰 덕분이라고 봅니다. 제가 2년 전 독일에서 지낼 때 그쪽 사람들은 아시아에서는 물론 유럽에서조차도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든 ‘50년 만의 정권교체’를 대단히 높이 평가했어요. 그걸 이뤄낸 게 우리 국민 아닙니까. 그러니 한국민은 위대하다, 그런 국민이 있는 나라에는 돈을 꿔주고 투자해도 된다는 믿음 때문에 외환보유고가 늘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외환유동성 위기를 극복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그걸 기초로 해서 구조조정을 확실하게 했어야 하는데, 여러가지 징표를 보면 그게 잘 안됐다는 얘깁니다.
외생변수에 의한 위기극복
김종인 : 외환유동성 위기만 극복하면 IMF체제를 극복하는 것으로 착각한 겁니다. IMF체제는 단기적인 외환유동성 위기에서 온 것인데, 국민의 정부 출범과 동시에 뉴욕에서 250억달러의 단기외채를 중·장기외채로 전환시켜주면서 외환유동성 위기는 일단 극복한 겁니다. 그와 더불어 IMF로부터 200억달러 가량의 차관제공도 약속받았고.
우리가 IMF사태를 겪지 않으려면 우루과이 라운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 산업구조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어야 했어요. 우리가 스스로 변하지 못했기 때문에 외부세력으로부터 변화를 강요당한 게 바로 IMF사태입니다. 그러고도 변화하지 못해 4년이 지난 지금도 IMF체제라고 하는 병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의 경제정책은 확고한 중심없이 상황에 따라 유행을 좇아가는 버릇이 있어요. 그러다가 해야 할 일을 놓치고 마는 겁니다. 우리가 과거 30년 동안 경제개발을 해오면서 큰 어려움에 처할 뻔했던 때가 오일쇼크 이후인 1975년과 외채망국론이 제기됐던 1985년인데, 두 번 다 극복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발한 경제정책을 시행해서 그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위기를 기회로 만든 게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 덕분이라기보다는 ‘외생변수’에 의해서였어요.
가령 1975년은 외환위기가 닥쳐올 상황이었는데, 1976년부터 갑자기 중동 건설붐이 부는 바람에 중동에서 들어오는 외화 덕분에 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처럼 보였죠. 1985년에는 외채망국론이 나왔어요. 외채규모가 400억달러 가까이 됐습니다. 당시 인구가 4000만 명 정도여서 1인당 1000달러씩 빚을 지고 있다고 했어요. 그러다 불과 6∼7개월 후에 외채망국론이 자취를 감췄어요. 1985년 9월 플라자협정에 따라 전반적인 환율재조정이 있었어요. 1달러당 230∼240엔 하던 엔화가 150엔대로 떨어지고, 1달러당 3마르크가 넘던 독일 마르크는 1.5마르크가 됐어요. 그런데 다른 나라 화폐들은 그렇게 달러대비 평가절상이 됐는데 우리는 거꾸로 평가절하를 했어요. 그게 우연찮게 수출가격 경쟁력을 높여준 겁니다.
그래서 수출이 좀 되기 시작했고, 1980년대에 이란과 이라크가 전쟁을 하면서 원유생산량을 늘리자 유가가 형편없이 내려앉아 한자리수가 됐죠. 플라자협정 이후 각국은 금리를 내렸어요. 일본, 독일 등은 자국화폐를 지나치게 평가절상한 나머지 수출부진으로 경기가 침체되자 금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죠. 그 와중에 1987년 10월에는 뉴욕증시에 블랙먼데이가 터졌어요. 주가가 폭락하니까 증권시장을 떠받치기 위해 또 이자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3저(低)’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겁니다. 환율, 이자, 기름값이 함께 떨어진 덕분에 1986년부터 1989년까지 국제수지 흑자를 봤죠. 1988년엔 145억달러로 사상 최대의 흑자가 났어요. 그때 우리 정책당국자들이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이제 한국도 곧 채권국이 된다’고 했습니다. 외환개방이다 뭐다 하면서 한참 소란을 피우며 우리가 곧 G7에 들어갈 것 같다는 소리를 했어요. 그러다가 1989년 말에 경제정책 총수가 갑자기 ‘경제위기가 올지도 모른다’고 했죠. 아니, 채권국, 흑자국으로 간다는 나라의 경제가 어떻게 하루 아침에 위기를 맞는단 말입니까?
