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10일 한 아랍계 소년이 아라파트가 입원중인 프랑스 파리 근교의 군병원 앞에서 ‘팔레스타인’이라는 아랍어 문자 모양을 따라 촛불을 세우고 있다. 아라파트는 11월11일 새벽 사망했다.
아라파트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린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언론들은 그를 가리켜 “독립국가 야망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중동평화를 파괴한 인물”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비판의 초점은 그가 평화가 아닌 파괴적인 테러전술에 매달려왔다는 데 모아진다.
‘정치인 아라파트’에게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인티파다 과정에 아라파트가 보인 상대적 유약함에 실망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강경파 하마스(Hamas)에서 희망의 빛을 찾았다. 아라파트 측근의 부패문제도 어제오늘 나온 지적이 아니다(필자가 라말라에서 아라파트 지지자에게서 들은 우회적인 해명에 따르면, “대이스라엘 항쟁을 위한 무기 구입, 알 아크사 순교여단 같은 친(親)아라파트 무장조직에 대한 재정지원 등 말못할 항목에 큰 돈이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럽과 이슬람권의 평가는 우호적이다. 두 지역에서 아라파트는 이스라엘의 무단(武斷)통치에 맞서 민족해방운동을 벌여온 의지의 정치인으로 여겨진다. 그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민족적 우상(icon)이다. 요르단, 레바논 등 중동 일대에서 수십 년 넘게 난민생활을 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아라파트는 희망의 화신이었다. 팔레스타인 민중은 그의 지도력에 따라 언젠가는 고향땅을 밟을 수 있으려니 하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를 따르던 지지자들에게 아라파트의 죽음은 정치적 구심력의 실종을 뜻한다.
“넬슨 만델라가 되고 싶다”
필자는 2002년 5월과 올해 6월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정치중심도시 라말라의 아라파트 집무실에서 두 차례 그를 만난 적이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치정부 수반의 집무실을 무카타(Mukata)라고 일컫는다. 우리로 치면 청와대다. 올해 6월 무카타에 들어서자, 전보다 휠씬 심하게 파괴됐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아라파트 경호부대가 묵는 막사를 비롯, 집무실 건물 두 채를 뺀 나머지가 모두 파괴됐다. 아라파트를 지키는 소수의 경호대원들은 이스라엘군의 탱크 포격과 불도저 공격에 저항하지 못하고 몸을 사려야 했다.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아라파트는 이스라엘의 아리엘 샤론 정권은 물론 미 부시 행정부를 강력히 비난했다. “현 중동사태를 둘러싸고 부시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있다고 보는가”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부분에 관해선 의문의 여지가 없다. 미국은 아리엘 샤론의 범죄행위를 덮어왔다. 샤론은 미국의 지원(유엔에서 대이스라엘 비난결의안이 나올 때마다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하거나 유엔총회에서 부표를 던짐으로써)을 바람막이로 삼고 있다.”
아라파트를 만날 때마다 그의 얼굴이 주위 사람들에 견주어 몹시 창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라파트를 평생의 라이벌로 여겨온 샤론 이스라엘 총리는 2001년 말 이스라엘군 탱크를 동원, 무카타를 향해 마구잡이로 포격해대면서 “아라파트가 라말라 집무실(무카타) 밖으로 나오면 생명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위협했다. 그때부터 지금껏 거의 3년 동안 아라파트는 감옥 아닌 감옥인 무카타의 집무실에서 지내왔다. 어쩌다 라말라 시내 회교사원에서 예배를 보는 게 유일한 외출이었다.
“나는 팔레스타인의 넬슨 만델라가 되고 싶다.” 지난 10월 초 영국 런던에서 발행되는 아랍계 신문 ‘아슈라크 알 아우사트’와의 인터뷰에서 아라파트가 한 말이다. 남아프리카 백인정권의 흑백차별정책(apartheid) 아래서 27년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도 남아프리카에 희망을 빛을 비춘 만델라는 아라파트의 마음속 영웅이었다. 만델라도 아라파트를 높이 평가한다. 그는 한 자서전에 써준 서문에서 아라파트를 가리켜 “난민 처지로 떠돌던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끌어올린 인물”이라고 적었다.
아라파트는 그렇게도 열망하던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그러나 지난 35년 동안 아라파트의 카리스마는 팔레스타인을 지배해왔다. 어느 누가 아라파트의 빈자리를 차지하더라도, 그의 지도력을 따라갈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