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러한 상황에서 민간 전문컨설팅 기업은 아무리 전문적 역량을 객관적으로 입증해도 자생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 가장 큰 원인은 정책 연구용역 시장의 경쟁이 사실상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책 연구용역 시장에 경쟁을 도입하는 것이 국내 지식정보산업을 육성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일본의 사례를 살펴보자.
일본은 정부 용역도 민간 개방
일본은 이미 1960년대부터 컨설팅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민간분야에 전문컨설팅 연구기관이 많이 생겨났다. 예컨대 노무라종합연구소나 미쓰비시종합연구소 등 오늘날 일본을 대표하는 민간 컨설팅기업이 대부분 이 무렵에 설립됐다. 그러나 설립 당시에는 기업부문의 컨설팅시장이 그리 크지 않아서 대부분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각종 정책 연구용역을 민간 컨설팅기업에 적극 개방했다. 예컨대 어떤 민간 컨설팅 기업은 연간 600명에 달하는 전문연구인력을 유지할 수 있는 규모의 정책연구용역을 30년간 지속적으로 수주하기도 했다. 이처럼 정책 연구용역의 안정적 수요를 기반으로 일본의 민간 컨설팅 기업들은 외국계 컨설팅기업과 경쟁하며 나름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일본 정책 연구용역 시장의 개방과 경쟁은 정책연구의 질과 정책대안의 다양성을 보장하며 동시에 민간 전문컨설팅기업이 자생력을 확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의 정책 연구용역 시장은 이른바 ‘정부출연 연구기관 육성법’이라는 보호막을 배경으로, 대부분 정부출연 연구기관이 독점하고 있어 경쟁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러한 경쟁의 부재는 정책연구에 많은 문제점과 부작용을 낳고 있다.
현재 정부출연 연구기관은 모두 42개이지만 실질적으로 정부 예산을 지원받는 정부산하기관의 연구기관까지 포함하면 그 이상이다. 정부출연 연구기관에 지원되는 정부예산은 2001년 현재 연간 약 1조5000억원에 달하며, 정부산하기관 연구기관을 포함하면 매년 약 2조원의 예산이 지원되는 셈이다. 여기에 전국 지자체가 출연한 연구기관까지 포함하면 연간 약 3조원의 예산을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막대한 예산을 쓰면서도 정부출연 연구기관들의 연구역량과 성과는 부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을 과감히 민영화하거나 민간 컨설팅기업과 경쟁시키지 않고 왜 막대한 예산을 낭비하면서도 지키려는 것일까.
일부 정부 관계자들은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연구역량에 문제가 있음을 알면서도 이른바 ‘자식론’을 내세워 어쩔 수 없이 먹여 살리는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30년 동안 같이 지내왔으니 이제 와서 매정하게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정부출연 연구기관들이 정책 실패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방패로 악용되기도 한다. 즉 어떤 정책이 실패할 경우 관련부처는 규정과 절차에 따라 처리했다는 식으로 책임을 피하며,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정책연구 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추진한 정책은 실패하더라도 확실히 ‘면피’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정부조차 민간 연구소 신뢰
정부가 정부출연 연구기관에 전적으로 의존해 정책을 내놓을 때에는 연구기관이 최선의 정책대안을 제시할 만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 그러나 과연 정부출연 연구기관이 우리나라에서 최고 수준의 정책연구를 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재벌 계열의 민간 연구소 자료를 자주 활용하는 상당수 정부 관계자는 민간 연구소 보고서가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자료보다 낫다고 지적한다. 정부 스스로 민간 연구소의 수준이 정부출연 연구기관보다 더 낫다고 인정한다는 이야기다.
선진국에서는 컨설팅사 등 민간 전문연구기관이 활성화되어 있어 다양한 각도와 방식으로 정책연구의 내용을 검증하고 비판하기 때문에 정책에 실패할 가능성이 낮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민간 전문연구기관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탓에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정책연구 결과에 대해 검증하고 여과할 방법이 거의 없다. 이러다 보니 정책실패의 원인이 잘못된 정책연구 결과물 때문인지, 아니면 정책집행 과정의 잘못에 기인하는 것인지조차 구별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