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현대문명의 불모지에 사는 사람들은 오직 신에 의지하여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읽으며 평생을 보내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완강하고 보수적인 이슬람 사회를 형성한 것은 아닐까.
고산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마치 저승의 빛깔이 저렇지 않을까 싶은 코발트색 하늘, 그 밑자락에 장엄한 자태의 힌두쿠시산맥이 억겁의 세월을 버티고 있다. 그러나 힌두쿠시의 연봉들은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품지 않은 거대한 바윗돌 같은 악산(惡山)이다. 음울한 잿빛 천지다.
어디 산뿐인가 아프가니스탄은 어디를 가든지 온통 카키색, 오래 전에 죽어버린 그런 폐허 같은 땅이다.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 그 사람들은 외지인을 만나면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건넨다.
“쥐뚜라스띠(안녕하세요).”
“살라말리 콤(그대에게 평화를).”
그러나 정작 아프가니스탄에는 역사 이래 그들이 갈망하는 평화가 없었다. 동서 양 진영 사이에 낀 미묘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그들은 외부에서 침입해 오는 무수한 군대들과 싸워서 생존해온 강인한 투지가 있다. 2500년 전, 우리나라 고조선 시기에 해당하는 까마득한 옛날,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와 싸웠고, 2200년 전,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삼국시대보다 더 이른 시기에 동진하는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와도 맞섰다. 또 1200년 전에는 당나라 불세출의 명장 고구려인 고선지(高仙芝) 장군의 침략을 받기도 했는데, 중국의 고전인 ‘당서(唐書)’는 그 시절 고선지 장군의 아프가니스탄 정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사흘을 행군하여 탄구령에 이르렀다. 탄구령은 험준하기 그지없는 데다가 40리 길이나 되었다. 군사들이 기가 질려서 고개를 넘으려고 하지 앉았고… 영마루에 오른 군사들은 가파른 절벽 길을 보자 겁을 먹고 ‘이 길을 어떻게 내려가라는 겁니까?’ 소리를 지르며 움직이지를 않았다.”
고선지 장군이 발자국을 남기고 간 후 400년쯤 지나서 이번에는 칭기즈칸이 침략을 해왔다. 당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세계를 정복한 칭기즈칸의 군대와 맞서 3년간 싸웠을 만큼 용맹스러웠다. 그러나 그들의 용맹성 이면은 처절한 피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바위 위에 건설한 솨리골골라성을 공격하다가 사랑하는 손자 무투겐이 화살에 맞아서 죽자 칭기즈칸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성을 함락시키는 날 살아 움직이는 것은 모조리 죽이겠다.”
이 성은 외부에서 몰래 물을 공급받아서 몇 달을 버텼는데, 종내는 칭기즈칸 군대에게 급수원을 들키는 바람에 낙성이 되고 말았다. 칭기즈칸은 얼마나 잔혹했던지 성 안의 고양이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것은 모조리 죽여버렸기 때문에 오늘날 그 성의 페허에는 개미 한 마리 없다고 한다.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아프가니스탄은 또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영국과 세 번이나 전쟁을 치렀다. 1838~1842년에 일어난 제1차전쟁은 당시 세계 최강의 영국군대가 칸다하르를 점령하고 이어서 카불까지 진격해 왕이 도망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카불에서 아프가니스탄인들의 결사적인 저항으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된 영국군과 인도군은 철수를 했는데 그 과정에서 1만여 명이 몰사했다. 제2차전쟁은 1878~1880년, 영국군이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침략해 끝내 보호국으로 만들었으나 1919년 아마눌라한 국왕이 제3차전쟁을 일으켜 영국을 몰아냄으로써 아프가니스탄은 완전한 독립국가가 되었다.
그로부터 60년 후, 1979년 말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함으로써 중동 산유국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또 당시 이란에서 불길처럼 일어난 호메이니의 이슬람 원리주의가 소련 남부의 이슬람 지역에 옮겨붙는 것을 사전에 차단할 목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해서 10년을 싸웠다. 그러나 소련은 막대한 피해만 보고 쫓겨갈 수밖에 없었다.
