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다양한 비난과 우려에도 많은 미국인은 강한 미국과 도덕적 우월주의를 선택했다. 내년 1월 재취임식이 있은 후 앞으로 4년간 미국의 외교 및 국가안보 전략이 네오콘의 확고한 신보수주의 기조에 따라 이른바 불량국가들(rogue state)에 대한 강경대응으로 이어질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상황을 전제하고 우리나라의 정치상황을 들여다보면 국가의 미래가 심히 걱정스럽다. 노무현 정부의 정책 담당자들은 부시 행정부가 불량국가 혹은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한 김정일 정권과 교류협력하는 데 지나치게 조바심내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지난 6월 노무현 정부는 휴전선 일대에 설치한 고성능 확성기를 모두 철거했다. 사실 이는 남북 비방방송 중단만으로 충분한 일이었다. 북한 주민들에게 진실을 전달할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을 우리 손으로 제거함으로써 김정일 정권이 바라는 바를 충족시켜 준 셈이다. 미국 정부는 CNN을 통해 이 철거장면을 착잡하게 지켜보았다.
며칠 전 언론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대표적 보수성향 싱크탱크인 미국기업연구소(AEI)의 니컬러스 에버스타트 선임연구원은 “부시 대통령의 재선이 확정되자 청와대에 비상이 걸렸다고 하더라. 누가 부시 대통령의 낙선을 기원했는지 이름까지 댈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억지와 불성실 때문에 교착된 6자회담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조바심, 부시 정부와의 마찰음을 감수하면서까지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내려는 일부 세력의 무리수 등에 비추어보면, 이와 같은 발언은 청와대의 부인성명에도 앞으로 2기 부시 행정부와 현 정권 담당자 간의 순탄치 않은 파열음을 예상케 한다.
100년 전 조선왕조 말 우리 백성은 당시 정권 담당자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운명을 열강의 손에 맡김으로써 국권을 잃었고, 50여 년 전에도 정치권력에 눈먼 정상배들의 정치싸움 속에서 분단의 비극을 맞았다. 몇몇 정치인의 편협하고 왜곡된 역사관·국가관 때문에 한반도의 운명이 다시 한 번 미국 등 강대국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이 앞선다.
이러한 시점에, 우리는 부시 대통령과 그 핵심참모들의 정치철학에 대한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 그들의 국가안보전략이 과연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이나 김정일 정권에 대한 그들의 정책은 어떠하며 한국의 정권 담당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되짚어보는 작업 말이다. 필자가 현재 방문연구원 자격으로 국가안보학을 공부하는 워싱턴DC 조지타운대 국제문제대학원 로버트 갈루치 학장의 강연내용을 소개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부시 정권의 선제공격 독트린(Preemption Doctrine)을 주제로 갈루치 학장이 최근 세미나에서 진행한 이 강연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참고로 갈루치 학장은 미 국무부에서 정치·군사담당차관보를 지냈고 1970년대부터 파키스탄·인도 핵무기 보유억제활동, 이집트·이스라엘·아랍국가에서의 평화유지군 활동, 걸프전 이후의 이라크 무장해제 임무, 러시아에서 이란으로 핵기술 이전 차단활동, 북한의 핵개발 프로그램 대응 등 다양한 외교안보활동을 경험한 온건합리주의자다. 이제부터 아무런 가치평가 없이 부시 행정부 안보전략의 기원과 본질을 풀어낸 그의 강연내용을 가감 없이 정리해 전한다.
‘좋은 시절’은 끝났다
이라크와 북한의 현 상황을 이해하고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미국이 가진 국가안보의 취약성(Vulnerability)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미국은 영국이 수도 워싱턴을 불태운 1814년 이후 안보적으로 취약한 점이 별달리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도가 불타는 것은 엄청난 취약점을 드러내는 일로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1814년 8월24일 미영전쟁 당시 영국군은 워싱턴에 진입해 정부청사를 불태우고, 미국이 캐나다 수도를 불태운 것에 복수하기 위해 대통령관저 등 공공건물에 방화했다. 이때 관저 외벽이 크게 훼손되어 나중에 건물을 모두 흰색으로 칠한 것이 오늘날 ‘백악관’의 기원이다·필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