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호

“미제 방탄유리, 황금 수도꼭지, 일제 변기…부산시장 관사는 전두환 ‘부산 별장’이었다”

전직 고위 공무원이 20년 만에 털어놓은 5공 秘史

  • 글: 손점용 전 부산시 공무원

    입력2004-11-23 19: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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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제 방탄유리, 황금 수도꼭지, 일제 변기…부산시장 관사는 전두환 ‘부산 별장’이었다”
    “와이래 잠이 안 오노. 위에서도 아래서도 뭐시 이래 시끄럽노? 잠을 못자겠다….”1983년 9월8일 밤, 부산에 온 전두환 대통령은 당시 부산에서 제일가는 해운대 웨스턴 조선비치호텔 VIP룸 침실에서 이렇게 투덜거렸다. 그는 청와대 침실이 아니면 아스라이 들려오는 잡음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조선비치호텔 VIP룸은 개장 이래 박정희 대통령 전용객실로 사용되다가 정권이 바뀌자 전 대통령의 방으로 제공됐다. 물론 특수 방음처리가 돼 있는 방이었다.

    엎치락뒤치락하던 그는 자정을 넘길 무렵 벌떡 일어났다. 그는 “지금부터 각 기관의 야간 경비태세를 점검하겠다”면서 경호요원만 데리고 동래구청과 부산시경 등을 돌아보고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그는 호텔로 찾아온 부산시장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부산엔 내가 자주 내려오는데 이렇게 큰 도시에 시장관사가 왜 그 모양이오? 빨리 넓고 좋은 집을 지어서 다음에는 날 좀 편하게 잘 수 있게끔 해주시오.”

    당시 부산시장 관사는 동래온천장에 있었다. 역대 시장들이 관사 없이 지내온 것을 알고 한 재일교포 할머니가 시청에 기증한 것으로, 박영수 시장 때부터 사용해왔다. 대지 602평, 건평 126평 단층집인 관사는 사방이 업소에 둘러싸여 경호상의 어려움이 크고 대통령이 묵기에는 적당치 않았다.

    당시 나는 부산시 이재과장(서기관)으로 국가와 시의 부동산을 관리하고 시 산하 건물을 짓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C시장은 곧장 관련부서 직원 32명을 전원 소집했다.



    “대통령 지시에 따른 시장특명이 떨어졌습니다. 오늘은 토요일이지만, 지금부터 늦게까지 수고를 해주셔야겠습니다. 대통령이 오시면 숙박하실 수 있는 시장공관을 빨리 지어야 합니다. 이재과 3개 계(係)가 한 구(區)씩을 맡아 적당한 부지를 찾아서 내일 아침까지 영선계장에게 도면을 전해주세요.”

    이튿날, 후보지 중 8개 지점을 골라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동료들과 현장 일대를 샅샅이 누볐다. C시장을 건립 후보지 현장으로 안내하자 세 번째 지점에서 “좋소. 여기로 합시다”고 낙점했다.

    시장관사 아닌 ‘부산 청와대’

    “대지 2500평, 공사비 16억원…”

    10월5일 청와대에 들어가서 계획을 설명하니 총무수석과 경호실 경호처장은 입을 맞춘 듯 펄쩍 뛰었다.

    “말도 안 돼! 각하의 뜻을 그렇게 몰라요?”

    그들은 도면에 그어진 계획선을 산허리로 거침없이 밀면서 말했다.

    “대지는 적어도 5000평, 건평도 400평은 넘게 잡고, 공사비도 20억원 이상으로 잡아주시오.”

    ‘부산시장 공관’이 아니라 ‘부산 청와대’를 짓자는 얘기였다. 그들은 대지 4800평에 지하1층 지상2층 연건평 464평을 제시하면서 세부 사항을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시장관사 62평 : 침실 거실 37평, 주방 식당 11평, 다용도실 6평, 접견실 8평 ▲대통령실 133평 : 침실·거실 42평, 접견집무실 34평, 가족실 46평, 가족식당 11평 ▲부대실 145평 : 연회실 73평, 대식당 21평, 주방 22평, 부속실 19평, 대기실 10평, 관리실(기계실 경비실 등) 288평. 참으로 거창한 규모였다.

    건축설계는 그해 11월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김 건축연구소’에 맡겼다. 시장관사 예정지의 땅주인들은 대부분 투기꾼이었다. 간부와 직원들이 삼고초려해가며 겨우 부지 매입을 매듭지었는데, 가장 골칫거리는 전직 부산시장 ○씨였다. 1561평의 실제 소유자가 전직 시장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는 가장 손쉬운 매입협상 대상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내려온 전직 시장은 시장실로 달려와 따졌다.

    “당신은 그래, 선배 시장인 내 땅을 도시계획에 묶어놓은 것만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공관 부지로 몽땅 뺏어가겠단 말이오?”

    시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어른이 그렇게까지 화내실 줄은 미처 몰랐소. 손 과장, 국유지든 시유지든 쓸 만한 곳을 내놓으라니 도와주시오.”

    시장의 지시에 따라 12월21일 ○씨 자택을 방문했다.

    “내 땅의 값이 2억4000만원이라니 장래가 유망한 시유지를 그 돈만큼 넘겨주시오.”

    “예, 이러이러한 시유지가 있는데, 어떻겠습니까.”

    “그쪽은 개발이 끝난 곳 아니오? 야산이라야 값이 뛸 텐데….”

    오랜 승강이 끝에 부지사용 승낙서를 받을 수 있었다. ‘명색이 시장을 지낸 사람이 그렇게 땅 투기를 하십니까’ 하고 쏘아주고 싶었다.

    1984년 2월17일 오후 4시, 본관이 들어설 자리에 돼지머리를 놓고 기공식을 치렀다. 공사를 맡은 S주택 임원들과 부산시 동료들이 술을 따르며 절을 하고 있는데 시장이 뒤늦게 달려왔다. 전날 18기의 묘를 공원묘지로 옮길 때도 시장은 현장을 찾았다. 공관이 들어설 산자락에는 다행히 건물이 없고, 무성한 잡목 숲에 묘지 18기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장 때는 무엇보다 찌꺼기 관리가 중요해요. 뼈 성분 가운데 인(燐)이 남으면 천둥 번개가 칠 때 유령이 나온다잖아요.”

    시장은 무덤의 주인공에게 원한을 사지 않도록 명복을 빌어야 입주할 사람이 편하게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청와대에서는 혹한기에도 작업을 서두르라며 성화를 부렸으나 우리는 건물의 안전을 위해 버티다가 다음해 3월에야 본격적인 건축공사에 착수했다. 괴로운 일이 잦아졌다.

    매주 경호요원이 한 사람씩 내려와 설계도를 펴놓고 ‘여기를 이렇게, 저기를 저렇게 고치라’고 하다가 의견이 맞지 않으면 담당자를 청와대로 불러들였다. “웃어른과 상의하자”는 것이다. 이런 ‘시어머니’들 등쌀에 설계도는 누더기가 될 판이었다. 조경공사 문제로도 자주 부딪혔다.