소련과의 전쟁이 멎은 지 10년도 안되어서 이젠 미국이, 그들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추락시킨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할 목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 했는데, 이 전쟁이 초강대국 미국이 의도한 대로 끝난다고 해도 곧이어 다음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알라신의 축복과 예고된 전쟁
이슬람교의 알라신은 자기를 믿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있는 중동, 리비아 등의 북부 아프리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에 크게 수고하지 않더라도 먹고 살 수 있도록 검은 황금 석유를 주었는데 아프가니스탄도 예외가 아니어서 엄청난 양의 석유 가스가 매장되어 있다. 그래서 주변 강대국들이 벌써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어 정치마저 불안한 아프가니스탄에는 또 한번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잠재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64만여 ㎢(남한 면적의 6배 이상)나 되는 넓은 나라다. 소련과의 전쟁 전 인구는 1600만여 명으로 인구밀도는 겨우 ㎢당 25명. 그리고 의료기술의 낙후로 평균수명은 40세를 조금 넘기는 수준이다. 주민은 파슈툰족(파탄족)이 60%쯤으로 주류를 형성하고, 그외에 타지크족, 우즈베크족, 하자르족이 섞여서 산다.
아프가니스탄족들은 15~16세기에 인도의 델리를 중심으로 로디왕조와 수르왕조를 세웠고, 또 1722년에는 이란의 이스파한을 점령하기도 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인들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과 인더스강 상류 지역에 민족 독립국가를 건설했다.
그러나 평화가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1973년, 왕족이자 수상인 다우드가 국왕 자히르샤의 외유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제를 선포하고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다. 또 1978년에는 청년장교들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가 발생. 대통령 다우드가 피살당하고 친소(親蘇)적인 카르말이 정권을 잡았지만, 미국과 중동 산유국들의 지원을 받은 무자헤딘 반군들의 집요한 저항으로 정권이 위태로워지자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10년을 싸웠다.
1986년, 카르말이 건강 악화로 인해 사퇴하자 비밀경찰 총수였던 나지불라가 정권을 인수하고 소련군이 철수했다. 그러나 신정부 구성문제로 다툼을 벌이다가 다시 내전상태에 돌입, 반군들이 카불에 입성하고 나지불라는 1999년 9월 27일 총살당했다. 이 과정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기치를 든 탈레반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 미국에 패퇴하기 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해왔다.
이슬람 사회에서 나라를 개방하고 국민들에게 민주화정책을 썼기 때문에 오히려 쫓겨난 두 명의 지도자가 있다. 이란의 팔레비 왕과 아프가니스탄의 자히르샤 왕이다. 자히르샤 왕은 국민에게 사회와 정치를 개방하고 교육을 장려했다.
1959년 8월 독립기념일에는 수백 년 동안이나 이어온 부르카를 여자의 얼굴에서 벗겨내는 용단을 내리기도 했으나 보수적인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1973년 쿠데타에 의해 외국으로 쫓겨나는 비운의 국왕이 됐다. 그후, 팔레비 왕의 개방에 대한 반동으로 이란에서는 보수적인 이슬람 원리주의자 호메이니가 집권을 했듯이,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탈레반이 들어서서 여자들의 교육기회마저 박탈하고, 다시 부르카를 씌워버렸다.
필자가 UN 산하 국제식량농업기구(FAO)의 수석고문관으로 아프가니스탄에 부임한 것은 소련과의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1989년이다. 필자는 1992년까지 3년 동안 단 한 명의 한국인, 아니 오직 한 사람의 노란색 피부를 가진 동양인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살면서 몸서리치는 전쟁을 경험했다.
“펑, 펑, 펑….”
날마다 반군들이 힌두쿠시 산맥에서 쏘아대는 로켓 포탄이 폭발하는 소리에 새벽잠을 깼다. 폭탄이 떨어지는 곳마다 흙먼지 기둥이 하늘로 솟구치고 그 안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 갔다. 어디 필자인들 예외였겠는가. 카불대학교에서 강의하는 도중 힌두쿠시 산맥에서 무자헤딘 반군들이 쏜 로켓 포탄에 의해 22명의 학생들이 즉사하는 와중에 천행으로 목숨은 건졌다. 대신 폭발음으로 고막이 파열되어 청각장애자로 나머지 인생을 살고 있다. 그들이 전쟁을 하지 않는 날은 오직 이슬람의 성일인 금요일과 한 달간의 라마단 기간. 이때는 아프가니스탄의 전국토가 이상하리만큼 조용해져서 선사시대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누에씨를 체온으로 부화시키는 여인들
아프가니스탄은 전국토가 반(半) 사막지대인데 세계에서 일교차가 가장 심해서 20도가 넘는다. 그러나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지극히 낮은 습도다. 어떤 날은 상대습도가 10%도 안되어 잠을 자다 호흡곤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강우량은 연간 300mm 안팎, 그것도 대부분 겨울철에 눈으로 내린다. 그래서 힌두쿠시 연봉이 흰눈을 이고 있으면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이것을 알라신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이듬해 봄이 되면 눈 녹은 물이 흘러내려 식수로 사용하고 또 들녘에 풀이 자라서 그들의 생계수단인 양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과거에 있던 강이 사라지고, 갑자기 새로운 강이 생기기도 하는데 이는 힌두쿠시 산맥에서 눈 녹은 물이 흘러내리면서 때때로 강물의 방향을 바꾸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로 여름에는 가마솥처럼 푹푹 찌고 겨울에는 영하 10도를 넘나든다. 거기다가 바람이 잦아 체감온도는 더욱 낮다. 봄이 와도 힌두쿠시 산맥은 겨울이어서 연봉에 흰눈을 이고 있건만, 카불 분지에는 꽃이 피고, 나뭇잎들이 무성해지는 특이한 풍경을 연출한다.
