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란·부정부패 개선할 유일한 후보
- 정치적 입장은 개혁적 보수
- ‘창노믹스’로 고도성장 추진
- 머리는 명석, 가슴은 좁아
그로부터 4년이 흐른 지금, 그는 또다시 제1당의 총재로서 차기 대선의 가장 유력한 대권후보로 거론되는 상황이다. 국회 재적 과반수에 1석 모자란 거대 야당을 이끌고 있는 그에겐 ‘6년 대통령’ ‘수권야당 총재’란 신조어가 따라붙을 정도다. 당내 경선이란 절차를 남겨두고 있지만 그가 대선에 나선다는 것을 의심하는 이는 찾기 힘들다.
하지만 견고해 보이는 그의 정치적 기반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정치적 비전은 아직도 국민들에게 그리 선명치 못한 측면이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정치경력이 대단히 짧은 탓일 수 있다. 또 보수와 진보를 모두 안으려는 ‘이회창 정치’의 폭넓은 이념적 스펙트럼 때문일 수도 있다.
‘대안 없는 후보’
물론 이회창이란 정치인이 초단기간에 ‘대중정치인’으로 착근을 한 데는 ‘대쪽 판사’로 대변되는 청렴·정직의 이미지가 있었다. 그러나 ‘대권 재수’에 도전하는 그에겐 좀더 새롭고도 구체적인 정치적 비전이 요구된다. ‘이회창 대통령’의 가능성이 유력해지면 질수록 ‘이회창은 왜 대통령이 돼야 하냐’는 질문도 더욱 유효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 이총재와 그 측근의 입을 빌려 왜 대통령이 되려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총재의 비서실장 출신인 하순봉 부총재의 얘기를 들어보자.
“다음 대선이 우리 정치에 한 획을 긋는다면 그것은 바로 ‘3김정치’를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시대적인 소명인 동시에 정치사의 흐름이다. 3김 정치의 존재가치가 산업화에 이은 민주화운동이었다면 이제는 이를 뛰어넘어 21세기를 대비하는 정치인이 등장해야 한다. 그런 흐름에선 현실적으로 이회창 총재가 대안 없는 후보다.”
또 다른 측근인 이원창 의원은 “혼란과 부정부패가 만연한 현실정치를 개선할 지도자로는 이회창 총재가 유일하다”고 주장한다.
이총재 자신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흐트러진 나라의 기본질서를 바로잡겠다”며 ‘국민 우선(People First)의 정치’를 모토로 내세우고 있다. 그가 2001년 1월28일 발표한 ‘국민우선정치 선언문’에 따르면, “말 없는 대다수 국민들의 민생과 고통을 걱정하고 치유하는 바로 그런 정치”를 의미한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국회 중심의 정치와 진정한 민주주의의 복원 ▲과거지향적 정쟁에서 미래지형적인 정치개혁으로 ▲경제와 남북문제에 있어 분명한 철학과 노선의 선택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새로운 리더십’ 등의 용어는 아무래도 추상적이다. 일반 국민에겐 더욱 그렇다.
이 부분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려면 그가 집권할 경우 가장 먼저 손을 댈 정책과제와 기조, 특히 남북·경제·교육 문제 등에 있어 그의 관(觀)이 무엇인지를 확인해보는 게 도움이 될 것같다. 지금까지 나온 얘기를 모아보면 이렇다. 그는 우선 부정부패의 척결을 수없이 강조한다. 이를 위해선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 격인 ‘법과 원칙’이 바로서야 한다는 것이다.
남북문제는 현정부가 추진하는 햇볕정책에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진보적 시각에선 ‘남북관계의 발목을 잡는다’ ‘대안 없이 비난만 한다’는 등의 비판을 쏟아내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이총재는 “기본적으로 포용정책을 지지한다”면서도, 자신의 대북정책에 대해선 ‘포괄적 상호주의’ ‘전략적 상호주의’란 용어를 사용한다. “북한이 군사우선 정책을 수정해야 정치·경제적인 대북지원이 가능하다”는 게 핵심이다.
통일구상에 대해선 2000년 12월 ‘6·25 참전소대장 모임’에 참석,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10가지 기본구상’을 통해 비교적 상세히 설명한 바 있다. 한반도의 평화는 북한의 변화에 달려 있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주변 4국이 참여하는 ‘동북아 다자 안보대화체’ 추진을 제시한 점 등이 주 내용이다.
김정일 답방 문제에 대한 이총재의 가장 최근 발언은 “양대 선거를 앞둔 2002년에 오면 국내 정치에 이용될 수 있으므로 안된다”는 것이다. 반대입장을 확실히 한 것이다.
이총재는 자신의 이념적 성향에 대해 “산업화와 민주화를 대승적으로 극복해서 세계속의 선진화된 한국을 만드는 것이 21세기 초 한국의 시대정신이다. 그래서 나의 정체성이 뭐냐고 물으면 ‘개혁적 보수’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의 한 측근은 “진보의 입장에선 보수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보수층은 이총재의 보수성에 여전히 100% 신뢰를 보내지 않고 있다는 점도 기억해달라”고 말한다.