IMF체제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구조조정이 시급하다고 했다가, 완료됐다고 했다가, 다시 2차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구조조정을 완료했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또 2차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고 나옵니까? 그런 식으로 경제를 운영하니까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겁니다. 원칙이 없고, 원칙이 있다고 해도 지켜지지 않을 것 같으면 불확실성만 높이고 예측가능성이 떨어지죠. 경제주체들이 어떻게 거기에 맞춰 경제활동을 하겠습니까.
정운찬 : 구조조정이 안된 근본적인 원인의 하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몰랐다는 것이에요. 다시 말해 1997년의 한국경제 위기가 겉으로 봐선 외환유동성 위기였지만, 외환유동성 위기를 가져온 것은 경제 체질의 허약성이라는 걸 몰랐어요. 그러니 외환보유고가 늘어나니까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착각한 겁니다. 가정이 파산했을 때도 융자를 받는다든지 하면 문제가 금방 해결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파산에 이른 근본적인 이유를 따져봐야 합니다. 미시적인 펀더멘털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망각했거나 처음부터 몰랐기 때문에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김종인 : 요즘 상황을 한번 봅시다. 9·11테러 이후 가장 걱정하던 게 뭐였습니까. 국제금융시장이 충격을 받을 것이다, 유가가 폭등할 것이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반대였어요. 국제금융시장은 비교적 안정된 상태이고, 주가도 사태 이전 수준으로 회복됐고, 금리는 사상 최저로 떨어졌고, 유가도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환율도 마찬가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겐 지금도 1980년대 말처럼 3저란 말이에요. 그때처럼 3저가 왔는데 왜 지금은 우리 경제에 기력이 없을까요? 경제의 본질이 허약하니까 여기에서 더 뻗어나가질 못하는 겁니다.
정운찬 : 체질이 허약해서 외환유동성 위기를 맞은 것이지, 외환유동성 위기 때문에 한국경제가 어려워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걸 잘 모르거나, 안다고 해도 주위 환경의 변화에 따라 자꾸 잊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어요.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소위 개혁을 담당해야 할 사람들이 변화를 너무 두려워해서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지 않고 우회했다는 사실입니다. 아까 ‘코리언 이코노믹 퍼즐’이란 얘기를 했는데, 비슷한 사례를 구소련에서 찾아볼 수 있어요. 소련은 1917년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약 40년 동안 이른바 ‘외연적 성장(extensive growth)’을 잘해왔습니다. 서유럽 국가들에게 모범이 되기도 했죠. 1930년대 초 미국과 유럽이 공황으로 고생할 때 케인스가 소련의 경제성과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가 공산주의자로 몰리기도 했지요. 소련의 40년이 우리가 겪은 40년과 비슷해요. 소련 경제를 미시적으로 살펴보면 체질이 허약했습니다. 인적, 물적 자원을 합리적 계산없이 마구 갖다 쓰다보니 성장은 잘됐지만, 속은 빈약했던거죠. 그러다 결국 한계에 도달해 정권교체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김종인 : 제가 1980년대에 한·소 경제협력 업무를 담당했고, 소련경제를 공부한 적도 있어 그 내용을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소련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후 1920년대 초반부터 5개년 성장계획을 세워 시행했어요. 그 체제가 1950년대 중반까지는 성장률에서 최고의 효율을 보였어요. 그러다 1950년대 중반에 와서 갈림길에 선 겁니다. 여기서 망하든지, 아니면 변화를 해서 새롭게 더 발전하든지.