    “자연생 나무로 빽빽한 숲은 어떤 인공조경보다 아름답습니다. 이대로 수수하게 살리고 노지와 절개지 그리고 본관 앞 광장만 조경하면 돈도 적게 들고 원시림도 보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호원은 “깡그리 깔아뭉개고 자연석을 쌓아 기화요초(琪花瑤草)로 일본식 고급정원처럼 꾸미자”고 졸라댔다. 돈은 아끼지 말고 귀한 나무들을 옮겨 심으라고 했다. 그래서 전국 여러 도에서 단풍나무, 느티나무를 나무값 200만원에 운반비 600만원씩을 들여가며 옮겨 심었다.

    청와대의 요구는 끝이 없었다. “아무래도 부지가 좁으니 420평을 더 늘리시오” “영선계장을 청와대로 보내시오. 주문할 일이 또 한 보따리 생겼소”…. 자기들끼리도 의견이 달라 조령모개가 되풀이됐다. 현장소장은 울상이 됐다.

    “설계를 자꾸 고쳐서 다 굳은 콘크리트를 망치로 부수고 새로 쌓아 올리니 공사비가 두 배, 세 배로 듭니다. 청와대 요청으로 전국 각지에서 우수한 목공과 미장이들을 총동원해 데려왔는데, 자꾸 설계가 변하니 기술자들이 놀게 되고, 노는 날에도 임금은 달랍니다.”

    그런데도 부산시장 공관 공사가 왜 이리 늦냐는 전 대통령의 재촉에 경호관이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공사가 늦어지는 이유야 우리보다 경호실이 더 잘 알 것 아닙니까. 설계대로만 했으면 9월 말 완공에 문제가 없는데, 지었다가 부수기를 세 번 했으니 이대로 가면 연말에도 어렵습니다.”

    전 대통령이 조급해 하니 내무장관이 내려온다, 청와대 총무수석이 내려온다 해서 우리는 공사보다 현장 상황실 정비와 상황보고에 더 신경을 써야 했다. 느긋하게 공사할수록 그만큼 안전하고 오래 견딜 집이 될텐데 어쩌자고 그리 조급하게 졸라대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설계와 시공을 뜯어고치던 경호실의 버릇은 사라졌으나 다급해진 우리는 공사 인력을 50명에서 120명으로 늘리고, 밤에도 대낮같이 백열등을 밝히고 공사를 강행군했다.

    이순자와 기도원 십자가

    본관 각 방의 콘크리트 양생이 끝나고 내장 작업에 들어가자 모 경호관이 각 방을 다니며 자신이 전 대통령이나 부인 이순자 여사라고 가정하고 점검했다. 전 대통령의 침실 화장실 변기뚜껑을 들어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용변 후 따뜻한 물이 자동으로 나와서 뒤를 씻어주는 일제 변기가 설치된 것은 청와대에 이어 이곳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입니다.”

    기관총 사격을 받아도 끄떡없는 미제 유리 창문을 두들겨보는 등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그가 화장실 황금제 수도꼭지를 틀어보더니 깜짝 놀라 말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이 수도꼭지는 바꿔 주세요. 각하께선 왼손잡이십니다.”

    그는 이런 얘기도 했다.

    “각하께선 밤중에 눈을 떴다가 청와대 침실이 아니면 여기가 어딘가 하고 신경을 쓰십니다. 그래서 이 방의 넓이나 구조, 가구와 비품을 모조리 청와대 침실과 똑같이 꾸며야 하는데, 무심코 수도꼭지를 틀다가 왼손잡이 식이 아니면 순간적이나마 당황하실 수 있어요. 그리고 각하께서 주무실 때는 절대로 조용해야 돼요.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안 됩니다.”

    이어 이순자 여사의 전속 미용사 방에 들러 창밖을 내다보던 경호관의 얼굴색이 변했다. 멀리 산중턱에 있는 기도원의 붉은색 네온 십자가가 눈에 들어온 것. 그는 안절부절못하면서 “저기 저 십자가 철거하시오”라고 했다.

    상부에서는, 노태우 후보와 경합하는 3김씨 가운데 10%이하의 득표가 예상되는 JP는 제외하고 DJ와 YS를 저울대에 올려놓고 정보에 따라 한 쪽이 유리해지면 그 쪽을 때리고 다른 쪽이 유리해지면 그 쪽을 때리는 작전을 썼다. 김대중씨의 정치활동을 풀어 야당이 3분 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상부는 먼저 김영삼씨를 강력한 경합후보로 보고 부산시의 간부회의에서 YS 비방 자료를 한 보따리 풀었다. 시간이 지나 김대중씨가 유리한 것으로 보이자 그에 대한 비방자료가 역시 한 보따리 쏟아져 나왔다.

    푸짐한 선거공작금

    이 무렵 우리는 출처불명의 난데없는 선거공작금 홍수를 맞았다. 처음에는 국장에게 200만원, 과장에게 100만원씩 돈 봉투가 내려오더니 그 다음엔 국장에게 500만원, 과장에게 200만원씩 주어졌다. ‘간부들이 공식적 임무와 비공식적 임무를 수행하는데 개인 돈이 많이 들 테니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약간의 성금을 보태드린다’는 명목이었다. 구청에 물어보니 일선 주민을 직접 상대하는 만큼 구청장은 2000만∼3000만원, 부청장은 700만원, 동장에게는 500만원 안팎의 돈이 나갔다고 하는데 행정기관뿐 아니라 모든 정부기관에 선거공작금이 깔렸다니 그 액수가 얼마나 되겠는가.

    내 뒤를 감시하는 정보요원들도 있을 터라 나는 내게 내려온 자금을 이곳저곳에 썼다. 회장으로 있던 장학회와 통역봉사회, 그리고 회원으로 있는 10개 단체의 회식비 등으로 100만원 정도를 썼다. 우리 과에서도 계장과 직원들에게 150만원 정도를 나눠줬다. 과 직원 단합대회에도 30만원 정도를 냈다. 태어나서 돈을 그렇게 흥청망청 써보기는 처음이었다.

    국장이나 나는 단합대회 때마다 “여러분, 업무수행에 수고가 많습니다. 더욱이 요즘은 나라의 대사가 겹쳐서 힘이 드시죠. 상부에서는 격무에 시달리는 여러분의 노고를 위로하고 사기를 높여 드리기 위해서 이러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모든 것을 잊고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냅시다”라고 인사말을 했다. 선거후 당시 모 구청의 부구청장은 이렇게 말했다.

    “과장님, 이번 선거에는 웬 돈이 그렇게 쏟아져 내려오는지, 저는 700만원을 써도 써도 남아서 횡재를 했습니다. 집권당의 강력한 행정선거에다 돈 보따리까지 푸짐하니 어느 야당 후보자가 감히 현 정권을 넘어뜨리고 대통령이 될 수 있겠습니까. 구청직원들이 그 어느 선거 때보다도 즐거운 마음으로 선거를 치러냈다며 좋아합니다.”