아프가니스탄은 유서 깊은 실크로드의 나라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마을이나 수백년은 되었음직한 고목이 된 뽕나무가 많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뽕나무 잎을 따서 누에를 쳐서 명주실을 뽑고, 그 실을 가지고 비단을 짜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실크카펫을 생산한다.
또 뽕나무의 오디를 적당하게 말렸다가 기나긴 겨울철의 식량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뽕나무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게 생명의 나무일 수밖에 없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생산하는 고급 실크카펫은 부르는 게 값으로 수만달러를 호가하는 것도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처녀들은 천연염료를 사용해서 한올 한올 정성을 들여 색을 들인 다음 시집갈 때까지 몇 년 동안 정성을 들여 겨우 1~2장을 완성한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계를 이용하거나 여덟 살에서 열 살 먹은 사내아이들을 고용해서 짜기 때문에 품질이 많이 떨어졌다.
아프가니스탄의 여인들이 누에를 치는 것을 보면 문득 연민의 정이 느껴진다. 땔감이 귀해 실내를 데울 방법이 없다 보니 누에씨를 몸 안에 품고 다니면서 체온을 이용해서 부화시킨다. 그래서 그녀들은 누에를 친자식 대하듯 한다. 아프가니스탄의 실크카펫에는 여인들의 따뜻한 애정이 올올이 배어 있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인의 99%는 이슬람교, 나머지 1%는 힌두교 아니면 시크교도 들이다. 그들은 3단계의 종교를 거쳤다. 애초에는 태양숭배 등의 토속신앙이었으나, 다음에는 독실한 불교나 조로아스터(배화교)도가 되었다. 동서 문명을 조화시킨 칸다하르 불교유적은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특히 서양의 기하학적 무늬와 프레스코 기법이 돋보인다. 부처님상도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서양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필자는 전쟁중이라 폐관한 그곳 중앙박물관의 유물들을 플래시 불빛을 비춰가며 감상했는데,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높은 예술성에 찬탄할 수밖에 없었다. 기원후 7세기 후반에 그들은 불교에서 다시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그중 코란의 어떤 해석도 거부하고 글자 그대로를 믿는 보수적인 수니파가 약 80%, 나머지는 시아파다.
코란과 하디트가 가르치는 것들
이슬람교는 알라신을 믿는 유일신 종교다. 기독교와는 구약성경을 공통으로 사용하는 등 유사점이 있으나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교리가 전혀 다르다. 기독교가 예수를 신격화하는 반면 이슬람교는 예수에게 인간으로서의 선지자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도 생전에 예수를 가리켜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바 있다.
또 기독교인들은 아브라함의 적자인 사라의 아들 이삭을 정통시 하는 반면, 이슬람교는 장자이면서도 서자인 이스마일을 조상으로 떠받든다.
기독교가 구약시대의 율법을 부정하는 반면, 이슬람교는 모세시대의 율법을 존중한다. 그래서 이슬람교는 ‘이는 이로 갚고 눈은 눈으로 갚는다’는 사회적 행동 지침을 가지고 있다. 이슬람교에서 강간한 자는 돌로 쳐서 죽이고, 도둑질한 자의 손목을 잘라버리는 계율도 구약시대의 것을 따른 것이다.
이슬람교의 경전은 코란과 하디트. 코란은 신의 사자인 인간 모하케느가 알라신의 계시를 적은 것이고, 하디트는 그의 언행록이다. 어느 것이나 인간의 삶의 본질과 그에 따른 올바른 행동지침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이슬람교도들이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지정하여 먹지 않는 것도, 또 여자를 특별하게 보호하는 것도 모두 그들 경전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컨대 하디트는 “여자는 보물과 같이 소중한 것이니 잘 간수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같이 보수적인 이슬람 사회에서는 그들의 보물인 여자들이 혹시나 잘못 될까봐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부르카를 씌워서 가족 이외의 사람들이 볼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필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있던 3년 동안 부르카를 뒤집어 써서 온 몸을 가린 여자들을 무수히 보았다. 그녀들에게 가까이 접근을 해서도 안되고, 호기심에서 사진을 찍어도 안된다. 만약에 손이라도 한번 잡으면 누가 와서 반드시 죽인다. 아버지나 남자 형제가, 형제가 없으면 사촌들이 와서 자기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상대방에게 피의 복수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에게 움직일 수 없는 율법이고, 변하지 않는 관념이다.