스탈린 사후 권력을 잡은 당시 후르시초프가 그 사실을 잘 알았어요. 후르시초프는 변화를 가져오려 했죠. 1957년 제20차 소련공산당대회에서 후르시초프가 이런 연설을 했어요. ‘우리가 이 시점에서 경제 체질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자본주의 경제의 효율을 도입하지 않으면 전망이 없다’고. 그렇게 소련경제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수렴이론’ 같은 게 나왔죠. 그런데 소련 공산당 엘리트, 노멘클라투라들이 기득권이 흔들리자 저항을 한 겁니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1964년에 후르시초프를 축출했죠. 그후 집권한 브레즈네프가 과거 스탈린식의 경제 운영방식을 20년간 계속 답습하다가 결국 1980년대 초에 와서 소련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것이 소련이라는 나라를 와해시킨 가장 큰 요인이 됐습니다.
외환보유고가 너무 많다고?
정운찬 : 일본경제를 소련경제와 비교하는 시각도 있지요?
김종인 : 미국 캘리포니아대에서 연구하다 은퇴한 찰머스 존슨 교수가 ‘일본경제는 말만 자본주의 시장경제이지, 경제 운영방식은 소비에트 스타일과 똑같다’고 했어요. 일본경제도 일정 기간은 엄청난 효율을 기록했어요. 1960년대에 올림픽을 치른 뒤 약간 슬럼프에 빠졌다가 다시 뻗어나가기 시작한 이래 경기변동과 무관하게 성장을 거듭했어요. 관료의 효율에 의해 계속 성장했던 겁니다. 그러나 변화를 정책적으로 수용하지 못해 결국 뒤처질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일본은 국제환경의 변화를 잘 읽지 못했습니다. 1989년에 일본은 최대의 호황을 누렸는데, 그것을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10년(The Lost Decade)’에 빠져든 겁니다.
우리도 그런 일본경제를 그대로 따라가지 않았습니까. 개발연대에는 별 아이디어가 필요없어요. 5개년 계획 세우고 자원 공급하면 되는 거예요. 더욱이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출발했으니 물건을 생산하면 다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죠. 그러나 경제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지면 사람도 변하는 것 아닙니까. 사람들의 욕구가 다 달라져요. 우리도 1990년대 초에 변화를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기업들은 계속 규모만 확대하는 정책을 고수했고, 정부와 금융기관은 아무런 제동장치도 없이 따라간 거예요. 결국 일본과 한국 둘다 오버 커패시티(over capacity) 문제, 그리고 이와 연관된 금융의 부실을 낳지 않았습니까. 소련이 거대한 콤비나트만 잔뜩 만들어놓고 금융권에서 계속 돈 대주니까 효율이 뭔지도, 코스트가 뭔지도 모르고 운영한 것처럼요. 아니, 돈 벌어서 이자도 못내는 사람들이 계속 성장한다는 게 기업가로서 상상할 수 있는 일인가요?
지금 우리 외환보유고가 1000억달러가 넘어 신인도가 올라간다는데, 그건 좋은 얘깁니다. 정부도 이걸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죠. 하지만 외환보유고의 구성요소를 제대로 파악해야 됩니다. 최근 일각에서는 ‘적정 외환보유고가 400억∼500억달러면 되는데 왜 쓸데없이 1000억달러씩 갖고 있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변화를 직시해야 돼요. 과거처럼 자본시장 개방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외환보유고 적정수준을 따진다면 IMF에서 얘기하는 대로 3개월 정도 수입할 수 있는 액수에다가 알파(α)만 보태면 되죠. 우리의 현재 수입규모로 볼 때 400억∼500억달러면 충분하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자본 유출입이 자유화됐기 때문에 외국자본이 우리나라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 증권시장 시가총액의 35%가 외국인 소유예요. 시가총액을 250조원으로 잡으면 외국인 소유 주식이 90조원, 근 700억달러나 돼요. 게다가 채권시장에도 150억달러쯤 들어와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것만 해도 800억달러가 훨씬 넘어요. 이 돈은 우리 경제상황이 어떻게 변하냐에 따라 그때그때 들락거릴 수 있습니다. 그런 사정도 모르면서 외환을 너무 많이 갖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니 답답할 수밖에요. 그러면서 우리처럼 IMF사태를 겪은 태국과 인도네시아를 한국과 비교해선 안돼요. 그런 나라들과 비교하는 건 창피한 일입니다.