이총재의 경제분야 자문그룹은 ‘창 노믹스’란 가제로 그의 경제관을 정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점은 고도성장(6% 이상)을 기반으로 한 경제정책이라고 한다. 그는 2000년 4월 나라발전연구회 연설에서 우리 경제가 해결해야 할 과제를 3가지로 압축했다. 첫째는 개방 경제로 위기의 경제를 살리는 것, 둘째는 활기찬 시장경제를 만들어 성장잠재력을 강화하는 것, 셋째는 경쟁의 낙오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재벌규제 정책에 대해 그는 철저한 시장주의 이론을 내세워 이견을 표시하고 있다.
교육분야에서는 현정부가 추진한 개혁정책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다. 교원정년 연장안 파동으로 다소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교육문제는 이총재가 경제와 함께 가장 즐겨 쓰는 대중연설의 화두이기도 하다. 그는 공교육 붕괴 등 전반적인 교육파탄 상황에 대해 개탄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대안까지 제시해 놓은 상황은 아니다.
이상에서 그의 정책 방향을 훑어봤다. 이쯤해서 화제를 이회창 개인으로 돌려보자. 정치적 비전을 이해하는 데는 구체적인 정책방향과 아울러 인간적인 면모를 엿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같은 당 최병렬 부총재는 ‘인간 이회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가까이서 보니 (이총재는) 우선 행동이나 말을 하는 데 있어 모럴 스탠더드(도덕적 기준)가 매우 높다. 되도록이면 원칙을 지키려는 사람이다. 또 대단히 명석해 중구난방으로 얽힌 회의에서도 가닥을 잡고 분석한 뒤 자기 의견으로 포장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평가한다. 그는 이어 “단점에 대해 말하자면 역시 폭이 좀 좁다는 면이 있다. 많은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논리가 있는데, 그 논리에 맞지 않는 얘기엔 주목하지 않는 면도 있다. 정치지도자로서 보완해야 할 부분들이다”고 말한다.
최부총재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총재에 대한 일반인의 첫인상은 두가지 이미지가 교차되는 듯하다. ‘강직하다, 깨끗하다’와 ‘차갑다, 엘리트다’라는 것이 다. 포용력이 부족하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총재는 최근 ‘차갑다’는 이미지를 의식, 한 행사장에서 “내가 엄격한 아버지 아래서 자라나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서툴다. 하지만 진심으로 여러분께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해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그가 ‘비사교적’이란 면에 대해 부인 한인옥 여사는 “판사가 되고 나서 누구든지 3번 이상 만나면 반드시 부탁을 해오더라. 그래서 아예 판사들끼리 어울리거나 가족끼리만 어울렸다”고 해명한 적이 있다.
이총재가 주관이 강한 것은 분명한 듯하다. 스스로도 자서전인 ‘아름다운 원칙’에서 “주변에서 싫어하는 얘기를 들으면 그 자리에선 굽히지 않는 성격이 있다. 하지만 돌아서 반성하고 고친다”고 고백한 적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이처럼 고정된 이미지를 넘어 그에겐 또다른 모습이 있다는 게 측근들의 주장이다. 이원창 의원은 “반듯한 엘리트처럼 보이지만 학창시절 권투도 하는 등 건달기도 있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그래서 애창곡도 ‘친구여’라는 것. 그의 홈페이지를 보면 좋아하는 음식은 된장찌개, 별명은 피카추(얼굴이 발갛다고) 등으로 돼 있다.
새해에 펼쳐질 본격적인 대선 가도에서 그에게 최대 장애물은 무엇일까. 이 총재로선 뭐니뭐니해도 이른바 반창(反昌)구도의 형성 여부가 부담이다. 본인이 동의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의 인기는 상당부분 반(反) DJ정서에 힘입고 있는 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차기 대선에서 그 축이 민주당 이인제 고문이든 노무현 고문이든, 아니면 일각에서 흘러나오는 박근혜 부총재가 되든, 지금의 정치판을 흔드는 차원으로 재편되는 것은 이총재로선 가장 상상하기 싫은 상황이다. 당내 단합을 확고히 하고 김대중 대통령과의 화해가 필요하다는 주문도 그래서 나온다.
다음 난관은 이 총재 자신과 결부된 문제다. 그는 ‘3김식 정치’를 지양한다고 하지만 ‘정치공학적’으로 여전히 불안정하다. 최근 50%에 가까운 지지도를 받았음에도 “대선까지 아직 1년이 남았다”는 반대편의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는 데도 이같은 불안정이 논거가 된다.
‘정치보복을 할 것’이란 의혹 어린 시선도 극복해야 할 과제가 된다. 이총재는 2001년 12월 강창희 의원 지구당 대회에 참석, “과거에 대해선 만델라식의 화해와 청산, 그러나 집권 후에는 엄벌주의가 내 소신”이라고 정리했다.
경천동지할 지각변동만 없다면 이 총재는 21세기 첫 대통령선거의 한복판에서 뛸 것이다. 그가 원하는 정치적 지향점이 어떻게 국민에게 전달되고 실현될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