    1987년 12월16일에 치러진 대통령선거는 유권자의 89.2%가 참여해 국민의 높은 관심을 반영했다. 노태우 후보가 36.6%인 828만표를 얻어 당선됐다. 그러나 그 표가 모두 노씨의 표일까. 당시 간부급 공무원들은 ‘절반인 18.3%만 민정당이 얻은 표고, 나머지 18.3%는 행정부와 공무원이 얻어낸 표다’라고 내심 자부했다.冬

    [필자 손점용씨는 경남지사 공보비서 9년, 내무부 장관 공보비서관 대리 3년, 부산시 과장 및 부청장(현 부구청장) 등으로 23년간 공직에 근무했다. - 편집자]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 분이 저걸 보시면 안 됩니다. 어떻게라도 철거해야 돼요.”

    “영부인께서 종교가 다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신경이 쓰입니까?”

    “그래요. 더구나 붉은색 십자가라 영부인께서 보시면 안 됩니다.”

    하는 수 없이 “시장에게 보고해 조치하겠다”고 했다.

    그 기도원은 가난한 새마을학교 무허가 건물 한 칸을 800만원 전세로 얻어 일주일에 두 번씩 기도를 한다고 했다. 전세기한은 연말까지였다. 시장은 불우이웃돕기 성금에서 전세금을 내주며 말썽이 없도록 잘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새마을학교와는 700만원을 주고 십자가를 떼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그런데 경호관이 서울로 돌아간 그날 밤에 경호실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문제의 십자가 철거는 즉시 중지하시오. 공연히 말썽이 나선 안 되겠습니다. 상관의 지시입니다.”

    옥상 비둘기집 철거령

    공관 건립 공정이 90%를 넘어서면서 화초 가꾸기가 시작됐다. 경호관이 또 별난 소리를 했다.

    “공관 구역 안에는 붉은 꽃과 노란 국화는 절대 심어선 안 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오? 붉은색은 정열적이라 일찍이 중국에서 모든 색의 으뜸으로 쳐왔고, 국화 중에서도 황색 국화는 일본이 왕가의 문장으로 삼을 만큼 우아하지 않습니까. 저도 시 녹지과장을 지냈지만 부산은 그런 꽃을 많이 가꾸어 왔어요.”

    “영부인께선 붉은 꽃을 싫어하십니다. 노란 국화도 뭔가 언짢은 것이 연상되시나 봐요. 어쨌든 싫어하시는 것은 없는 게 좋습니다.”

    어느 분의 명령이라고 감히 어길 수가 있겠는가. 전씨 집권 동안에는 경호관이 시키는 대로 했다.

    전 대통령은 늘 뭔가에 쫓기듯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전 대통령이 언젠가 연두순시를 위해 부산시청을 방문, 본관 2층 상황실에서 업무보고를 받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구구웅…구구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청 옥상과 건물 처마 밑에 보금자리를 튼 비둘기들의 울음소리였다. 그것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 곧바로 비둘기집 철거령이 내려졌다.

    또 한번은 업무보고 도중 갑자기 전기가 나간 일이 있었다. 놀란 경호원들이 후닥닥 대통령의 몸을 덮쳐 에워쌌다. 곧 비상용 발전기로 불이 켜지자 모두 계면쩍은 얼굴로 자기 자리를 찾았다. 불호령이 떨어진 한국전력이 서둘러 조사한 결과 남포동 어느 불고기집 옥상 배전선에 빨래가 날아가서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아마도 부산이 4·19 민주혁명과 10·16 부마항쟁의 진원지고, 김영삼씨의 본거지라는 점에서 전 대통령의 신경이 더 예민해지는 듯했다. 공관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영선계장이 살짝 귀엣말로 보고를 했다.

    “과장님, 경호실에선 일절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했지만, 지난번 세 번째로 설계도를 고칠 때 본관 지하실에 비밀시설을 꾸몄습니다.”

    “그게 뭔데요?”

    “긴급사태 때 피할 수 있는 대피실입니다.”

    대규모 민주항쟁 같은 유사시 공관에서 뒷산으로 도피할 수 있도록 지하도까지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런 시설도 필요하겠지. 정말 그게 필요한 날이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야.”

    나는 씁쓰레한 웃음만 흘렸다.

    “예산은 철저히 비밀로 하시오”

    당시 대통령 영부인은 각 지방 공관에 관심이 아주 높았던 것 같다. 하루는 한 경호관이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영부인께서 여러 도를 다녀보시고는 공관마다 특색이 있어 좋다고 하셨습니다. 청와대 안에도 따분한 본관 말고 방갈로를 지으라고 해서 지금 설계를 하고 있습니다. 오솔길을 따라 언덕에 오르면 자그마한 산장이 있고, 아담한 방이 있다면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할 말이 없었다. 부지 5640평에 건평 580평인 전남지사 공관을 비롯해 전북, 제주 그리고 대전 교외 군부대 공관과 청남대, 부산공관을 합치면 7개소나 된다. 좁은 나라에 대통령 별장이 그렇게 많아도 되는 것인지.

    어느덧 11월 하순이었다. 마무리 공사 현장을 돌아보니 사뭇 감개무량했다. 정원에서 보면 동쪽에는 광안리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뒤뜰 서쪽으로는 황령산이 웅장한 자태를 뽐냈다.

    “미제 방탄유리, 황금 수도꼭지, 일제 변기…부산시장 관사는 전두환 ‘부산 별장’이었다”

    1983년 9월 부산시장 관사 후보지를 살펴보고 있는 부산시장과 시 공무원들. 맨 앞쪽이 당시 부산시장이고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다.

    수백 명이 가든파티를 벌일 수 있는 700평의 정원에는 수십년생의 값비싼 나무들이 솟아 있고, 무공해 지하수로 채운 넓은 연못에는 비단잉어 100여마리가 노닐고 있었다. 180평의 대연회장, 방마다 고급 가구, 찬란한 샹들리에…. 준공식 다음날부터는 나도 마음대로 출입할 수가 없게 된 ‘부산 청와대’의 위용 앞에 저절로 주눅이 들었다. 준공식을 며칠 앞두고 공관을 찾은 시장은 이런 지시를 내렸다.

    “시장 공관에 관해서는 계속 보도 관제를 하시오. 특히 이곳에 투입된 예산이 40억원이 넘는다는 사실을 시민들이 알아서는 절대 안 됩니다. 진입로 건설비, 급수 시설비 등 다른 부서에서 지출된 비용은 아예 계상하지 말아요. 이재과 소관의 예산도 적당히 계산해서 공사비를 30억원(사실 부대비를 합치면 50억원이 넘었다) 이내로 줄여서 올리시오.”

    1984년 11월29일 오후 5시, 부산시장 공관에 도착한 전 대통령 일행은 본관 입구에서 준공 테이프를 끊고 2층 귀빈실에서 휴식을 취했다. 저녁에는 대연회장에 내려와 부산의 주요 기관장과 유지, 시 산하 간부 등 180여명에게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하룻밤을 이 공관에서 묵은 전 대통령은 다음날 부산시장에게 함박웃음과 함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새 집에서 하룻밤을 자보니까 괜찮아요. 그동안 시에서 수고가 많았소.”