정운찬 : 아세안 국가들의 GDP를 다 합친 게 한국의 GDP 규모와 비슷합니다. 그쪽 나라들보다 잘했다는 건 의미가 없어요.
‘진정제 효과’엔 한계
김종인 : 인도네시아나 태국 같은 나라는 외국으로부터 단기자금을 차입해서 부동산에다 쏟아부었어요. 우리는 일부 종금사들이 해외에서 러시아나 동남아 국가에 투자했다가 날리기도 했지만, 단기차입금의 상당 부분을 그나마 시설에 투자했기 때문에 팔아먹을 거라도 좀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런 나라들과 비교해서 잘했다 어쨌다 하는 건 스스로를 비하하는 거예요.
정운찬 : 후르시초프에겐 개혁의지가 있었지만 엘리트들이 변화를 거부해 소련경제가 실패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경우에도 이 정부 초기에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어요. ‘모두 다 살려고 하면 모두 망한다’고. 그런 걸 보면 개혁과 구조조정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는 상당했던 것 같은데, 그게 퇴색한 것은 경제운영을 담당하는 고위관료들이 그걸 따라오지 못했거나 변화를 너무 두려워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김종인 : 경제정책을 담당하는 사람은 경제라는 환자의 병을 고치는 의사입니다. 병을 고치려면 환자의 병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진단해서 올바른 처방을 해야 합니다. 외과적 치료가 필요하냐, 내과 치료만 해도 되냐를 판단해야죠. 가령 속이 곪아들고 있으면 수술로 떼어내야 치료가 됩니다. 그런데도 자꾸 내과 처방만 하면 환자는 결국 죽게 돼요. 경제도 마찬가집니다. 외과 처방이 필요하면 외과 처방을 해야 되는데, 바쁘다고 진정제만 자꾸 먹여서야 되겠어요? 공적자금이 바로 진정제예요. 경기부양책과 공적자금은 진정제 노릇밖에 한 게 없어요. 어느 시점까지는 진정제 효과로 안 아플지 몰라도 결국은 다시 도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꾸 금융경색 현상이 생기지 않습니까.
IMF사태 후 은행에 감자(減資)해서 공적자금을 집어넣었는데, 2년쯤 지나니 금융경색이 와서 또 감자해서 공적자금을 추가 투입했어요. 구조조정을 하라니까 실업을 걱정합니다만, 예컨대 다리를 절단해야 목숨을 건질 수 있는데, 그게 두려워 미적거리다간 병이 더 악화되죠. 무릎 아래만 잘라도 될 것을 다리를 다 잘라야 하는 수가 있어요.
실업이 두렵겠지만, 실업은 별개의 방법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공적자금을 투입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공적자금이라는 진정제를 투입해서 어느 정도 통증을 가라앉히고 체력을 회복했으면 구조조정이라는 외과수술을 단행했어야죠. 그랬으면 투입할 공적자금도 절약했을 것이고, 그 돈으로 제대로 된 실업대책도 마련하고 새로운 산업도 일으킬 수 있었다고 봐요.
적자생존과 투명성
정운찬 : IMF사태 직후에는 실업자가 100만 명이 넘었는데 지금은 70만 명쯤 된다고 합니다. 4인 가족 한 달 최저생계비가 98만원이라니까 100만원으로 잡고, 실업자 1인당 매달 100만원씩 준다면 실업자를 100만 명으로 쳐도 한 달에 1조원, 1년에 12조원이면 됩니다. 물론 12조원은 큰 돈이죠. 하지만 공적자금 150조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선은 실업이나 다른 부작용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대신 사람이 고통받는 것을 방치할 순 없으니까 실업수당을 준다든지 하는 방법을 고려해야겠죠. 실업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그밖에 직업훈련, 정보제공 등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뒤따라야겠죠.
