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첼은 폴란드와 레바논에서 각각 미국으로 이민온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수위로, 어머니는 파출부로 일하며 미첼을 키워 조지타운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시켰는데, 그는 강연 시작 때 “이러한 하류층 가정에서 컸지만 내가 미국 메인주에서 연방검사와 연방판사를 거친 뒤 연방상원의원으로 15년 동안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헌신과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빼놓는다면 다른 나라에서 찾기 어려운 미국사회의 독특한 장점에 힘입은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미첼은 민주당이 연방상원의 다수당이던 때 원내총무가 되어 공화당 소속이던 조지 부시(George Bush) 대통령을 돕기도 했고, 부시의 후임으로 민주당 소속이던 클린턴(Bill Clinton) 대통령도 여러 모로 도왔다. 연방상원의 다수당 원내총무란 권력이 크면서도 어려운 자리다. 미첼은 이 임무를 아주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여야를 초월해 국가적 정치인으로서 존경을 받았다. 더구나 1995년에 정계를 은퇴한 뒤에도 클린턴 대통령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북아일랜드의 평화를 위한 국제위원회 의장 및 평화협상 의장으로, 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을 심사하는 국제사실확인위원회 의장으로 역량을 발휘해 유네스코 평화상을 받는 등, 세계적 정치가의 반열에 섰다. 현재는 워싱턴의 저명한 법률사무소 특별고문이다.
미첼은 북아일랜드와 중동에서의 협상 경험을 통해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 희망과 인내를 꼽았다. 어떠한 분쟁이라도 반드시 조정될 수 있고 마침내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을 당사자들이 반드시 가져야 하며, 비록 좌절과 결렬이 거듭된다고 해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 교훈을 한반도에 적용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남북관계가 아무리 꼬여 있다고 해도 결코 절망해서는 안되며, 꼭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고 서두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는 한반도에서 ‘완벽한 평화방안’이나 ‘완벽한 통일방안’은 찾기 어렵다고 진단하면서 ‘조금이라도 나은’ ‘오늘보다 한 걸음이라도 앞선’ 길을 남과 북이 함께 찾아야 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고르바초프는 이번이 네번째 만남인 셈이다. 그는 70세를 막 넘긴 나이였건만 여전히 정력적이란 인상을 주었다. 이지적이면서 세련된, 그러면서도 친절하고 겸손한 자세는 비잔틴세계의 음모적 권력자들의 모습을 지녔던 옛 소련공산당 지도자들의 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아일보사 20층 접견실에서의 한 장면이다. 나는 그곳에서 청와대 일대를 보여주며 “저기에 일제의 조선총독부와 총독관저가 자리잡고 있어 동아일보사 창업자가 우리 민족이 저곳을 감독해야 한다는 뜻에서 이곳 세종로 네거리에 사옥을 지었고, 그래서 동아일보는 그 정신에 따라 대한민국이 건국된 뒤 계속해서 역대 정부를 감독해왔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그는 곧바로 자신의 손을 이마에 대고 눈을 크게 뜬 뒤 청와대 일대를 바라보더니 앞으로 동아일보의 상징물은 ‘어떤 한 시민이 이마에 손을 대고 눈을 부릅뜬 채 먼 곳을 내다보며 권력을 감독하는 모습’으로 만들면 어떻겠냐고 권고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남북한의 지도자들과 몇 차례에 걸쳐 각각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관해 의견을 나눴던 일들을 회상하면서, 남한방식이 북한방식보다 훨씬 더 합리적이면서 실현가능성 높은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북한의 본질적 변화 없이는 한반도에서의 진정한 화해와 평화 및 통일의 길은 결코 쉽게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최근 자신의 관심은 빈부격차의 완화에 있다고 말했다.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빈부격차가 커지면 평화가 오기 어렵기 때문에, 노벨평화상 수상자로서 자신의 임무는 바로 빈부격차의 완화를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외과의사인 딸 이리나 여사가 별세한 어머니 라이자 여사를 대신해 아버지를 돕고 있었는데, 짧은 방한기간중 “한국에서는 여성이 차별받고 있다는 느낌을 금세 받았다”고 술회했다. 고르바초프가 딸을 향해 “내 일생 최고의 작품이며 최대의 업적”이라고 치켜세운 것이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