    이날 전 대통령은 시민회관에서 열린 ‘수출의 날’ 기념식과 시청의 업무보고 참석을 위해 공관을 떠나면서 공관 앞뜰에 금송 한 그루를 심었다. 각하가 좋아하신다며 시장이 직접 고른 값비싼 나무였다.

    1987년 6·29 선언으로 억압이 다소 풀리면서 그간 보도관제에 묶였던 ‘부산 청와대’가 시민들에게 알려지게 됐다. 지나치게 호화롭다는 비판 여론에 밀려 부산시장은 그 좋은 관사를 놓아두고 남의 집 신세를 져야 했다. 이 공관은 한때 민속관으로 꾸며지기도 했으나 건물 구조가 워낙 엉뚱하다 보니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천년만년 살 줄 알고 그렇게 서둘던 전씨 내외는 그 집을 고작 8차례 다녀갔을 뿐이었다. 애당초 없어야 할 집이지만, 기왕 들어선 이 집은 부산에서 유일한 12·12, 5·18 전씨 군부 전제폭정의 잔재물이 되었다. 이 공관은 세월이 흐르면 지방문화재적 가치가 생길 것이다. 기왕에 부산시장 공관용으로 설계되고 지어진 집이니 시장관사를 주된 목적으로 쓰고, 나머지 넓은 공간은 시민들을 위해 사용돼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4500만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나라의 위신과 권위를 갖춘 청와대를 거처로 쓰고 있듯이 이제 400만 시민이 뽑은 부산시장이 기왕에 지어놓은 공관을 거처로 쓴다고 해서 지나칠 것은 없다. 다만 2층의 귀빈실은 부산을 찾은 외국 귀빈을 모시고, 1층 대연회실은 내외 귀빈과 부산의 주요한 행사를 위해 개방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본관 앞의 넓은 뜰은 ‘시민의 마당’으로 옥외 문화행사를 벌이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지금도 하루 평균 80명이 찾는 민속관은 적당한 장소에 적합한 설계로 2층 기와집을 따로 세워 전문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대통령 육촌의 유세

    1988년 초 전두환 대통령이 현직에서 물러나자 전씨 일가의 비리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동생 경환씨가 새마을운동 사무총장 및 본부회장 당시 수십억 원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난 데 이어 형 기환 순환, 동생 우환 등 전 대통령의 일족 7명과 관련자 17명이 구속돼 징역을 살았다. 특기할 것은 전 대통령의 형 기환씨의 비리다.

    하급 경찰관 출신의 기환씨는 전 대통령이 집권하자 일약 ‘비공식’ 치안본부장(지금의 경찰청장)이 되어 시도 경찰국장(지금의 시도 경찰청장)들이 그에게 선을 대서 더러는 승진도 하고 영전도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의 공식직함은 B여행사 고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업무상 횡령으로 특경법 위반혐의가 드러났고,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각종 청탁거리를 물고 다니다 변호사법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했다.

    전 대통령에게는 웬 사촌과 육촌이 그리도 많은지…. 그들의 주된 활동무대는 부산이었다. 그림자 치안총수로 불린 기환씨는 당시 부산시 부시장 O씨의 배경이기도 했다.

    한번은 시장비서실에서 시장 결재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서울에서 경찰 경비전화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부시장을 찾다가 시장실로 갔다하니 전화를 돌린 것이다. 수화기를 든 부시장은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영감님, 이번에 누구 누구를 어느 자리에 돌려주신 것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저는 행정직이지만 저도 좀 도와주십시오. 제가 전에 말씀드린 그 자리 말입니다… 예….”

    시청 이재과장 때 국유지 사용료를 10억 이상 연체한 서면의 어느 집단은 재판에서 패소할 기미가 보이자 전 대통령의 육촌이란 사람을 동원해서 부시장에게 압력을 행사했다. 하루는 부시장이 나를 불렀다.

    “손 과장, 소송 그거 마 취하하이소. 여기 각하의 육촌동생도 오셔서 부탁을 하시는데….”

    “허허 10억이 넘는 시의 돈을 힘들여 재판해서 이제 겨우 받아내게 됐는데, 부시장님 말씀대로하면 훗날 그 책임은 누가 지겠습니까?”

    육촌이라는 사람이 나를 째려보았으나 말은 못했다. 또 한번은 재(在)부산 밀양향우회에서 보세창고업을 하는 친구를 만났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

    “전두환 일족 참 웃기데. 내가 자그만 보세창고를 하나 갖고 있어서 밥은 먹고 사는데 얼마 전에 난데없이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서 ‘댁이 하고 있는 이 보세창고 나한테 넘기소’ 그러는 거야. ‘그게 무신 소리요. 이 창고는 내 재산인데 당신이 누구길래 그런 소리를 해요?’ 하고 물으니 ‘대통령의 육촌동생인데. 친구들이 보세창고업이 잘 된다고 해서 나도 한번 해볼까 하니까 창고를 팔라’는 거야. 나 참 기가 막혀서….”

    관광과장으로 있을 때는 어떤 사람이 전 대통령 육촌동생이라는 사람을 앞세우고 와서 관광호텔을 짓고 싶으니 허가를 내달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이 사업계획은 법률과 여건에 따라 조건이 맞으면 누구에게라도 승인해드립니다. 구태여 높은 분을 모시고 오시지 않아도 되니까 충분히 계획을 세운 다음 시청에 오십시오.”

    그들이 가고 난 뒤에 직원들과 함께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전통에게는 사촌과 육촌이 도대체 몇 사람이나 있는지 모르겠네.”

    ‘새마을 사나이’ 전경환

    시간을 좀 거슬러올라간다. 1981년 6월 상공부에서는 각도 지역경제과장과 전국 62개 도시의 상공회의소 사무국장을 중앙새마을운동본부에 불러 ‘공장새마을운동회의’를 열었다. 소강당에 모인 80명 남짓한 사람들 앞에 나타난 사나이는 전 대통령과 외모가 많이 닮은 사람이었다. 상공부 국장의 소개로 연단에 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지난 4월 새마을운동 사무총장을 맡은 전경환입니다. 이 자리는 당초 대통령각하께서 장관이나 고참 차관급 중 한 사람을 배치하려던 것을 ‘형님 그 자리 제가 하고 싶다’고 말씀드려서 맡았습니다. 처음에는 새마을운동을 열심히 해온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백지인 사람을 시킨다고 말이 많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새마을의 사나이입니다. 앞으로 어떤 사람이 어떤 압력을 가하고 도전을 해와도 저는 절대로 굴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래봬도 유도가 6단이고 태권도가 7단입니다. 제가 뭐 대통령의 동생이라고 해서가 아니라 제 자신이 그렇게 힘을 가지고 있으니 어떤 도전자라도 과감하게 대결하겠습니다.”