구조조정을 다른 말로 하면 적자생존의 원칙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원칙은 실물과 금융부문에 다 적용돼야 하는데, 그간 실물부문에서는 대우나 동아건설 등의 경우에서 보듯 타이밍상 늦기는 했지만 원칙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던 듯하지만, 금융부문에서는 작은 금융기관 말고는 금융의 특수성, 즉 금융기관이 문을 닫으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인지 그 원칙을 제대로 적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좋건 싫건 20년이 될지 30년이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앞으로 당분간은 미국식 자본주의가 세계의 룰이 될 터인데, 그것을 무시하면 세계경제 속에서 살아남기 힘들어요. 현재 세계 자본주의의 두 가지 기본룰은 적자생존의 원칙과 투명성의 제고입니다.
지금까지는 현재 경제상황에 대한 분석, 구조조정의 필요성, 구조조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이유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눴습니다. 이제 2001년을 보내는 마당에서 새해 경제 전망과 경제정책 등으로 화제를 돌려볼까요?
김종인 : 정부는 지금 성장률이 예상보다 좋다고 보고 있어 2002년 성장률을 4%선으로 잡을 것 같더군요. 특히 미국 경기가 ‘V’자를 그리면서 회복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미국이 3/4분기에 -1.1% 성장했는데, 4/4분기엔 더 나빠질 것으로 예상되니까 4/4분기를 바닥으로 보는 거죠. 4/4분기가 바닥이면 2002년 1/4분기는 조금 나아지지 않겠나, 그렇게 되면 2/4분기는 더 나아지지 않겠나 하는 식으로 보더군요. 또한 현재 미국 금리가 40년 만에 최저수준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게 별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2001년 초부터 11차례나 금리를 내렸어요. 연6.5%로 시작해서 1.75%까지 왔고, 어쩌면 앞으로 더 낮출 수도 있는데 그렇게 금리를 내린 것이 경제에 별로 긍정적 효과를 주지 못했어요. 잘못하면 미국 금리도 일본처럼 돼서 경기에 아무런 영향을 못 주는 상황에 이를지도 몰라요.
9·11테러 이후에도 단순히 경기순환적인 차원에서 보면 걱정할 까닭이 없어요. 문제는 이 사건이 미국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엄청난 불안심리를 조성했다는 것입니다. 2차대전 이후 지금껏 미국은 신성불가침의 나라,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로 여겨졌는데, 그런 사건이 터져 불안감에 빠지고, 불확실성이 확산되다보니 그들의 경제활동, 심리상태가 과연 언제쯤 회복될 것인가를 경제이론으로 설명할 수가 없게 됐어요. 완전히 회복돼서 투자자나 소비자가 왕성하게 투자의욕과 소비의욕을 보이려면 꽤 시간이 걸릴 수도 있죠. 그리고 그간 미국경제를 주도했던 IT산업이 아직도 과잉시설 상태이기 때문에 이 부문의 조정기간도 꽤 걸리지 않겠나 싶어요.
이렇게 볼 때 저는 2001년 4/4분기를 고비로 해서 2002년에 미국 경기가 급작스럽게 호전될 것으로는 보지 않아요. 미국 경기가 좋아지지 않으면 유럽 경기도 마찬가집니다. 유럽경제도 이제 유로 단일 통화권이 돼서 미국 경기와 관계없이 자생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게 최근에 와서 입증됐어요. 이렇게 보면 국제적인 측면에서 우리 경기가 회복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줄 만한 요인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2002년 5월에 시작되는 월드컵대회로 인해 소비수요가 상당히 촉발될 수 있고, 6월의 지자체 선거, 12월 대통령 선거 등에 따라 경기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예산의 조기 집행 등으로 성장률이 다소 호전될 가능성은 있어요. 그러나 거기에 너무 매달리다 본질을 상실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정운찬 : 1990년대 말 미국의 소비지출과 IT 투자가 급증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GDP 대비 가계 및 기업 부채비율이 굉장히 높아졌습니다. 1920년대 후반의 공황기와 거의 비슷한 수치를 보이고 있어요. 그만큼 미국경제가 불안정하다는 얘기죠. 그 외에도 앞길을 어둡게 보도록 하는 조짐이 많아요. 내년에 미국경제가 몇%나 성장할지는 모르지만, 우리 경제가 굉장히 어두운 가운데서 긴 정치일정을 보내야 하는데, 그 와중에 정부가 또 여러가지 경기부양책을 쓸 게 틀림없고, 그렇게 된다면 성장률은 좀 살아날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인플레이션이 걱정됩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경제 전망이 어두운 마당에 우리가 경기부양책을 쓰면 국제수지에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외 수요가 클 때 경기를 부양하면 물건을 많이 만들어도 다 내다팔 수 있지만, 물건을 팔 데가 없는 상황에서 경기를 부양하면 물가와 국제수지 면에서 여러가지 불안정 요소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경제와 심리
김종인 : 정책당국자들이 처음엔 ‘먼저 금융부문 구조조정을 하고 그 다음에 금융기관이 실물부문의 구조조정을 하도록 하겠다’고 타임테이블을 내놓았어요. 그렇게 하다가 공적자금 부실문제가 생겨난 거예요.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은 실물부문을 단호하게 구조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서로간의 인간적인 관행도 그랬고, 금융기관이 실물을 정리하면 자기네의 부실이 더 늘어나니까 하려고 들지를 않아요. 그걸 적당히 유지해가야 자기 책임이 덜해져요.
