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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奇人·名人 ④

춤꾼 운심|“천하 名妓가 천하 명승지에서 죽는다면 그 또한 만족이니”

  • 글: 안대회 영남대 교수·한문교육 ahnhoi@yumail.ac.kr

춤꾼 운심|“천하 名妓가 천하 명승지에서 죽는다면 그 또한 만족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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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심이 18세기 전기에 살았던 윤순(尹淳)의 소실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녀의 전성기는 18세기 전기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운심의 특장은 양손에 칼을 들고 추는 칼춤이었다. 여러 기록으로 미루어 18세기와 19세기에는 각종 공연에서 검무가 널리 추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운심은 당시 널리 유행하던 춤의 최고봉에 올랐던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운심의 특기인 검무는 언제부터 유행하게 되었을까. 언뜻 아주 오래 전부터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물론 고구려 때부터 다양한 검무가 있었음은 벽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신라 때 검무의 일종인 황창무(黃昌舞)가 조선시대까지 계승되어 주로 경주지역에 연행(演行)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검무는 남성의 춤이었다.

검무는 무예의 일종으로 추어지기도 했다. 검객(劍客)이 무예를 연마하는 과정에서 추는 검무가 그것이다. 유본학(柳本學)과 심능숙(沈能淑)이 쓴 검객 전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이러한 검무에 능했다. 유본학의 ‘김광택전(金光澤傳)’에 따르면, 운심과 비슷한 시기의 검객으로 검선(劍仙)으로 불린 김체건(金體健)은 아버지 김광택과 김신선(金神仙)으로부터 신선술과 검술을 배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검술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칼춤에 빼어난 재주를 보인 그는 검무 솜씨가 가히 입신의 경지에 들어 땅 가득히 꽃잎이 흩어지는 형세를 취할 줄 알았고 몸을 숨겨 보이지 않게도 했다고 전해진다. ‘김광택전’은 당시에 그의 명성이 대단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김체건의 후계자로 비견되는 이가 19세기 사람인 탁문한(卓文漢)이다. 어릴 적부터 검무에 능통했던 탁문한은 회오리바람에 꽃잎이 흩어지는 형세를 취할 줄 알았는데 세상에서는 김광택이 죽은 지 100년 만에 탁문한이 그 신비한 기술을 터득했다고 했다. 심능숙의 ‘탁문한기실’을 보면 탁문한이 자신의 검 솜씨를 얼마나 자부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산대도감극 연희가 펼쳐지는 곳마다 찾아가서 다른 사람의 검무를 구경하다가, 검무를 추는 사람의 솜씨가 졸렬하다고 생각하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검을 빼앗아 자신이 기세등등하게 춤을 췄다는 것이다.

18세기 공연예술의 절정



그러나 이러한 검무는 운심이 춘 검무와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운심이 춘 검무는 검객들의 검무와는 달리 공연을 위한 것이었다. 이 검무는 18세기에 들어서 갑자기 유행했고, 19세기 춤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근대까지 유행하며 현재에 이른다. 공연을 위한 검무의 형식도 네 명이 추는 검무, 두 명이 추는 검무 등으로 다양했으며 항장무(項莊舞)와 같이 연극의 형식을 띤 검무도 있다. 검무를 지칭하는 이름도 다양해서 검기무(劍器舞)라는 말로 불리기도 했다.

이 가운데 어느 형식이 검무의 대종을 이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검무를 추는 방법과 과정 및 소품에 대해서는 19세기 후기의 학자 정현석(鄭顯奭)의 저술 ‘교방가요(敎坊歌謠)’에 간단하게나마 밝혀져 있다. 네 명의 기생이 추는 검무형식인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네 명의 기생이 나란히 절하고 일어서면 음악이 연주된다. 두 번째 북이 울리면 한 손을 들어올리고, 다섯 번째 북이 울리면 양손을 들거나 아니면 한 손은 들고 한 손은 내린다. 쌍쌍이 마주하여 춤을 추고 쌍쌍이 마주앉아 칼을 희롱할 때에는 먼저 칼 하나를 줍고 다음에 칼 하나를 주워서 춤을 추다가 곧 일어나서 춤을 춘다. 나아가고 물러나기를 정해진 숫자대로 하며, 서로 뒤쫓다가 서로 칼을 치다가 마지막에는 연풍대(宴豊臺) - 즉 칼을 휘두르고 몸을 돌리면서 원을 그려나가는 동작이다. 일명 연풍대(軟風隊)라고도 한다 - 장면을 한다. 칼을 겨드랑이에 끼고 한 번 돌고, 칼 하나를 휘두르고 한 번 돌며, 쌍칼을 휘두르고 한 번 돌고, 칼을 찌르고 한 번 돈다. - 한 명의 기생이 춤을 출 때 나머지 세 명의 기생은 쉰다. - 검을 던지고 절하고 나온다.]

이 시기에 오면 검무는 이렇듯 틀이 갖춰진다. 이런 형식은 과연 언제 누구에 의해 정착되었을까.

18세기 회화나 문헌에 등장하는 검무의 대종은 두 명의 기생이 추는 쌍검대무(雙劍對舞)다. 이 형식은 18세기 들어와 비로소 유행한 것으로 이전에는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

쌍검대무에 대한 첫 기록은 김창업(金昌業)의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에 나온다. 1713년 3월18일 연경(지금의 북경)에서 돌아온 사절단 일행이 평안도 정주(定州)에 유숙하게 되는데 이때 김창업은 16세의 가학(駕鶴)이란 기생과 13세의 초옥(楚玉)이란 두 기생이 추는 검무를 구경한다. 동기(童妓) 둘이 쌍검대무 형태로 검무를 춘 것이다. 초옥이 추는 춤을 높이 평가한 김창업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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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안대회 영남대 교수·한문교육 ahnhoi@yumail.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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