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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공수특전교육으로 훈센 총리 사로잡다

캄보디아 특수전 부대 代父 전병만

  • 장인석 jis1029@hanmail.net

한국식 공수특전교육으로 훈센 총리 사로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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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만씨로 말미암아 박정희 전대통령의 지지자가 된 훈센 총리는 2001년 11월9∼10일 캄보디아 총리로는 한국을 처음으로 공식방문해 김대중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렇게 된 것도 따지고보면 캄보디아 권력층에 퍼진 ‘한류(韓流)’ 열풍 탓이라는 게 교민들의 한결같은 설명이다. 이 한류 열풍을 일으킨 진원지가 바로 전병만씨. 이러한 열풍은 그가 캄보디아에 첫발을 내디딘 1994년만 해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전병만씨는 왜 캄보디아에 왔고, 어떤 목적으로 군의 정예화를 돕게 됐을까.

전병만씨는 경남 의령 출생으로 농사를 짓는 집안의 2남4녀 중 차남. 고향에는 80세의 모친이 살고 있다. 고교를 중퇴한 그는 모병 3기로 1972년 특전사에 입대했다. ‘용감하게 살고 싶어서’가 특전사를 선택한 이유였다. 제1공수 여단에서 태권도 선수로 근무하던 그는 국내에서 스카이다이빙 교육이 시작되자 1기로 훈련을 이수했다. 스카이다이빙은 고공침투요원들만 받는 교육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특전사의 최정예 멤버로서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남들이 그래요. 군 생활 멋지게 했다고…. 부대가 있던 김포 부근에선 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요. 부대에서 절 제대시키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1년 더 근무하고 1978년 8월에 중사로 제대했지요. 상사를 달으라고 했지만 어차피 장교가 못될 건데 군생활에 별 미련이 없었어요.”

나이 50줄에 접어들었지만 그의 몸은 군살 없이 단단하다. 눈매 역시 보통 매섭지 않아 그가 어떤 이력을 갖고 살아왔는지를 짐작케 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형 밑에서 일하려고 했지만 뜻이 맞지 않아 서울로 올라왔다. 특전사에서 근무할 때 알던 술집 사장이 지배인으로 와달라고 해서다.



그러다 해군제독 출신으로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함명준씨가 그를 불렀고. 함제독이 학교 선배인 옥창호 장군을 도와주라고 해 옥장군의 비서로 들어갔다. 옥창호씨는 육사 8기로 김종필 현 자민련 총재와 동기. 당시 옥장군은 강남터미널 인창빌딩 임대업을 하고 있었다. 인창빌딩은 강남에선 꽤 유명한 청록카바레가 입주해 있는 등 대규모 임대점포여서, 상가 유치를 둘러싸고 분규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여기서도 신임을 얻어 4년 만에 비서실장이 됐다. 그때 옥장군이 로열 프린스 자동차를 사주었을 정도라고 했다.

“옥장군 밑에서 일하면서 선배들과 특전동지회 전국조직을 만들자는 데 의기가 투합했지요. 당시에는 계급별 지역별로 친목회 정도로 모였는데, 전국을 돌며 친목회를 서로 연결하고 전역자들에게 일일이 연락해서 1987년 5월영등포구 신길동에 중앙본부를 발족시켰어요. 그리고 저보고 초대 사무총장을 맡아달라고 해서 옥장군을 떠나게 됐지요.”

“석촌호수 포장마차 철거는 내 작품”

전씨는 1993년 사무총장직을 그만둘 때까지 특전동지회를 발전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그는 특전전우회 사무총장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안기부의 지시를 받아 우익테러를 담당하는 책임자 역할도 했다. 그는 이 부분에 대해선 한사코 말하기를 꺼렸다. 아직도 현직에 있는 사람이 많아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애국심 차원에서 합법적으로 했으므로 죄 될 것도 없고 미안한 마음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가 우익테러를 했던 인물이라는 것은 캄보디아 교민들도 다 아는 얘기다. 몇 년 전 캄보디아에서 그에게 테러를 당했던 D중공업 노조위원장인 K씨를 우연히 만났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너무 놀라 할 말을 잊었다는데, 서로 옛일을 잊고 잘 지내자며 화해했다는 게 전씨의 얘기다.

“한 10년 했으니까 얼마나 많은 사건과 연관있는지 짐작하실 겁니다. 하지만 다 말할 수는 없고 드러난 것만 말을 하지요. 석촌호수 포장마차 철거를 비롯해 서초동 꽃동네 철거, 대우중공업 농성 해산, 현대중공업 농성 해산, 이거 모두 제가 했습니다. 다른 건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당시 석촌호수 주변의 포장마차는 정부나 검찰에 큰 골칫거리였다. 88올림픽은 다가오는데 호수 주변에 포장마차가 5000여 개나 있었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단속을 나가고 철거를 시도했지만 실효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전씨에게 ‘밀명’이 떨어졌다. 그는 5000명을 동원해 이틀 만에 모조리 없앴다.