정부가 해야 할 일을, 구조조정을 할 인센티브가 없는 금융기관에 자꾸 떠맡기니 무슨 구조조정이 되겠습니까. 정부가 돈을 집어넣으면 정부가 알아서 구조조정을 해야지 왜 금융기관더러 하라고 합니까. 정부가 할 때까지는 확실하게 하고 손을 끊어야 할 때는 끊도록 한계를 정했어야 해요. 그러지 않고 뒤에서 자꾸 어물쩡거리는, 과거와 똑같은 금융운영을 하다가 이렇게 된 겁니다.
정운찬 : 구조조정 문제는 지금처럼 나아간다면 선거일정과 겹치면서 더 지지부진해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대통령이 이미 여당 총재도 그만둔 마당에 정치일정과는 관계없이 원칙에 입각한 구조조정을 계속해야 역사에도 그 기초를 제공한 인물로 남고, 다음 대통령이 일을 좀 쉽게 하도록 틀을 만들어줄 수 있습니다. 남은 임기 1년 동안 구조조정에 전력을 다 해야 된다는 당위적인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김종인 : 대통령 임기가 1년밖에 안 남았으니 ‘경제정책을 마무리해야 된다’고 하던데, 경제란 마무리를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한국경제는 어느 시점에 가서 끝나는 게 아니고 지속적으로 가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 2002년 경제도 한국의 중·장기 경제정책에 포커스를 맞춰서 운영해야 합니다. 중·장기 발전방향을 놓고서 2002년에 할 일은 뭐다는 식으로 일을 해야지, 선거가 있다고 정치적인 목적으로 뭘 해봐야 정치적인 효과도 없어요. 우리 국민이 그렇게 우둔하질 않습니다. 재정을 운용하거나 해서 돈을 더 집어넣으면 금방 정치적 성과가 나타나던 시절이 아니에요. 국민이 워낙 그런 정책에 많이 속아왔기 때문에 웬만큼 얘기해서는 곧이듣질 않아요.
정치인들이 말인즉슨 ‘경제정책은 심리학’이라고 합디다. 하지만 경제정책이 심리적 효과를 거두려면 반드시 먼저 신뢰를 확보해야 해요. 신뢰를 확보하지 못하면 심리적 효과가 오히려 부정적으로 나타납니다. 몇 분기에 뭐가 되고 몇 분기에 뭐가 된다고 했다가 실제로는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는데, 앞으로도 그런 식이라면 무슨 정책을 발표할 때마다 저건 또 무슨 속셈인가 하고 회의를 품게 됩니다. 경제정책에서 중요한 게 ‘시그널 이펙트’입니다. 정책이 발표되면 그것이 경제주체들에게 ‘아, 앞으로 경제가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겠구나’ 하는 신호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신뢰를 상실한 경제정책은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죠.
