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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발굴Ⅰ

청나라 역사서, 중국 요서를 백제 영토로 인정

중국의 동북공정 뒤엎을 史料 찾았다!

청나라 역사서, 중국 요서를 백제 영토로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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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흠정만주원류고’, 백제를 중국 동부 지배한 황제국으로 기술
  • ●온조왕~다루왕 사이 11명의 왕이 역사에서 사라졌다
  • ●소정방이 멸망시킨 것은 일부분, 신라 멸망 후에도 백제는 존속
  • ●한반도 서부 중심의 백제사는 일제의 역사 왜곡
청나라 역사서, 중국 요서를 백제 영토로 인정

충남 부여 소재 백제 별궁 연못인 궁남지. 최근 중국 동부지방에 위치했다는 ‘화북백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흔히 백제라고 하면 의자왕, 삼천궁녀, 낙화암 같은 패망의 역사, 부끄러운 역사를 떠올린다. 그것은 백제 역사에서 자랑스러운 면보다 어둡고 수치스러운 면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우리는 백제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백제가 부여의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이고, 대륙 깊숙한 요서(遼西)지역에 수도를 가질 만큼 강력한 대제국이었다는 사실은 망각되었다. 그러나 백제는 삼국 중 제일 먼저 패망한 나라가 아니라 가장 오랫동안 존속하며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준 나라였다.

잃어버린 백제사를 복원하기 위해선 백제의 뿌리인 부여에서 실마리를 풀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시경(詩經)’ 노송(魯頌) 비궁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부산(鳧山)과 역산(繹山)을 차지하고 마침내 서국(徐國)의 영토를 짓밟아 해방(海邦)에 이르니 회이(淮夷)와 만맥(蠻貊)과 저 남쪽 이족들이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감히 순응하지 않는 이가 없어 노후에게 순종했다.”

노송이란 동방의 동이족을 몰아내고 노나라를 세운 주공(周公)을 칭송하기 위해 자손들이 쓴 글로 여기에 나타나는 부, 역, 서택, 해방, 회이, 만맥, 남이는 노나라 건국 당시 오늘의 산둥성, 장쑤성, 저장성, 안후이성, 푸젠성 일대 동남방 지역에 분포해 있던 동이족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부(鳧)는 9이(九夷)의 다섯 번째인 부유(鳧臾)로 바로 부여국의 전신이다. 이순의 ‘이아석지주’와 형병의 ‘논어주소’는 “동북지역 구이의 다섯 번째가 부유”라 했다. ‘자회보’에는 “부유는 동방의 나라 이름인데 바로 부여다”라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논어’ 자한 편에도 “구이의 다섯 번째인 부유는 바로 부여”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처럼 고대문헌을 통해 오늘날 취푸를 중심으로 한 산둥성 일대가 노(魯)나라가 세워지기 전까지 부여의 발상지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산둥성의 부산이 부여의 발상지라는 사실은 중국 고대문헌에서 쉽게 확인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현대 역사학자들도 널리 인정하는 바다.

예컨대 중국 역사학자 허광웨(何光岳)는 그의 저서 ‘동이원류사(東夷源流史)’에서 “‘후한서’ 등 사서에 이미 부여, 동명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동명이 나라를 세운 것은 동한시대 중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명 이전에 이미 부여족이 존재했다. 이 부여족은 어느 지역에서 기원했는가”라고 묻고 “사료로 보건대 동한 이전 부여족의 발원지는 산둥성 추현 부근에 있는 부산, 즉 부유”라고 했다.

복희에서 부여로 정통성 계승한 백제

사마천이 쓴 중국 역사 ‘사기’는 황제(黃帝)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공자는 분명히 ‘황제 이전에 신농씨(神農氏)가 있었고 신농씨 이전에 복희씨(伏羲氏)가 있었다’고 했는데 사마천은 왜 황제를 출발점으로 삼았을까. 그것은 복희를 한족의 시조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지지(輿地志)’의 다음 기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산은 추현에 있다. 살피건대 어대(魚台)지방의 지형이 마치 오리가 날아가는 모양과 비슷하다. 세상에서는 복희가 이곳에서 팔괘(八卦)를 그었다고 한다.”

중국인이 한족의 시조로 받드는 황제보다도 훨씬 앞선 시기에 동양 인류의 시조라 해도 과언이 아닌 복희가 있었고, 그의 활동무대는 다름 아닌 부여의 발원지 부산이었다는 기록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올해 4월 필자가 현지답사를 통해 확인한 바로는 중국 산둥성 줘청(鄒城)시 이산(繹山)에서 그리 멀지 않은 미산호(微山湖)부근에 실재 부산이 있었으며 복희의 사당을 비롯한 유물유적들이 집중해 있었다.

이처럼 고대 문헌기록과 유물유적들은 산둥성 부산이 동이 부유의 근거지이고, 부유가 부여의 발원지이며 곧 복희의 주요 활동무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복희가 동이족의 시조이고 부산이 동이문화의 발상지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복희 시대는 고대국가 수립단계에 진입하기 이전 씨족사회였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세기’에 의하면 동이 9족이 모여서 최초로 나라를 세운 것은 고조선이다. 그러니까 부유에서 9부족으로 발전하고 9부족이 모여 고조선을 세운 것으로, 단군은 동이의 국조(國祖)이고 복희는 동이족의 시조(始祖)이며 부유는 동이 역사의 출발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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