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 얘기로 좀 돌아가보자. 나는 1901년생으로 마차에서 태어났다. 기이한 일이나 아마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나 싶다. 이상한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를 낳자마자 젖이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모유를 먹지 못했다. 그래서 아주 가난했음에도 우리집에서는 유모 한 분을 고용했다. 무려 40세가 넘으신 분이었다. 생각해보라! 이런 분의 젖이 오죽했겠는가. 이러니 어릴 때부터 몸이 좋을 리가 없었다. 언젠가 어느 의사가 나에게 몸이 아주 안 좋다고 했는데 나는 당연하다고 대답해줬다.
나의 부친 장쭤린(張作霖) 장군은 이때 사람을 죽이고 조선으로 도주하는 신세가 되었다. 부친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가서 청나라의 군인이 됐다. 부친이 군문에 들어선 계기가 아닌가 싶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애국적인 인물이었다. 아마 16세 때쯤인가 싶다. 대총통으로 정권을 잡고 있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일본과 치욕적인 21개조 조약을 맺었다.
이는 정말이지 망국조약이었다. 우리 집안의 근거지인 동북3성 역시 끝장이 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도저히 승복할 수가 없었다. 울분이 치밀었다. 이런 울분에다 몸까지 좋지 않았으니 탈이 나지 않을 리 없었다. 급기야 피를 토하고 드러눕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아버지는 자신의 휘하에 있던 영국인 의무대장을 불러 치료를 맡겼다. 그는 나의 증세를 잘 아는 듯 고민하지 말고 마음을 편히 가지라고 했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편히 지낼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그가 나에게 표를 한 장 주면서 강연을 듣고 오라고 했다. 톈진(天津)에 있는 난카이(南開)대학 장보링(張伯笭) 총장의 강연이었다.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요지의 강연이었다. 나는 그의 강연에 신선한 감명을 받았다. 그와 교류하면서 점점 내 인생의 지향점이 드러나는 기분이 들었다.
본래 나는 의학을 공부하려고 했다. 그게 애국광이자 사람에 대한 사랑이 유난했던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수차례 번민 끝에 나는 미국으로 가서 의학을 배우기로 했다. 지금의 선양(瀋陽)인 당시의 펑톈(奉天)에는 기독교청년회라는 것이 있었다. 장총장의 강연도 그곳에서 들었다. 나는 그곳에서 프라이드라는 분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는 내 계획에 흔쾌히 찬성을 표시하면서 3등 배표를 살 수 있는 70달러를 건네줬다.
“나는 지모가 대단했다”
나는 부친이 반대할 것 같아 몰래 도망가려 했다. 이때 독일 유학생 출신이자 나의 영어선생인 천잉(陳英)이라는 분이 아이디어를 줬다. “부친에게 군사학을 배우러 미국으로 가고 싶다고 하게. 부친은 자네가 군인이 되기를 원하니 보내주실 걸세”라면서. 나는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에 즉시 부친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웬걸, 부친은 내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천선생이 다시 나에게 다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1919년에 펑톈에 설립된 강무당(講武堂·오늘날의 사관학교)에 보내달라고 졸라보라는 것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틀림없이 미국유학을 보내줄 거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 강무당 입학을 요청했다. 그러자 부친은 “좋다. 우리 부대의 대대장을 맡으면서 다녀라. 졸업할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해서 나는 겨우 20세의 나이에 아버지 부대(동북군 군벌)의 대대장이 됐다. 이후 미국 유학은 진짜 물 건너갔다.
군대에서 나는 한마디로 승승장구했다. 20세 중반에 27사단장이 됐고 군벌간의 전투에서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아버지가 일본군의 손에 의해 돌아가신 후인 29세에 동북군 사령관으로 승진한 것은 너희들도 잘 아는 일이니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겠다.
자랑 같지만 나는 지모가 대단했다. 지금까지 아무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게 했다. 너희들은 내가 지금 웃고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바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나에게 무슨 특출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모두가 장총통의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 여사의 권유로 믿게 된 하느님이 정해놓으신 일이다.
올해 나는 86세다. 정말 많은 일을 봐왔고 많은 일을 겪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이것들이 다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이탈리아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당시 무솔리니의 권위는 대단했다. 나중에 전범으로 잡혀 총살형을 당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다시 내 젊은 시절로 돌아가보자. 나는 28~29세에 이미 천하의 전권을 장악했다. 사람들이 만약 내 역사를 쓴다면 이렇게 쓸 것이다. 동북군 사령관 겸 전국 육해공군 부총사령관이자 70만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산둥(山東)·허베이(河北)·산시(山西)성을 총지휘한 인물이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겨우 29세의 나이에 슈퍼맨이 되었던가? 그렇지 않다. 그도 아니면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던가? 마찬가지로 아니다. 이 말은 내가 겸손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다. 지금까지 살게 될지는 정말 꿈도 꾸지 못했다. 때문에 노는 것과 식도락을 즐기는 쪽으로 유달리 신경을 많이 쓴 편이었다. 중국의 3분의 1을 내 손안에서 주무르기도 했다.
내가 원한다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나중에 일본인들이 나를 없애려고 그토록 노력을 기울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의 회유
일본인들은 왜 ‘9·18사변(1931년 일본 관동군이 장쉐량의 근거지인 펑톈을 점령한 사건)’을 일으켰는가. 바로 나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 조국을 침략하기 위해 전쟁을 도발한 것이다. 당시 일본군의 전략은 다른 게 아니었다. 다른 장군들에 대해서는 별로 욕을 하지 않고 나만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나를 인간이 아니라고 모욕하고 온갖 유언비어를 다 만들어냈다. 심지어 가짜 사진까지 조작해내 나의 권위에 상처를 입히려고 했다. 당시 내가 동북지방의 중심세력으로 중국을 통일하려 했고 중국을 부강하게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전에 일본의 회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내가 동북지방의 왕이 되는 것을 용인하는 대신 장제스 총통의 난징(南京) 국민당 정부와 합작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아마 아버지가 일본군에 의해 폭사당한 후였을 것이다. 그들은 히야시라는 인물을 파견해 조문을 했다. 그는 주중 일본공사로 나중에 일본에서 승승장구해 대신으로 승진한 인물이다. 아무튼 나는 무척 슬펐으나 웃으면서 그를 맞았다. 히야시는 나와의 대화에서 나를 자신들의 괴뢰로 만들겠다는 흉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당연히 그것은 말도 안되는 제의였다. 그러나 나는 히야시에 대해서는 정말로 경외의 마음을 가졌다. 몸을 던져 절을 하고 싶을 정도로 유능하고 설득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나는 결코 그들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후 각종의 준비 끝에 나는 난징정부와 합작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인들은 당황했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일본인들은 나를 여전히 30세 이전의 아이로 생각하고 나를 속이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나의 이같은 전략은 1936년 12월12일 시안에서 장총통을 체포, 항일전쟁을 요구했을 때도 발휘됐다. 장총통은 나를 믿었으나 나는 그의 예상을 깨버리는 일대 용단을 내리고 구국전선에 내 몸을 던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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