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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말부록|월드컵 올가이드/화제발굴

역사를 바꾼 월드컵 70년 비화

  • 기영노·스포츠평론가 kisports@hanmail.net

역사를 바꾼 월드컵 70년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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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9년 7월14일 엘살바도르 육군과 공군이 불시에 탱크와 전투기로 온두라스를 공격하자, 온두라스도 엘살바도르의 여러 도시를 폭격했다. 축구 때문에 양국 국민이 감정싸움을 벌이고, 외교관계를 단절하더니, 급기야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2001년 12월1일 부산 전시컨벤션센터에서 있었던 2002 한·일월드컵 조추첨에서 한국은 포르투갈, 폴란드, 미국과 함께 D조에 배정됐다. 2001년 11월 현재 FIFA(국제축구연맹) 랭킹 4위인 포르투갈은 미국(20위) 폴란드(33위) 한국(43위)보다 분명히 한 수 위다. 한국으로서는 예선 마지막 경기로 벌어질 포르투갈전 결과에 따라 월드컵 16강진출 여부가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포르투갈은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 때 돌풍의 팀 북한에 3대0으로 밀리다가 5대3으로 역전승을 거둔 팀이다. 만약 북한이 포르투갈을 꺾었다면 북한은 ‘월드컵 4강’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남길 뻔했다. 그런데 북한은 왜 3대0으로 리드하던 게임을 망치고 말았을까.

북한은 당시 4조에서 소련, 칠레, 이탈리아와 만났다. 그러자 축구전문가들은 이탈리아와 소련이 8강에 오를 것이며 칠레가 복병이라고 평가했다. 북한을 언급한 전문가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북한 선수들은 전원이 100m를 11초대에 뛰는 준족이었으며, 2년여 동안 군부대에서 특수훈련을 받아 90분을 뛰고도 남을 만큼의 체력을 갖추고 있었다.

북한은 첫 경기에서 소련의 말리페에프 선수를 막지 못해 0대3으로 무너졌다. 그러나 두번째 경기인 칠레전에서 후반 43분 박승진 선수가 남북한 선수로는 최초로 골을 터뜨려 1대1로 비겼다. 자신감을 얻은 북한은 예선 마지막 경기인 이탈리아전에서 전반 41분 ‘동양의 진주’ 박두익 선수가 결승골을 터뜨린 데 힘입어 1대0으로 승리하며 월드컵 역사상 최대의 이변을 일으켰다. 거함 ‘이탈리아호’를 격침시킨 북한 선수들은 미들즈브러 스타디움에 모인 1만8000여 명의 관중 앞에서 ‘김일성 수령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고, 관중이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축제를 벌였다. 그때가 1966년 7월19일이었다. 그런데!

들뜬 분위기가 하루 이틀 지나자 ‘이제 우리는 목표를 달성했지 않냐’는 자만감이 팽배해진 선수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영국의 뒷골목을 단체로 찾게 되었다. 이들은 다음날 브라질을 꺾은 포르투갈과 8강전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밤늦도록 하얀 피부를 탐닉했다.

북한과 포르투갈의 준준결승이 열린 리버풀 스타디움에는 5만1780명의 관중이 모여들었다. 예선이 벌어졌던 미들즈브러 구장의 1∼2만 관중과는 차원이 달랐다. 만원 관중을 본 북한 선수들은 없던 힘까지 솟는 듯했다. 스페인 주심 가르데아자발이 휘슬을 불기가 무섭게 23초 만에 박승진이 포르투갈 골문을 갈랐다. 선제골을 얻어맞은 포르투갈 선수들은 ‘어! 이거 보통내기가 아니네’라며 반격했다. 그러나 기계처럼 돌아가는 북한의 조직력을 제압하지 못했다. 21분경 이동운이 추가골을 터뜨렸고, 1분 뒤 양성국이 세번째 골을 성공시켰다.



전반전 중반이 지나지 않아 3대0 스코어라면 상대팀은 포기할 만한 구실을 찾기 마련이다. 그러나 북한 선수들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영국의 뒷골목만 가지 않았어도 90분이 아니라 120분 연장전까지 소화할 수 있었을텐데….

