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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

상처를 보석으로 만든 영적 트레이너 ‘들꽃피는 마을’ 김현수 목사

“지도자와 낙오자는 ‘한끝’ 차이죠”

  • 글: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상처를 보석으로 만든 영적 트레이너 ‘들꽃피는 마을’ 김현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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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보석으로 만든 영적 트레이너 ‘들꽃피는 마을’ 김현수 목사

‘들꽃피는 마을’에 거주하는 아이들과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는 김현수 목사.

이런 극한상황을 한두 번 겪었으랴. 집안은 늘 작은 전쟁터였다. 그들 부부에게는 딸 심지가 있었고 시골서 올라오신 어머니를 교회사택에서 모시고 살았다. 어머니는 한 달쯤 아이들과의 생활을 지켜보시더니 기어이 폭탄선언을 하셨다. “안 되겠다. 내가 집을 나가마!” 집 나온 떠돌이 녀석들을 택하든지 늙은 어미를 택하든지 양자택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도 단호하게 맞섰다. “어머니는 집에 계세요. 제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한술 더 뜨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결국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동안 몹시 앓으시더니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 그 이후 한마디 없이 어머니가 앞장서 아이들을 거뒀다. 다니던 공장도 그만두고 팔 걷어붙이고 아이들과의 싸움에 나섰다. 하나뿐인 손녀 심지를 몸소 지키려고 다짐하신 건지도 몰랐다. 한번은 애들이 어머니에게 따지고 대들었다. “왜 심지와 우리를 차별대우하느냐”고. 어머니는 아주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래. 나는 심지가 너희보다 더 신경 쓰인다. 하나뿐인 내 손녀 아니냐!” 이런 솔직한 대답을 아이들은 좋아했다. 상대방 입장이 이해가 된다는 거다. 지금 그 어머니는 들꽃마을을 가장 힘차게 이끄는 대안가정을 이루고 있다. 다섯 남매를 길러낸 따스한 가슴으로 망아지 새끼 같은 사내아이 여섯을 품고 사신다.

김 목사는 강원도 횡성군 태기산 자락 황골에서 자랐다. 우리나라에서 육안으로 별이 가장 많이 보인다는 맑은 동네였다. 부모님은 소작농이었고 당연히 가난했다. 어렸어도 봄이면 장리쌀을 얻어야 한다는 고통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교회 비인가학교에서 開眼

아버지는 억척 같은 농부였다. 그러나 한번 술을 입에 댔다 하면 며칠이고 일어설 줄을 몰랐다. 해방이니 전쟁이니 좌우대립이니 해서 다들 울분이 목 밑까지 차올랐던 시절이었다. 술이 취하면 그것들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그는 어둡고 답답한 공기가 짓누르는 집이 싫었다. 1955년생인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해 황골을 떠나 서울로 왔다. 중학교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강원도 소작농 집 장남의 서울유학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 외가가 중랑천변에 있었다. 천변에다 판잣집을 새로 지어야 했던 외가는 가난한 그의 집에 도움을 청했다. 대신 장남을 서울로 데려가 공부시켜주겠다는 약속이 있었다. 그는 서울 오기 위해 양치질이란 것을 처음 해봤다. 버스도 처음 타봤다. 그러나 서울 입성은 전혀 화려하지 않았다. 강원도 깡촌놈의 눈에도 중랑천변 풍경은 한심했다. 게딱지만하게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에 강둑 가득 들어선 연탄공장에 그 위로 시꺼멓게 불어오는 바람에.



당시는 중학교에도 입시가 있었다. 그는 시험에 낙방했다. 그러나 그도 외삼촌도 개의치 않았다. 후기 시험은 아예 보지도 않고 그냥 강둑 너머, 교회 부설 비인가학교인 무궁화학교에 들어갔다. “돌아보면 그 학교가 내 인생을 결정지었어요. 거기서 예수님을 알게 됐거든요. 새벽마다 외할머니를 따라 기도하러 다녔죠. 어쩌다 빠지는 날이면 내가 큰 벌 받겠구나 싶어 불안했어요. 뭐가 뭔지 몰라도 열심히 다니긴 했나봐요.”

하나님은 도와주지 않고…

그 교회는 부흥회를 많이 하는, 지금 생각하면 순복음 계열의 교회였다. 그는 밤새 기도하고 찬송하느라고 곧잘 목이 쉬곤 했다. 지금도 말을 많이 하면 금방 목이 쉬는 건 그때의 후유증인지도 모른다. 그는 기도하고 찬송하면서 다른 사람처럼 신비체험을 하고 싶었다. 방언도 하고 귀신도 쫓고 안수도 하는 사람이 많은 교회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도해도 은사를 주시지 않는 거예요. 차마 하나님께 섭섭하다고 말할 수는 없고 내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거겠지, 하면서 포기하는 마음이 어찌나 울적하든지….”

그토록 하나님이나 세상관심에 민감했던 건 그가 정규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부모와 멀리 떨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무궁화학교에서 그는 비교적 천진난만해도 좋았다. 정규학교가 아니라는 설움이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문학이나 신앙에 대해 얘기 나눌 동류(同類)가 많았던 까닭이다. 아폴로 11호가 달착륙을 했다고 남산까지 걸어간 기억도 있고 초대권을 얻어 중랑교 어귀 새서울극장에도 자주 다녔다. 무궁화학교에 다닌다는 자격지심이 없지 않았지만 세월은 금방 갔다. 졸업 무렵 검정고시를 봤지만 다시 낙방이었다. 처음에 50명이던 무궁화학교 인원은 졸업에 이르자 달랑 그 혼자만 남았다. 쓸쓸했다. 제대로 졸업식을 할 수조차 없었다. 그 썰렁하던 졸업식은 지금도 가슴 뜨끔거리는 아픈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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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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