정운찬 : 2001년 2월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 끝 무렵에서 ‘경제는 심리’라는 말을 했어요. ‘경제는 잘된다고 하면 잘되는 겁니다’라면서 마치 시카고대 루카스 교수의 말처럼 얘기했어요. 그런데 루카스 교수는 사실 그 반대의 의미로 말한 겁니다. 정보가 불완전한 상태에선 경제가 일시적으로 본질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새로운 정보가 들어와 경제주체들이 ‘아, 이게 아닌데’ 하고 느끼면 금방 본질로 되돌아간다고 한 겁니다. 즉 경제의 본질이 좋으면 경제도 좋은 것이고 본질이 나쁘면 나쁘다는 것이지, 그저 좋아진다고 해서 좋아지는 게 아니고 나빠진다고 해서 나빠지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누군가 대통령에게 잘못 가르쳐준 것 같아요.
김종인 : 루카스 교수의 말은 경제주체인 국민이 영리하기 때문에 정부가 어떻게 하면 실제로는 어떻게 된다는 것을 꿰뚫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게 심리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경제는 나빠진다고 생각하면 실제로 나빠진다’고 잘못 알고 있습니다.
정운찬 : 실제로 그후에 장관들이 ‘심리’라는 말을 많이 했어요. 잘된다고 하면 잘된다, 못된다고 하면 못된다는 식으로. 그리고 대통령은 장관들에게, 장관들은 아래 직원들에게 자꾸 ‘홍보가 부족해서 우리가 잘하는 게 제대로 안 알려져서 경제가 나빠졌다’고 하는 것 같던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통화 확대정책은 불가능
김종인 : 소비도 돈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소비심리를 아무리 유도해도 돈이 없으면 소비할 수가 없죠.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IMF사태 이후 4년간 85%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소득이 하나도 늘지 않았다고 답했어요. 그중 절반은 소득이 오히려 줄었다고 하고, 나머지 절반은 그대로라고 하는데, 그간의 물가상승률 등을 고려하면 실제 소득은 다 줄었다는 얘깁니다. 소득이 없는데 어떻게 소비를 늘리겠어요? 최근 가계대출이 엄청나게 늘었다는데, 그런데도 소비진작을 해야 되는 겁니까?
정운찬 : 신년호부터 이런 얘기를 해서 되겠나 싶지만, 저는 앞으로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김종인 : 그런 걸 솔직하게 얘기해줘야 해요. 신년호니까 더욱 정신을 차리게 해야 돼요. 2003년부터는 공적자금의 이자만 해도 7조∼8조원에 이른다고 하더군요. 그걸 메워넣기 위해 다시 채권을 발행하면 당장 재정에는 편입되지 않을지 몰라도 결국은 재정이 떠안게 됩니다. 경기진작을 위해 특소세를 내린다는 것도 상상해볼 수는 있는 것이지만, 특소세는 경기진작의 도구로 쓸 수 있는 세금이 아닙니다.
더구나 3/4분기에 소비를 조금이라도 늘려서 성장률을 높이려는 의도에서인지는 몰라도 특소세 인하안이 법으로 확정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시행됐잖아요. 이게 우리 경제정책 다루는 사람들의 못된 버릇입니다. 정책을 만든다는 사람들에게 법의 개념이 없어요. 누군가 그게 위헌이라고 소송을 제기하면 뭐라고 할 겁니까? 요즘엔 법인세를 없애자는 논의도 있습디다. 그렇다면 앞으로 대한민국의 세입은 뭘로 충당할 생각인지 모르겠어요.
정운찬 : 금융 구조조정이 지금까지는 공적자금을 투입해서 가능한 한 모든 은행을 클린화하려는 방향으로 추진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실채권 비중이 어느 정도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은행이 대출심사를 비롯해 기본적인 경영을 잘해서 그렇게 됐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앞으로는 금융부문에서도 큰 곳이든 작은 곳이든 적자생존의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그에 덧붙여 요즘 자꾸 은행합병을 유도하고 있는 듯한데, 이건 ‘경제학의 남용’이에요. 규모가 커지면 단위당 생산비가 줄어든다는 소위 ‘규모의 경제’라는 것이 금융업에서는 경험적 연구에 의하면 소규모에서 중규모까지는 들어맞는데, 중규모에서 대규모까지는 그 성과가 좋질 않습니다.