북한이 지친 모습을 보이자 포르투갈 선수들은 ‘검은 표범’ 에우세비오를 내세워 총반격에 나섰다. 에우세비오는 전반 27분부터 후반 14분까지 32분 동안 무려 4골을 넣어 4대3으로 경기를 뒤집었다. 그리고 후반 33분 호세 아우구스토 선수의 다섯번째 골이 터지면서 북한은 추격할 의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북한 돌풍이 사그라진 이유

군인 출신 전두환 대통령이 스포츠계에 남긴 에피소드가 많다. 오죽하면 ‘스포츠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었을까? 전두환 대통령은 프로복싱 세계타이틀매치를 보다가 전화를 걸어 코치(선수)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텔레비전으로 스포츠중계를 시청하다가 재미있다고 생각되면 느닷없이 경기현장으로 달려갔다.

월드컵 무대에서도 군인 출신의 극성(?)은 유별났다. 1974년 서독월드컵 2조에는 자이레, 브라질, 스코틀랜드, 유고가 속해 있었다. 당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모부투 장군이 정권을 장악한 자이레는 예선 첫 경기에서 스코틀랜드에 0대2로 패했다. 이제 유고와의 2차전에서도 패하면 탈락이 확정적이었다. 최종 3차전 상대는 브라질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자이레는 유고전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자이레 감독이 유고 출신의 비디치였다. 모부투 장군은 혹시 비디치가 최선을 다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몇 날을 고심하던 모부투는 대표팀에 “비디치를 해고하라”는 긴급전문을 내려보냈다. 대신 현지에 가있던 체육부장관한테 감독직을 맡으라고 지시했다. 그야말로 축구의 ‘축’자도 모르는 체육부장관이 졸지에 월드컵대표팀 사령탑에 앉게 된 것이다.

결과는 뻔했다. 자이레는 유고에 0대9로 대패했다. 모부투는 브라질전을 앞두고 또다시 전문을 보냈다. ‘체육부 장관으로는 안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다시 감독을 바꾼 자이레는 브라질에도 0대3으로 패해 3경기에서 14골을 허용하며 단 한 골도 넣지 못하고 예선 탈락했다.

한국도 98프랑스월드컵 때 멕시코에 1대3, 네덜란드에 0대5로 잇따라 패하자 차범근 감독을 중도 해임한 바 있다. 아마 전두환 대통령이 그때까지 집권하고 있었더라면, 차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마지막 벨기에 전에서는 자신감을 잃은 김병지 골키퍼를 빼고 서동명 골키퍼를 넣고, 홍명보를 미드필드에 배치하라”는 ‘특명’을 내리지 않았을까.

최근 외신은 축구영웅 디에고 마라도나가 2003년 아르헨티나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카를로스 메넴(71) 전대통령의 러닝메이트가 되고 싶어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마라도나는 정치(부통령)를 하고 싶은 것이다. 마라도나는 자신의 영원한 라이벌 펠레가 브라질에서 체육부장관을 지냈으니 자신은 그보다 높은 벼슬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마라도나 하면 ‘신의 손’을 빼놓을 수 없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이 열릴 무렵 마라도나의 축구실력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마라도나는 A조 예선에서 한국의 허정무 등 찰거머리 같은 수비수들에게 차이고 넘어지면서도 자기실력을 십분 발휘했다. 월드컵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문제의 8강전. 상대팀 잉글랜드도 아르헨티나 공격의 핵 마라도나를 철저히 마크했다. 후반 6분경까지 0대0이었다.

그 무렵 아르헨티나의 발다노가 잉글랜드 수비의 한 축을 무너뜨리더니 골문 앞으로 길게 센터링했다. 잉글랜드 골키퍼 쉴턴은 높이 뜬 공을 향해 치솟았고, 그 앞에서 알짱거리던 마라도나도 함께 점프했다. 방향이 바뀐 공이 잉글랜드 문전으로 빨려 들어가자 마라도나가 두 손을 들어 환호했다.

