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가 몸담고 있는 국제위기감시기구(International Crisis Group)는 북한과 6자회담의 미래에 대한 최근 보고서에서 이와 관련된 로드맵을 제안한 바 있다(www.icg.org에 게재된 보고서 참조). 미국이 진지하고 성실한 제안을 꺼내놓아야만 다른 6자회담 참가국들이 북한을 압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2기 부시 행정부가 기존의 대외정책 기조, 특히 한반도 정책에서의 일방주의와 강경노선을 벗어날 확률은 현재로는 거의 없어 보인다. 대선 레이스가 진행되는 동안 부시 대통령과 참모들은 미국이 무력침공을 포함한 대외정책을 수행함에 있어 아무에게도 ‘허가장’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누차 언급해왔다. 국민 투표를 거쳐 재선에 성공하고 의회 의석수를 추가로 획득함으로써 부시 대통령은 그러한 자신감을 더욱 강화하게 됐다. 이제 부시 행정부는 자신의 정책을 대중이 ‘위임’했다고 공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2기 부시 행정부의 새 외교안보팀은 동맹국들과의 협의를 필수적인 의무로 여기지 않을 공산이 크다. 오히려 자신들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만 이러한 절차를 거치게 될 수도 있다. 동맹국과 적국을 모두 정적을 상대하듯 대하며 “우리 팀에 끼든지 아니면 우리 도움 없이 살아가는 법을 배우라”고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방식이다.
때문에 2기 행정부가 대북정책 혹은 한반도 정책에 있어 1기 행정부와 크게 다른 변화를 보여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다만 부시 행정부의 강경파가 북한에 대해 이전보다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
당분간 ‘무시전략’ 택할 가능성 높아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를 기대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바로 부시 대통령의 의사결정 과정이 갖고 있는 특성 때문이다. 정밀한 현실분석이나 상황파악 보다는 본능적인 직감에 의존하는 듯 보이는 이 특성은 그간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 결정과정에 끊임없이 확인된 바 있다. ‘뉴욕타임스’가 10월17일자 커버스토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부시 대통령은 핵심적인 의사결정 단계에서 ‘사실’보다는 자신의 사적인 감정이나 믿음을 근거로 삼는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듯 부시 행정부가 전세계 곳곳을 향해 펼친 ‘신앙에 기초한 대외정책’의 가장 참혹하고도 극명한 결과가 바로 이라크였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미국과 다른 나라의 관계가 그 나라의 정부 지도자들과 부시 대통령의 개인적인 친소(親疏)관계에 좌우된다고도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는 부시 행정부가 영국이나 일본, 러시아 등과 유지하고 있는 이른바 ‘대단히 긴밀한 파트너십’의 근거가 무엇인지 설명해준다.
반대로 지난 4년간 워싱턴과 평양 사이에 오간 험담과 모욕은, 아시아 내의 미국 협조자들이 북한을 설득해 협상 테이블에 앉게 만드는 작업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 정부는 부시 행정부 외교안보팀과 직접적인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현재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부시 행정부가 북한문제를 대외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놓게끔 만드는 일이다. 야심만만한 국내 의제가 산적한 데다 대외적으로는 이라크 안정화 작업이 현재 최고의 관심사이고 보면, 부시행정부는 새로운 외교안보팀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동안 단기적으로 북한을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방안을 정책기조로 삼을 가능성이 있다. 11월초 선거가 끝난 이후 현재까지 부시 행정부가 북한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한 일이 거의 없다는 의외의 사실은 이를 방증하는 포인트다.
부시 대통령은 당면한 최우선 과제로 중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대다수 대외정책 분석가들도 이란의 핵 잠재력 보유문제를 북한 문제보다 우선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북한이 이미 핵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매우 아이러니컬하다.
11월 초에 이란이 독일과 프랑스, 영국 등과 맺은 합의가 유지되는지도 꾸준히 지켜봐야 할 문제다. 네오콘들은 시리아가 테러세력과 연계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며 팔레스타인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의 사망은 워싱턴이 중동문제에 몰두하게 만들 공산이 크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면 당분간 미국이 적극적이고도 주의 깊은 대북정책을 추진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