    몇 달 후 새마을운동중앙본부에서 각 시도의 과장과 대도시 공장 새마을연수원장, 그리고 각 마을 새마을부녀회장 등 100명을 대만에 해외 연수차 보내겠다는 연락이 왔다. 1981년 12월 김포공항 인근 중앙본부 연수원에 모습을 나타낸 경환씨는 연수 기획에 대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새마을운동으로 우리나라도 이제 커졌다. 그래서 지도자 여러분이 나라 밖으로 나가서 보고 듣고 귀한 외화를 좀 써도 좋을 것 같아 이번 해외 연수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 본부의 담당과장이 말을 이었다.

    “돌아오실 때 세관의 물품검사가 엄할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런 걱정 마시고, 뭐 귀한 것 있으면 좀 사 오셔도 좋습니다. 지난번 어느 고급 공무원은 비싼 물건을 사오다가 세관에 적발되어 청와대로부터 혼이 난 일이 있지요. 전경환 총장님께서는 새마을운동에 수고가 많으신 여러분을 위해서 돌아오실 때 다소 값진 것을 사 오시더라도 세관에서 눈감아주라고 미리 당국에 말씀을 해두셨습니다. 마약이나 무슨 범죄행위 거리만 아니면 갖고 싶던 물건을 사 오십시오.”

    그럼에도 새마을지도자 대부분은 검소하게 여행을 다녀왔다. 그런데 경기도 K군의 어느 금은방 주인이 어느새 새마을 지도자로 끼여들어 귀금속과 웅담, 녹용 같은 값비싼 물건들을 잔뜩 싸들고도 형식적인 세관검색을 통과해 유유히 빠져나왔다. 세관원들은 보따리를 열고 손을 슬쩍 넣어보고는 그만이었다. 대통령 동생의 위력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당신들 아까 그 환영 인파, 도대체 몇 사람이오? 박수는 또 왜 그 모양인지 박력도 없고 소리도 작고…. 그래서야 어디 각하나 영부인 귀에 들렸겠소?”

    4월3일 해군사관학교 졸업식 참석길에 부산을 연두 순시한 전 대통령이 시청을 떠난 지 3분 후, 시청 총무과에 들어온 청와대 경호실의 한 경호관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자 총무과장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경호관은 대통령 순시 때의 환영담당 즉, ‘박수부대’ 동원 독려관이었다.

    박수부대는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있어 왔으나 그때는 그래도 시청 직원들이 요소마다 줄지어 박수를 치면 지나가던 시민이 자연스레 합류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신문 방송을 통제하고 사람들의 입을 막아도 12·12와 5·18 광주항쟁 소식을 모를 리 없던 당시 부산시민들이 자진해서 박수를 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전 대통령이 시청에 들어설 때와 떠날 때 줄 지어 박수를 치는 시 공무원들은 서글픈 비애에 젖었다. 당시 시에 하달된 ‘각하 환영 계획서’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각 국실의 6급 이하 직원들 중 약 500명을 국 단위로 시청 주변에 배치한다. 시청 건너편 영도행 버스정류소 근처는 건설국 도시계획국, 남포동 입구는 감사실 수도국, 광복동 입구는 내무국 재무국 이렇게 6개 지점에 각 실과 사무관을 책임자와 부책임자로 임명해 30분 전에 집결, 전 대통령이 떠나면 해산.’

    전 대통령이 올 때마다 시청 업무는 마비되다시피 했다. 근무 요령도 만만치 않았다. ‘대열에서 무단이탈 금지, 양복과 넥타이, 신발을 단정히 하고 각하께서 가까이 오실 때는 열렬한 박수를….’

    1986년 초 들어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고조되자 정례직으로 배치된 시청직원 박수부대들은 각 팀 책임자 몇 사람을 빼곤 거의가 ‘근무지’를 떠나버렸다. 경호실 환영담당관은 믿었던 박수부대가 전 대통령이 접근할 때 오히려 흩어지자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형식적이나마 격식을 갖추던 환영인파가 눈에 띄게 줄고 박수소리도 없자 차창에서 시민을 향해 흔들던 전 대통령의 손도 맥이 빠졌다.

    격노한 경호관은 전 대통령이 떠나자 2층 내무국장실로 뛰어들었다.

    “국장! 당신 진짜 이러기요? 내 모가지가 날아가나 당신 모가지가 날아가나 한번 봅시다. 시청 앞에서 줄지어 있다가 박수 한번 치는 거, 그것도 하나 제대로 못해요. 각하를 모시고 먹고 사는 공무원들이 이럴 수가 있소. 내, 서울 가면 당신을 그냥 안 둘테니 두고 봅시다.”

    그러나 날로 악화되는 민심과 민주화의 도도한 물결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지 내무국장은 문책당하지 않았다.

    “야, 경찰서장 나와!”

    지금부터는 선거와 관련된 이야기다. 1980년 7월 나는 부산시 부산진구 부구청장으로 있었다. 어느 날 내 방으로 찾아온 한 정보통이 슬그머니 귀띔했다.

    “최규하 대통령이 너무 무능해서 아무래도 전두환 장군이 직접 대통령이 돼야겠다고 중앙(보안사령부)에서 판단을 내린 것 같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최 대통령이 물러났다. 8월19일 시에서 지시가 내려왔다. 간부들에게 달갑지 않은 임무가 주어졌다. 시장의 선물과 ‘대의원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의 서한을 가지고 퇴근 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의 집을 일일이 방문하는 일이었다.

    시 간부의 인사를 받은 대의원들은 “아이구,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또 때가 왔군요. 높은 어른들이 이렇게 자꾸 우리를 찾아주시니 또 한 표 찍어야겠네요”라며 야유조의 인사를 건넸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그래도 양순한 축이었다. “뭐? 이런 시국에 ‘적극 협조하여주시기 바란다’고? 적극 협조 좋아하시네”하고 투덜거리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과장들이 돌아와서 청장과 내게 대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언동을 보고할 때 안전기획부 조정관과 보안대원이 우리 옆에 앉아서 상황을 체크했다. 어느 기관원은 “×××들, 지들이 누구 덕에 대의원 해먹는데…. 까부는 꼴 정말 못 보겠네” 하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1972년 유신 선포와 함께 대통령 직선제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간선제,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바뀌었다. 대의원은 대개 지역 유지였다. 만년여당 체질인 이들은 자기들을 제대로 알아주고 대접하지 않는다고 늘 불만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대통령선거 때뿐이니만큼 선거 무렵이 되면 여러 행태로 자신을 과시하려 했다.

    대의원을 뽑을 때는 구청장실에서 비밀 작업을 했다. 사실상 출마예상자 자격심사 회의였다. 이 회의에는 구청에서 구청장 부청장·총무과장·행정계장, 경찰에서 서장·정보과장·정보계장, 그리고 안기부와 보안대의 담당직원과 민정당 사무국장이 참석했다. 대의원을 하고 싶은 사람의 성분과 당선 가능성(재력을 의미한다. 그때는 야당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어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돈을 뿌리면 대의원이 됐다)을 검토하고 현 정권에 대한 충성도가 모호하거나, 성분이 좋아도 돈이 없는 사람은 입후보자 등록에서 배제했다. 그러니 ‘은혜도 모르고 까부냐’는 힐난이 나올 만도 하다.