필자는 아프가니스탄에 3년이나 머물면서 여러 차례 초대를 받아 그들의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집 밖에서 5~10분씩 기다려야만 했는데, 그동안 주인은 자기 집의 여자들을 외간 남자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로 숨기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어디에서나 대중적인 장소에서 서비스는 남자들의 몫이다.
필자가 아프가니스탄에 머물 때 여자가 유일하게 부르카를 쓰지 않아도 되는 장소는 카불대학교였다. 부르카로 얼굴을 가린 상태로는 칠판에 쓴 글씨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등교와 하교길에는 반드시 부르카로 온 몸을 가렸다. 아프가니스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한번도 남녀학생들이 어울려서 이야기를 하거나 노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없다.
여자 나이 16~18세가 되면 결혼을 하는데, 자유결혼은 안된다. 처녀를 차지할 수 있는 1순위는 사촌들이다. 그들은 재물을 가지고 입찰과 같은 방식으로 경쟁하는데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양(羊)을 가지고 다툼을 벌인다. 사촌에서 적격자가 없으면 육촌으로, 그래도 없으면 친척 이외의 남자에게 시집을 가야만 한다. 물론 경쟁자가 많을 때는 신부의 값을 가장 비싸게 쳐주는 남자에게 여자의 운명이 맡겨진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다른 종교를 가진 배우자를 선택할 수가 없다. 오직 기독교도인 외부 세계의 여자만이 아프가니스탄 남자와 맺어질 수 있는 예외가 인정될 뿐이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결혼풍속 가운데서 특이한 것은 여자의 순결을 지극히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여자는 첫날밤에 자기의 순결을 입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랑에게서 받은 몸값을 되돌려주고 다음날로 버림을 당한다. 이슬람은 율법에 따라 남자가 4명까지 부인을 얻을 수 있는 일부다처제의 결혼풍속을 유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풍속은 마호메트 시절 잦은 전쟁으로 남자의 숫자가 부족했던 데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 당시 가장 불쌍한 계층인 고아와 과부를 구제할 목적으로 일부다처제의 풍속을 장려한 것이다. 마호메트도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과부에게 장가들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일부다처제인데도 아프가니스탄 여자들은 화목하게 지낸다. 4명의 처들이 모두 한집에서 기거를 하며 취사, 세탁, 육아 등의 가사를 공동으로 돌보건만 불평 한마디 나오는 법이 없다.
그들의 주식은 양고기. 따라서 양고기를 재료로 하는 요리가 무척 발달해서 50가지도 넘는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양의 뱃속에 온갖 양념을 넣고 통째로 삶은 요리다. 양고기 삶은 국물에는 논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밀가루 빵을 찍어 먹기도 한다.
양파와 양배추 같은 채소가 있지만, 반사막의 척박한 토질 때문에 재배가 어려워서 식물성 음식재료는 빈약하기 이를 데가 없다. 쌀을 먹기는 하지만 우리의 것과는 생김새가 다르고(아프가니스탄의 것은 구형) 또 시궁창 썩는 냄새가 나서, 필자는 먹는 것을 포기할 정도였다. 반면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지구상에서 가장 맛있는 과일이 생산된다. 기후가 연중 건조한 까닭에 포도나 살구가 신맛이 적고 달콤하다. 잣도 우리의 것과는 모양새가 달라 방추형으로 생겼지만 참깨처럼 고소하다.
우리나라와 가장 이질적인 아프가니스탄의 사회풍속은 무엇보다 술이 없다는 점이다. 이슬람의 율법에 따라 술을 만들지도 팔지도 마시지도 않는다. 그래서 술집도 또 다른 위락시설도 없는 아프가니스탄은 저녁 5시만 되면 온 국토가 침묵에 잠긴다. 아프가니스탄의 또 다른 금기는 사람의 형상을 새긴 조각, 그림, 마네킹, 장난감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인, 그들은 우리의 누구였을까
이것도 이슬람의 율법에 따른 것인데, 2001년 봄 탈레반이 세계의 이름난 문화유산인 바미안 석불을 파괴한 것은, 불교의 유산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불상의 얼굴 모습을 용납할 수 없는 그들의 교리에 따른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는 TV나 당구장 같은 위락시설이 전혀 없어 다른 나라에서 온 외부인들은 태고 적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날마다 과연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살아갈까.
