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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方外之士 ⑩

뗏목 타고 바다를 떠도는 사나이 윤명철

망망대해 별빛 아래 누리는 고독한 절대자유

  • 글: 조용헌 江湖東洋學연구소 소장, 원광대 초빙교수 cyh062@wonkwang.ac.kr

뗏목 타고 바다를 떠도는 사나이 윤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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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뗏목을 타면서 언제가 가장 즐거운가.

“밤에 별을 보면서 상상할 때다. 별빛을 보면 늘 태초의 신화가 떠오른다. 그러다 문득 인간과 우주가 합일되는 체험은 과연 어떤 것일까 궁금해진다. 가끔은 사랑하는 여인을 생각하기도 한다. 대양의 끝에서 마지막 붉은 빛을 토하는 석양에다가 사랑하는 여인을 오버랩시키는 순간 한없이 행복하다는 느낌이 든다. 해질 무렵의 노을빛은 기가 막히게 멋지다. 바다에서 보면 시야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없다. 수평선 뒤로 벌건 태양이 넘어가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우주 탄생의 신화에 나오는 장면이 아마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노을빛도 시간대별로 다른데, 처음에는 옅은 붉은색이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진홍색으로 변해간다. 바닷물 색깔도 시간대별로 달라진다.

또 뗏목에 앉아 있다 보면 바다와 나, 대자연과 내가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현실에서 바다와 사람은 갈등관계지만 그 사이에 뗏목이 자리잡으면 양상이 변한다. 양자가 화합한다. 상극관계가 상생관계로 변하는 것이다. 이런 이치가 참 묘하다고 느꼈다. 정처 없이 바다에 떠다니다 보면 라면봉지 같은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런데 라면봉지를 건져내 보면 거기에 따개비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하는 생명력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느꼈다. 생명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이렇게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탐험을 굳이 강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탐험은 인간의 한계상황을 깨뜨리는 행위다. 한계상황을 깨뜨리면 통쾌한 자유가 밀려든다. 인간 역사는 자유로의 확대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탐험을 통해서 인간의 자유가 확장된다고 믿는다. 또 탐험은 대자연과 합일을 이루는 행위다. 현대인은 문명에 갇혀버렸다. 루카치는 그의 명저인 ‘미학’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막의 대상들이 밤에 별을 보고 가던 때가 행복했다’고. 사막에선 자연과 인간 사이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다. 자연과 내가 직접 교감한다. 동양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데서 오는 쾌감 아니겠는가. 탐험은 극한 상황으로 자신을 몰고 가는 행위다. 극한 상황에서야 비로소 대자연의 실체에 직면할 수 있다. 직면은 목숨을 거는 순간에 이뤄진다. 목숨을 건다는 것은 벌거벗고 마주친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러면 인간은 진실해진다. 진실해질 때 자연과의 합일이 이뤄지지 않나 싶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전을 추구한다. ‘빵 가운데 가장 맛있는 빵은 안전빵’이라는 농담도 있지 않던가. 우리가 돈 벌려고 그렇게 아등바등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안전한 인생을 보장받고 싶어서다. 안전이란 무엇인가. 목숨이다. 인간은 목숨을 지키고 싶어한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인간은 자진해서 목숨을 건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안전에 금가는 행동을 자처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필자는 윤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내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자유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납득하기 쉽지 않았다. 뒤집어보면 뗏목탐험은 그 무엇보다도 자유를 구속하는 일이기도 하다. 뗏목 위에 무슨 자유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자유를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는 자유의 하부구조에는 엄청난 위험과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공포와 자유. 이것도 동전의 양면관계에 속한단 말인가. 공포스러운 만큼 거기에 비례해서 자유를 느끼는 쾌감도 큰 것이 세상 이치란 말인가.

하지만 40대 중반에 들어선 후로 필자는 부쩍 ‘인생 별것 아니다’는 생각을 한다. 성인이 된 후 보낸 20여년을 생각하니 순식간이었다. 앞으로의 20년도 순식간에 지나갈 것이 뻔하다. 이렇게 지내다가 삶을 등지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밀려온다. 임종의 순간에 너무도 후회할 것 같다. 그럴 바에야 모험을 한번 시도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윤 교수야말로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게 아닐까. 그는 도대체 어떤 팔자길래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인가. 나는 분석의 한계를 느낄 때 상대방의 생년월일시를 묻는 습관이 있다. 사판(事判·합리적 판단)으로 풀리지 않는 대목이 이판(理判·신비적 판단)으로 해석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1954년 음력 4월7일 사시(巳時)에 태어났다고 한다. 만세력을 꺼내 찾아보니 갑오(甲午)년, 기사(己巳)월, 을축(乙丑)일, 신사(辛巳)시가 나온다. 지지(地支)에 불이 많은 사주다. 음력으로 4월이면 더워지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거기에다가 태어난 해가 말띠 해인데, 이는 불을 의미한다. 태어난 시간도 사시다. 사시도 불에 해당한다. 누워 있는 방바닥 구들장이 뜨끈뜨끈 데워지는 형국이다.

이렇게 불이 많은 것은 예술가 사주에 가깝다. 조직에 길들여지지 않는 팔자인 것. 예술가는 자기 생각을 숨기지 못하고 밖으로 발산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 불이 많아서 그 발산하는 힘이 대단하다. 그 힘이 그를 탐험으로 몰고 가지 않을까. 하필이면 왜 바다를 택했는가. 방바닥이 뜨거우니 물로 식혀야 할 것 아닌가. 불을 식히려면 물이 최고다. 바다의 뗏목에서 타고난 사주의 불기운을 식히는 형국이다. 이런 사주가 쉬는 날 방바닥에 누워 TV를 보기는 어렵다. 뛰쳐나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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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용헌 江湖東洋學연구소 소장, 원광대 초빙교수 cyh062@wonkw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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