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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의 땅 아프가니스탄

척박한 환경, 배타적 기질, 보수적 사회

  • 김병호·소설가/공학박사

알라의 땅 아프가니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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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현대문명의 불모지에 사는 사람들은 오직 신에 의지하여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읽으며 평생을 보내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완강하고 보수적인 이슬람 사회를 형성한 것은 아닐까.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은 해발 1760m의 고지대에 형성된 도시지만, 그보다 훨씬 높은 해발 4000 ~5000m의 힌두쿠시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서 마치 우물 속 같은 깊숙한 분지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래서 여객기는 수평으로 착륙하지 못하고 카불 상공에서 몇 차례나 동심원을 그리며 날다가 고도를 낮춘 다음 비로소 활주로에 내려앉는다.

고산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마치 저승의 빛깔이 저렇지 않을까 싶은 코발트색 하늘, 그 밑자락에 장엄한 자태의 힌두쿠시산맥이 억겁의 세월을 버티고 있다. 그러나 힌두쿠시의 연봉들은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품지 않은 거대한 바윗돌 같은 악산(惡山)이다. 음울한 잿빛 천지다.

어디 산뿐인가 아프가니스탄은 어디를 가든지 온통 카키색, 오래 전에 죽어버린 그런 폐허 같은 땅이다.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 그 사람들은 외지인을 만나면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건넨다.

“쥐뚜라스띠(안녕하세요).”

“살라말리 콤(그대에게 평화를).”



그러나 정작 아프가니스탄에는 역사 이래 그들이 갈망하는 평화가 없었다. 동서 양 진영 사이에 낀 미묘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그들은 외부에서 침입해 오는 무수한 군대들과 싸워서 생존해온 강인한 투지가 있다. 2500년 전, 우리나라 고조선 시기에 해당하는 까마득한 옛날,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와 싸웠고, 2200년 전,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삼국시대보다 더 이른 시기에 동진하는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와도 맞섰다. 또 1200년 전에는 당나라 불세출의 명장 고구려인 고선지(高仙芝) 장군의 침략을 받기도 했는데, 중국의 고전인 ‘당서(唐書)’는 그 시절 고선지 장군의 아프가니스탄 정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사흘을 행군하여 탄구령에 이르렀다. 탄구령은 험준하기 그지없는 데다가 40리 길이나 되었다. 군사들이 기가 질려서 고개를 넘으려고 하지 앉았고… 영마루에 오른 군사들은 가파른 절벽 길을 보자 겁을 먹고 ‘이 길을 어떻게 내려가라는 겁니까?’ 소리를 지르며 움직이지를 않았다.”

고선지 장군이 발자국을 남기고 간 후 400년쯤 지나서 이번에는 칭기즈칸이 침략을 해왔다. 당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세계를 정복한 칭기즈칸의 군대와 맞서 3년간 싸웠을 만큼 용맹스러웠다. 그러나 그들의 용맹성 이면은 처절한 피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바위 위에 건설한 솨리골골라성을 공격하다가 사랑하는 손자 무투겐이 화살에 맞아서 죽자 칭기즈칸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성을 함락시키는 날 살아 움직이는 것은 모조리 죽이겠다.”

이 성은 외부에서 몰래 물을 공급받아서 몇 달을 버텼는데, 종내는 칭기즈칸 군대에게 급수원을 들키는 바람에 낙성이 되고 말았다. 칭기즈칸은 얼마나 잔혹했던지 성 안의 고양이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것은 모조리 죽여버렸기 때문에 오늘날 그 성의 페허에는 개미 한 마리 없다고 한다.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아프가니스탄은 또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영국과 세 번이나 전쟁을 치렀다. 1838~1842년에 일어난 제1차전쟁은 당시 세계 최강의 영국군대가 칸다하르를 점령하고 이어서 카불까지 진격해 왕이 도망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카불에서 아프가니스탄인들의 결사적인 저항으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된 영국군과 인도군은 철수를 했는데 그 과정에서 1만여 명이 몰사했다. 제2차전쟁은 1878~1880년, 영국군이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침략해 끝내 보호국으로 만들었으나 1919년 아마눌라한 국왕이 제3차전쟁을 일으켜 영국을 몰아냄으로써 아프가니스탄은 완전한 독립국가가 되었다.