그들이 모처럼 즐기는 것은 개싸움과 반시새 싸움이다. 개싸움장에 가서 보면 송아지만큼 큰 개가 이빨을 드러내놓고 ‘으르렁’거린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그저 그런 구경거리인데도 그들은 열을 올린다.
아마도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현대문명의 불모지에서 사는 사람들은 오직 신에 의지하고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읽으며 평생을 보내는 것이 아닐까. 그 결과로 그들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강하고 보수적인 이슬람 사회를 형성한 것은 아닐까.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성격은 그들이 살고 있는 환경이 말해주듯 몹시 급하고 원색적이다. 그래서 조그만 일에도 참지 못하고 매사에 고집을 부리며 도전적이고 배타적이다. 필자가 아무리 풍요로운 외부세계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어도 종말에 가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이 세상에서 아프가니스탄만큼 사람 살기 좋은 나라가 어딨냐”다.
물이 귀해서 여간해서는 목욕을 하지 않는 구릿빛 얼굴의 사람들이 바위투성이의 힌두쿠시 산자락에 의지해서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아프가니스탄이다.
힌두쿠시 산맥 너머의 반 사막지대는 구소련의 투르케스탄 평원으로 연결된다. 봄철에는 가끔씩 모래바람이 해를 가려서 눈앞 1cm의 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를 가린다. 이때 길을 잃으면 모래에 묻히고 생명은 그것으로 끝이 난다. 모래바람이 그치고 나면 이곳 저곳에 새로운 모래언덕이 생기는데 이곳을 낙타떼들이 지나간다.
밤에는 이 구릉들이 오래 전에 사라진 공룡들의 시체처럼 보인다. 사막의 달이라야 진짜 달이다. 끝이 없는 모래벌판을 비추는 달빛은 밝다 못해 푸른기운마저 돌아 정녕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왜 혹성에서 하필이면 사막을 선택해서 내려왔는가 비로소 이해할 것만 같다.
힌두쿠시 산맥 북쪽에 자리잡은 마자리 이 샤리프, 아프가니스탄 최대의 전략적 요충지인 이곳도 예외는 아니어서 사방이 먼지투성이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집은 외부의 기온을 차단하기 위해서 두껍게 벽을 만드는데, 먼지의 유입을 막기 위해서 외부로 난 창문은 어느 집이나 다 조그맣다.
마자리 이 샤리프에서 60km쯤 북상하면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을 사이에 두고 아무다리야강이 흐르고, 그 위에 외부세계와 통하도록 만들어놓은 아프가니스탄 유일의 철도와 인도교가 놓여 있다. 아무다리야강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가장 큰 강. 이 강을 건너면 비로소 테레메즈라는 딴 세상의 도시가 있다. 그곳은 개방된 이슬람 사회라 큰 식당도 있고 댄스홀도 있다.
한국어와의 유사성
또 1936년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에 의해서 강제 이주를 당한 우리 동포들의 상당수가 정착해서 살고 있다. 그들은 퇴비를 사용해서(현지 주민들은 퇴비 사용법을 몰랐다) 논농사를 짓고, 생산한 고품질 채소를 팔아서 경제적으로 넉넉해지자 자식들을 모스크바나 타슈켄트로 보내서 고등교육을 시켰다. 그 결과 오늘날 학자, 사업가, 관료 등으로 활약하는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런데 한국사람에게 아프가니스탄이 각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옛 삼국시대에 동부아시아에서는 오직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과하마(果下馬)가 그들에게도 있고, 또 그들의 말(言語)과 우리말 사이에 아주 밀접한 유사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원시 어휘가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언어학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게 수사의 정확한 일치인데, 하나를 ‘액’으로, 둘을 ‘두’, 셋은 ‘세’로 거의 유사하다.
옛날 우리 조상들도 하나를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처럼 ‘애’라고 불렀다(애벌빨래/첫빨래, 논 애벌매기/첫매기) 등, 그외에도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사용하는 다리어(페르시어 계통)와 우리말이 일치하는 원시어휘는 흰이 ‘하이윤’, 파란이 ‘파’, 바람이 ‘바라’, 불다 ‘부’, 바다가 ‘바르’, 내가 ‘나하르’ 등 셀 수 없이 많다.
필자가 20년 동안 우리말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 세계의 현장을 돌아다녔는데 우리 것과 일치하는 원시어휘가 가장 많은 것은 뜻밖에도 아프가니스탄의 다리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