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한 역사학자의 苦言

노 대통령은 정조에게서 배우라

신하를 ‘국가의 편’과 ‘역적의 편’으로 나누는 순간 개혁은 실종되고 氣싸움만 남는다

  • 글: 박현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구교수 hyunmp@hotmail.com

노 대통령은 정조에게서 배우라

2/8
그렇다면 전하께서 ‘세도(世道)에 따르는 정치’를 포기하고, ‘세도(勢道)에 의한 정치’로 돌아선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1795년부터 지금까지 전하는 믿었던 “어진 신하들”에게 심한 배신을 느끼셨던 듯하다.

노론의 대표적인 ‘비판적 참여자’라고 할 김종수(金鍾秀)는 물론이고, “전하로부터 저토록 신임을 독점했다”(23/1/18)는 채제공(蔡濟恭)조차도 전하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게다가 작년 초에는 ‘좌(左)제공, 우(右)종수’마저도 약속이나 한 듯 열흘 간격을 두고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국가재정을 도맡아오던 정민시(鄭民始)가 석 달 전에 사망했을 때도 전하는 심히 허탈해하셨다.

결국 전하는 내게 ‘세도를 위임’함으로써 정국을 돌파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신 것 같았다. 1795년 이후 철저하게 임금을 고립시킨 심환지를 비롯한 노론 세력의 강고함과, 무기력 한 소론파 이시수·이만수, 그리고 천주학 문제로 유배 가 있거나 외직에 밀려나 있는 남인의 젊은 신하들, 노론의 분열을 통한 지배, 이것이 바로 전하가 내게 기대하는 바였다. 이제 전하는 재위24년의 정치원칙을 걸고 새로운 승부수를 던지고 계셨다. 그리고 그러한 승부수는 1795년부터 준비되고 있었다.

2.

1795년(정조19) 정월 초하루의 날씨는 몹시 흐렸다. 일식(日蝕)이 진행되고 있다는 관상감의 보고가 있었지만, 해는 앞으로 벌어질 1년의 정국만큼이나 구름에 가려서 보이지가 않았다. 전하는 여느 때처럼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새해 첫날을 시작하셨다.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에 참배하는 일은 이제 전하의 모든 거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자식이 아버지의 사당에 참배하는 것이야 자연스런 일이라 할 수 있을 테지만, 전하는 정치적으로 미묘한 일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경모궁을 찾아 전알(展謁)하곤 했다(12/2/25 ; 8/7/2). 경모궁에서 나오는 전하의 침통한 표정 앞에 우리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사도세자의 기일(忌日, 5월13일)을 전후한 열흘 동안은 모든 정치가 멈추는 시간이다. 이 기간에 전하는 모든 일을 전폐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근신재계(謹愼齋戒)의 기간에 함부로 경모궁에 들어간 자나 제례의식(儀式)을 비판한 자는 삭직이나 유배형과 같은 엄한 벌을 받았다(6/4/20, 6/6/21). 말하자면 경모궁은 이 시대의 정치적 금기처(禁忌處)였으며, 벽파 신하들을 향한 전하의 무언의 압력이었다.

과거청산 둘러싼 신하들의 대립

사실 1795년에 들어서 우리 노론은 큰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4년째 계속되는 전하의 ‘개혁정국’ 속에서 노론이 내부적으로 분열된 반면, 정적들의 집요한 공격은 계속되었다. 노론 벽파의 영수(領袖)인 김종수는 남인 이석하에 의해 성토당했으며(18/7/24), 같은 노론의 김이성에 의해서도 공격받았다(18/4/6). 전하는 아예 금령을 설치해 신료들의 쟁집 자체를 막아버리곤 했다. 1794년에는 당신의 재위기간 중 가장 많은 금령을 내렸다.(18회). 그것은 주로 강화도에 있는 당신의 이복동생 은언군에 대한 신하들의 성토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18/4/14 등).

이에 앞서 1793년 남인의 영수 채제공은 이른바 ‘천토(天討)상소’를 올려, 노론 벽파의 마음을 철렁하게 했다. 이전의 두 차례에 걸친 ‘영남만인소’(1792년) 사건 때 보인 전하의 남인에 대한 전향적 태도에 힘입어 그는 사도세자 사건 관련자 처단을 요청했다. 그는 “천지간에 극악무도한 자들의 지친(至親: 父子·兄弟)과 인척들이 모두 벼슬아치의 대장(臺帳)을 꽉 메우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사도세자를 “참소하고 무함”했던 “큰 괴수로서 원수가 되는 자들의 이름”을 밝히고 “사도세자의 무함 입은 것을 깨끗이 씻어”낼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17/5/28).

1792년 봄 경상도 유학(幼學) 이우 등이 1만57인의 연명상소를 가지고 올라왔을 때 우리는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이 사도세자를 죽게 한 노론 벽파를 처단하는 것이야말로 “선대왕(영조)의 본심을 받드는 것”(16/4#/27)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상께서는 “소리 내어 상소를 읽게” 한 뒤에 “이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는 영조와의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을 내려보냈다. 부자의 윤리(孝親: 사도세자와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군신의 윤리(忠義: 영조와의 관계)를 저버릴 수는 없다는 논리에서였다.

하지만 이러한 전하의 반응은 집권 초의 태도와 비교해볼 때 크게 달라진 것이다. 즉위년에 영남 유생 이응원이 사도세자 사건 관련자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했을 때, 전하는 “어리석은 짓 아니면 미치광이 짓”으로 간주하여 이응원 부자를 “대역부도(大逆不道)”로 처벌했었다(00/08/06). 그런데 16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선 이 난처한 문제를 자신의 입으로 드러내어 밝힐 수는 없다는 전연 뜻밖의 반응을 보인 것이다.

2/8
글: 박현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구교수 hyunmp@hotmail.com
목록 닫기

노 대통령은 정조에게서 배우라

댓글 창 닫기

2019/11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