    투표일이 가까워오자 우리는 관내 최고급 요정에 대의원 25명을 초청했다. 구청장과 부청장, 총무과장, 경찰서장, 정보과장, 안기부 조정관, 보안대원, 민정당 사무국장 거기에다 아가씨들까지 동원해 성대한 파티를 벌였다. 술이 거나하여 얼큰해지자 참석자의 절반 정도는 자리를 뜨고 대의원들만 남았는데 끼리끼리 시비가 벌어졌다.

    “밴드 불러!”

    “지금 때가 어느 땐데 밴드가 다 뭐꼬?”

    “와, 지금 때가 놀아서 나쁜 때가? 들여보내!”

    “못 들어온다. 밴드는 나가라.”

    결국 밴드가 입성에 성공했다. 흥겨운 음악에 반대파의 기세도 수그러들었다. 이번에는 기관장들이 수난을 당할 차례였다. 곤드레가 되어 마이크를 잡은 어느 대의원은 “야, 경찰서장 나와! 당신이 무슨 경찰서장이라고” 하며 고성을 질러댔다.

    아무튼 이날 밤의 광란으로 ‘대의원을 몰라주는’ 사람들에 대한 응어리는 풀리고 그들은 전두환 장군을 대통령으로 모시자는 결의를 다졌다. 한 대의원은 헤어지면서 술잔을 높이 들고 혀 꼬부라진 소리로 “국민의 화합과 단결을 위해 전두환 장군을 지도자로 모시고 총진군하자”고 외쳐 향응의 효과를 즉석에서 확인해 보이기도 했다. 지역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선출된 ‘체육관 대통령’ 전씨의 득표수는 새삼 헤아릴 필요도 없었다.

    전두환씨는 그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에 선출된 뒤 ‘미국식 민주주의 방식으로 대통령을 뽑는다’며 국민을 우롱하는 헌법개정안을 만들어 10월22일 국민투표에 부쳤다. 권력자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개정을 거듭해온 헌법이 또 한번 누더기가 됐다.

    국민투표 기권자도 단속

    국민투표를 앞두고 시청 직원들을 차례로 시민회관 대강당에 모아 ‘새 헌법의 요지’를 교육했고, 그럴 때면 안기부 직원들이 나와 참석 확인증을 나눠줬다. ‘유권자 모두가 투표에 참여, 거의 다 찬성하도록 계몽’하기 위해 시 산하 간부들이 본업을 덮어두고 뛰었다. 부산진구 부처장에서 시 본청 지역경제과장으로 옮긴 나는 담당업무상으론 기업체를 맡고 책임구역으론 중구 남포동을 맡았다. 우리 과의 경우 대기업에는 직접 나가고 중소기업은 업종별 협동조합을 통해 국민투표에 대한 ‘종업원 교육’을 실시했다. 과장과 계장은 각 동을 맡았다. 그리고 지지 여부가 분명치 않은 ‘회색분자’들은 가정방문을 통해 설득해야 했다.

    오전에는 기업체 출장, 오후에는 동사무소와 동네 순회 및 상황보고 등을 하느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보안대 하사관들이 뒤에서 우리를 감시하고 아침 저녁으로 제출하는 ‘1일 상황보고서’를 확인하는 판이었다. ‘군인이 공무원을 자기 집 개만도 못하게 부리는구나’ 하는 생각에 매일 오후면 남포동 거리를 헤매는 명색이 대한민국 서기관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러던 중 10월7일 전 대통령이 초도순시차 부산에 내려왔다. 그는 보고를 다 받고 나서 “국민투표에 기권하는 것은 반대하는 것보다 더 나쁘니 철저히 계몽하라”고 지시했다. “수집된 정보에 의하면 중산층·지식층이 회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니 특히 그들을 철저히 계도하라”고도 했다. 사실상 기권자 단속이었다. 투표도 기권도 자유요, 찬성도 반대도 자유인 것이 민주주의 국민투표일 텐데 ‘기권이 반대보다 나쁘다’면 ‘반대도 기권도 다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동장실에서는 주민명부를 놓고 통·반장을 불러 한 집씩 기권과 반대 예상자에 점을 찍어가며 결과를 예상해 보는 점검작업을 벌이고 대책을 세웠다. 투표율에 따라 통·반장에게 상금이 걸렸다. 기권이 불가피한 표도 통·반장이 살려내는 이른바 대리투표를 독려해 92.6%의 경이적인 투표율을 기록했다. 어느 동의 사무장은 동장에게 “이러다간 투표율이 100%가 되지 않을까요? 강제성을 띤 것 같이 보일까 걱정입니다. 통·반장 독려의 고삐를 좀 늦춰야겠습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1981년 새해 들어 전두환 군부가 급조한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장식품 야당’인 민한당, 국민당, 민권당을 들러리로 내세워 대통령선거가 마치 경선으로 치러지는 듯이 흉내를 냈다. 2월25일을 선거일로 잡고 공고가 나가자 유신 때와는 달리 소위 4개 당의 후보자 4명이 등록을 하고 선거인후보 등록자 수도 9478명에 이르러 1.8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미제 방탄유리, 황금 수도꼭지, 일제 변기…부산시장 관사는 전두환 ‘부산 별장’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호화롭다는 부산시장 관사 전경.

    ‘역사상 처음 실시하는 미국식 간접선거에 기권하지 말고 모두 참여하자’는 취지로 낮에는 상공회의소 회의실에 기업체 대표들을 모아 설명하고, 밤에는 중구관내의 유지 모임에 나가서 하소연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기업 경영에 바쁜 중소기업 대표들은 후환이 두려워 나오기는 했으나 우거지상이었고, 지역주민들의 모임 역시 우리를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다.

    거기다 구청장과 경찰서장들은 “통일주체 대의원 선거와 달리 아무 프리미엄도 없는 선거인을 누가 하겠냐”며 “입후보자가 없어서 큰일이다. 많이 나와야 심사를 해서 걸러내는데 큰일났다”고 발을 굴렀다. 결국 전국 1005개 선거인선거구 가운데 53개 선거구는 후보자가 정원을 넘지 않아 125명이 무투표 당선됐고, 입후보자는 민정당 3800명, 무소속 2000명(사실상 전두환 지지), 민한당 1973명이 등록을 했다. 전 정권은 등록이 끝나자 그들이 원치 않은 115명에게 억지로 사퇴를 권해 무투표 당선자가 231명으로 늘었다.

    선거인선거의 결과는 민정당 3676명, 민한당 411명, 국민당 48명, 민권당 0명, 무소속 1123명이어서 선거 전에 이미 결판이 난 상태였다. 그런데도 전두환과 민한당 유치송 후보, 국민당 김종철 후보, 민권당 김의택 후보는 신문과 TV를 통해 “내가 여러분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이 된다면…” 하는 어이없는 쇼를 벌였다.