신의 손, 신의 발

쉴턴 골키퍼의 신장은 181cm이고 마라도나는 쉴턴보다 16cm나 작은 165cm였다. 게다가 골키퍼는 점프하면서 손을 사용할 수 있으니 마라도나보다는 적어도 50cm 이상 유리하다. 그런데 땅딸보 마라도나에게 당했으니 쉴턴은 어처구니 없었다. 아즈테카경기장에 모인 12만 명에 가까운 관중들도 마라도나의 묘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주심 튀니지의 알리 베세나우르는 즉시 아르헨티나의 득점을 선언했다. 그러나 뒤늦게 마라도나의 핸들링을 알아차린 쉴턴이 주심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마라도나의 머리를 맞고 들어간 게 아니라 손으로 처넣었다.”

잉글랜드의 강력한 항의에도 주심은 한번 내린 판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경기 후 사진과 TV화면을 분석한 결과 마라도나가 왼손으로 처넣은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자 마라도나는 묘한 말로 반칙을 인정했다.

“내 손이 아니라 ‘신의 손’이 골을 넣은 것이다.”

아닌 밤중에 ‘신의 손’이라니. 정말 기막힌 표현이다. 하긴 골키퍼 쉴턴이 손을 뻗으면 2m가 넘을 것이다. 그러나 키 작고 팔도 짧은 마라도나는 아무리 손을 뻗는다 해도 180cm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주심도 가리지 못할 만큼 빠르고 재치있게 손으로 쳐 넣었으니 확실히 ‘신의 힘’을 빌렸는지도 모른다. ‘신의 손’이 아니라 ‘신의 힘을 빌린 장난’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불과 3분 후 마라도나는 ‘신의 발’로 잉글랜드 수비진을 유린했다. 월드컵 사상 가장 ‘화려한 골’을 터뜨린 것이다. 하프라인에서 공을 잡은 마라도나는 40여m를 혼자 드리블해가며 무려 5명을 제치고 골을 성공시켰다.

얼떨결에 두 골을 허용한 잉글랜드는 전열을 가다듬어 맹반격을 폈으나 후반 36분 리네커가 한 골을 만회하는 데 그쳤다.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가 마라도나 한 명에게 농락당한 것이다. 이후 마라도나는 벨기에와의 준결승전에서 혼자 2골을 터뜨려 아르헨티나를 결승전에 올려놓았고, 서독과의 결승전에서는 서독 수비진영의 혼을 뺀 절묘한 전진패스로 브라운, 발다노, 부르차가의 득점을 도왔다. 3대2. 아르헨티나가 두번째로 월드컵을 제패한 것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공인구 피버노바는 역대 축구공 가운데 가장 탄력이 뛰어나고 스피드가 좋아 벌써부터 골키퍼 수난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월드컵에서는 1970년 멕시코대회부터 공인구를 사용해왔다. 이전까지는 개최국이 제공하는 공을 쓰는 것이 관례였다.

1930년 우루과이월드컵에서는 전반과 후반에 각각 다른 공인구를 사용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결승전에 오른 아르헨티나가 자기네 공을 사용하자고 제의하자, 개최국으로 결승까지 진출한 우루과이가 반발한 것이다. 결국 토스를 통해 아르헨티나측이 이겨 전반전은 아르헨티나 공으로, 후반전은 우루과이 공으로 경기를 벌였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아르헨티나 공으로 경기를 한 전반전은 아르헨티나가 앞섰고(2대1), 우루과이 공을 사용한 후반전에서는 우루과이가 일방적으로 우세했다(3대0).

1930년 우루과이대회는 첫 월드컵이라 그런지 해프닝이 많았다. 우승후보인 아르헨티나의 센터포드 페레이라가 학기말 시험을 치르기 위해 귀국했고, 페레이라 대신 출전한 18살 고교생 스타빌레가 데뷔전인 멕시코전에서 월드컵 사상 최초로 해트트릭을 기록했는가 하면, 득점왕(8골)까지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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