또한 합병은 우량은행과 우량은행이 해야 원칙인데, 그렇게 했을 경우에도 성공률이 40∼50%밖에 안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불량은행끼리 무리하게 합병시키려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그 은행들이 불량은행이 된 이유를 호도하려는 목적이 숨어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화폐·금융정책 측면에서 보면 통화량이 지난 4년 동안 너무 많이 풀렸습니다. 그래서 이젠 통화량 증대를 통한 경기부양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지금 우리 경제는 이른바 ‘유동성 함정’에 빠져 있어 통화량을 늘려도 소용없어요. 목표 콜금리를 4%로 잡고 있는데, 그것도 지키기 힘든 상황 아닙니까. 한국경제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의 정도에 비춰볼 때 금리를 더 낮추려고 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한국은행이 아닌 다른 경제부처에서 금리정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금리를 더 내리는 것은 시장에서 허용하지 않을 것이고, 통화량은 유동성 함정에 빠져 있어 금융정책으론 어쩔 수가 없어요. 재정정책이라면 어떨지 모르지만.
김종인 : 공적자금을 저렇게 많이 쓰기 때문에 재정정책 쪽에도 뾰족한 수가 없어요. 재경부 장관은 내년 말이면 공적자금이 필요없을 거라고 하는데, 제가 보기엔 그렇지 않아요. 내년에 또 추가적인 공적자금 필요성이 대두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렇다고 보면 추가적인 재정적자를 통해 경기부양을 하겠다는 사고는 금물이에요. 재정적자가 일단 한계를 넘어 경제에 부담을 주게 되면 우리 경제는 아주 어려운 상황으로 갈 수 있어요.
정교수께서 지적하셨듯이 지나치게 경기부양을 해서 해외에 수요도 없는데 물건을 많이 만들면 팔 데가 없어 무역수지가 적자가 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무역수지 적자에다 재정적자까지 겹치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올지도 몰라요. 그러니 국제경기가 좋아질 때까지 우리 경제의 기반을 건전하고 튼튼하게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또한 정부가 내년에 은행 민영화를 하겠다고 하는데, 이것도 재고해야 해요. 지금 한국에 은행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러니 재벌한테 파는 수밖에 없다고 해서 궁여지책으로 재벌이 은행 지분을 4% 이상 가져도 좋다, 그러나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한다고 하는데, 이런 뚱딴지 같은 짓을 하려면 차라리 민영화하지 않는 게 나아요. 우리가 1982년에 은행 민영화를 하면서 겪은 시행착오를 반복해선 안돼요. 그때도 뭐라고 했습니까. 은행 민영화만 하면 만사형통이다, 모든 은행이 효율화, 건전화된다고 했어요. 그랬는데 그 은행들이 지금 다 저렇게 부실해진 게 아닙니까. 은행이 건전해질 때까지 정부가 은행을 소유하되 은행장 인선에 중립을 지켜 좋은 은행장을 뽑고 은행을 탄탄하게 만드는 게 현명하지, 그저 공적자금 몇푼 더 회수하려고 은행을 민영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국가 소유·민간 경영’으로
정운찬 : 앵글로색슨적 사고로야 은행이건 기업이건 ‘민간 소유, 민간 경영’이 바람직할 거예요. 그런데 지금 우리 현실에선 ‘민간 소유, 국가 경영’보다는 ‘국가 소유, 민간 경영’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시장에서 좋은 은행장, 좋은 은행인을 찾으려면 굉장히 많아요.
공적자금은 좀 덜 회수되는 한이 있더라도 은행이 재벌한테 넘어가서 과거처럼 재벌의 투자를 용이하게 한다든지, 퇴출돼야 할 기업에 돈을 대줘서 연명하게 함으로써 중복과잉투자, 중복과잉시설을 키워주면 안됩니다. 지금 은행을 살 사람들이 많다면 몰라도, 살 만한 곳은 재벌하고 외국밖에 없어요. 외국한테 팔자니 지금까지 너무 많이 팔았잖아요. 그러니 차라리 정부가 은행을 소유하고, 대신 좋은 은행장을 찾아 경영을 맡기는 게 옳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