    1985년 2월12일에는 제12대 총선이 치러졌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지 5년, 국민의 눈도 귀도 입도 모두 막아버린 군사정부는 무력해진 국민을 다루는 데 느긋한 자세였다. 그런데 이 총선거가 정치의 물길을 바꾸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선거 앞둔 선심공세

    선거를 앞두고 전씨가 부산시를 연두 순시했다. 그 직후 시 산하에 몇 가지 선거지원 방침이 시달됐다. ▲무허가 건물·무허가 영업 등 모든 불법행위 단속을 완화할 것, 시민의 불편사항을 일제히 점검하고 체납세금 등 받을 것은 미루고, 영세민 생활 보호금·보조금 등 줄 것은 빨리 줄 것 ▲민원서류는 될 것은 당연히 해주고 안될 것도 해줄 듯이 희망을 주며 선거가 끝날 때까지 끌 것 ▲기회 있는 대로 정부의 시책을 홍보하되 각종 공사는 미리 착공하고 시민을 오라가라 하는 회의는 삼갈 것 ▲민정당에서 벌이는 ‘공명선거 100만명 서명운동’에 공무원과 가족·친척·친지를 총동원할 것 등이었다. 이와 함께 각계 각층 인사에 대한 훈장·표창 수여를 장려했다. 그 결과 평소보다 5배가 늘어났다.

    나는 부산진구 전포2동을 맡아 상부에 동향보고서를 냈다. 그런데 부산진구의 민정당 K의원은 당선 전망이 비관적이었다. 그러자 동장과 구청 간부들은 당부했다. “과장님, 비관적이라는 것은 우리끼리만 알고 보고서에는 기록하지 마이소. K의원이 알면 펄쩍 뛰면서 우리를 족칠 것이고 상부에서는 또 우리한테 뭘 하고 있냐며 야단을 칠겁니다”라고.

    어느 민정당 입후보자는 마침 완공된 호화판 시장관사의 귀빈 연회실에서 충성당원 250명을 불러 칵테일파티로 기세를 올렸고, 부산에서 갑부로 이름난 민정당 한 의원은 온 동네에 비누세트를 돌렸다. 밤 10시에 찾아온 반장은 “과장님이야 틀림이 없으니까 이런 것 필요없겠지만, 그래도 우리 반 전체에 돌리는 거니까 드립니다”라고 했다. 당시 민정당은 거리낌없이 봉투나 선물을 돌렸다. 부산시청 이재과장이던 나는 후보자 합동연설이 벌어지자 틈나는 대로 시내 6개구의 연설회장을 모두 돌았다. 그러나 1981년 선거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박찬종의 폭로

    1981년에 치른 제11대 총선 때 전두환 정권은 충성을 다할 해바라기 재력가들을 후보자로 많이 내세웠다. 민정당의 한 후보가 영세민이 많이 사는 마을에서 생필품세트를 돌리자 ‘배급소’에 1000여명이 몰렸다. 늘어선 줄이 간선도로까지 이어져 교통이 막히자 경찰이 출동해 친절하게도 두 줄 서기로 질서를 잡아주기도 했다. 반면 야당 후보 홍보물은 운동원이 사무실에서 들고 나가기 무섭게 사복 정보형사들에게 압수되곤 했다. 그 결과 부산의 6개 선거구에서 민정당이 모두 당선(당시는 한 지역구에 2명씩 선출)됐다.

    그러나 1985년 12대 총선은 달랐다. 선거과정에서 시민들의 귀가 열린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어느 날 동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박찬종 후보의 연설을 듣던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군부의 언론통제로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던 12·12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상을 폭로했다.

    “미국의 타임지는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뉴스위크는 또 이렇게 보도한 바가 있습니다. 전두환씨는…, 신군부는 이런 짓을 저질러 놓고….”

    유언비어를 퍼뜨렸다고 몰아대지 못하도록 외신보도를 인용한 박씨의 폭로는 교정을 가득 메운 청중들을 놀라게 했고, 군중 속에 섞여 있던 안기부원이나 보안대요원, 경찰 정보원들도 낯빛이 변했다. 내 옆에서 박 후보의 연설을 듣던 보안요원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교무실로 달려갔다. 상부에 보고하고 대책을 지시받으려는 것 같았다.

    언론은 박 후보의 발언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지만, 그날 합동유세가 끝나자 부산 중·동·영도구는 말할 것도 없고 시 전체에 12·12, 5·18의 진상에 관한 소문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선거 결과는 여당의 참패. 6개 지역구 중에서 3개 지역에서 민정당 후보들이 2등도 못하고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선거가 끝난 뒤 시장은 간부회의에서 “선거운동 기간 중 어느 입후보자가 감히 국가 원수를 모독하는 말을 해서 민심수습을 우려할 상황이 됐다. 경찰정보에 따르면 시내 공중변소와 대학의 화장실에 입에 담지 못할 욕설로 국가원수를 모독한 낙서가 많아졌다 하니 앞으로 각하에 대한 이미지를 계몽하는 데 힘써야겠다”고 했다. 내무부의 관료들은 부산시청 간부들에게 경쟁적으로 전화를 걸어댔다. “당신들 도대체 뭐 했소. 부산은 왜 그렇게 전멸이오. 그래 가지고 어떻게 낯짝을 들고 다닐 수 있겠소”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3·15, 4·19, 그리고 10·16 부마항쟁의 전통을 긍지로 삼는 부산시민들은 술집마다 만원을 이루며 ‘민주부산’의 승리를 자축했다. 동료 공무원들 중에는 “서울에 출장가면 서울 친구들이 부산 사람을 상석에 모시고 한턱을 내서 기분이 삼삼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정권위기는 국가위기?

    1983년 김영삼씨의 단식과 김대중씨의 귀국,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의 활동과 1985년 2·12 총선에 따른 신민당의 제1야당 등극(50석)은 군사정권의 앞날이 더이상 평탄하지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1987년 1월14일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터졌다. 박군의 죽음으로 시국은 더 시끄러워졌고 민주화투쟁은 직선제 개헌에 초점을 맞춰갔다. 그러던 2월17일 오후, 내무부는 각 시·도에 ‘헌법은 왜 지켜야 하나’라는 제목으로 산하 전 공무원들에게 교육을 실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부산시에서는 퇴근 무렵 본청 직원 700명을 상공회의소 회의실에 모아놓고 시장 참석하에 내무국장이 강연을 했다.

    K시장은 훈시에서 “공무원은 정치적으로 중립이어야 한다. 그러나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공무원은 중립을 지킬 수 없다. 학생들 데모가 이런 상황에 이르면 진압이 너무 강경하다고 정부를 비난할 일이 아니다. 요즘 소위 개헌을 위한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는 시민의 말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과감히 계몽해야 한다”고 했다. 정권의 위기를 국가의 위기로 규정하고 있었다.

    내무국장은 내무부에서 내려온 소책자 ‘개헌서명 책동-그 부당성과 저의’를 나눠주고는 이렇게 말했다.