그로부터 60년 후, 1979년 말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함으로써 중동 산유국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또 당시 이란에서 불길처럼 일어난 호메이니의 이슬람 원리주의가 소련 남부의 이슬람 지역에 옮겨붙는 것을 사전에 차단할 목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해서 10년을 싸웠다. 그러나 소련은 막대한 피해만 보고 쫓겨갈 수밖에 없었다.

소련과의 전쟁이 멎은 지 10년도 안되어서 이젠 미국이, 그들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추락시킨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할 목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 했는데, 이 전쟁이 초강대국 미국이 의도한 대로 끝난다고 해도 곧이어 다음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알라신의 축복과 예고된 전쟁

이슬람교의 알라신은 자기를 믿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있는 중동, 리비아 등의 북부 아프리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에 크게 수고하지 않더라도 먹고 살 수 있도록 검은 황금 석유를 주었는데 아프가니스탄도 예외가 아니어서 엄청난 양의 석유 가스가 매장되어 있다. 그래서 주변 강대국들이 벌써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어 정치마저 불안한 아프가니스탄에는 또 한번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잠재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64만여 ㎢(남한 면적의 6배 이상)나 되는 넓은 나라다. 소련과의 전쟁 전 인구는 1600만여 명으로 인구밀도는 겨우 ㎢당 25명. 그리고 의료기술의 낙후로 평균수명은 40세를 조금 넘기는 수준이다. 주민은 파슈툰족(파탄족)이 60%쯤으로 주류를 형성하고, 그외에 타지크족, 우즈베크족, 하자르족이 섞여서 산다.

아프가니스탄족들은 15~16세기에 인도의 델리를 중심으로 로디왕조와 수르왕조를 세웠고, 또 1722년에는 이란의 이스파한을 점령하기도 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인들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과 인더스강 상류 지역에 민족 독립국가를 건설했다.

그러나 평화가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1973년, 왕족이자 수상인 다우드가 국왕 자히르샤의 외유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제를 선포하고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다. 또 1978년에는 청년장교들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가 발생. 대통령 다우드가 피살당하고 친소(親蘇)적인 카르말이 정권을 잡았지만, 미국과 중동 산유국들의 지원을 받은 무자헤딘 반군들의 집요한 저항으로 정권이 위태로워지자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10년을 싸웠다.

1986년, 카르말이 건강 악화로 인해 사퇴하자 비밀경찰 총수였던 나지불라가 정권을 인수하고 소련군이 철수했다. 그러나 신정부 구성문제로 다툼을 벌이다가 다시 내전상태에 돌입, 반군들이 카불에 입성하고 나지불라는 1999년 9월 27일 총살당했다. 이 과정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기치를 든 탈레반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 미국에 패퇴하기 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해왔다.

이슬람 사회에서 나라를 개방하고 국민들에게 민주화정책을 썼기 때문에 오히려 쫓겨난 두 명의 지도자가 있다. 이란의 팔레비 왕과 아프가니스탄의 자히르샤 왕이다. 자히르샤 왕은 국민에게 사회와 정치를 개방하고 교육을 장려했다.

1959년 8월 독립기념일에는 수백 년 동안이나 이어온 부르카를 여자의 얼굴에서 벗겨내는 용단을 내리기도 했으나 보수적인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1973년 쿠데타에 의해 외국으로 쫓겨나는 비운의 국왕이 됐다. 그후, 팔레비 왕의 개방에 대한 반동으로 이란에서는 보수적인 이슬람 원리주의자 호메이니가 집권을 했듯이,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탈레반이 들어서서 여자들의 교육기회마저 박탈하고, 다시 부르카를 씌워버렸다.

필자가 UN 산하 국제식량농업기구(FAO)의 수석고문관으로 아프가니스탄에 부임한 것은 소련과의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1989년이다. 필자는 1992년까지 3년 동안 단 한 명의 한국인, 아니 오직 한 사람의 노란색 피부를 가진 동양인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살면서 몸서리치는 전쟁을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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