그는 당시 판공비로 월 1000만원 정도와 건당 수당도 받았다고 한다. 동원 인력에 들어갈 돈으로 일인당 하루 10만원을 받았다. 당시 공무원 일당이 2만2000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큰 돈이다. 그는 지금도 그렇지만 돈에는 욕심이 없었다고 강조한다.

“만일 제가 돈이나 챙기고 부하들에게 짜게 굴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지요. 저는 한번도 돈을 제 주머니에 넣어본 적이 없어요. 일이 끝나면 남은 돈을 룸살롱 같은 데서 부하들에게 쫙 뿌렸는데, 그 맛 때문에 했다고 할 수 있지요.”

당시 전씨 밑에는 귀순용사들도 있었다고 한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방황하는 이들을 안기부가 데리고 있으라고 붙여준 것이라고 한다. 특수8군단 출신으로 임진강을 수영해서 건너온 이영선, 다대포에서 자폭하려다 수류탄이 불발돼 붙잡힌 전충남, 방랑생활하면서 홍콩을 통해 들어온 어성일 등을 친동생처럼 돌봐주었다고 했다.

“그러다 검찰에 쫓기게 되었습니다. 검찰에선 제가 안기부 지시로 일했다는 걸 모르니까요. 그 과정에서 이혼도 당하고, 물론 나중에 다 무혐의로 처리됐지만 그때 많이 힘들었지요.”

중고 앰뷸런스로 맺은 인연

그는 다시 안기부 이사관급의 지시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갔다. LA폭동으로 한인들의 피해가 많이 발생하자 교민보호 차원에서 특전동지회 조직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곳에서도 특유의 조직력을 발휘해 1년 만에 특전동지회 미국지부를 설립, 현판식까지 거행했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이번에는 보건복지부 응급구조단에서 본부장 일을 맡게 됐다. 당시 응급구조단은 비리가 많아 사회적으로 말썽 많은 단체였는데, 조직을 다시 잘 정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러던중 캄보디아에 간 특전동지회 후배로부터 오래된 것이라도 좋으니 앰뷸런스를 기증해줄 수 있냐는 연락이 왔다.

“마침 오래된 앰뷸런스 5대를 마련해 캄보디아에 갔습니다. 그게 1995년일 겁니다. 1994년에도 후배들 보려고 캄보디아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받은 인상이 좋아서 캄보디아에 관심이 많았어요. 비록 내전을 겪어 못살지만 그래도 밝게 살아가는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정이 가요. 지금도 그렇지만 정말 캄보디아는 좋은 나랍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순박한지 겪어보면 압니다.”

그때 훈센 총리는 제2수상이었다. 앰뷸런스가 한 대도 없던 캄보디아라 그런지 훈센 총리는 시승해보고 어린애처럼 좋아했다고 한다. 훈센 총리로부터 사오소카 준장을 소개받았다. 현재 40세의 젊은 나이로 헌병사령관(중장)이 된 사오소카는, 당시에는 30대 초반의 원스타로 훈센 총리가 총애하는 인텔리였다.

“그 사오소카가 태권도를 가르쳐달라고 했어요. 그게 인연의 시작이지요. 그때는 정말 간단하게 생각했습니다. 6개월간 두 명만 파견하면 되겠다 싶었지요.”

캄보디아는 가난한 나라다. 인구 800만 명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250만 명을 학살한 폴포트정권과, 그후 베트남의 지배를 받은 10여 년간 캄보디아의 국력은 쇠퇴할 대로 쇠퇴했다. 과거 ‘동양의 파리’라고 불렸던 수도 프놈펜에는 먼지만 자욱했다. 그는 사오소카가 아무런 지원을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 생각은 맞았다. 비용 일체를 전씨가 부담해야 할 처지였다.

“특전동지회라는 게 뭡니까. 의리로 뭉친 사람들 아닙니까. 제가 선배나 후배 복이 많아요. 그래서 후배 둘에게 부탁했습니다. 먹고 자는 건 해결해주지만 월급은 못 준다고요. 그후로 지금까지 한 60여 명의 후배들이 저를 도와서 캄보디아에서 지내다 갔지만 한번도 보상은 해주지 못했어요. 그게 지금도 가장 미안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인터뷰를 하지 않다가 ‘신동아’와 처음으로 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런 후배들이 있기에 오늘의 제가 있고, 캄보디아가 한국에 호의를 갖게 됐다는 것을 밝히고 싶어서입니다.”

그는 인터뷰 도중 후배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했다. 그는 후배들이 캄보디아군을 돕는 게 어떤 이득을 보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두렵다고도 했다. 후배들의 선의가 다르게 해석돼서는 안된다고 그는 재삼 강조했다. 하지만 사오소카의 청을 수락했을 때 군인들과 친해지면 나중에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막연한 생각은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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