    “개헌을 발의하려면 국회의원 과반수가 찬성해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개헌을 밀어붙이는 개헌론자는 개헌보다 정권에 대한 야욕으로 헌법정치를 파괴하려는 것이다. 학생들의 개헌 선동은 공산당의 혁명 노선같이 자유민주주의를 부인하는 것으로 헌법 제25조 국민 청원 사항 중 개헌은 불가하다는 규정에 어긋나는 것이다. 따라서 서명책동은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고 한반도의 정세에 비추어 국가를 혼란으로 몰아 국가를 파괴하려는 것이니 대통령은 헌법 수호 책임을 규정한 헌법 제38조를 지켜야 한다.”

    전두환 정권은 엉터리 헌법을 만들면서 언젠가 닥쳐올 국민의 개헌 요구에 대비, 그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조항을 둔 것이다.

    전 대통령은 4월13일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나는 임기중 개헌은 불가하다고 판단했다. 현행 헌법으로 연내에 대통령선거를 치르고 지방자치제도 실시할 테니 혼탁하고 소모적인 개헌논의는 그만두라. 대통령으로서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권한을 행사하겠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수습될 국면이 아니었다. 박종철군 49제를 계기로 거리는 다시 시위물결에 휩싸였다. 은폐됐던 박군 고문치사의 진상이 밝혀지고 전두환 정권이 말하는 ‘헌법수호’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다 알게 된 시민들은 6월10일 일제히 일어났다. 시청을 향해서 밤낮없이 파상시위를 해대니 시청은 수백 명의 전경으로 둘러싸였고, 남포동 광복동 중앙동의 시청 공방전에서 날아드는 최루탄 가스로 직원들은 종일 눈물을 흘렸다. 뒷날 들리는 말로는 한때 최루탄의 재고가 바닥나 시청이 ‘점령’될 뻔했다고 한다. 결국 전 대통령은 6·29선언을 내놓기에 이른다.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되기에 이른 것이다.

    대통령직선제 헌법을 위한 국민투표가 10월27일 시행될 예정이었는데 대선 열기는 그 전부터 뜨겁게 달아올랐다. 공무원들은 또 바빠졌다.

    10월17일 부산 수영만 매립지에서는 김영삼씨의 ‘군정종식 국민대회’가 열렸다. 이날 부산집회 사상 처음으로 100만 인파가 몰린 것으로 보도되자 노태우 민정당 총재도 같은 장소에서 대규모 집회를 계획했다. 그러자 상부로부터 부산시민 100만명과 경남도민 30만명을 동원하라는 동원령이 떨어졌다. 당시 내무부 장관 K씨는 경북 출신으로 내가 경남도청에 있을 때 재정과장을 하던 사람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에게 ‘행정선거 본부장’ 노릇을 하게 한 것이다. 그는 부산과 경남도 소재의 시장 군수 10여명에게 전화를 걸어 시 군민을 총동원해 수영만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아무리 관청 주도의 동원이라도 다른 도에서 부산으로 대규모 인원이 이동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경남도 부지사는 부산시 부시장에게 “이번 행사에 도민 30만명이 참가할 예정인데, 시외버스터미널에 그들이 도착하면 부산시에서는 터미널에서 수영만 행사장까지 갔다가 다시 터미널로 돌아오는 수송편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시 교통국에서는 “관광버스 400대를 돌리면 겨우 2만명, 각종 관용·자가용 버스를 돌려도 2만명밖에 수송할 수 없다. 나머지 26만명을 다 실어나르려면 시내버스 3000대를 빼돌려야 하는데 그게 가능한 일이냐”며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어떤 명령인가. 국장실에 모인 운수과장 경찰교통계장 버스조합 이사장과 민정당 간부는 머리를 싸맸다. 시내 각 동에서는 통·반장을 통해서 일부 점심값과 교통비를 줘가며 인원을 독려하고 1400대의 시내버스를 노선운행에서 빼내 터미널로 돌렸다. ‘노태우 후보의 수영만 유세에도 100만 인파가 모였다’고 선전은 할 수 있었지만 그날 시내교통은 대혼란이었다. 그 와중에 K시장은 간부회의에서 이런 지시를 내렸다.

    “이번 선거에서 공무원이 민정당을 밀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 됩니다. 공무원이 많이 사는 어느 아파트에서 지난번에 야당표가 많이 나왔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런 소리 하는 ××는 아가리를 벌려서 똥을 한 바가지 처넣으시오. ‘부산은 김영삼의 아성’이라며 공무원의 사기가 죽어 있는데, 두려워하지 말고 열심히들 뛰시오.”

    믿는 건 ‘행정선거’뿐

    전두환 정권은 행정과 인맥을 총동원, 결사적인 선거운동을 폈다. 당시 전씨 인맥은 시청에도 몇몇이 있었다. 그들은 ‘만약의 경우 우리는 다 죽는다’며 비장한 각오로 나섰다. 선거사무가 시작되자 우리는 법규정에 따른 공적 임무와 함께 자유당 시절부터 진저리나게 해온 비공식 불법임무를 맡아 뛰어야 했다.

    나는 몇 개 동을 돌면서 투표소 설치상황, 경비대책, 화재대책 그리고 투표 종사원에 대한 교육실시 상황을 살폈다. 과장 이상 간부들에겐 “만약 정권이 바뀌면 서기관 이상은 싹쓸이 교체될 것”이라는 상관의 협박과 함께 비공식 임무가 잔뜩 떨어졌다. 우선 민심수습을 위한 간부 공무원 현장봉사 활동계획에 따라 간부 1일 활동 보고서, 무슨 실적보고서 등을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상부에 올려야 했다. 개인이 속한 향우회와 친목회, 동창회, 산악회 등 단체의 회원명부와 전화번호 일람표를 내고, 하루 10명 이상에게 전화를 걸되 ‘자연스럽게 안부를 묻고 뭔가 도울 일이 없는가를 살피며 지지세력으로 유도할 것’이라는 지침도 내려졌다.

    ‘소관업무상 관계되는 업자와 업체 간부 등을 시정 상담역으로 임명하고 생년월일, 본적, 주소, 경력 등을 살펴 꾸준히 접촉한다. 친척·친구는 물론 그들에게는 시정 홍보물을 우송하고 생일과 길흉사때 반드시 방문, 우의를 돈독히 한다. 지역에서는 동장을 도와 영세민촌 지원대책을 추진하되 영세한 가정과 결연해 라면 등 생필품을 지원해주며 인간관계를 맺는다. 때로는 기사식당에도 들러 그들의 대화로 민심동향을 파악하고 같이 어울려 격려할 것….’

    이렇게 활동하고 보고하는 과정에서 만든 각종 서류와 메모 쪽지는 대외비로 취급하고 보고가 끝나면 없애버리게 돼 있었다. 그러나 나는 훗날에 대비, 노트에 자세하게 기록하면서 자료를 보관해왔다. 허술한 점은 있지만 각계각층에 파고드는 행정선거는 역시 ‘기름’(돈)을 쳐야 효력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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